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5화 오크 라덴 (8)
내가 한 짓이다.
확실한 것은 놈의 머리에 검을 꽂아 넣은 건 결코 우발적인 실수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결과가 너무 처참해서 나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고 말았다. 내가 한 짓임에도 마치 갑작스레 벌어진 사고처럼 당황스러웠다.
‘엿같이 징그럽잖아.’
세이렌의 힘은 기억을 열매로 맺히게 하는 것이다.
그럼 내 교감의 힘과 메타소드로, 놈의 기억을 완전히 소거하기 위해 전력을 쏟아부으면 어떻게 될까?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저렇게 징그럽고 꺼림칙할지는 몰랐다.
크아악-!
괴로워하는 카를의 머리 위에 콩알만큼 작은 열매들이 잔뜩 열리기 시작했다. 알이 가득찬 산란기 물고기의 배처럼 오밀조밀 머리에 열리기 시작하는 열매들은 이내 놈의 몸을 뒤덮었다.
거품 같기도 하고 개구리 알 같기도 한 것에 뒤덮인 카를의 모습에 소름이 돋았다. 백치가 되어 가는 과정은 구토가 나올 만큼 역겨웠다.
세이렌의 힘은 분명 내가 가진 힘 중에서 가장 악독한 힘이라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B급 호러 무비처럼 그로테스크한 장면은 오래가지 않았다.
이대로 기억의 열매가 떨어지면 카를은 백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열매들은 곧바로 다시 카를의 몸속으로 흡수되었다.
난 다급히 다시 한번 세이렌의 검을 휘둘러 놈을 찔렀으나 열매는 맺히지 않았다. 계속해서 머리를 찔렀으나 기억을 꺼내지 못했다.
젠장, 이 힘도 통하지 않아.
“홍식!”
놈이 정신을 차리기 전에 나는 곧바로 홍식을 펼쳤으나 갑작스레 폭발한 섬광에 휩쓸려 뒤로 날아가 버렸다.
‘눈이 안 보여.’
천막을 찢고 내동댕이쳐졌으나 고통에 신음할 여유는 없었다. 난 곧바로 자세를 잡고 침착하게 기다렸다. 강렬한 빛에 멀었던 눈은 빠르게 회복되었으나 기회는 놓치고 말았다.
“네놈이구나.”
카를은 여유롭게 천막에서 걸어 나왔다. 그러나 눈빛만큼은 섬뜩했다. 눈에 담긴 살기가 사나웠다. 카를은 세이렌의 힘을 모두 저항한 듯 보였다.
“망할, 귀찮게.”
방금 전까지 청바지나 입고 있던 놈은 대체 언제 갈아입었는지 광채가 빛나는 오리하르콘 갑옷을 입고 있었다.
“버러지 새끼가 잔재주는 많아서.”
놈은 머리를 부여잡으며 고통스러워했으나 그뿐, 세이렌의 힘은 큰 상처는 입히지 못했다. 포근이의 전력이 담긴 홍식을 맞고도 멀쩡한 걸 교훈 삼아 물리적인 힘이 통하지 않으리라 예상했다.
그렇기에 세이렌의 힘을 빌렸으나 이마저도 통하지 않았다. 검증되지 않은 힘이라서가 아니다. 세이렌의 기억을 파괴하는 힘은 충분히 강력했지만 카를에겐 통하지 않았을 뿐이다.
“넌 랭킹 몇 위이지?”
머릿속으로 놈을 죽이기 위한 수를 생각하고 있는데, 카를이 질문해 왔다. 난 ‘야옹이’의 힘을 끌어 올리고 단검처럼 작아진 메타소드를 턱시도의 소매에 숨겼다.
“랭킹? 매년 잡지사들이 선정하는 헌터 랭킹?”
카를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넌 몇 위의 헌터냐?”
