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화 오크 라덴 (6)
난 그들을 따라 ‘반’이라 불리는 지하 통로로 향했다. ‘반’이란 지반에서 바위가 솟아오른 후 생겨난 지하의 구멍이었다.
원장님과 처음 오크 라덴으로 넘어왔을 때 본 굉장하고 기괴했던 광경. 땅에서 산이 솟아오르고 하늘에서 거대한 바위가 내려와 둘이 빈틈없이 맞물려 하나의 바위기둥이 되었지. ‘반’은 그러한 바위기둥 아래 만들어진 넓은 공동이었다.
지하 통로 반은 지상에 솟아 있는 무수히 많은 기둥만큼 미로처럼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게다가 자칫하면 솟아오르는 바위에 휩쓸릴 수 있어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그러나 오우거들은 땅의 진동을 누구보다 잘 느끼며 태생적으로 습기가 가득하고 어두침침한 곳을 좋아해 오크들과 달리 지하에서 살아간다고 했다. 이곳이라면 카를과 놈의 광신도인 오크들도 찾지 못하니 추격을 피할 수 있을 것이란다.
‘고역이야.’
지하 공동 몇 개를 지나면 오우거가 기거하는 마을이 나온다고 했다. 문제는 그곳과 가까워질수록 악취가 더 고약해진다는 것이다. 통풍이 되지 않는 지하에 오우거들과 있으려니 코가 마비될 것 같았다.
“카를에 대항하는 저항군이라 하셨죠. 규모는 어느 정도 됩니까?”
‘까락시’란 이름의 여자 오크가 대답했다.
“중앙 대륙에 흩어져 지내던 오우거들이 이곳에서 뭉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오우거는 단독 생활을 즐기기에 모인 자들은 모두 카를에게 피해를 입은 자뿐입니다. 그리고… 오크는 저 혼자입니다.”
중앙 대륙의 오크들이 높은 방벽을 세워 카를에게 대항하던 이유가 있었다. 까락시는 남서쪽 대륙을 제외하고 자신이 카를에 대하여 다른 오크들에게 알렸다고 했다.
까락시는 카를의 힘을 알고 있었다. ‘워커’인 그녀는 카를이 오크트리아의 오크들을 제 종으로 만들 때 지구에 있었다. 까락시가 지구에서 구한 이계의 문물을 가지고 제 고향으로 왔을 때 카를의 ‘빛’이 오크들을 세뇌시키던 중이었다.
뛰어난 사냥꾼이자 베테랑 헌터인 까락시는 다른 오크들과 달리 냉정하고 현명하게 판단했다. 까락시는 스파이 드론을 이용하여 빛이 닿지 않는 곳에서 카를을 관찰했다. 그리고 카를이 일곱 번째 오크트리아를 무너뜨릴 때 우연한 기회로 그의 힘이 무엇인지 알았다고 했다.
그 뒤 이미 늦은 북쪽을 버리고 중앙 대륙으로 건너와 오크들에게 경고했지만 사납고 독립적인 오크들은 그녀의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그나마 방벽을 세우는 부족은 양호한 것이며 대부분 무방비한 상태라고 하였다.
“저항군은 절 제외하면 모두 오우거들입니다. 그들은 강인하고 매서우나 큰 문제점이 있지요. 보시다시피…….”
까락시가 뒤에서 따라오던 오우거를 가리킨다. 뭘 하나 싶어 보니 놈들은 그 큰 덩치로 바닥에 넙죽 엎드려 무언가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이것 봐. 별 모양 돌이다.”
“돌, 멋지군. 내 거야.”
“안 돼, 내가 먼저 발견했다.”
“어딜 훔쳐 가!”
작은 돌멩이 하나 때문에 주먹 다툼까지 벌인다. 그 모습을 보던 난 어깨를 으쓱하고 까락시에게 말했다.
“오우거들은 카를의 힘에 당하지 않았군요.”
카를의 노예는 모두 오크였다. 까락시에게 물어봤을 때 이곳의 오우거들은 모두 카를에게 피해를 당했다고 한다. 그렇다면 오우거들은 놈과 만나 본 적이 있는 것인데, 놈의 주변엔 세뇌당한 오우거는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네. 카를은 오우거들 또한 제 노예로 복종시키려고 했으나 실패하여 호되게 당한 후, 지금은 보이는 즉시 모두 죽이고 다닙니다. 저들은 모두 카를에 의해 가족을 잃은 오우거들이지요.”
까락시가 말했다.
“오우거들의 복수심은 저항군의 가장 큰 무기가 되어 줄 겁니다.”
말을 그렇게 해도 못 미더운 눈치였다. 까락시가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 나가려고 했다. 그때 뒤에서 싸우던 오우거들이 까락시의 한숨을 듣곤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해 왔다. 까락시는 손을 들어 괜찮다는 제스처를 취한 후 내게 말했다.
“이상하지요. 왜 오우거들은 놈의 힘에 당하지 않는지…….”
오우거들이 소리쳤다.
“우린 긍지 높은 오우거다!”
“빛은 눈부셔! 싫어! 우린 놈을 때려 버린다!”
