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7화 날개를 가진 소녀 (5)
관리실로 돌아온 난 해변에 쓸려 온 해파리처럼 맥없이 쓰러져 있는 정혜연을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너 귀여운 거 좋아하지.”
변명해도 소용없다.
편의점 빵에서 나온 귀여운 캐릭터의 스티커를 주머니에 챙기는 걸 다 봤다.
“따라와 봐.”
싫어하는 정혜연을 데리고 마물 우리로 향했다. 순식간에 새로운 공간이 열리고 하늘 섬에서 폭포수가 떨어지는 쾌청한 평야가 나타났다. 역시 꿀꿀한 기분을 날리기엔 최적의 장소다.
츄우-!
오랜만이라고 복슬복슬 하얀 털의 마츄들이 살갑게 뛰어나왔다. 경계심이 많은 녀석들도 정혜연은 마음에 드는지 애교를 피우며 꼬리를 비비적거렸다.
정혜연은 무어라 말을 하지 않았으나 표정에서 감정이 다 드러났다. 행복하다 못해 벅차기까지 한 표정으로 마츄들에게 손을 내민다.
마츄들은 정혜연의 손길을 거부하지 않았다.
정혜연은 한참 동안 마츄들에게 둘러싸여 힐링을 받았다. 솔로몬의 탑의 괴물들처럼 고통을 주는 마물만 있는 게 아니다.
미소를 짓는 정혜연을 보던 난 관리실에서 가져온 노란 번개 쥐의 스티커를 건넸다.
“너 이거 좋아하지?”
정혜연은 분명 주머니 몬스터의 팬이다.
“그때 들었어. 날 마그마라고 불렀잖아. 기다려 봐, 내 컬렉션을 보여 주지.”
정혜연이 마츄들과 놀 동안에 나는 집에서 주머니 몬스터에 대한 캐릭터 상품들을 긁어 왔다. 우는 아기에게 장난감을 주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해도 어이가 없지만, 그래도 주고 싶었다.
왜냐하면 내가 그랬기 때문이다.
다 커서도 장난감에 집착하게 된 건, 내게 장난감 선물을 준 사람이 낡은 수염을 붙이고 가짜라는 티가 나게 산타를 연기한 복지관 아저씨뿐이었으니까. 고등학생이라도 다를 바 없다. 사실 지금의 나도 장난감을 받으면 울컥할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생일 때나, 아닐 때나 작은 장난감이라도 선물해 준다는 건 매우 행복한 일이니까.
마츄 우리로 돌아오자 진흙탕에 빠져 허우적대는 정혜연이 보였다. 내가 첫날에 한 실수였지. 그때의 나처럼 진흙탕에 빨려 들어가진 않았으나 교복은 진흙에 더럽혀졌다.
‘옷도 사 줘야겠네.’
우선 관리실로 돌아와 작업복과 함께 가져온 장난감을 건넸다.
장난감을 받은 녀석은 머뭇거리며 안절부절못했다. 고맙다는 인사는 안 했지만 괜찮았다. 이해한다. 익숙하지 않으니 쉽게 말이 떠오르지 않는 거겠지.
씻고 옷을 갈아입고 온 녀석에게 난 넌지시 말해 줬다.
“살아 있어, 네 친구들.”
스마트폰을 건네 보여 줬다.
화면에 뜬 인터넷 뉴스를 읽어 가던 정혜연의 눈이 붉어진다.
“이런 걸 보면 기적은 의외로 참 쉽게 일어나. 하하, 네 친구들 중에 초진 3급을 받을 정도로 강한 능력자가 있었다니 말이야.”
기숙사에 나타난 괴물들,
하지만 학생 중 능력을 각성한 자에 의해 학생 전원이 생존했다.
나는 눈물 콧물로 엉망이 된 정혜연의 얼굴을 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씻기 전에 말해 줄 걸 그랬다. 못생김 묻었으니까 세수라도 하고 와.”
농담이었으나 녀석은 엉엉 울며 화장실로 향했다.
* * *
몇 주 만에 원장님이 돌아왔다.
원장님은 관리실에서 지내던 정혜연을 마주했다. 난 벌어지는 원장님의 입을 보며 덩달아 당황하고 말았다. 아니, 그렇게 놀라면 당황스럽잖아요.
“세상에.”
난 지금까지 몇 년 동안 마물원에서 일하며, 단언하건대 저렇게 당황한 원장님의 표정은 본 적이 없었다.
원장님에 대해선 정혜연에게 미리 말해 줬으나 실제로 드래곤을 처음 대면한 정혜연은 고양이 앞의 쥐처럼 아무 말도 못하고 얼어붙었다.
원장님은 그런 정혜연을 잡아먹을 듯 노려봤다. 난 재빨리 정혜연에 대해서 말해 줬다.
“어… 카르마로부터 얼떨결에 구한 아이인데, 이 녀석 신인류라는데요.”