기습 공격을 당했음에도 놈은 여유로이 내게 질문을 한다. 난 천막 너머에서 격돌하는 오우거와 오크들을 쳐다봤다. 이미 이곳까지 격전이 벌어졌으나 카를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뒤편에 벌어지는 난잡한 전투에도 놈의 관심은 내게만 있었다.
“내가 랭커 같냐? 어디 가서 상도 받아 본 적 없는데, 시부랄 놈아.”
카를은 천천히 내게 다가오며 말을 이어 나갔다.
“난 6위였다.”
놈이 갑자기 자기 자랑을 해 댄다, 그것도 새빨간 거짓말을. 권위 있는 미디어 그룹 여러 곳이 매년 선정하는 헌터 랭킹은 지구에서 가장 유명한 가십거리다.
나 또한 매년 랭킹의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헌터를 모두 기억하고 있었는데 랭커 6위는 몇 년 전부터 고정적으로 어떤 여자 헌터가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아니다.
난 입이 근질거렸다. 어차피 개싸움을 피할 수는 없으니 전초전으로 말싸움부터 이겨야겠다.
“어린놈이 허세만 잔뜩 껴서. 야, 이 시부랄 놈아. 미취학 아동도 안 할 거짓말을 왜 씨불여. 그리고 진짜 랭커라고 치자. 내가 뭐, 대우라도 해 줄 거라 생각했냐?”
신랄하게 욕을 하며 놈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놈은 걸음을 멈추지 않고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 랭킹을 정할 때의 일이다. 그땐 순수하게 능력의 잠재성만을 평가했지. 그게 빛에 선택받기 전의 일이니, 벌써 15년도 더 되었군.”
미간을 좁히며 놈을 바라봤다. 거짓말하고 있다기엔 너무 진지한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놈이 말하는 시기와 놈의 얼굴은 매치가 되지 않았다. 녀석은 아무리 봐도 십 대 후반의 소년이었다. 그런데 15년 전의 일을 생생히 기억하듯 말하고 있다. 전이 이후 태어난 신인류라고 소개했던 첫 만남과는 완전히 달랐다.
뭐가 진실일까, 어쩐지 난 지금이 진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리가 좁혀졌을 때 카를이 걸음을 멈췄다.
“너에게 제안 하나 하지.”
뜻밖의 말에 난 입을 다물고 놈의 말을 기다렸다. 여러모로 카를은 앞뒤가 맞지 않은 인물이다.
방금까지 날 버러지라 부르며 화내던 놈이 갑자기 제안을 하며, 어린 외모의 소년이 갑자기 15년 전에도 자신은 젊은이였다고 말한다. 종잡을 수 없는 놈이다.
“넌 아마 꽤 강한 헌터일 것이다. 적어도 100위 안에는 들겠지. 하지만 그뿐이다.
난 15년 전 지구상에서 가장 촉망받는 ‘젊은이’ 중 한 명이었다. 결국 오만함에 삼켜져 다른 세계를 향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닫고 말았지. 수많은 차원엔 수많은 신과 왕들이 살며, 그들에 비하면 난 먼지보다 못한 존재라는 걸.”
대체 무슨 생각인지, 카를은 자신을 공격한 적을 향해 자신의 편이 되어 달라고 말하고 있었다.
“너 또한 워커이니, 깨달을 것이다. 너 자신의 힘으론 어떤 것도 될 수가 없다. 태생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선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를 섬겨야 하지. 날 진심을 다해 섬겨라. 그럼 네가 원하는 게 무엇이든 내가 이루게 해 주마.”
물론 그 부탁은 강압적이며 굴욕적이었다. 난 놈의 말을 끝까지 들은 후, 입꼬리를 올려 비웃으며 조롱했다.
“뭘 자신을 섬기래. 그렇게 말하는 너도 겨우 인간이잖아. 저기요, 님이 뭘 봤든 장담한 건데 나도 만만치 않게 ‘다른 세계’의 말도 안되는 것을 많이 봤거든요? 그에 비하면 넌 별거도 아닌 새끼야. 어디서 주웠는지 좀 쩌는 갑옷 하나 입었다고 너무 자신감 넘치시네.”
