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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54화 (154/258)

# 154화 오크 라덴 (7)

흐리멍덩하던 눈이 또렷해진다.

날 가만히 바라보던 오크는 눈을 지그시 감았다가 떴다. 현실을 곧바로 직시하지 못하는 듯했다. 난 세이렌의 힘으로 그의 기억 중에 카를이 빛을 주입하던 순간만을 도려냈다.

지금까지 했던 자신의 행동들을 모두 기억하나 그 원인만은 모르기에 그는 더더욱 혼란스러운 것이겠지.

“크아아악!”

갑자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가 풀었다가, 다시 일그러트리며 고통스러워한다. 결국 오크는 눈동자를 뒤집고 입에 하얀 거품을 물며 비명을 내질렀다.

쿵!

그는 망설이지 않고 뾰족한 바위에 제 머리를 박았다. 두개골이 깨지는 섬뜩한 소리가 나며 그는 잠시 기절했지만, 곧바로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는 이마를 또다시 바위에 박으려 들었다. 난 그의 뒷목을 쳐 자결하려는 걸 막았다.

카를의 세뇌에 풀린 오크는 자신이 한 행동을 견디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오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프라이드가 높은 오크들은 비록 강제였다고 하더라도 제 삶을 완전히 부정한 행동들의 굴욕을 목숨을 끊어 씻어 내겠지.

세이렌의 힘으로 오크들의 세뇌를 푸는 건 가능했다. 다만 부작용이 심했다.

세뇌를 풀기 위해선 카를의 빛이 심어진 기억을 없애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하면 오크는 제 행동들을 모두 자신의 선택이라 믿게 될 것이고, 저자처럼 극단적으로 행동할 확률이 높았다.

게다가 오크들뿐만 아니라 나 또한 망가졌다. 겨우 한 명의 기억을 삼켰을 뿐인데 정신을 세뇌당하는 기억이라 감당하기 벅찼다.

그 기억은 맛있는 열매가 아니었다. 삼키자 내 머릿속까지 혼란하게 만들었다. 다시 할 수 있다면 하겠으나 세뇌에 당한 오크가 한두 명도 아니고 수만 명이나 된다.

이 방법은 못 써먹겠어. 놈의 힘에 비해 효율과 출력이 다르잖아.

“대체!”

비명을 듣고 달려온 까락시에게 이자의 세뇌를 풀었다고 말했다.

까락시는 내가 오크의 세뇌를 풀었다는 것에 놀라워했다. 하지만 곧 이 방법은 불가능하다는 내 말에 실망했다. 까락시는 원래의 계획을 실행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말했다.

“카를을 죽이지 않으면 반복되는 소모전에 지나지 않습니다. 놈의 종이 된 자들을 죽이더라도 놈은 오크 라덴의 제 동족들로 언제든 병사를 보충할 수 있을 겁니다.”

까락시가 세운 계획은 간단했다.

“총력전,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놈을 죽여야 합니다. 그리고 카를의 힘에 대항하여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을 수 있는 자는… 지구의 워커 님밖에 없습니다.”

까락시는 무릎을 꿇으며 내게 부탁했다. 오크가 얼마만큼 긍지가 높은 종족인지 방금 전의 일로 알았다. 큰 결심일 것이다.

“무모한 계획입니다. 수락하기 힘드시다는 것도 압니다. 염치없이 부탁드리는 제 꼴이 너무나 한심합니다. 그러니… 지구로 돌아간다고 해도 무어라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나타나기 전에 세운 계획은 지금보다 훨씬 무모했다. 카를을 죽이기 위해 훈련받은 오우거들을 투입하려고 했단다. 분명 100% 확률로 실패했을 것이다. 오우거들은 강하지만 카를의 상대는 되지 못했을 테니까.

“괜찮아요, 일어나세요.”

나는 까락시를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사실 저도 놈을 죽이기 위해 당신들을 이용하는 겁니다.”

사실이었다. 내가 필요로 하는 건 카를과의 일대일 상황, 내가 놈과 싸울 동안 시간을 벌어 줄 자들이 필요했다.

때마침 ‘검이 없고 방패만 있는’ 그들이 나타났다. 내가 검이 되면 그들은 방패가 되면 된다. 서로 필요로 할 뿐, 정의감에 불타 불구덩이에 뛰어드는 머저리처럼 구는 게 아닌 것이다.

