# 143화 날개를 가진 소녀 (1)
“알았어. 에이, 뭘 화를 내고 그래.”
나는 녀석을 진정시키고 경청하는 자세로 전환을 했다. 절대 녀석이 생각보다 무서운 힘을 가져서가 아니다.
“여기서 나가고 싶다고? 어떤 소녀가 널 불러서?”
[정확히는 날 부른 게 아니다. 다만 몹시 불안에 떨고 있어. 위험해, 구하지 않으면 그녀뿐만 아니라 많은 게 무너질 것이다.]
“솔직해지자고. 정말 어떤 소녀가 위험에 처해 있다고 치자. 네가 왜 구하러 가야 하는데? 의도가 다분한데?”
녀석은 투레질을 하여 성남을 잔뜩 표출했다.
[평범한 소녀가 아니다. 내겐 느껴진다. 이 힘, 계시록의 성녀와 비견될 만큼 강한 힘! 영웅의 계시자이자 신의 피에서 태어난 순결의 탄생자. 난 유니콘으로서 꼭 소녀를 만나 봐야 해.]
“정말인지 아닌지는 확인하면 되겠지. 하지만 넌 여기 있어. 내가 대신 확인하고, 위험에 처해 있다면 구해 줄 테니까.”
[안 돼. 소녀는 수많은 마법과 주술에 속박받고 있어. 내가 아니라면 결코 찾아낼 수 없을 것이다. 내가 만나야 해!]
첫인상이 이래서 중요하다.
유니콘에 대해 몰랐다면 놈이 정말 일면식도 없는 어떤 소녀를 구하기 위해 마음을 열렬하게 불태우는 숭고한 녀석이라 생각했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의도가 불순해 보인단 말이지.
“만나서 뭐 하려고?”
[순수가 오염되지 않기 위해…….]
나는 녀석의 말을 끊었다.
“네가 오염시키려고 하는 건 아니고?”
푸르릉-!
유니콘은 거친 투레질을 하더니 내게 달려왔다. 난 간신히 녀석의 뿔을 피하며 다급하게 외쳤다.
“왜 갑자기 성질이야?”
[날 자꾸 폄하하지 마. 아무렴 창조된 의미조차 까먹을까 봐!]
녀석이 또다시 덤벼든다.
녀석은 정말로 억울한지 자신을 ‘순결의 보호자’라고 외치며 사납게 덤벼들었다. 녀석의 돌진은 상당히 매서웠다. 장난으로 넘길 수 없을 정도다. 과장하지 않고 평가한 건데 원탁의 기사들이 휘두른 검보다 빠르고 강력한 것 같다.
나는 엉덩이에 구멍이 새로 뚫리기 전에 소리쳤다.
“알았어!”
그제야 녀석이 진정하더니 구름 위에 살포시 앉았다. 하지만 성난 콧김을 내뿜으며 언제든 덤벼 올 준비를 했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며 말을 이어 나갔다.
“원장님이 오면 네 의사를 제대로 전달해 줄게.”
[안 돼! 할망구가 끼면 내 계획이… 아니, 것보다 할망구는 지금 아주 멀리 있어. 돌아올 때쯤이면 이미 소녀는 타락해 버리고 말아.]
“뭐? 원장님이 어디 있는지 네가 어떻게 알아.”
유니콘은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자신이 신의 피에서 태어난 순결함의 대변자라고 강조하며, 순결함을 간직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생명은 자신의 뿔을 속일 수 없다고 했다.
‘그 무슨 해괴망측한 레이더냐.’
망할 놈이 내가 어디에 있든 계속 속삭이며 괴롭힐 수 있던 것도 내가 순결함을 간직하고 있었기 때문이란다. 참 기괴하고 꺼림칙한 능력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뭐, 저런 게 다 있어.
[좋다, 이 녀석아. 이번 일을 도와주면 널 영웅으로 만들어 줄 수도 있다.]
녀석은 영웅이 되게 해 준다며 나를 회유하려고 들었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영웅, 그런 추상적인 개념의 직업은 공짜로 시켜 준다고 해도 거절이다.
“뭔 영웅?”
시큰둥하게 대답하던 그때였다.
[보여 주지, 영웅의 삶을.]
구름이 내게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를 해치려고 든 건 아니었기에 차분하게 있었다. 무얼 하려는 거지? 순식간에 거대한 뭉게구름 파도에 휩쓸린 나는 아득한 높이의 천공으로 던져졌다.
구름의 파도에 휩쓸려 천공이란 바다에 정처 없이 떠밀리는 건 무섭기보다는 자유롭고 상쾌했다. 유니콘은 구름 위를 해치고 하늘을 날며, 내게 다가와 말했다.
