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52화 (152/258)

# 152화 오크 라덴 (5)

전쟁을 준비 중이던 중앙 대륙의 오크들이 검 대신 식칼을 들고 음식을 준비한다. 난 오크들의 연회가 끝나길 잠자코 기다렸다. 지금은 평화로운 오크들이라 하더라도 카를의 힘에 지배받고 있는 이상 언제 돌변할지 몰랐다.

저녁이 되자 카를이 저녁식사에 초대했다. 그는 연회 때 오크들과 겸상을 하지 않았다. 식탁엔 다양한 고기 요리들이 화려하게 차려져 있었으나 그는 혼자 앉아 있었다. 난 카를의 맞은편에 앉았다.

“론농와주 샴페인입니다.”

그는 내 앞에 놓인 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난 빈 잔에 샴페인을 따랐다. 향긋한 과일 향과 금색 액체. 샴페인은 고급스러웠다.

“놀랐습니다. 방벽을 순식간에 무너트리시더군요. 마법은 아니던데, 대단한 힘이었습니다.”

카를의 태도가 달라졌다.

난 잔을 모두 비운 후 대답했다.

“저보다 놀라진 않으셨을 겁니다. 피를 보지 않고 사나운 오크들을 복종시키다니요. 빛과 함께 거니는 모습은 정말 성자와 같았습니다.”

난 그의 꺼림칙한 능력이 무엇인지 눈치챘지만 모른 척 추켜세워 줬다. 하지만 그 능력의 범주와 강력함에 대해선 자세히 알지 못했다.

카를이 내게 호감을 가진 이유는 내 힘을 증명했기 때문이다. 일단 그의 호감을 사 측근이 되어 놈의 능력에 대해 알아볼 생각이었다.

“북부 오크트리아를 모두 점령하는 데 7개월이 걸렸습니다. 중앙 대륙은 크기가 두 배니 1년은 넘을 테고, 바다를 건너야 하는 남서 대륙은 훨씬 오래 걸리겠지요. 워커께서 도와주신다면 큰 힘이 될 겁니다.”

그는 자신을 도와 달라고 했다. 난 어차피 오크 라덴의 마물을 관찰기록 해야 하니 서로 도와준다면 흔쾌히 수락할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질 ‘대가와 거래’의 대목을 기다렸다. 내가 그를 도와줌으로써 얻는 이익. 그는 무얼 제시할까. 어차피 뒤통수를 치더라도 뽑아 먹을 게 있으면 잔뜩 뽑아 먹고 싶은데.

“그럼 당장 내 발가락을 핥으세요.”

순간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묻고 말았다.

“뭘…….”

카를은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담담하게 말했다.

“내 발가락을 핥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당신의 빛이니, 빛에 충성을 맹세하십시오.”

이자는 지금 날 무시하는 건가?

자기 위치가 날 압도한다고 생각해서 모욕을 주고 짓밟으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전개가 너무 급했다. 그의 태도도 이상하다. 카를은 자기가 내뱉은 말이 실제로 이루어질 거라 생각하고 있다. 그렇지 않으면 저리 당당한 눈빛으로 날 볼 리가 없다.

“지금 당장.”

그제야 난 깨달았다.

그건 부탁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머릿속에 빛이 들어온다. 환한 빛. 내 부모이자 혈육이며, 자식이자 꿈이었다. 빛은 그만큼 소중했다.

내 모든 걸 다해 빛에 맹세하리라. 빛이 날 지배하여도 기쁘게 종이 되리라.

‘그런 거였군.’

내 의지에 따라 빛은 점점 옅어지다가 이내 사라졌다. 확실히 깨달았다. 놈의 힘은 세뇌, 대상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강력한 세뇌다.

‘어디서 개수작을.’

그러나 내겐 통하지 않았다. 기억을 조작하는 세이렌과의 교감 덕분에 이런 정신적이고 추상적인 힘에 내성이 생긴 걸지도 모른다. 놈의 빛은 내 머릿속을 어지럽히지 못했다.

난 입을 다물고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에게 다가가도 카를은 무방비했다. 자신의 힘에 자신이 있는지, 내가 세뇌에 넘어갔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놈은 제 힘의 성공 여부를 확인하지 못하는구나. 카를의 능력에 대해 한 가지 알아냈으나 이젠 필요 없었다. 어차피 지금, 놈은 세상을 어지럽힌 대가를 치러야 하니까.

놈의 앞에 서서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천천히 카를의 신발을 벗겼다. 그러는 동안에도 카를은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놈을 무시하지 않는다.

수천의 오크를 제 힘으로 세뇌시킨 자다. 그 강력한 마나를 제외하고도 숨겨 둔 힘이 있을 것이다.

실패하면 오크들이 몰려와 골치 아파진다. 방심하는 이 순간이 기회다.

놈을 죽일 걱정은 접어 둔다. 진정 죽일 각오로 공격을 해야 한다.