“아니, 죽여야지! 바보야!”
“누가 바보야, 이 멍청이가!”
난 머리를 긁적였다.
음, 정말 그럴 수도 있는가?
난 까락시의 의문에 답해 줬다.
“뭐, 그 이유는 대강 알겠지만요.”
그녀도 눈치채고 있었다.
“저도 설마 했는데, 정말 그 이유 때문이라면……. 오우거들이 좋아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바로 오우거들의 지능.
소 귀에 경 읽기라 했다. 믿을 수 없지만 멍청이들, 좋게 말해 제 주장이 뚜렷한 오우거들에게 세뇌가 통하지 않는 듯했다. 대단하군, 대단해.
몇 시간이 지나서야 오우거들의 마을에 도착했다. 홀로 생활하는 오우거들의 몇 안 되는 마을이었다. 지하에 세워진 투박하고 볼품없는 마을이었지만 그래도 있을 건 다 있어 보였다.
이곳의 오우거들에게 열기가 가득 차 있었다. 카를을 죽이기 위해 이를 가는 자들이다. 전쟁을 준비하는지 지하 공동의 구석엔 병장기들이 산처럼 쌓여 있었고, 광장에 설치된 투박한 훈련장에선 오우거들이 실전에 가까운 대결을 통해 수련하고 있었다.
지구의 오우거들과 사뭇 달라 보였다. 지구에선 언제나 악취 나고, 무기력하고, 머저리 같은 오우거였지만 이곳에선 적어도 무기력하진 않았다.
‘힘이 대단해.’
오우거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며 나는 진심으로 감탄했다. 오크도 매우 강인한 전사였으나, 솔직히 말하면 오우거는 한 차원 위에 있었다.
오우거를 두고 하는 농담은 진짜일지도 몰라. 녀석들이 머리만 좀 좋았다면 지구를 지배했을 거라는…….
내가 마을에 들어서자 오우거들이 몰려왔다. 다행히 날 반가워하며 꾹 안아 주진 않았다. 오히려 비실대는 놈을 어디서 데려왔냐고 욕까지 했다. 난 그 점이 더 마음에 들었다. 그들의 비아냥거림을 잠자코 듣던 난 까락시에게 물었다.
“날 왜 데려왔습니까?”
이유야 처음에 들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내게 원하는 게 있을 것이다.
까락시가 대답했다.
“당신은 유일하게 카를에게 대항할 수 있는 자입니다. 오우거들이 세뇌당하지 않는다고 하여 그의 상대가 된다는 건 아닙니다. 그는… 매우 무서운 자입니다.”
나는 샐러맨더의 힘을 전력으로 펼친 공격이 간단히 막혀 버린 그 순간을 떠올렸다. 입맛이 쓰지만 인정할 건 해야지. 빌어먹을 오리하르콘 갑옷을 어디서 주워 입었는진 몰라도 그 자체만으로 놈은 엄청 강하다.
어차피 방법은 없다.
이들은 날 필요로 하고, 나도 이들이 필요하다.
우선 그 전에.
“내게 중요한 역할을 맡기려거든, 일단 내가 믿을 만한 자라는 걸 증명해야겠죠. 녀석들은 나에 대해 잘 모르는 것 같으니.”
비실거리는 놈이라 얕보던 오우거에게 걸어갔다. 그러고는 놈의 엉덩이에 대뜸 싸커 킥을 날렸다. 두툼한 고기를 몽둥이로 때리는 찰진 소리가 났다.
놈의 거대한 궁둥이에 비해 내 다리는 이쑤시개처럼 작아 보였으나 싸커 킥을 맞은 오우거는 비명을 내지르며 땅바닥을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난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온몸이 찌뿌둥한데 잘됐네. 덤벼. 너희, 나, 상대한다, 멍청한 오우거들을.”
녀석들의 말투를 흉내 내며 조롱하자 오우거들이 성을 내며 덤벼들었다. 난 녀석들의 토실토실한 엉덩이를 걷어차며 소리쳤다.
“내가 이루게 해 준다, 너희의 복수를.”
오우거들은 반발하며 외쳤다.
“내 복수는 내 손으로 이룬다!”
“내가 믿을 자는 나의 부모와 위대한 대전사들뿐이다. 이방인은 꺼져!”
그날, 난 오우거들이 몇 대를 맞아야 눈물이 고이고 몇 대를 맞아야 살이 부어오르며 몇십 대를 맞아야 상대를 인정하는지 알게 되었다.
*
오우거들을 혼내 준 후 식사를 대접받았다. 다행히 오우거들은 뒤탈이 없는 녀석들이라 그렇게 맞고도 날 적대하기는커녕 대단한 전사라며 중요한 역할을 맡기는 데 찬성해 줬다.
상황이 상황인지라 여러모로 녀석들이 마음에 들었다. 만약 인간이었다면 난 이렇게 쉽게 저항군의 중요한 역할을 맡을 수 없었을 것이다.
아무리 상황이 위급하고 희망이 하나뿐이더라도 사람들은 우선 의심하고 불신하니까. 나쁘다는 건 아니다. 좋게 말하면 신중하다는 것이니까.
