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50화 (150/258)

# 150화 오크 라덴 (3)

어떤 꾀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설령 검은 속내가 있더라도 이런 방식으로 나오진 않았을 테니까.

@혼란스러웠던 나는 각오하고 말했다.

오크들에겐 실례가 되겠지만 직접 물어보는 수밖에 없었다.

“듣기론 당신들은 이방인의 얼굴을 베어다가 가면으로 쓰길 즐긴다던데, 어찌 이토록 환영해 주는 겁니까?”

그러자 오크들 중 제법 지위가 높아 보이는 늙은 오크가 나서서 말했다. 다른 오크들은 가죽 갑옷 따위를 걸치고 있었지만 늙은 오크는 하얀 천의 한 벌 옷을 입고 있었다.

“그건 신종으로 개화되기 전의 우리가 가졌던 미개하고 더러운 습관이지요. 신종이 된 우리들은 이제 더 이상 그러지 않습니다.”

“신의 종, 오크들이 말입니까?”

난 일부러 신랄하게 말해 봤다.

그가 화를 내서, 조금이라도 오크다운 모습을 보일까 싶어서였다.

“항상 전쟁을 몰고 다니고 피를 보지 않으면 적성이 풀리지 않는 오크들이?”

하지만 그는 생긴 것과 전혀 어울리지 않게도,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스스로를 자책하기까지 했다.

“이해합니다. 우리들은 미개하고 난폭했으며 야만적이고 잔혹했지요. 하지만 이젠 사랑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평화를 이룩하였습니다. 이제 더 이상 피에 미쳐 살던 오크들은 없습니다. 어느 날 성인께서 강림하시어 깨달음을 주었기 때문입니다.”

오크 노인의 말을 들으며 난 대강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좋아해야 할까? 비교적 쉽게 원장님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다.

“그게 언제인지 알 수 있겠습니까?”

그는 친절히 대답해 줬다.

“오른 달의 왼쪽 그믐날이 되던 날입니다.”

책자에 적힌 오크들의 날짜 계산법에 따르면, 오른쪽 달의 왼쪽 그믐날은 불과 몇 개월 전이다.

난 그제야 깨달았다.

이 괴상한 현상이 절대 자연적이지 않다는 걸. 시기도 딱 워라이언들이 지구로 넘어올 때다.

‘성인이라는 놈을 만나봐야겠군.’

워라이언들은 전쟁을 부추기고 알리는 마물이다. 하지만 정말 보이는 대로 오크들이 평화를 추구하게 되었다면, 워라이언들이 오크 라덴에서 존재하는 의미가 사라질 테지.

오크들을 사랑이 넘치는 자들로 만들어 버린 자, 이 기묘한 변화를 일으킨 장본인을 만난다면 모든 사실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인을 만나 볼 수 있겠습니까?”

그는 흔쾌히 알았다고 대답했다.

“성인께선 이계의 주민의 방문을 환영하십니다. 예언하길, 곧 이계인이 우리 세계로 건너온다 하셨죠. 당신이 그분이시군요.”

꺼림칙한 기분이 든다.

난 차라리 오크들이 난폭하게 나왔다면 더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지금 상황은 이치에 맞지 않았고, 이 상황을 불러일으킨 게 ‘성인(聖人)’이라는 놈이기에 당연히 만나기 꺼려지는 것이다.

늙은 오크는 쿠콩이 몇 마리가 끄는 마차를 불러 날 태웠다. 난 그와 같이 성인이 기거하고 있다는 오크트리아로 향했다.

마차 안에서 난 늙은 오크로부터 몇 달 전 갑자기 나타난 성인의 이야기를 들었다.

“성인께선 얻을 것 없는 북부 오크들의 사막 전쟁을 종식시켜 주었지요.”

이야기는 몹시 흥미로웠고, 성인에 대한 나의 호기심이 높아졌다.

그가 말하길,

성인은 갑자기 전쟁터 한가운데에 나타났다고 한다.

*

난 고개를 갸우뚱거리게 만드는 이야기에 집중했다. 늙은 오크는 성인의 추종자가 되어 그의 업적을 열렬히 칭송했지만 듣다 보니 공감하기 어려운 추상적인 이야기였다.

실상 오크들은 자신들이 어떻게 변화됐는지 제대로 알 지 못했다. 놀라운 건 지금껏 전쟁을 해 오던 오크들이 한순간의 변화를 기꺼이 받아들였다는 것이다.

어느 날 전쟁터에 성인이 나타나 빛을 내려 사랑을 베푸니, 오크들은 저마다 무기를 내려놓고 적을 안아 줬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그래서 점점 성인이란 자에 대해 호기심이 동했다.