[영웅이란 선망받는 자.]
녀석은 앞을 바라봤다.
덩달아 앞을 본 난, 태양 빛을 받아 반짝이는 뭉게구름 사이로 드러나는 거대한 인간의 형상을 목격했다. 구름으로 이루어진 인간의 형상은 점점 본래 색채를 찾았고, 이내 영화의 한 장면처럼 움직이기 시작했다.
유니콘 녀석이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도 구름에 자기가 보여 주고 싶은 걸 투영하고 있는 듯했다.
그림자는 한 남자가 되었다.
이내 박수와 환호 소리가 들려오고, 그가 손에 쥔 검을 하늘 높이 추켜들자 구름들이 들썩거리며 군중 수만 명이 되어 소리쳤다.
[지혜의 왕! 지혜의 왕!]
저게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얼마나 장관이란 말인가.
지혜의 왕이라 불리는 한 남자는 수만 명의 선망을 받았다.
[나의 첫 번째 파트너였지.]
유니콘이 말하자 남자와 군중은 다시 구름으로 돌아갔다. 내 주변을 가득히 메우던 구름도 물러가고, 나는 다시 청색 구름 위로 돌아왔다.
[또한 많은 인간이 내게 선택을 받아 선망받는 영웅이 되었지. 어떠냐, 황홀하지 않더냐? 네게 이 황홀함을 줄 수도 있다.]
녀석이 말했다.
[음하하, 인기 절정의 남자가 되는 것이다.]
유니콘의 마지막 말은 지금까지 그럴듯하게 펼쳐지던 ‘영웅’이 가지는 의미를 완전히 퇴색되게 만들었다. 하지만 그렇기에 내 마음을 움직였다.
“그 영웅이 될 수 있게 해 준다는 거, 구체적으로 네놈이 어떻게 해 주는 건데?”
유니콘이 대답했다.
[넌 가만히 있어도 영웅이 되는 길이 저절로 열리게 되는 것이다.]
“팍 씨, 구체적으로 말하랬지?”
[영웅은 세상을 구하기 위해 많은 과제를 수행하지. 그러나 그러한 과제들은 쉽게 내려지는 게 아니다. 날 믿어라. 내 파트너가 된다면 영웅으로 인정받을 수 있는 위대한 과업들이 저절로 생겨날 테니.]
잠깐 ‘인기 절정’이란 말에 혹한 나는 이어진 녀석의 말에 관심이 짜게 식었다.
그럼 그렇지, 세상에 공짜가 어디 있어.
“그게 뭐야. 지금도 충분히 트러블 많은 인생인데 더 지랄 맞게 된다는 거잖아.”
유니콘이 말하는 영웅이 되는 법은 간단했다. 비유하자면 녀석이 일거리를 물어다 주는 중개업자라면 나는 그것을 수행하기만 하면 되는 작업자인 것이다. 이미 마물원 일만으로 별별 엿 같은 경험을 다 겪었다. 더 이상 트러블에 휘말리는 건 극구 사양이다.
“안 해. 차라리 힘으로 줘.”
[잘 생각해 봐. 모든 인간이 널 좋아하고 선망하며…….]
“응, 안 해.”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 될 수 있…….]
“보상이라도 준대?”
[인간들의 마음을 얻을 수 있다.]
“응, 안 해.”
유니콘은 회유하려고 들었지만 나는 시큰둥했다. 영웅, 그런 추상적인 개념의 직업은 공짜로 시켜 준다고 해도 할까 말까인데 귀찮은 짓거리를 해야 한다고 한다.
어쩌면 영웅은 다 관심 종자가 아닐까. 그저 선망받기 위해 목숨을 걸 바에야 욕을 좀 먹더라도 보상을 두둑이 받아 내는 게 낫지.
“그러지 말고 딴 거 없냐? 혹할 만한 보상 없냐고. 보니까 꿍쳐 둔 힘이 대단한 듯한데, 조금 나눠 주거나 하면 좋을 텐데.”
녀석은 철옹성이다. 교감으로 대화는 나눌 수 있지만 힘은 절대 빌려주지 않았다. 그렇다고 강제로 교감할 수도 없었다. 보기보다 꽤 강한 녀석이었기 때문이다.
아까 느꼈던 유니콘의 힘이라면 충분히 욕심낼 만하지. 녀석은 내 말에 잠시 머뭇거리다가 실망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안 돼, 넌 남자잖아.]
“뭐? 여기서 남자가 뭔 상관이야?”
[내 등 뒤에 태울 수 있는 자는 정해져 있어. 내 마음을 뽀송뽀송한 솜 베개처럼 만드는 그러한…….]
