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46화 (146/258)

# 146화 날개를 가진 소녀 (4)

그림리퍼의 전설은 지구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다. 어떤 세계의 어떤 문명이든 그림리퍼의 전설은 있었다.

영혼을 거두어 저승으로 안내하는 사신, 죽음을 알리는 자. 죽음을 내리기에 두려운 자이나 모든 생명은 결국 죽는다. 때문에 그의 존재를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기기도 한다.

하지만 그건 그럴듯하게 와전된 이야기다. 단지 놈이 주는 공포를 줄이기 위해 순화된 이야기다.

저승 따윈 존재하지 않는다.

삼켜진 영혼은 그대로 놈의 양분이 될 뿐이다. 육식 동물이 다른 동물의 살점을 먹고 에너지를 얻듯, 그림리퍼에겐 생명의 영혼이 에너지가 된다.

다만 놈의 기운은 생물이 가지기엔 너무나 끔찍했다. 놈의 속삭임은 너무 간교하고 추악하여 감히 교감을 시도조차 하지 못했다. 놈의 목적은 오로지 정혜연의 영혼을 취하는 것뿐이다.

휘이익!

그림리퍼의 거대한 낫이 휘둘러진다. 난 그에 맞서 홍아를 휘둘렀으나 낫은 유령처럼 내 검과 몸을 통과했다.

영혼이 찢겨 나가며 또다시 지독한 허덕임이 느껴졌다. 다행히 이번엔 더 빨리 회복되었다.

샐러맨더의 기운을 뻗어 홍식으로 반격했으나 그림리퍼에겐 통하지 않았다. 놈은 어떤 공격에도 홀로그램처럼 유유히 떠다녔다. 물리적인 공격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어떤 힘을…….’

영혼을 찢는 놈의 낫은 내게 상처를 입히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내 힘 또한 그림리퍼에게 닿지 않는다.

놈의 힘의 근원이 마법이나 주술이었다면 대항할 수단이 있었다. 그러나 그림리퍼의 존재는 추상적인 개념, 영혼이란 기이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었다.

“젠장.”

방법이 마땅히 떠오르지 않았다. 평소와 같았다면 도망쳤을 것이다.

쓰러져 있는 정혜연의 상태가 더욱이 나빠졌다. 창백하던 피부는 죽은 위 바오룽처럼 썩어 문드러져 갔다. 곧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다.

놈이 다가온다.

난 있는 힘을 다해 검을 휘둘렀으나 일렁이는 아지랑이처럼 다가오는 놈을 막을 수 없었다. 놈은 더 이상 내게 흥미를 두지 않았다.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놈은 백색의 두개골을 정혜연에게 들이밀었다.

정혜연의 몸으로부터 푸른 정기가 뽑혀 나온다. 다급히 정혜연을 업고 놈으로부터 달아났으나 자석처럼 달라붙는 놈을 떨쳐 낼 수는 없었다.

[거두어… 거두어…….]

기괴한 울음소리를 내며 그림리퍼가 푸른 정기를 먹어 치운다. 역겨웠다. 맹수에게 산채로 뜯어 먹히는 임팔라처럼 정혜연과 나는 그림리퍼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젠장! 이 여자와는 오늘 처음 만났지만 눈앞에서 영혼이 사그라지는 모습에 눈물이 핑 돌 만큼 고통스러웠다.

그때였다.

히히힝-!

거친 말발굽 소리, 달려오는 황금색 광채. 뿔을 가진 백마가 영혼을 잡아먹는 사신에게 달려들었다.

끼아아아!

내 힘으론 어떤 상처도 입힐 수 없던 그림리퍼는 처음으로 끔찍한 비명을 내지르며 나가떨어졌다.

[시부랄, 어쩔 수 없지.]

유니콘이었다.

유니콘은 욕을 내뱉더니, 내게 입술을 내밀었다. 이 상황에 무슨 짓인가 당황하며 홍아의 검 자루로 놈의 콧구멍을 쑤셨다.

“깜빡이 안 켜냐? 무슨 짓을 하려거든 설명부터 해.”

유니콘의 뿔에 받혀 고통스러워하던 그림리퍼가 다시 몸을 일으킨다. 그러자 유니콘이 다급하게 말했다.

[힘을 빌려줄게. 그러니까 닥치고 입술 내밀어.]

“힘을 빌려주는데 왜 입을…….”

[망할 놈아, 나도 싫어. 젠장, 하필… 왜 네놈은 남자인 거지?]

“뭐?”

유니콘이 말했다.

[네 그 괴상한 힘 때문에……. 나도 이해할 순 없지만 네가 내 힘을 ‘약간이지만’ 받아들일 수 있는 모양이다. 넌 ‘순결한 소녀’가 아니니까 힘을 제대로 발휘하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순결하긴 하니 약간의 힘은 사용할 수 있겠지.]

놈이 입을 내민다.

[신성한 힘이다, 경건하게 받아들여라.]

그림리퍼가 달려들고,

정혜연은 죽어 가고,

내겐 선택지가 없고,

망할.

눈을 감았다.