난 미담에 비판적인 현대인답게 그가 누구든, 어떻게 이런 짓을 벌였든 무슨 수작이 있다고 짐작했다.

*

달그락거리는 마차에 엉덩이가 아파올 때쯤 성인이 기거한다는 오크트리아에 도착했다. 겉모습은 콜로세움처럼 생겼으나 안쪽 지물은 전혀 달랐다. 늙은 오크가 안내한 장소는 오크 라덴에서 볼 수 없는 건축물이었다.

투박하고 삭막한 다른 건물과 다르게 맑고 세련되었다. 황량한 사막과는 정반대이기에 매우 이질적인 건물이었다. 게다가 성당처럼 경건하고 반듯하게 세워진 건물의 벽면엔 드래곤의 형상이 양각되어 있었다. 입구는 거대한 대리석 문이었고 지붕은 비취색 돔, 지탱하는 기둥은 황금색으로 빛이 났다.

마차에서 내린 늙은 오크가 먼저 건물로 들어갔다. 그동안 다른 오크들이 날 환영했는데 역시 이쪽의 오크들도 사랑이 넘치는 미소로 날 안아 주려고 했다.

그들의 호의와 별개로 입 냄새는 견디기 어려웠으므로 난 예의 있게 거절했다.

잠시 후, 늙은 오크가 건물에서 나와 내게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성자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리석 문 너머로 안내하는 늙은 오크의 등을 쳐다봤다. 편견은 좋지 않지만 때론 의심은 현명한 선택을 유도하기도 한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은 매끄러웠으나 난 오히려 처음보다 더 불안했다.

‘대체 어떤 힘이기에.’

한순간에 오크들을 착한 놈으로 탈바꿈시킨 자. 그 방법이 진심을 담은 말와 행동 따위의 서투른 것은 아니겠지. 난 그와 직접 대면하기도 전에 꺼림칙한 기분에 휩싸였다. 그래서 늙은 오크를 따라가며 잠자던 단비를 깨웠다.

“단비야, 준비해.”

비몽사몽이던 녀석은 내 말에 힘을 끌어 올렸고, 드루이드를 언제든지 가동할 수 있도록 준비를 끝마쳤다. 젠장, 차라리 오크들과 치고 박고 싸우는 게 마음은 더 편할지도.

*

문 앞에 서자 가슴 주머니에 숨겨 둔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빛이 났다. 보기와 달리 상당한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곳이다. 아마 주인의 허락을 받지 않는 자가 이곳의 문턱을 넘으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

대리석 문을 지나자 코를 간질이는 냄새가 났다.

‘향초?’

나는 성자라는 자에 대해서 한 가지 깨달았다. 그는 오크들의 냄새를 혐오하는 자다. 길게 이어진 복도엔 수백 개의 향초가 진한 향을 자아내고 있었다.

점점 그자가 성자라는 거창한 수식어에 어울리지 않는 자라는 생각이 든다. 오크들의 냄새를 싫어하는 건 사소하지만 그의 허황된 소문을 방증하기도 했다. 진짜 성자라면 굳이 보호 마법을 걸지도, 오크들의 냄새를 없애기 위해 향초를 피우지도 않았을 테니까.

길게 이어진 복도의 끝에 도달하자 또다시 문이 있었다. 건물의 벽에 양각된 드래곤 형상이 이 문에도 조각되어 있었다.

“거룩한 빛에 놀라게 되실 겁니다.”

늙은 오크가 문을 열었고 난 따라 들어갔다. 문 너머엔 고풍스러운 실내 장식이 인상적인 넓은 방이 나왔다. 이 역시 건물처럼 오크 라덴에선 볼 수 없는 이질적인 장식이었다. 벽에 걸린 다양한 그림과 방에 장식된 조각품, 도자기. 마치 르네상스 시대 귀족들의 거실 같은 느낌이다.

넓은 방 한가운데엔 대리석으로 만든 의자가 있었고, 그 의자엔 금발의 남자가 앉아 있었다.

‘인간… 지구인이다.’

성자는 인간이었다. ‘인간’이란 종족은 지구를 제외하고도 무림인 등 많았지만 난 그가 지구인임을 확실했다. 별다른 이유는 없다. 청바지와 후드 티, 그리고 귀에 꽂은 무선 이어폰 때문이다.

“모셔 왔나이다.”

늙은 오크가 말하자 그제야 남자가 일어났다. 그는 날 보며 웃더니 이어폰을 빼 주머니에 넣곤 성직자처럼 느리고 예의 바른 몸놀림으로 다가왔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그는 금발와 푸른 눈의 북유럽 백인의 외모였다. 다만 얼굴의 선이 부드러웠고 눈 꼬리가 매끈하여 순한 인상을 줬다.

