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4화 날개를 가진 소녀 (2)
지하철 선로의 어느 지점에서부터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결계들이 나타났다. 얼마나 많은 마법이 깃들었는지 마치 마물원 관리실의 마도구 창고에 설치되어 있는 결계 마법과 비슷한 힘이 느껴졌다.
앞장서던 유니콘이 나를 뒤돌아보며 히죽 웃는다. 녀석이 대답했다.
[36겹의 마법으로 그녈 감추고 있다. 내가 아니라면 못 찾아. 늙은 할망구라도 찾지 못할걸.]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허세가 넘치는 녀석의 얼굴을 한 대 쳐 주고 싶었다. 여전히 적응이 안 되는 마스크이다. 마물 주제에 잘생기고 지랄이야. 원장님한테 할망구라 불렀다고 다 일러야지.
나는 오리하르콘 브로치를 꽉 쥐었다. 오리하르콘은 신의 광물, 마법을 강제로 풀어 버린다. 하지만 내 마나를 잡아먹는다. 이러한 강력한 결계를 모두 지울 때까지 내가 버틸 수 있을까?
[나서지 마. 이 정돈 내게 맡겨.]
고민하던 그때, 유니콘이 나섰다.
녀석은 히죽 웃는 얼굴로 결계에 다가갔다. 결계의 마법은 닿는 대상을 용서 없이 공격할 테지만, 나는 걱정하지 않았다.
‘사악한 힘을 물리치는 힘이라.’
유니콘의 백발 머리가 찬란하게 빛나자 구름같이 신령스러운 기운들이 발산되었다. 놈의 말에 따르면 36겹인 강력한 결계 마법도 구름에 닿자마자 순식간에 사라졌다.
녀석의 말이 허세는 아닌 듯했다.
놈을 따라 지하 선로를 걸었다.
도중에 결계 마법과 주술, 물리적인 트랩도 수차례 만났으나 모두 유니콘이 해결해 줬다. 녀석의 표정은 매우 들떠 있었다.
마침내 건설이 중단된 지하 선로의 끝에 도달했다. 아무런 기운도 풍기고 있지 않아 나는 뒤늦게 발견했다.
크루즈의 닻이라도 달 수 있을 법한 굵은 쇠사슬에 손발이 묶인 채, 거미줄에 걸린 벌레처럼 애처롭게 매달려 있는 여자를.
[다행이야, 늦지 않았어.]
여자는 10대 후반으로 보이는 어린 소녀로 의식이 없는 듯했다.
한국 교복을 입은 동양인 여자, 언뜻 봐선 흔히 볼 수 있는 학생이었지만 나는 기이한 느낌을 받았다. 복장과 생김새만 본다면 너무 평범하여 결코 이런 삼엄한 경계의 중심에 있다곤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저주가 되어 버릴 만큼 아름다웠던 인어보다, 미의 종족으로 알려진 엘프 카르네보다.
저 평범한 소녀가 더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이상해, 마치 먹구름 뒤에 가려진 달 같은 느낌이야.
아니, 그것보다 진짜 이상해.
나는 코를 찡긋했다. 혹시나 후각이 고장 났나 싶어 코를 흥, 하고 풀어 봤다. 그러나 여전히 냄새는 똑같이 났다.
이상해, 왜 녀석에게 ‘원장님’의 냄새가 나는 거지?
*
유니콘이 오리하르콘 브로치를 빌려 갔다. 보기에도 단단해 보이는 쇠사슬에 물리적인 힘 외에도 엄청난 속박 마법이 걸려 있다고 했다.
하지만 자신의 힘과 오리하르콘의 성질을 빌리면 풀지 못할 것도 없다며, 유니콘은 역시 자신은 대단하고 멋진 생물이라 자찬했다.
나는 무시하고 벗겨진 쇠사슬을 멀리 치워 버렸다. 만지자마자 불쾌함이 밀려오는 쇠사슬이었다. 힘이 쭉 빨려 나가는 기분, 이런 것에 묶여 있다면 엄청나게 고통스러웠겠지.