일련의 과정은 순식간이 이루어졌다. 놈에게 다가갈 때부터 끌어올렸던 포근이의 기운. 겉으로 드러나지 않게 억눌러져 있던 불꽃의 힘을 폭발시켜 단검의 형태로 소매에 숨겨 뒀던 메타소드에 주입했고, 이내 붉은 송곳니가 되어 작열하는 화염이 놈을 휩쓸었다.

지독한 열기에 샴페인병이 녹았다.

화염은 놈을 휘감아 불태우는 것에 만족하지 못하고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더니, 이내 건물 전체를 삼켜 주변이 오븐 안처럼 뜨거워졌다.

놈은 엄청난 화마에 직격으로 휩쓸렸다. 결코 난 방심하지 않았다. 분명 내 전력이었다.

“사탄이로다.”

‘망할.’

그러나 카를은 타오르는 화염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금색으로 빛나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가슴 주머니의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빛이 난다.

어떻게? 신의 금속이라며. 한 종족의 존망마저 좌우하며 희귀함으론 우주에서 가장 귀하다며.

근데 왜 놈은 그러한 오리하르콘을, 몸 전체를 뒤덮는 갑옷으로 만들어 입고 있는 건가.

“빛을 거부하여 감히 신의 대리인에게 사탄의 불꽃을 내뿜으니, 넌 사탄이로구나!”

카를.

두꺼운 가면을 벗은 진짜 모습. 착한 척하는 성자도 머저리 같은 소년의 모습도 아닌, 저처럼 광신적인 게 본모습이구나.

“신도들이여, 집결하라. 인간의 탈을 쓴 사탄을 죽여 평화의 봉화를 올리리라.”

화염은 아직까지 주변을 불태우며 검은 연기를 내뿜고 있었으나, 카를의 호령에 수많은 오크가 아랑곳하지 않고 달려왔다. 살점이 타며 화상을 입어도 오크들은 고통을 모르는 것처럼 난폭했다.

조금 전의 오크들과는 달랐다.

비록 카를의 세뇌에 당했으나 지금 저 모습이 진정 오크들의 모습일 것이다. 마치 악귀의 모습 같다.

난 풍종도보의 경공으로 뒤로 물러났다. 주변의 오크들이 모두 몰려와 족히 수백 명은 넘어 보였다.

카를의 전력조차 알 수 없는데, 수백의 오크에 대항하는 건 무리라고 판단했다. 원장님은 이번에도 도와주지 않을 테니, 이 엿 같은 상황에서 벗어나는 게 우선이겠지.

풍종도보의 경공으로 도망치며 드루이드의 힘으로 땅을 진흙으로 만들었다. 놈들의 걸음을 늦추는 용도밖에 되진 않겠지만 쿠콩이를 부르기엔 충분한 시간이다.

마구간에 도착한 난 쿠콩이의 등에 올라타 소리쳤다.

“모두 날 따라와!”

길들인 쿠콩이는 오랫동안 오크들의 탈것이 되어 주었지만, 내 한마디에 격렬하게 몸부림치며 목줄을 끊고 우리를 탈출했다.

수백 마리의 루콩이가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밤의 사막으로 달려 나갔고, 그 무리의 중심에 있는 나를 아무리 오크와 카를이라 해도 어찌하지는 못했다.

어느 정도 거리가 벌어지자 난 뒤를 돌아 카를을 쳐다봤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까. 화를 내고 있을까 아니면 도망치는 날 비웃으며 이죽댈까.

‘저 개새끼.’

놈은 무표정했다.

별일 아니라는 듯.

전혀 동요하지 않고 날 쳐다보다가 손에 앉은 파리를 털어 내듯 무심하게 등을 돌렸다.

*

밤새 도망치던 난 새벽녘이 될 때쯤 사구에 가려져 있는 지하 동굴로 피신했다. 추적을 피하기 위해 쿠콩이 무리를 사방으로 흩어지게 했고, 도망치면서도 최대한 흔적을 남기지 않았다.

‘어떻게 ㅤㅉㅗㅈ아오는 거야.’

그럼에도 냄새가 없어지지 않는다. 날 추적하고 있는 오크들의 냄새가.

후각이 뛰어난 코쿠라차 여우 원숭이의 힘으로 멀리 떨어진 놈들의 냄새를 확인했다. 하루 만에 따라잡힐 거리에서 희미하게 놈들의 냄새가 느껴진다.

놈들은 드넓은 사막 속에서도 날 놓치지 않고 ㅤㅉㅗㅈ아왔다. 과연 지구에서 ‘용병헌터’로 활약하는 오크들이다. 사냥감은 놓치지 않는다는 건가.

쪽잠을 잔 후, 원장님에게 연락을 했으나 받지 않으셨다. 아마 일부러 내 연락을 무시하고 있겠지. 우리 위대하신 원장님은 한번 임무를 내리면 끝나거나 끝나기 직전까진 결코 도와주지 않으니까.

‘마냥 도망만 다닐 수는 없어.’