내가 놀란 건 그가 겉보기에 상당히 어려 보였기 때문이다. 많이 쳐줘 봐야 20대 초반, 혹은 10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외모였다.

“수고하셨어요, 큠차탄 사제. 이제 돌아가 양들을 위한 볏짚을 준비해 줘요.”

목소리는 제법 근엄하였다. 그의 축객령에 늙은 오크가 물러가고 그와 나만 남게 되었다.

난 그가 입을 열기 전까지 침묵을 고수했다. 잠시 동안 날 바라만 보던 남자는 이내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당신 지구인이구나!”

조금은 당황했다.

방금 전 늙은 오크를 대하던 태도와 목소리와는 딴판이었기 때문이다. 남자는 방정맞은 목소리와 쾌활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처럼 말하기 전엔 성인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소년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중국인? 일본인?”

난 남자와 악수하며 말했다.

“날 기다렸다고 들었어요.”

자기소개도 하지 않는 무례한 놈에게 날 소개하긴 싫었다. 하지만 녀석은 개의치 않고 제 할 말만 했다.

“음, 발음으로 보아 당신 한국인이구나? 오! 나 케이 팝 좋아해요!”

보통 이런 유형의 사람은 크게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일부러 저딴 태도로 나서서 본심을 감추든가, 아니면 정말 싸가지가 타고난 녀석이든가. 난 다시 한 번 강조하며 말했다.

“날 기다렸다고 하던데.”

그가 대답했다.

“응? 왜 내가 당신을 기다려요?”

“오크에게 듣기로 날 예언의 남자라고 하더군요.”

놈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아 나도 모르게 날 선 말투로 답했다.

“그리고 예언이란 건 당신 입에서 나온 소리고.”

그러나 녀석의 말투는 여전했다. 그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했다.

“아, 그거 그냥 적당히 둘러댄 건데요. 다른 세계에서 온 워커들이 내 계획을 망치기 전에 만나 봐야 하니까.”

그러면서 이어폰을 꺼내 귀에 꽂곤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도무지 오크들을 개화시킨 성자로 보이지 않았다. 잠자코 그를 쳐다만 보자 소년은 고개를 까닥거리며 따라오라고 몸짓했다.

그를 따라갔다. 고풍스러운 방을 지나치자 짧은 복도가 나왔고, 그 끝엔 자물쇠가 걸린 문이 있었다. 다시금 오리하르콘이 빛나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곳이다.

그가 자물쇠를 열자 오리하르콘은 잠잠해졌다. 문을 열자 방의 풍경이 드러났는데 오크 라덴에선 이질적이지만 오히려 내겐 익숙한 풍경이었다. 베이지색 가죽 소파와 대형 스크린 모니터. 게임기와 조이 스틱. 벽엔 영국 락 밴드와 한국 아이돌들의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그 외 냉장고와 정수기 같은 가전제품도 보였다. 구석에 자리한 발전기가 눈에 띈다. 마도구를 뜻하는 마크가 그려진 발전기, 전기 시설이 없는 오크 라덴에서 사용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다. 난 감탄한 채 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대단한 시설이네요.”

“현대인이 이계에서 살아가려면 이 정돈 돼야죠.”

그가 대답했다. 이계에서도 불편함이 없는 시설이라며 자랑을 한다. 확실히 대단하긴 했다. 그는 차원을 왕래할 수 있는 워커일 테고 서투른 초짜가 아니라 이런 시설을 준비할 만큼 베테랑이었다.

“반가워요. 처음 찾아온 워커가 지구인이라니 정말 다행이야. 난 말재주가 없어서 뱀파이어나 레프러콘이라도 오면 솔직히 대화를 나눌 자신이 없었거든.”

베이지색 소파에 앉아 콜라 500ml를 대접 받고 나서야 그와 소개를 나눌 수 있었다. 그의 이름은 카를 페테르손, 자신을 차원을 왕래하는 ‘워커’이자 이계의 문물과 지식을 거래하는 ‘교섭인’이라고 하였다.

‘교섭인이라…….’

흥미로웠다. 이미 그와 같은 존재가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유저라 칭하는 이계의 힘을 사용하는 자들이 그렇다. 또한 ‘랭커’라 불리는 자들이 대부분 이계에서 힘을 키운다는 사실을 마물원에서 일하며 알게 되었다.

크게 본다면 하이 엘프인 카르네도 범주에 넣을 수 있겠지. 하지만 유저 중 사람을 실제로 만난 건 처음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