‘젠장, 통풍 걸리겠네.’
음식은 역시 고기, 그저 암염을 쳐 구운 붉은 살점 고기였다. 오크 라덴에 넘어오고 나서 계속 고기만 먹었다. 매콤한 김치 한 조각이 절실해.
잠자리는 흙을 구워 만든 침대에 냄새나는 가죽 침낭이었지만 맨바닥보단 나았다.
*
다음 날, 까락시가 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지하 공동으로 날 안내했다. 그곳까지 향하며 까락시가 오크들의 신념에 대해 말해 줬다.
“카를이 오크트리아를 무너뜨릴 때 그를 따르는 오크들을 보며 처음엔 지구인의 압도적인 무위에 복종한 자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까락시는 지구인의 편견과 다르게 오크들은 명예로우며 긍지 높은 종족이라 말했다. 그녀는 오크들의 명예로운 일화를 몇 가지 들려줬다.
싸움을 좋아하되 약자는 괴롭히지 않으며, 강자를 존경하되 배를 내밀고 굴복하진 않는다.
명예를 위해 제 생명을 등한시하지만 생명의 무게를 모르는 건 아니다. 자신들은 그저 순수한 전쟁의 인도자라고 하였다.
“하지만 오크들의 복종은 보다 강한 힘에 대한 숭상이지, 대상을 제 아비처럼 모시는 건 아닙니다. 오크들은 카를의 발에 입을 맞추는 굴욕적인 행동을 기쁘게 받아들였지요. 긍지마저 저버린 겁니다.”
이러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터널을 지나 공동에 도착했다. 그곳은 감옥이었다. 동굴의 움푹 파인 곳에 철장을 세워 만들어진 감옥. 갇혀 있는 자들은 오크였다. 까락시는 가져온 음식을 철장 너머로 건넸고, 무기력하게 앉아 있던 오크는 재빨리 뛰어와 음식을 낚아챘다.
“진정 오크라면, 적이 주는 음식을 받아먹진 않았을 겁니다.”
까락시는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감옥 안의 오크는 음식을 모두 게걸스럽고 해치운 후 넙죽 엎드리며 기도했다. 일용할 양식을 주어 감사하다며 ‘빛’에 경배한다.
까락시가 가방에서 어떤 기계 한 대를 꺼내며 말했다.
“폭풍을 만나 우연히 행렬에서 떨어진 그를 찾았습니다. 그의 행동거지에 이상함을 느껴 정신 검사를 하였는데, 오염 수치가 최고치를 넘어 측정이 불가능할 정도였습니다.”
기계에서 마나가 느껴졌다. 가동시키니 마나로 이루어진 붉은 빛줄기가 뻗어 나갔다. 까락시가 빛으로 철장 너머 오크를 가리키자 기계는 경고음을 내며 화면에 적색 경고문이 떴다.
“뭔 기계예요?”
“헌터들이 사용하는 정신 오염 검사기입니다. 탑에서 온 악마들에게 대비하기 위해 만들어진 마도구인데, 카를에게 당한 자들은 모두 오염 수치가 정상에서 벗어나 있어요. 설마 카를은 지구인이 아니라 도플갱어같이 탑에서 온 악마일까요?”
난 고개를 저었다. 악마들과 만나 교감까지 나눈 나라서 잘 알았다. 놈은 솔로몬의 탑에서 온 존재가 아니다.
“이자는 언제 발견했어요?”
“지구의 계산법으론… 6개월도 전입니다.”
카를의 힘은 매우 강력했다.
6개월이나 지나도 세뇌가 풀리지 않다니. 난 감옥 안의 오크를 지켜보다 입술을 깨물었다.
‘세이렌의 힘과 비슷하다면.’
인어들의 섬에서 있었던 일로 무진장 고생했지만 이젠 다를지도 몰라. 내가 견딜지도 모르지. 오크 수만 마리를……. 젠장, 자신은 없다. 하지만 시도해 볼 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잠시 물러나 있어요.”
까락시는 뒷걸음질 쳤으나 난 아예 공동 바깥까지 물러나라 말했다.
[바다님, 바다님!]
[내 바다님, 우리의 바다님.]
기억을 떠올려 힘을 끌어 올리자 귓구멍에서 녀석들의 노랫소리가 맴도는 듯했다.
짧은 인간의 입이 점점 길어지더니 이내 부리가 되었다. 몸의 털이 꼿꼿하게 세워지더니 굵어지고 질겨져 깃털이 되었고, 발가락이 뭉치고 굳어져 새의 발톱이 되었다.
“내게 들려줘.”
내가 말하자 음률이 되어 노래처럼 되었다.
“빛이 네 머릿속으로 들어오던 순간을.”
긴 허밍이 이어진다.
노래를 부를수록 오크의 머리 위에 가지가 자랐고, 이내 열매가 맺혔다. 기억의 열매다. 무엇보다 달콤한 황금색 열매. 난 천천히 다가가 조심스레 부리를 내밀어 열매를 물었다.
그의 기억이 내게 깃들고, 그럼으로써 저자는 기억을 잊게 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