조롱이 통했을까? 놈은 전혀 화가 나지 않은 모습이었지만 내게 이득이 되는 행동을 취해 줬다.
“멍청한 것, 날 섬긴다는 건 내가 모시는 빛 또한 섬긴다는 것이거늘. 이 힘 또한 작은 선물일 뿐, 진정한 빛을 목도하여라.”
나는 오리하르콘 갑옷이 사라지자마자 곧바로 달려갔다. 깊게 연결된 야옹이의 힘과 풍종도보의 경공은 절묘한 시너지를 발휘했고 카를조차 내 움직임을 놓치곤 주변을 둘러봤다.
검은 단검 두 개가 놈의 목과 심장을 찌르기 전이었다.
아-!
난 짧은 비명을 내지르며 급히 뒤로 물러났다. 본능적인 경고, 오감에 잡히는 위험은 없으나 맹수의 날카로운 기감이 내게 말해 줬다. 위험해, 당장 피해.
그때였다.
충분히 놈의 목과 심장을 벨 수 있는 거리에서 급히 물러난 건 옳은 판단이었다.
“젠장!”
쿠쿠쿠쿠-!
빛이 폭발했다.
놈의 주변에서 일어난 빛은 주변을 휩쓸며 점점 더 커져 갔다. 난 풍종도보의 경공을 극성으로 펼치며 도망쳤다. 단지 빛이었을 뿐이나 맹독보다 더 위험하게 느껴졌다.
간신히 빛의 범위에서 벗어나 놈이 일으킨 백색 기둥을 바라봤다.
“놈은 인간이 맞긴 한가?”
땅에서 치솟아 하늘까지 뻗어 간 빛의 기둥은 불처럼 타오르거나 뜨겁지도 않았다. 그저 강렬한 빛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두려웠다. 저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빛 속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어떻게 저런 힘을 인간이 다룰 수 있는 거지?
“이건…….”
빛 기둥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 그곳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하얀 천막과 쿠콩이, 검과 갑옷, 휩쓸린 오우거와 오크 수십 명까지.
모두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빛은 모든 걸 정화한다.”
유일하게 존재하는 건 카를뿐이었다.
놈의 두 손엔 빛무리가 맺혀 있었다. 카를은 내게 다가오며 두 손을 천천히 추켜올렸다. 주변의 모든 걸 없애 버렸던 빛이 날 비추기 시작한다.
“망할 새끼, 뻥 아니었네.”
난 깨달았다. 내가 가진 모든 힘은 놈에게 통하지 않는다. 홍식을 없앤 건 오리하르콘 갑옷이 아니었다. 놈이 보이던 여유의 근본이 되는 힘 또한 그런 게 아니다.
세뇌? 젠장, 그 사기적인 힘이 부가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걸 내가 어떻게 알았겠어. 결국 남은 수는 하나밖에 없다.
놈은 눈치채지 못한 모양이지만 짧은 격돌이 일어나는 동안에도 내 등 뒤에 계속 녀석이 매달려 있었다.
“야옹아.”
놈의 힘이 빛이라고 하여 성스러운 건 아니다. 마찬가지로 이 힘이 어둡고 탁하다고 하여 사악한 건 아니다. 다만 비유하자면 그랬다. 빛을 삼키는 건 어둠뿐이다.
“마음껏 뛰어 놀아.”
야옹이와의 교감은 기묘했다.
다른 마물들과 달리, 녀석과는 어느 선을 넘을 수 있었다. 정확히 표현하긴 난해하나 마치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평소엔 나도 그렇고 야옹이도 이 선을 넘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러나 무림에서 딱 한 번 선을 넘은 적이 있었다. 그땐 일방적으로 야옹이가 먼저 건너왔다. 그러나 지금은 내가 필요하여 선을 넘었다.
그때의 힘이 필요해.