까락시는 스파이 드론으로 카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있었다. 그래서 습격에 가장 적절한 때를 알고 있었다. 바로 카를이 오크 병력을 데리고 다른 오크트리아를 무너트리려 사막을 건널 때라고 했다.

더불어 그 외의 오크들을 상대하기 위한 오우거 군대의 병력 배치나 혼란한 틈을 타 카를의 목을 베는 경로 따위를 설명해 줬으나, 내가 궁금한 건 따로 있었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사막이 붉은색으로 물들 만큼 많은 피를 흘려야 할 겁니다.”

나라면 까락시처럼 쉽게 결정을 못 내렸을지도 모르겠다.

“오크들은 그저 카를의 정신 지배에 당했을 뿐이니 영문도 모른 채 개죽음당하는 것과 다를 바 없는데……. 괜찮겠습니까?”

까락시는 내 질문에 확신에 찬 목소리로 대답했다.

“우리, 오크들은 삶의 지속보다 형태를 더 중요시합니다. 굴욕적이고 비참하게 살아가는 걸 죽음보다 더 두렵게 생각합니다. 결코 죽은 자들은 우릴 원망하지 않을 겁니다.”

세뇌당한 동족을 죽이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다. 그게 옳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나 희생을 등한시하는 건 아니었다. 까락시는 씹어뱉듯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 나갔다.

“다만 카를의 심장을 쪼개어 그들이 잠든 대지에 뿌려 복수의 염원을 이루게 해 줄 겁니다. 감히 전사의 혼을 짓밟고 긍지의 검을 부러트린 놈이 죽어서 망자들의 세계로 간다면, 그곳에서 놈을 기다리던 전사들은 자신이 겪은 고통을 만 배로 돌려줄 겁니다.”

까락시의 다짐을 듣던 난 문득 오크를 적으로 돌린다면 정말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대화를 나누다 보니 기절시켰던 오크가 정신을 차렸다. 사지가 결박되자 그자는 혀를 깨물어 자결하려고 했으나 혀를 이빨 사이에 끼우지도 못했다. 저럴까 싶어 아라크네의 거미줄로 입을 봉인했기 때문이다.

“나의 동포여, 그대의 고통을 십분 이해하니 부디 분노의 응어리를 푸십시오. 그리고 수치심보다 카를을 향한 증오가 더 크다면 내 부탁을 들어주십시오.”

까락시의 거듭된 설득으로 오크는 제정신을 찾았다. 까락시는 그에게 할 일을 줬고 그제야 오크는 제 목숨을 버리지 않게 되었다.

까락시는 세뇌당한 채 살아갔던 오크에게 누구보다 카를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을 테니 중앙 대륙의 다른 오크들에게 경고하러 당장 떠나라고 말했다. 단 한 번의 싸움, 모든 걸 건 총력전이 실패로 돌아간다면 이곳에 남은 오크들에게 더 이상 희망은 없다.

때문에 까락시는 실패도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난 달랐다. 이 싸움은 지지 않는다. 근거 없는 자신감이 아니다.

나 혼자라면 모를까, 내겐 녀석이 있어.

*

다음 날이 되었다.

지하에 있어 아침인지 밤인지도 모를 시간에 까락시는 광장에 오우거들을 소집했다. 오우거들은 저마다 술 한 통과 먹을 음식을 들고 왔다.

서로 음식과 술을 나눠먹으며 최후의 만찬이라 했다. 까락시 또한 카를에 대한 저주를 내뱉고, 이 싸움은 명예를 위한 결전이라며 비장한 각오를 되새겼다. 하지만 나에겐 최후의 만찬도, 마지막 결전도 아니다.

모인 오우거들은 기껏해야 수백 명이었다. 아마 카를의 행렬에 참여하는 오크들의 수가 이보다 배는 많을 것이다.

중앙 대륙으로 넘어올 때 긴 여정을 같이한 오크들이 수백 명이었고, 중앙 대륙에서도 오크트리아를 무너트리며 다시 오크 수천 명을 제 종으로 만들어 버렸다.

이 싸움의 목적은 전쟁이 아닌 한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사투에 가까웠다. 목적은 카를의 죽음, 놈만 죽으면 싸움은 끝난다.