유니콘의 손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만약 신성해 보이는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당장 옆구리를 걷어차 줬을 것이다.
의식이 없던 소녀가 곧바로 표정을 미세하게 일그러트렸다. 눈꺼풀이 살짝 떨리기 시작했다.
유니콘 녀석, 어쩜 생각보다 더 대단할지도 모르겠다.
정신을 차린 소녀가 눈을 떴다. 천천히 주변을 둘러보다가 우리에게 시선을 고정한다.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깊이를 알 수 없는 저 눈.
혹시 이 아이…….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날…….”
당황할까, 소리를 지를까, 무서워할까? 그녀의 입에서 나올 말을 예상하며 뒷말을 기다렸다.
“왜 풀어 줬죠?”
의외였다. 마치 풀어 주면 안 된다는 듯 우리를 꾸짖는 말투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유니콘을 바라봤다. 뭐라고 말 좀 해 봐.
“푸르르릉.”
[뭘 봐, 네가 이야기해야지.]
아차, 녀석의 말은 나밖에 들을 수 없었지. 나는 뒤통수를 벅벅 긁다가 우선 가장 궁금한 것부터 질문하기로 했다.
“넌 누구니?”
내가 찾아서 구해 놓고선 이런 질문이라니, 참 어색한 상황이다. 소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나를 바라만 봤다.
“날 다시 묶어 줘요. 모방된 글레이프니르가 없다면 난…….”
녀석은 다시 자기를 묶어 달라고만 했다. 나는 그녀가 충분히 신비하고 미스터리한 존재라는 걸 알았다. 왜 다시 묶어 달라는지에 대해선 몰라도 아마 엄청난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로 나는 짜증이 치솟았다. 이런 상황은 싫다. 답답해서 화가 난다.
일단 유니콘의 말대로 한 소녀가 위험에 처해 있었고, 구하기도 했으니 내 할 일은 끝났다.
“잔말 말고 따라와.”
우선 안전한 마물원에 데려가기로 했다. 그녀의 정체에 대해선 내 개인적인 호기심이 조금은 있기도 했고, 원장님이라면 이 상황이 뭔지 알려 줄 수 있을 테니까.
난 그녀를 데려가려고 했다
문득 내가 내뱉은 말이 지극히 악당처럼 들려왔지만 뭔 상관인가.
“안 돼!”
퍼엉!
손을 뻗자마자 무언가가 폭발했다.
마법은 아니다. 맞아서 욱신거리는 어깨엔 그대로 손바닥 자국이 나 있었다. 덜렁거리는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고통이 몰려왔지만 다행히 참을 만했다.
대체 어떻게 하면 단지 밀치는 것만으로 폭발하는 소리를 내며 내 어깨를 탈골시킬 수 있는 건가.
“미… 미안해요!”
자기가 때려 놓고 미안하다며 소리친다. 나는 다시 걸음을 내디뎠지만 또 때릴까 봐 가까이 다가가진 못했다.
“한 번은 맞아 줄게. 상황 파악을 못 한 내 잘못도 아주 쥐똥만큼은 있을 테니까. 근데 왜? 내가 뭘 하디? 그냥 안전한 곳에 데려다준다니까. 나 못 믿을 사람 아니야. 잠깐, 여기 카드가…….”
원장님으로부터 받은 드래곤 카드를 지갑에서 꺼내려고 할 때였다.
“알아요. 느껴져요, 당신은 날 해치지 않아. 하지만 난……. 제발 날 무시해요. 난 너무 위험해요.”
그녀가 벌떡 일어나더니 도망가기 시작했다. 나는 유니콘보고 쫓아가라고 소리쳤다.
[싫어, 난 맞기 싫단 말이야.]
“아주 개…….”
