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51화 (151/258)

# 151화 오크 라덴 (4)

카를의 소개에 이어 나도 날 워커라고 소개했다. 다만 교섭인이 아니라 마물 학자라고 둘러댔다. 오크 라덴의 마물들을 기록하는 게 목적인 것처럼 말했다. 직접적으로 내 일을 언급하는 게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았다.

“마물 학자? 흐음, 이상한 직업도 다 있네. 오크 라덴엔 며칠 동안 있었어요?”

“하루도 지나지 않았죠.”

“그래서 턱시도를 입고 있구나.”

카를은 이죽거리며 다행으로 여기라고 했다. 몇 달 전의 오크 라덴이었다면 그 얇은 천 옷 따위론 오크들의 검날을 막아 주지 못했을 거란다.

난 궁금한 걸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지구에서도 오크들은 사납기로 유명한데 당신은 어떻게 성자라 불리며 숭배받는지 그 이유를 물었다.

그러자 잠깐 침묵하던 카를은 한쪽 눈썹을 추켜세우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열쇠 함으로 향했다.

곧이어 그는 내게 이곳의 방 한 칸를 내줄 테니 그곳에서 지내라고 했다. 열쇠를 받아 든 난 다른 대답을 기다렸지만 카를은 질문에 답해 주지 않았다.

“일단 여독을 풀며 방에서 쉬세요. 목욕물을 준비하라 이르겠지만 오크들의 위생 관념은 워낙 형편없어서 욕조에 진흙이 둥둥 떠다닐걸요. 왼쪽 달의 일곱 번째 상현달이 되는 날에 나머지 이야기를 나누시죠.”

나는 그의 의도를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우선 장단에 맞추어 주는 게 좋다고 판단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나가려는데 카를이 날 불러 세웠다.

“어떻게 알죠?”

뭘 의미하는지 몰라 멀뚱히 지켜보니 카를은 제 이마를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오크 라덴에 온 지 하루도 되지 않은 워커가 어떻게 오크들의 쓸데없이 난해한 날짜 계산법을 알고 있어요?”

내 대답은 망설임 없이 빨랐다.

“지구에 있을 때 친구에게 배웠습니다. 그 친구 덕분에 오크 라덴으로 넘어올 방법을 알 수 있었어요.”

카를은 낄낄 웃으며 말했다.

“보기보다 사교성이 뛰어나시나 봐요. 인간의 뼈를 부러트리는 걸 취미로 여기는 놈들과 친구라니.”

난 더 이상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등을 돌려 방에서 나왔다. 그는 경박한 말투와 태도 때문에 가볍게 느껴지는 사람이었지만 방금 전 찰나에 난 보았다.

날 취조하듯 물어볼 때 보인 싸늘한 눈빛, 얼마만큼 두꺼운 가면을 썼기에 그러한 눈빛을 감출 수 있었던 걸까? 본심을 숨기는 자다. 가면을 쓰는 데 익숙한 놈이다. 즉, 경계해야 할 자라는 것이다.

*

다음 날 오후, 저녁 식사에 초대받았다. 유럽식 식탁엔 많은 음식들이 차려져 있었으나 모두 붉은 살코기로 만든 음식이었고 채소는 보이지 않았다. 오크 라덴의 음식이지만 마물원 일에 단련된 난 거부감 없이 먹을 수 있었다.

그와 마주 앉아 이야기를 자세하게 나눴다. 카를은 스스로 자신을 신인류라 소개했다. 전이 이후 태어난 선천적인 능력자, 또한 워커이기도 하여 아주 어린 시절부터 다른 세계를 떠돌아다녔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은 말하지 않았으나 그의 이야기에서 그는 항상 혼자였다. 가족을 언급하지 않는 걸로 보아 꽤 불운한 과거를 지닌 듯했다.

또한 그가 평범하지 않다는 건 첫인상에서 느꼈으나 내 생각보다도 훨씬 제정신이 아니었다.

“난 평화와 희망이 될 겁니다.”

또라이 같은 소리를 표정 한 번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한다. 그는 자신을 평화를 퍼트리는 자라 부르며 오크 라덴의 고통스러운 전쟁을 종식시킬 자라고 말했다.

터무니없는 이야기였으나 이미 보여 준 게 있으니 허무맹랑한 이야기로 치부할 수도 없었다.

분명 목적이 있을 텐데 대화만으론 쉽게 파악할 수 없었다. 의도를 알아보기 위해 넌지시 던진 질문들을 교묘하게 피해 갔다. 자신을 정말 그저 선의를 베푸는 봉사단, 혹은 그 이상의 존재라고 생각하는 듯싶었다.