무림 칠괴의 즉사 주술에도 그림자를 공격한 듯 아무런 상처도 입지 않았던 힘. 난 분명 존재하나, 적에겐 내가 존재하지 않는 기괴하고 어두운 힘.
놈의 빛이 아무리 강렬하게 타오른다고 한들 그림자는 다시 생겨난다.
야옹이가 내게 들어왔다.
그러자 주변이 검은 붓으로 칠한 듯 새까매졌다. 이내 세상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했다는 걸 깨달았다. 난 어둡고 깊은 아래에 있으며 그림자이자 존재하나 존재 하지 않는 존재가 되었다.
카를의 빛이 내게 쇄도했다.
순간 빛이 주변을 환하게 가득 채웠지만 이내 검게 물들어 사라졌다. 카를의 빛 또한, 그림자를 없애진 못했다. 오히려 그림자에 삼켜져 빛을 잃어 갔다.
당황한 놈은 수차례 빛을 내뿜었다. 하늘에서 맹렬히 내리쬐기도 하고 땅에서 치솟기도 했으며 사방이 빛으로 가득 차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난 잠시 사라졌으나, 이내 또 생겨났다. 그림자는 절대 없어지지 않았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대체 야옹이는 어떤 존재일까. 나는 단지 녀석의 힘을 교감으로 빌려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세상 어느 것도 날 해치지 못할 것 같았다.
긴장하던 마음은 따뜻한 물속에 있는 듯 풀어졌고 사나웠던 정신은 수묵화처럼 고요해졌다. 그렇다고 평화로운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난 사냥꾼이며, 놈이 사냥감이 되었을 뿐이니까.
내가 놈의 곁에 서자, 놈은 처음으로 본심을 표정에 드러냈다. 진심으로 두려워하는 표정이다. 믿을 수 없다며, 빛이 닿지 않는 존재는 신뿐이라며 미친 광신도처럼 처절하게 외쳐 댄다.
난 담담히 말했다.
“아이러니하지. 빛을 숭배하고 빛처럼 보이는 힘을 다루는 또라이가 결국 어둠, 그림자에 삼켜져 죽다니.”
검은 손을 뻗어 놈을 만지자, 카를의 그림자가 용솟음치며 놈을 아래로 빨아들였다.
난 그림자에 삼켜지는 카를을 가만히 서서 지켜봤다. 정작 놈과 엮인 원한은 그다지 없는데도 놈은 지금까지 상대한 적 중에서 가장 불쾌하고 기분 나쁜 놈이었다.
카를은 그림자 늪에 빠지면서 최후의 저항을 했다. 하늘을 향해 기도하듯 높게 추켜든 손, 이내 빛이 뻗어 나갔으나 소용없었다.
야옹이의 힘만 있다면 아무리 저항한다고 한들…….
[이제 그만.]
그때였다.
야옹이가 내 몸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멀리 어딘가로 걸어갔다.
동시에 그림자에 빨려 들어가던 카를이 뛰쳐나왔고 의미 없던 놈의 공격이 날 불태우는 강력하고 고통스러운 힘이 되었다.
“야옹아?”
몸이 불타는 고통보다 더 강렬한 의문에 난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야옹이에게 물었다.
“왜?”
그러자 녀석은 돌아서며 한마디를 내뱉더니, 이내 도도하게 제 갈 길을 갔다.
[저번에 말했지. 이제 더 이상 힘을 빌려주지 않을 거야, 메롱.]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온몸이 마구 떨려오기까지 했다. 그래, 저번에 무림에서 분명 그렇게 말하긴 했지. 그러면 이번에 처음부터 힘을 빌려주지 말든가.
“엿 같은 고양이 개 같은 새끼.”
녀석이 제멋대로 구는 건 알았으나 설마 이런 상황에서까지……!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숨을 헐떡이던 카를은 더 이상 방심하지 않았다. 놈은 즉시 오리하르콘 갑옷을 소환하여 입고 두 손으로 찬란한 빛을 내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