원탁의 기사들에게 ㅤㅉㅗㅈ길 땐 지구였다. 아무리 엿 같아도 마실 물을 구하지 못하거나 배고파서 굶주리진 않았다. 그러나 황량한 오크 라덴은 다르다. 먹을 건 그렇다 쳐도 물이 귀하다.

카를, 놈은 오크를 세뇌시킨다. 더군다나 내 전력을 담은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

다른 ‘힘’이라면 모를까, 적어도 포근이의 힘으론 무리야.

마땅한 계획이 생각나지 않는다.

하지만 확실하면서도 무식한 계획은 있었다. 카를을 죽이는 것이다.

놈을 죽일 수만 있다면 오크들의 세뇌는 풀릴 테지.

하지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는 오크들에게 둘러싸인 놈과 싸우기 위해선 필연적으로 오크들과도 맞붙어야 한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수천 명의 오크 전사들과 맞붙을 수는 없어.

‘냄새?’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그때였다.

냄새가 더 진해져 온다. 난 동굴에 파여 있는 곳에 숨어 기척을 감췄다.

사실 날 찾아냈다고 하더라도 큰 문제는 되지 않는다. 다만, 세뇌당해 제 의지가 없는 녀석들을 죽이긴 싫었다. 지하 동굴까지 들어온 놈들. 냄새가 더 진해진다.

‘오크가 아니야.’

코를 찌르는 악취. 하지만 미묘하게 달랐다. 오크들의 냄새가 하수구였다면 저들의 냄새는 똥 그 자체였다.

저런 악취를 풍기는 놈들이 덤벼 온다면 힘을 조절할 자신이 없는데.

마침내 냄새의 주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오우거?’

오크들보다도 훨씬 거대한 체구, 지독한 악취, 고래처럼 두꺼운 지방질의 근육.

지구에선 오크들에 비해 여러모로 부족하여 단순 노동자 계층에 지나지 않지만, 화가 난 놈들이라면 오크마저 맨손으로 찢어 죽인다. 우스갯소리로 오우거가 머리만 좋았다면 지구를 지배했을지도 모른다고 할 정도다.

동굴에 나타난 놈들은 네 명의 오우거. 그리고 뒤늦게 한 오크가 들어왔다.

특이하게도 저 여자 오크에게선 냄새가 나지 않았다. 오히려 탈취제 냄새가 난다.

그들은 동굴을 샅샅이 수색했다. 하지만 조심스러운 몸놀림이었다. 분명 내게 용건은 있는 것 같은데, 적의는 보이지 않았다.

“저흰 적이 아닙니다. 지구에서 온 워커여! 난 적뼈부리 부족의 족장이자 오크 라덴의 ‘워커’, 대화를 요청하니 모습을 보여 주십시오!”

주변을 둘러보던 그녀는 날 도저히 못 찾겠는지 크게 소리쳤다. 난 오크를 유심히 지켜봤다.

‘탈취제 뿌린 거 맞아.’

착각이 아니다. 이 냄새, 이 익숙한 다우니 향. 그녀의 복장은 오크들과 다를 바 없었지만, 특이한 점이 몇 개 눈에 띈다. 손목에 찬 전자시계와 체인 목걸이가 그렇다.

‘워커랬지.’

카를이 지구와 오크 라덴을 왕래하듯 저 오크도 지구와 오크 라덴을 왕래할 수 있는 워커다. 저 오크는 지구의 문화에 물든 특이한 오크였다.

그들 앞에서 내가 모습을 감출 이유는 전혀 없었다. 오히려 이런 변수가 찾아온 걸 환영했다.

“내가 이곳에 있는지 어떻게 알았습니까?”

동굴 벽에서 모습을 드러내자 오우거들은 놀라 뒤로 발라당 자빠졌고, 오크도 짧은 비명을 질렀다. 바로 옆에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나 보다.

그녀는 숨을 고르며 침착하게 대답했다.

“카를을 감시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며 손목시계를 풀어 건네줬다. 단지 전자시계인 줄로만 알았던 시계는 사실 최첨단 기계였다.

난 시계의 화면에 비치는 카를을 바라봤다. 오크들에게 둘러싸여 경배를 받고 있는 놈이 보인다. 이건 실시간 화면이다.

“어떻게?”

“A식스형 스파이 드론 카메라입니다. 지구에서 용병 생활을 할 때 사용했던 것이지요.”

오크가 말했다.

“카를을 피해 도망치던 워커님을 보았습니다. 지구에서 온 워커님, 카를에 대한 목적이 우리와 같다면 제 이야기를 들어 주십시오. 우린 카를에 저항하는 자들입니다.”

뒤에 있는 네 명의 오우거가 말을 이어 나갔다.

“놈이 우리 세계를 망치고 있다.”

“우린 저항했다. 하지만 역부족이다.”

“너의 힘, 까락시가 보여 준 요술 상자로 다 보았다. 너, 강하다.”

“놈을 죽이고 싶다면, 우리와 함께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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