나는 대화를 나눌수록 입맛이 없어졌다. 그래서 포크를 내려놓고 그와의 대화에만 집중했다. 그는 놀랍게도 워라이언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내가 마물 학자로서 오크 라덴에 온 이유가 어떤 마물 때문이라고 말하자 설명을 요구하더니 이내 내 말을 듣고 그러한 마물을 직접 본 적이 있다는 것이다.

“잘됐어요. 날 도와주면 마물을 관찰할 기회를 드리죠.”

그의 말에 따르면 자신이 ‘개화 작업’을 할 때마다 기묘하게 생긴 사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이다. 원장님이 설명해 준 워라이언의 생김새와 묘사가 일치했다.

‘이 새끼가 원인이군.’

워라이언들은 전쟁을 종용하는 마물이다. 그런데 카를이 어떤 방법으로 오크들의 본성마저 꺾고 포옹이나 좋아하는 순진한 녀석들로 바꿔 버렸으니 오크 라덴을 떠나는 것도 당연한 것이다.

놈이 원인인 건 알았다. 문제는 그 방법, 어떤 수단으로 오크들을 변하게 했을까. 그걸 알기 전까진 경거망동해선 안 되겠지.

“북쪽 오크트리아는 모두 교화시켰어요. 마침 중앙 대륙으로 진출하려던 참인데 워커의 힘이라면 큰 도움이 될 거예요.”

워라이언들을 관찰한다는 명목으로 그를 도와주겠다고 했다. 그가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뭘 하면 됩니까?

그전에 그가 날 필요로 하는 이유를 알아야 했다. 카를은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싸움 좀 하세요?”

같잖다, 학자라고 소개했다고 무시하는 건가. 난 팔짱을 끼고 의자에 기대어 거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전공책으로 뚝배기 깬 학생들만 수십 명이 넘습니다.”

카를은 내 농담에 픽 웃고 말았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내가 얼마나 무시무시한 사람인지.

*

이곳에서 지내는 데 불편함은 없었다. 필요한 건 모두 구비되어 있었고 저녁 식사 이후로 카를은 날 부르지 않았다.

카를은 때때로 그의 궁전에서 나와 오크트리아를 순회했다. 궁금하여 뒤따라간 난 충격적인 모습을 목격했다. 그가 나타나자 거리의 오크들은 환호성을 지르며 고개를 숙여 그의 발에 입맞춤했다.

그 모습은 충성을 넘어 맹목적인 신앙으로까지 느껴졌다. 그가 기거하는 곳은 궁전이며, 그는 왕이었다. 오크들은 왕에게 경배하듯 카를을 모셨다. 아무리 생각해도 기이하기 짝이 없는 장면이었다.

카를은 오크들 앞에선 매우 두꺼운 가면을 썼다. 그가 어쩌면 진짜 착한 마음씨를 가진 성자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연기를 잘했다.

얼마 후, 카를과 난 쿠콩이를 타고 북쪽의 오크트리아를 지나 중앙 대륙의 가장 가까운 오크트리아로 향했다. 수백 명의 오크들이 우릴 뒤따랐으나 전쟁을 기하는 진군의 행군이라기보다 신도들의 행렬 같았다.

오크들은 전운에 달아오르거나 긴장하기보다 새로운 동료를 맞이할 준비를 하며 검과 창 대신에 바늘과 실을 들어 옷을 재단했다.

오크트리아를 벗어나자 맹렬한 모래 폭풍과 메마른 사막, 위험한 낙석 지대가 함정처럼 도사리고 있었지만 나와 카를은 여행하듯 몹시 편했다.

오크들이 모든 수발을 들어 줬기 때문이다. 푹신한 잠자리와 음식이 쉬어 가는 곳마다 만들어졌다. 귀찮을 법도 하건만 오크들은 어떠한 내색도 하지 않는다.

며칠의 여정 끝에 마침내 긴 협곡을 지나 새로운 오크트리아에 도착했다. 깊은 협곡을 경계로 이곳을 중앙 대륙이라 불렀다. 북쪽의 사막 지대와 달리 민둥산이지만 초목이 어느 정도 보이는 곳에 오크트리아가 세워져 있었다.

북쪽 오크트리아와 달리 저곳은 방책이 세워져 있었고 검은 연기가 피어 올랐다.

어느 정도 거리가 가까워졌을 때였다. 오크트리아에서부터 뿔피리 소리와 북소리가 울러 퍼졌다. 우릴 경계하고 적대하는 신호였다.

카를은 오크들을 멈춰 세우고 내게 다가와 말했다.

“저 오크트리아의 높은 방벽만 무너트리면 빛의 광명에 닿을 수 있을 테지요. 이들은 성전을 위해 피를 흘릴 각오가 되어 있으나, 다정 님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신다고 약속하셨기에 감히 물어보겠습니다.”