말(수컷)과 입을 맞춘다.

여기까진 참을 만했다.

‘이 시부랄 새끼, 왜 입에 침을 묻히고 지랄이…….’

입에 축축한 감촉이 느껴질 때,

놈의 아가리를 걷어차 주려 할 때, 하늘에 떠 있던 모든 구름이 내게 몰려왔다. 그리고 난 전에 느낀 적 없는 감각에 휩쓸렸다. 오래 묵은 때를 벗긴 듯 더할 나위 없이 깨끗하고 상쾌한 느낌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고, 태양 빛처럼 환한 기운이 온몸에 넘치기 시작했다.

‘메타소드?’

내 손에 들린 백색의 랜스.

다른 손엔 몸을 덮는 거대한 백색 방패. 그리고 등에 생겨난……. 거대하고 폭신해 보이는 하얀 날개.

* * *

[흥, 네 쌍의 날개 중 한 쌍만이 개화했네. 그래도 충분할 거다.]

“뭐야, 이건?”

유니콘이 대답했다.

[말했잖아, 신성한 힘이라고.]

랜스와 방패는 그렇다 치자.

등에 돋아난 이 거대하고 거추장스러운 하얀 날개는 뭐란 말인가. 마치 천사의 모습 같잖아.

“이게 신성한 힘?”

[인간들이 생각하는 신성한 모습이 새의 날개가 달린 인간이라서 그렇다. 어쨌든 그 힘은 세상을 구할 수 있는 힘의 반의 반의 반이다.]

“줄 거면 다 주든가 반의 반의 반이 뭐야?”

[몹쓸 녀석, 빨리 저 끔찍한 놈을 없애고 소녀를 구하기나 해!]

난 랜스를 추켜들었다.

‘이렇게 다루면 되나.’

그리고 샐러맨더의 기운으로 홍식을 펼치듯 유니콘이 준 신성한 기운을 비슷하게 운용했다. 그러자 백색 랜스의 창끝에 찬란한 빛이 모였고 강렬해질수록 그림리퍼가 비명을 내질렀다.

끼이이에에!

“오호라, 이게 네게 독이구나.”

유니콘이 말하길, 제 힘은 모든 질병을 치료하고 사악한 힘을 물리친다고 했다. 그렇다면 이 힘은 사악하기 그지없는 그림리퍼에게 독이 될 것이다.

별다른 기술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샐러맨더의 기운을 포효하는 홍식과는 다르게 단지 응축된 힘을 내지를 뿐이니까.

“여명.”

하지만 랜스를 뻗어 마침내 빛을 뿜어냈을 때 나도 모르게 여명이라고 말했다. 여명(黎明). 희미하게 밝아 오는 태양 같다. 또한 절망적이던 상황에 빛나는 희망의 빛 같기도 했다.

빛은 순식간에 그림리퍼를 불태웠다. 샐러맨더의 불꽃에도 멀쩡하던 놈은 빛에 사라지는 그림자처럼 허망하게 사라졌다. 그렇게 사신은 사라졌다, 너무나 허무하고 쉽게.

그림리퍼가 사라지자 죽어 가던 정혜연의 낯빛이 살색으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비록 그림리퍼의 공격에 당하긴 했으나 대단한 회복력이다.

“지쳐.”

무공, 형의검이라 할 것도 없이 단지 힘을 분출했을 뿐인데 두 가지 기운을 동시에 형의검으로 발현한 것보다 더 피곤했다.

다리가 후들거려 서 있을 힘조차 남지 않았다. 당장 퍼질러 눕고 싶었으나 나는 간신히 몸을 이끌고 정혜연에게 다가갔다. 아직 안심하길 일러. 마물원까지 돌아가야…….

푸르릉.

[업혀.]

나는 유니콘을 보며 피식 웃었다.

“아무나 등에 안 태운다며?”

녀석은 대답하지 않고 정혜연을 제 등에 태웠다. 그러고는 뒤돌아보지 않고 마물원 쪽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아, 저 망할 새끼.

* * *

마물원으로 돌아왔다.

이곳은 용의 마법으로 보호되는 곳이다. 감히 솔로몬의 괴물들이 침범하지 못하는 곳이다. 오는 길에 정신을 차린 정혜연도 그걸 느꼈는지 보다 안심한 것 같았다. 지치고 힘들어하는 녀석을 우선 관리실의 소파에 재웠다. 이야기는 나중에 들어야겠다.

유니콘은 알아서 제 발로 우리로 돌아갔다. 녀석은 정말 소녀가 무사하기만을 원했던 걸까?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게 아니라? 첫인상과 달리 조금 달라 보이네.

유니콘은 구름 가득한 창공 너머의 제 둥지로 미련 없이 떠났다. 그러다 어느 정도 멀어졌을 때, 녀석이 내게 말했다.

[부탁을 들어줘서 고마워.]

얼굴을 마주하고 말하긴 부끄러웠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사실 거짓말을 했어.]

녀석이 말을 덧붙인다.

[난 영웅을 탄생시키지만, 그 이상은 이루게 할 수 없어.]