놈의 엄살에 욕을 내뱉곤 소녀를 쫓아갔다. 평범하지 않다곤 생각했지만 녀석은 장난이 아니었다. 얼마나 발이 빠른지, 풍종도보의 경공으로도 간신히 따라붙기만 할 수 있었다.
‘조금 더.’
결국 풍종도보의 경공에 다른 마물의 힘마저 섞었다. 바람을 걸으며 무게를 가볍게 만드는 스위프트덕의 마력에 ‘마찰력’을 줄여 주는 ‘마츄’의 힘까지.
마물의 힘을 동시에 사용하면 심신이 금세 지쳤으나 효과는 굉장했다. 나는 순식간에 그녀를 추월해 숄더 태클을 걸 수 있었다.
“크악!”
소녀는 아까의 목소리와 달리 걸걸한 목소리로 비명을 내질렀다. 그만큼 아팠나 보다. 어쩔 수 없었다. 그녀를 멈추기 위해선 이럴 수밖에 없었다. 절대 아까 얻어맞은 것에 대한 보복이 아니다.
나는 쓰러진 소녀에게 드래곤 카드를 내보이며 소리쳤다.
“좀 진정해!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 전에 이렇게 삐딱하게 굴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냐.”
하지만 녀석의 시선은 내게 있지 않았다. 내 등 뒤를 돌아보며 몸을 떨었다.
‘젠장.’
그 이유를 물어보지 않아도 나는 깨달았다. 내게도 느껴진 것이다. 오랜만이다, 이 기운.
“아아, 이미 늦었어. 위험해, 도망쳐요!”
난 뒤를 돌아봤다. 어두운 지하 터널에 찢어진 ‘균열’이 눈에 들어왔다. 그 균열에선 새까맣고 작은 난쟁이들이 개미 떼처럼 몰려나오고 있었다.
‘나이트메어.’
놈들이 나타났다.
*
경험은 훌륭한 자산이다.
“홍염.”
놈들이 동료를 부르지 못하도록.
저번처럼 세상을 뒤덮는 악몽을 재현하지 못하도록.
나는 붉은 검을 들어 홍염을 펼쳤다. 샐러맨더의 기운이 대륙거북의 강대한 마나와 만나 들끓어 오른다. 이내 강렬히 휘둘러진 불꽃의 검은 터널을 가득 메울 화염을 일으켰다. 나이트메어들은 맥없이 소멸되었다. 균열은 닫히고 놈들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후우.”
이글거리는 화염으로 후덥지근해진 터널 안. 나는 유니콘을 돌아보며 말했다.
“왜 솔로몬의 탑의 괴물들이 이 녀석을 노리지?”
소녀는 격렬한 소동에 오히려 진정이 된 것처럼 보였다. 아까 전처럼 도망가지 않았다. 다만 깊은 눈망울로 나를 쳐다볼 뿐이었다.
유니콘은 침을 꿀꺽 삼켰다가 머쓱하게 웃으면서 변명했다.
[헤헤, 친구. 사실 말해 주지 않은 게 있어.]
언제부터 친구였지.
난 검을 유니콘에게 휘두르는 척하며 벨트에 있는 검집에 집어넣었다. 기겁하던 녀석이 한숨을 내쉬더니 솔직히 털어놨다.
[그녀는 매우 위험하고 불안정한 상태야. 마구잡이로 힘을 분출하고 있어. 솔로몬의 악마들은 이끌리는 거야. 그녀의 순수한 힘을 타락시키기 위해. 힘을 봉인하는 쇠사슬이 풀렸으니 이제… 더 몰려들걸?]
“알고 있었으면서 왜 말 안 했어?”
[사실대로 말했다면 네가 도와주지 않을까 봐.]
“콱, 씨.”
푸르릉!
[아파!]
녀석의 엉덩이를 걷어차 주며 말했다.
“얘가 뭔데 그래? 바른대로 말해.”
[날개를 가진 소녀, 그 이상은 나도 몰라!]
생각보다 더 귀찮은 일이었다.