오크들 앞이라서 그런지 녀석의 말투는 공손하고 겸허했다.

“워커로서 당신이 가진 힘을 보여 주십시오. 다만 강요는 하지 않겠습니다. 힘드시다면 뒤로 물러나 계셔도 괜찮습니다.”

언뜻 배려하는 듯, 날 무시하는 언사였다. 난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방벽만 무너트리면 됩니까?”

“광명이 닿을 수만 있다면 피를 흘릴 필요는 없지요.”

무심코 버릇대로 코를 훌쩍이자 모래 알갱이가 삼켜졌다. 난 침을 내뱉고 오크트리아를 향해 걸어 나갔다.

“교화되지 않은 오크들은 사납습니다.”

“잠자코 보고 계세요.”

거리가 가까워지자 방벽 위의 오크들이 시위를 겨눈다. 무시하고 한 걸음을 내딛자 화살 수백 개가 빗발쳤다.

난 피하지 않았다. 보기엔 턱시도에 지나지 않아도 원장님이 보강한 방호복이다. 화살 따위에 뚫릴 리가 없다. 머리를 노린 화살들만 쳐 내며 걸음을 늦추지 않았다.

“부탁한다, 단비야.”

[말랑말랑하게!]

오크트리아를 둘러싼 바위 방책은 높고 견고했다. 카를을 의식하고 세워진 것이다. 저 안의 오크들은 전쟁 준비를 끝마친 자들이다. 카를과 교화된 오크들을 적으로 여기고 있다. 과연 이 상황에서 카를은 어떻게 피를 흘리지 않고 오크들을 교화시킨다는 건가.

“아무리 단단한 바위벽이라도.”

드루이드를 발동시켰다. 대규모 환경 변화였으나 성질과 원소의 변화가 아닌 단지 바위를 풍화시키는 것임으로 능히 가동시킬 수 있었다. 단비의 힘이 뻗어 나간다. 바위벽은 순식간에 모래가 되어 흩날렸다. 수백 미터의 높고 견고한 방벽은 눈 깜짝할 사이 모래 언덕이 되었다.

무너진 방벽에 오크트리아안의 오크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난 매섭게 달려오는 수백의 오크, 갑옷과 창 따위로 중무장한 대군을 담담히 지켜보다가 살짝 뒷걸음질 쳤다.

‘이 새끼, 언제 보여 주는 건데?’

물소 떼처럼 돌진해 오는 오크들을 보자니 방광이 간지러워졌다. 젠장, 어쩐다.

멋없게 도망칠까 생각하던 그때였다.

그가 걸어 나왔다.

카를은 날 지나쳐 홀로 오크들 앞에 섰다.

“불쌍한 자들.”

그는 두 손을 들어 하늘을 가리켰다.

“자비를.”

하늘에서 빛줄기가 내려와 그를 비춘다.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빛을 비추며 적대적이던 오크들 사이를 거닐었고, 그때마다 카를을 공격하던 오크들은 저마다 무기를 내려놓고 무릎을 꿇었다.

늙은 오크에게 들었던 동화 같은 이야기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기적일까, 마침내 카를이 대군 행렬의 끝에 도달하자 오크들이 그를 향해 절을 하고 있었다.

격렬하며 피 튀기는 전장이 되어야 할 이곳은 지금 빛과 빛을 향해 순종하는 신자들밖에 남지 않았다.

숨을 턱 막히게 했던 열기가 가라앉을 때였다. 갑자기 땅 밑에서부터 거대한 사자들이 유령처럼 나타나 하늘로 솟아올랐다. 갈색 갈기와 붉은 눈을 가진 사자, 워라이언들이었다.

워라이언은 교감할 틈도 없이 하늘을 향해 달아나 버렸다. 카를은 가던 길을 돌아왔다. 그의 뒤로 수백의 오크가 무기를 버리고 따르고 있었다.

카를이 내게 다가와 말했다.

“어때요, 평화의 힘을 본 소감이?”

나는 안다.

‘평화의 힘? 지랄하고 있네.’

하늘의 빛이 놈을 비춘 건 마법으로 만들어 낸 연출. 진정 놈의 힘은…….

저런 힘을 난 한 번 겪어 본 적 있었다. 직접 내 손으로 펼치기까지 했다. 강압적이며 두려운 개념의 힘. 놈의 힘은 그들의 것과 비슷했다. 만약 겪어 보지 못했다면 나 또한 속아 넘어갔을 것이다.

‘세이렌…….’

오크들은 교화한 게 아니다. 놈이 강제로 그렇게 행동하게 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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