원장님은 고개를 세차게 저었다.
얼마나 세게 고개를 흔드는지 빨강 머리카락이 찰랑거릴 정도였다.
“아니야, 이 아이는 인간이 아니야.”
언제나 교양 있게 말하던 원장님이 이번만큼은 달랐다.
뭔데, 대체 뭔데 그래?
덩달아 침을 꿀꺽 삼키며 원장님의 입에서 튀어나올 충격적인 말을 기다렸다. 인간이 아니라면 뭘까?
“분명 이 기운, 두 다른 종의 피가 섞인 혼혈. 하지만 특히… 이 아이는……. 맙소사.”
사타리언 부인의 자식처럼 혼혈이라고? 신인류가 아니라? 하지만 생김새는 영락없는 사람인데.
원장님은 목소리를 떨었다.
“지구에서 태어난…….”
일부러 뜸을 들이며 말하는 게 아니다.
자기도 믿지 못해 간신히 말을 내뱉는 것이다.
원장님이 말했다.
“인간과…….”
인간과?
“드래곤의 아이.”
듣자마자 나 또한 고개가 세차게 돌아갔다. 정혜연을 봤다. 아, 젠장. 어쩐지 착각이 아니었다. 첫 만남에 원장님의 냄새가 난다고 했더니 드래곤의 자식이라고?
잠깐, 인간과 드래곤의 아이? 만약 정혜연이 드래곤이라면 결코 이만큼 충격적이고 놀라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드래곤이, 그 천하의 드래곤이 인간과 자식을 낳았단다.
원장님의 당혹스러워하는 행동이 그제야 이해가 갔다. 나도 이 정돈데 드래곤인 그녀는 오죽할까. 언제나 천상천하 유아독존인 드래곤이다. 그런데 인간과 피가 섞인 드래곤이 나타났다고 하니 적잖은 충격을 받았겠지.
“그게 가능합니까?”
지금까지 몇 번 생각한 적은 있었다. 하지만 감히 물어보지 못했다.
드래곤도 인간과 결합할 수 있나요?
죽기 딱 좋은 질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혼란한 상황을 틈타 질문할 수 있었다.
“가능해요.”
원장님의 대답은 지체 없었다.
“물론 가능과 실현은 다른 문제이긴 하지만…….”
원장님은 정혜연의 눈을 바라보며 이름을 물었다. 정혜연이 대답하자 원장님은 눈썹을 찌푸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이 얘가 누구 자식인지 알 것 같군요.”
그 말은 원장님에게도 내게도 충격이었으나 당사자인 정혜연만큼 놀라진 않았겠지. 정혜연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무어라 물어보고 싶지만 드래곤이라 감히 입을 못 여는 것처럼 보였다.
“기운이 뒤틀렸군요. 정순한 환경에서 자라야 할 숭고한 존재가 인간들과 지냈으니……. 다정 씨, 당분간 마물원에 출근하지 말고 집에서 지내요. 내가 부를 때까지 절대 마물원에 오지 마요. 일단 이 아이는 내가 맡아서 보살필 곳을 찾아내야… 때가 되면…….”
원장님은 순식간에 정혜연을 데리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폭풍 같은 등장과 퇴장이었다.
난 아직까지 멍한 정신으로 퇴근을 준비했다. 기한 없는 휴가는 좋았지만 대체 원장님은 무얼 하려는 걸까.
* * *
난 집에 돌아와 생각했다.
“용과 인간의 자식.”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0과 1은 다르다. 어쩌면 나, 가능성이 있는 건가?
* * *
다정이 신의 피에서 태어난 영웅 개시자의 힘을 펼쳤을 때였다. 인근 병원의 환자들이 동시에 몸을 일으키는 기적이 일어났다. 치료할 수 있는 경미한 병부터 세포가 파괴되어 가는 지독한 병까지. 어떤 병이든 상관없이 모든 환자가 몸을 일으킨 것이다.
그중엔 코마 상태의 환자들도 있었다. 그 후, 환자들은 신을 믿기 시작했다. 냉철하던 의료계 종사자들도 신의 존재에 궁금증을 두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러한 기적에도 이 사건은 알려지지 않았다.
* * *
대방주를 모시는 대사제와 초두라급 단장의 실력을 가진 무인 일곱이 움직였다. 그들의 전력은 국가의 최고보안 병력과 동등했다. 그들이 암살하지 못할 인간은 지구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정을 암살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그만큼 다정이 카르마에게 준 피해는 엄청났다. 더 이상 잠자코 좌시할 수준이 아니었다.
수장의 명령에 따라 대사제와 대사제의 수호자로서 선출된 일곱 고수가 파견되었다.
흔적을 따라 그를 쫓았다.
그렇게 그들은 서울 외곽의 허름한 마물원을 찾게 된다.
망설임 없이 건물로 들어갔다.