“뭐?”

녀석의 의미심장한 말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으나 이미 유니콘은 구름 너머로 사라진 후였다.

* * *

나는 편의점에서 이것저것 사 왔다.

역시 배가 고팠던 모양인지, 잠에서 깨어난 정혜연은 허겁지겁 음식들을 먹기 시작했다.

난 녀석이 과자 봉지를 뜯고 사탕을 깨물어 먹는 걸 보며 도시락 한 개를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도시락을 먹어라, 군것질만 하지 말고.”

따뜻하게 덥힌 도시락을 주자 그제야 밥다운 밥을 먹기 시작했다. 난 캔 커피 한 개를 홀짝이며 넌지시 질문했다.

“어쩌다 카르마와 엮이게 된 거야?”

도시락을 오물거리며 먹던 녀석은 젓가락질을 멈추고 대답했다.

“난 그들이…….”

“먹던 거 다 먹고 얘기해.”

볼이 빵빵하게 차선 말할 때마다 밥풀이 튀어나왔다. 참 허술한 녀석이다. 내 말에 정혜연은 다급히 음식을 씹어 삼켰다. 말은 참 잘 듣는다.

“그들이 내 힘을 억제해 준다고 했어요.”

솔로몬의 마물을 불러들였던 힘.

“그런 힘은 언제부터 있었던 거야?”

“저도 잘 몰라요. 어릴 때부터 난 다른 사람들과 많이 다르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끔찍한 괴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 건 얼마 되지 않았어요.”

정혜연이 머뭇거리며 말했다.

“어쩌면 그날 이후부터였는지도 몰라요. 최근에 많이 화가 나는 일이 있었는데 화를 내니까 머리가 어질어질하더니 눈 깜짝할 사이에 괴물들이 나타나서…….”

‘각성인가.’

능력자들의 ‘힘’은 특정한 조건 때문에 달라지는 경우도 있었다. 내 경우처럼 마물의 힘을 빌리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단지 모르는 경우도 있고, 감정이 격해지거나 능력이 숙련되어 새로운 힘이 개화되는 경우도 있었다.

각성 현상. 아마 이 아이는 화를 낸 후에 솔로몬의 괴물들이 나타났다고 하니 격렬해진 감정이 각성 현상을 일으킨 것으로 보였다. 정확한 건 원장님이 오면 자세히 알 수 있겠지.

“부모님은? 휴대폰 번호는 알지?”

그 전에 우선 정혜연의 부모에게 연락을 해야겠지. 보호자가 없는 나라서 금방 떠올리지 못했다. 녀석의 가족들은 얼마나 걱정하고 있을까.

“없어요.”

스마트폰을 건네주던 손에 절로 힘이 들어가고 말았다.

“…다른 가족이나 친척들은?”

“몰라요. 아마 없을 거예요.”

난 정혜연의 교복 재킷의 학교 마크를 확인했다. 국립 학교 교복, 정혜연의 학교는 정부에서 운영하는 복지 기관 소속이겠지. 나랑 똑같은 처지였구나. 시기상으로 보면 전이에 의해 고아가 된 아이인가.

“보호자도 없니?”

“복지관 담당자는 있지만 연락하지 말아 주세요.”

정혜연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까지 편안해하던 녀석은 싫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몹시 불안해했다.

“있잖아요. 화를 잔뜩 낸 날에 기숙사에서 책거리 파티가 열렸어요. 친구들은 날 위로하며 직접 그린 캐리커처를 선물해 줬어요. 좋았어요. 원하는 대학은 못 가더라도 무슨 상관이랴 싶었어요. 하지만 그때 놈들이 나타났어요. 하필! 그때! 놈들이 아무것도 없는 공중에서 나타났어.”

죄책감으로 얼룩진 소녀의 어깨는 심히 떨려왔다.

“좁은 기숙사 방은 한순간에 아수라장이 되었고 도망칠 수 있었던 건 나 혼자였어요. 난 친구들이 어떻게 됐는지 몰라요. 그 후로 계속 쫓아오는 괴물들을 피해 달아나고, 달아나고, 달아나고……. 생각하기 싫어서 외면해 왔어요. 하지만 역시… 죽었겠죠? 나 때문에 친구들은 한순간에 영문도 모른 채 모두… 죽었을 거예요.”

녀석의 말에서 녀석이 뭣 때문에 잔뜩 화가 났는지도, 지하 터널에서 왜 날더러 도망치라고 소리쳤는지도 알게 되었다.

같은 상처를 공유하는 녀석을 쳐다보던 나는 이전에 느낀 적 없는 요상한 기분이 들었다. 애틋함, 동정? 항상 동정받으며 살아온 내가 나와 같은 처지의 녀석을 보니 기분이 매우 이상했다.

벌벌 떨며 눈물을 흘리는 정혜연에게 담요를 덮어 주고 관리실을 나왔다. 다 마신 캔을 찌그러트리며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했다.

[○○국립여고 기숙사…….]

어렵지 않게 포털 사이트에 등록된 인터넷 뉴스를 확인할 수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