문제는 놈의 반항은 거세어 마침내 검을 놈의 목에 드리울 때, 오우거와 오크가 얼마나 죽을지 모른다는 것이다.

어쩌면 비극적으로 모두 자멸하는 상황이 벌어질지도 모른다. 까락시와 오우거들은 제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지만 내가 보기엔 정말 비참한 죽음이었다. 결사의 의지로 카를을 죽이더라도, 희생이 크면 남는 건 없다.

난 오우거들의 술판 사이로 걸어갔다. 오우거 옆을 지나 갈 때마다 악취가 나는 술잔에 구릿빛 싸구려 술을 가득 담아 건넸다.

난 거절하지 않고 모두 마셨다. 기름 맛이 나는 독한 술이었으나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 술판의 중앙에 도달하자 취기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그럼에도 난 샐러맨더의 기운을 끌어내 독소를 몰아내며 오우거들과 어울렸다. 이들 중 몇 명이 죽을까. 내게 술잔을 건넨 자들 중에서도 죽는 자가 있겠지. 불쌍하게 여길 생각은 없었다. 이 싸움은 그들의 선택이다.

다만 너무 가벼이 생각하기도 싫었다. 적어도 내가 짊어져야 할 목숨의 무게 정돈 느끼고 싶었다. 오크 라덴에 넘어올 때만 해도 이런 거창한 전쟁이 되리라 생각하진 못했지.

오우거는 타고난 술꾼이었다.

오우거들 사이에서도 ‘롯’이라 불리는 장군 계급이 있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술을 퍼마시고 나서 곧바로 까락시와 작전 회의를 열었다.

“반에 있으면 카를은 우릴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문제는 습격 이후, 워커 님께서 방해받지 않고 놈을 죽일 수 있는 최단 경로를 강구하여 결사대를…….”

난 습격 경로와 전력을 분석하는 까락시의 말을 잠자코 듣고 있다가 머리를 긁적이며 앞으로 나섰다.

“야옹아, 거기 있지?”

냐아앙!

내 말이 끝나자 어디선가 고양이 울음소리가 길게 들려왔다. 난 갑작스레 나타난 검은 고양이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으헉, 저 무시무시한 생물은 무엇인교?”

“저렇게 무섭게 생긴 건 처음 보오.”

“작은 놈이 매섭게 생겼군. 저 날카로운 발톱과 유연한 몸놀림을 보라지.”

오우거들은 갑자기 나타난 야옹이에 기겁했다. 야옹이는 꼬리를 살랑거리며 여유롭게 걸어왔으나 오우거들은 혼비백산하며 야옹이를 피해 다녔다.

지구의 고양이를 처음 봐서 그런지 반응이 너무 격렬한걸. 녀석들이 야옹이의 힘을 파악하진 못할 테니 그냥 고양이는 무섭게 생긴 동물이라고 느껴지나 보다.

내 곁으로 다가온 야옹이의 턱을 긁어 줬다. 기분이 좋은지 머리를 손가락에 비비적거리던 녀석은 내 발치에 자리 잡더니 발라당 엎드려 애교를 피웠다. 이럴땐 영락없는 고양이란 말이야.

“전 걱정하지 마시고 모든 병력을 바깥으로 돌리세요. 그 누구도 내가 그곳에 있다는 걸 눈치채지 못할 겁니다.”

야옹이를 빤히 쳐다보던 까락시가 뒤늦게 내 말을 알아듣곤 반발했다.

“홀로 놈을 습격한단 말씀이십니까?”

“그편이 낫겠죠.”

“불가능해요.”

까락시는 단호하게 말했다.

“지구의 장비로도 오크의 시선은 피할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타고난 사냥꾼, 머리카락 한 올에서 나는 미세한 냄새만으로 침입자를 찾아낼 수 있어요. 더군다나 수천 오크의 시선을 피해 카를을 죽인다는 건 사막의 폭풍 속에서 모래 한 톨도 맞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결사대의 도움이 없다면 카를을 찾기도 전에 오크들에게 발이 묶일 겁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야옹이를 쓰다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우악!”

어딘가를 가리키며 소리를 지르자 순간 오우거들과 까락시의 시선이 내게서 떨어졌다.