그들은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가 지구의 인간이라면 문제가 되지 않는다. 그가 정말 도성의 제자라고 하더라도, 심지어 도성이 기다리고 있더라도.
도성을 죽이지는 못할망정 성가신 남자는 해치울 수 있다고 자부했다.
그렇게 카르마 길드에서도 분명 최고 등급의 암살단이 분명한 그들은 마물원으로 들어서던 그때, 지구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 *
붉은 하늘, 무너진 대지, 느껴지지 않는 중력, 떠다니는 잔해, 폭발하는 행성.
자신들의 고향인 ‘무림’의 붕괴보다 더 처참한 광경이다. 대주술사이자 현명한 노인인 대사제도 지금 벌어지는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방금까지 푸른 세계인 지구에 있었는데 어찌 멸망한 행성이 눈앞에 펼쳐진단 말인가? 곧바로 주술을 펼쳤으나 공간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떨어지는 별, 찢어지는 하늘, 치솟는 대지. 멸망하는 세계에 갇힌 그들의 가슴에 점점 두려움이 피어오를 때였다.
그들은 보았다.
멸망한 행성의 붉고 짙은 안개 속에서 걸어 나오는 한 여인을. 얼굴을 감싸 쥔 채 정확히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는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을.
“신기해.”
여인의 목소리는 나지막했으나 바로 옆에서 말하듯 선명하게 들려왔다.
“놀랍다니까.”
얼굴을 감싼 여인의 손가락 틈으로 그녀의 붉은 안광이 기묘한 힘을 내뿜자, 주술의 왕의 근처까지 도달한 대사제도 일순간 몸을 굳히고 말았다.
대체 무엇이기에,
자신을 이토록 떨리게 하는지 대사제는 이해할 수 없었다.
여인은 아무런 짓을 하지 않았으나 대사제와 일곱 고수는 궁지에 몰린 쥐새끼처럼 반항했다.
한때 무림을 진동시켰던 일곱 고수의 병장기가 휘둘러진다. 무공의 힘은 능히 산을 자를 만큼 강대했다.
동시에 주술이 펼쳐진다.
대사제의 주술은 막강하여 죽음의 힘마저 수족처럼 다룬다.
하지만 그런 막강한 힘은 여인에게 닿는 순간 타오르며 사라지고 말았다. 그들은 즉시 다른 공격을 펼쳤으나 모두 소용이 없었다.
어떤 힘이든 여인에게 닿자마자 검은 연기가 되어 불타 사라진 것이다.
“내 가디언을 위해 이, 내가 이 정도 인내심을 발휘하다니.”
마침내 얼굴을 감싼 여인이 손을 내린다. 그들은 여인이 지금까지 웃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진즉에 멸족해야 할 너희들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건 알량한 자비 때문이 아님을 깨달아라.”
붉은 머리카락의 여인이 말했다.
대사제는 현명했다. 즉시 무언가 단단히 잘못되었음을 깨닫고 일곱 고수를 방패삼아 도망쳤다. 하지만 멀리 도망갔다고 생각했을 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제자리였다.
“이곳은 죽은 행성들의 무덤, 깨진 시간 틈에 갇혀 무한의 멸망을 반복하는 곳.”
여인이 다가온다.
“그러니 나같이 성질 더러운 드래곤이 화를 풀기에 좋은 장소야.”
날개가 펼쳐진다.
하늘을 뒤덮을, 거대한 붉은 날개였다.
여인이 날개를 펼치자 행성의 지표 위로 거대한 불기둥이 수천 개가 피어올랐다.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땅을 터트린다.
하나의 행성이 멸망해 간다. 그들은 무자비한 멸망 앞에 어떤 저항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죽음만을 기다리며 재가 되길 희망할 뿐.
* * *
이번 휴가는 엄청 길었다.
한 달이 지나고 나서야 원장님이 날 호출하여 마물원으로 출근할 수 있었다.
“일이 잘 해결됐나 봐요? 기분 좋아 보이셔요.”
오랜만에 만난 원장님은 피부가 반짝거렸고 내색은 하지 않아도 엄청 개운한 듯한 표정이었다.
아주 가끔씩 원장님은 저런 표정을 짓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내게 보너스를 두둑하게 주어, 엄청 기분이 좋은 상태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 참, 그녀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군요. 이거 받아요. 어렵게 구한 약초들로 만든 단약이에요.”
원장님이 건넨 약.
그녀는 먹으면 내 마나가 엄청나게 늘어날 거라고 했다. 분명 처음엔 내 오염된 마나를 치료하기 위해 떠났지 않았던가? 아무렴 어때.
그녀가 날 챙겨 준 게 고마웠다.
드래곤들은 다 괴팍하다던데 원장님은 엄청 착하다. 용이라는 편견을 내려 두고 생각하더라도 엄청 착한 사람이다. 가끔씩 보이는 매서운 눈빛만 조심하면 좋은 상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