순간 나는 녀석에게서 첫 만남 때 본 변태 제비족의 모습을 엿봤다. 놈은 신의 피에서 태어났기에 아주 신성한 존재라 했다. 그리고 사악한 힘을 막고 그 어떤 질병조차 치료할 수 있다며 자신의 힘을 과시했다.
하지만 자기 마음을 포근하게 만들어 주는 존재가 아니면 힘을 건넬 수 없으며, 그러한 존재는 정해져 있다고 했다.
즉, 나는 안 된다는 것이다.
[부탁할게. 제발, 시간이 없어. 더러움이 창궐하는 꼴을 나는 도저히 참을 수 없단 말이야!]
녀석은 끈질기게 부탁했다.
“에휴, 알았다.”
사실 녀석이 정말 진중하게 내게 부탁하고 있다는 건 우리에 들어오고 나서부터 확실히 깨달았다.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나쁜 녀석은 아니다. 원장님이란 보험도 있고.
무엇보다 정말 한 소녀가 위험에 처해 있다면, 그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면 모를까, 웬만하면 구하러 가고 싶었다.
“그래도 지금 그 모습으로 나갈 순 없어. 널 어떻게 데리고 다녀? 몬스터 볼이라도 있으면 좋겠네.”
문제는 2차적인 피해였다.
유니콘을 데리고 나갔다가 알려지기라도 하면 골치 아프다. 원장님에게 미움을 잔뜩 살 것이다.
고민하고 있던 그때였다.
[그건 걱정하지 마.]
갑자기 유니콘이 엄청난 에너지를 뿜었다. 휘몰아치는 태풍의 눈처럼 녀석의 주변으로 구름들이 거세게 몰려든다. 구름으로 가득했던 창공이 잠시 동안 맑아질 만큼 엄청난 양의 구름이 놈의 몸으로 빨려 들어갔다.
‘또 뭔 연출이야.’
마침내 구름이 걷히자, 놈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벌, 머여.”
그동안 마물들이 내게 신비하고 놀랍고 때론 역겹고 기괴한 것들을 많이 보여 줬지. 하지만 저건 달라, 말도 안 되잖아.
유니콘의 변신은 내 상식의 뿌리마저 뒤흔드는 충격이었다.
“어떻게?”
녀석은 쾌활하게 웃었다.
[으하하, 유니콘이 어떻게 사람의 마음을 얻었겠느냐.]
‘인간’의 언어는 사용하지 못하는 듯하지만 그럼에도 충분히 충격적이다.
“잠깐,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해. 그 꼬락서니는 대체 뭐야. 시벌, 마물과 이종족의 경계가 사라졌잖아. 헷갈려. 너 사실 그냥 정신 나간 사람이었어?”
유니콘은 사람으로 변했다.
백발의 긴 머리와 청안을 가진 미남자, 마치 ‘고대 그리스 로마 신화’ 만화책에서 잘생긴 남신으로 그려질 듯한 생김새로.
이럴 순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유니콘은 마물, 인간의 모습을 한다면 이종족과 다를 바가 없다.
[아니, 난 짐승의 길에 있다. 우리의 신은 없지.]
어리둥절하던 내게 유니콘이 말했다.
[인간도(人間道)와는 확실히 다르지. 뭐, 결국 같잖은 지구인인 넌 이해할 수 없겠지만.]
오늘 나는 새로운 걸 배웠다.
이제 대충 어떤 마물이 나와도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인간의 모습을 똑 닮은 마물이 나타나다니…….
역시 녀석들을 섣부른 편견으로 규정지으면 안 되겠구나.
*
[이곳이다.]
녀석을 데리고 우리에서 나왔다.
유니콘은 곧바로 ‘소녀가 갇혀 있다고’ 주장하는 장소로 이동했다. 나는 녀석을 따라가며 허튼짓을 못하게 감시했으나 의외로 길거리의 여자들에겐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그곳은 마물원과 꽤 가까운 곳이었다. 오랫동안 폐쇄된 지하철역이다. 이계의 범람으로 서울 지하철역은 노선 몇 개를 제외하고 대부분 폐쇄되었다. 땅의 마물이나 두더지족 때문이었다.
경고 표지판을 넘어 오랜 세월 사람의 손이 닿지 않아 지저분해진 지하철역으로 내려갔다. 완성되기 전에 폐쇄된 곳이라 낡은 지하실처럼 더럽고 어두운 곳이었다.
먼지 가득한 통로를 지나갈 때였다.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빛이 났다.
품에서 오리하르콘 브로치를 꺼내 고개를 들었다. 더 강렬하게 빛나는 브로치. 포근이의 힘을 끌어 올려 몸을 마나로 채우자 볼 수 있었다.
“이 안에 용이라도 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