찰나, 겨우 1초에 가까운 시간.

“…워커 님?”

“이상하다. 인간, 사라졌다. 냄새도 안 나, 뭐지?”

미세한 진동도 귀신같이 알아차리는 오우거와 제 앞에선 기척을 숨길 수 없다는 오크가 어리둥절하며 날 찾는다.

결국 내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낼 때까지 그들은 날 찾지 못하였다.

바로 등 뒤의 그림자에서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고 있었던 나를 말이다.

“날 믿어요.”

야옹이의 힘은 특별하다.

무림에서 있었던 일을 제외하고도 기괴하기 짝이 없는 힘이다.

녀석과 교감하면 존재감이 사라지고 냄새와 기척도 시야에서 사라진다.

내가 직접 힘을 보여 줬으니 그들은 의구심을 가질 이유가 없었다. 까락시는 카를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손목시계형 추적 장비를 건넸다.

그렇게 내가 홀로 카를을 암살하는 것으로 작전은 변경되었다. 습격이 시작되면 혼자 빠져나와 카를을 찾아 목을 벨 것이다.

*

카를, 놈이 행동에 나섰다. 다음 오크트리아를 목표로 삼아 사막을 이동한다. 우린 그 즉시 지하 통로인 반으로 놈을 추격하며 이동했다.

추정하길 놈의 병력은 3천, 이는 최소 병력이며 더 늘어날 수도 있다. 그에 비해 오우거들은 몇백.

오우거들이 얼마만큼 버텨 줄지 모른다. 내 손에 모든 게 달려 있다. 내가 카를의 목을 빨리 벨수록 작전의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다.

우린 매복한 채 카를과 오크들이 방심하기만을 기다렸다. 까락시는 드론으로 카를의 움직임을 살폈다. 마침내 그들이 행렬을 멈추고 휴식을 취하자, 준비하던 오우거들이 지반을 무너트릴 폭탄을 설치했다.

작업이 끝나자 까락시가 뿔피리를 불어 일제히 돌격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우우우우-!

가슴을 울리는 뿔피리 소리와 함께 까락시가 지구에서 가져온 설치형 폭탄이 일제히 화염을 터트렸다. 굉음과 함께 지반이 무너지고 폭발에 휩쓸린 오크들이 모래 더미와 함께 지하로 쓸려 왔다.

“단비야!”

난 드루이드를 발동해 모래를 단단히 굳혔다. 그와 동시에 기다리고 있던 오우거들은 육중한 덩치를 날쌔게 움직이며 단단해진 모래를 밟고 구멍을 뛰쳐나왔다.

첫 번째 격돌에서 오우거들은 파죽지세로 오크 행렬을 무너트렸다. 습격에 대비하지 못한 오크들은 미처 검을 들지 못하고 오우거들에게 짓밟혔다.

문제는 이 다음이다.

카를에게 세뇌당하고 있더라도 뛰어난 전사인 오크들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반격에 나설 것이다.

즉, 두 번째 격돌은 만만치 않을 것이다.

혼란을 틈타, 난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서둘렀다. 오크들은 바로 옆에서 뛰어가는 날 알아차리지도 못했다. 야옹이는 내 등에 매달렸고, 많은 힘을 쓴 단비는 잠에 빠졌다.

‘기다려라, 개새끼야.’

나는 놈을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난장판에도 여유롭게, 오크들이 설치한 하얀 천막 안에서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안색 한 번 변하지 않는 놈을 보며 난 왜 그토록 카를이 짜증나고 역겨웠는지 깨달았다.

나와 너무 다르다.

쉽게 화내고 무서워하고 기뻐하는 나에 비해서, 놈은 모든 순간이 여유로웠다. 패를 모르는 복서처럼 자신이 경기에서 결코 질 리가 없다고 생각하는 자만심, 그게 난 역겨웠던 것이다.

놈의 등 뒤에 설 때까지 놈은 내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했다. 내 손에 들린 검, 힘을 받아들여 변화한 메타소드는 검날은 물처럼 투명했다. 그 안에 담긴 힘은 샐러맨더도, 아즈모타카와 미라마물의 힘도 아닌 세이렌의 힘이었다.

“백치나 되라.”

검날이 놈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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