젠장, 이대로 버리고 갈 수도 없으니. 우선 마물원으로 돌아가는 게 상책이겠지.
*
마물원으로 돌아가는 그 짧은 시간에 또 다른 사건이 발생했다. 아마 소녀를 폐쇄된 지하 선로에 가둔 장본인들이겠지.
“오랜만이다.”
대낮의 서울 도심에서 검을 차고 당당히 나타난 놈들. 정체를 숨길 것도 없는 모양인지 검은 양복엔 버젓이 문양이 새겨져 있다. 카르마를 뜻하는 업 문양이.
“요즘 왜 안 보이나 했어.”
카르마 길드원 수십 명 중 선두에 선 자가 나섰다. 지구인이 아니다. 풍기는 기운과 냄새 모두 무림인, 하지만 주술사는 아니다. 녀석에게선 오리지널 무인의 냄새가 났다.
또한 얼굴이 익숙한 녀석이기도 했다.
“어휴, 이제 유명인을 다 만나네.”
예전에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서 본 적이 있었다. 보자마자 어지간히 미친 새끼라고 생각했던 놈이다. 스스로 카르마 길드의 수뇌부라 칭하며 얼굴을 완전히 드러낸 채 일장 연설을 하던 사내.
지구의 체제는 얼마 지나지 않아 붕괴될 것이니 전이 이후의 세계를 대비하라며, 자신은 우민을 짓밟고 왕이 되겠다던 사내.
그 광대한 다짐이 허세가 아니라는 듯 수많은 논란을 일으키며, 범죄자임에도 불구하고 ‘랭커’가 된 사내.
“이름이 위 바오룽이었던가?”
처음이다, 랭커랑 만난 건.
“너로군.”
놈이 말했다.
“계획을 사사건건 방해하던 놈.”
나는 살짝 놀랐다.
생각해 보면 몇 번이든가.
몇 번이나 놈들과 부딪치며 묵사발을 냈더라? 이제 슬슬 알아볼 때가 되지도 않았나 싶긴 했다.
“안녕.”
나는 익살맞게 웃으며 말했다.
“그럼 내가 뭘 할지도 잘 알겠네.”
메타소드를 꺼냈다.
이 일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더라도 카르마 길드가 관계되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싸울 이유는 충분했다.
“너네는 또 망한 거야.”
위 바오룽은 중절모와 검은 코트를 벗으며 한 걸음 나섰다. 코트를 벗자 등에 멘 차이다오(중식도)가 눈에 들어왔다. 사람을 베는 데 식칼을 사용하다니, 괴상한 취향이다.
그는 지금까지 만난 카르마 길드의 헌터들과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무림인은 분명하나, 주술사는 아니다. 보다 무에 가까운, 마치 곽운 스승님과 비슷한 청명한 기운이 느껴졌다.
“내겐 대운이나, 너에겐 흉운이군.”
놈이 칼을 뽑자 겨울날 불어오는 삭풍처럼 매섭고 차가운 기운이 뿜어졌다.
“넌 죽는다. 그건 변하지 않을 것이다.”
느끼는 기운만 청명할 뿐 살기는 매섭고 지독했다.
“그 전에 넌 대답해야 한다, 어떻게 알았지?”
“뭘?”
“반자가 갇힌 곳을 어떻게 알았느냐.”
“이 녀석? 재주껏 알았다. 왜?”
놈들은 알까.
“너도 오늘 죽는다. 그건 변하지 않아. 그 전에 너도 대답 하나 해 봐라. 이 녀석이 대체 시벌 누군데 그래?”
“반자가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감히 업의 길을 방해했단 말이더냐?”
아니, 제발!
어떻게 된 새끼들이 한 번에 대답하는 꼴을 못 봤다?
“이 새끼야! 그게 뭐냐고, 진짜 몰라서 그러니까 대답해 달라고!”
바락바락 소리를 지르자 놈은 살짝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 이내 대답을 했고, 나는 드디어 이 여자애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그 여식은 신인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