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6화 오크 라덴 (9)
드루이드의 힘으로 모래를 방벽처럼 세웠으나 빛은 그대로 방벽을 투과하여 내 몸을 불태웠다. 샐러맨더의 힘을 둘러도 몸이 타는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조바심이 난다. 마물의 힘으로 질기고 단단해진 피부 덕에 겉은 멀쩡했으나 속 안은 썩어 들어가고 있었다.
놈의 공격은 비명을 참아도 신음이 새어 나올 만큼 고통스러웠다. 얼마만큼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다. 젠장, 이런 무력함은 오랜만이다.
몇 번을 싸워도 같았다.
놈의 빛은 내 모든 공격을 막아 내고 또한 내 모든 방어 수단을 무력화시켰다. 간신히 놈의 몸에 칼을 찔러 넣어도 오리하르콘 갑옷을 꿰뚫진 못했다.
놈의 힘은 피할 수도, 막을 수도 없었다. 야옹이의 그림자를 제외하고 그 어떤 마물의 힘도 놈에게 닿지 못했다. 주변이 빛으로 차올라 찬란하게 빛날수록 고통은 점점 더 커져 갔다.
“그 표정은 뭐지? 자신의 무력함을 원망하며 억울하게 여기는 건가?”
야옹이의 그림자에 끌려갈 땐 이를 악물고 싸우던 놈이 이제 확실한 우위를 점했다고 생각했는지 입을 열기 시작했다.
“당연한 것이다. 이 빛은 신의 힘, 하등한 피조물은 굴복할 뿐이다.”
놈의 빛은 형태가 있었다.
점점 주변을 휘감아 기둥처럼 솟아올랐고 범위도 점점 넓어졌다. 눈이 부셔 빛 기둥의 중심에 있는 카를의 형체를 알아볼 수 없었다. 목소리만 들려온다.
“그러니 원망하지 마라. 신의 힘에 맞서는 것은 신의 힘뿐. 네 죽음은 당연한 순리일 테니.”
엿같이 오만한 대사라도 마땅히 반박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놈의 말이 맞았다. 닿는 모든 걸 불태워 버리는 빛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강해지고 있다. 놈 앞에서 난 너무나 무력했다.
‘걸맞은 힘은…….’
이를 악 물고 카를의 뒤편을 바라봤다. 오우거와 까락시의 군대는 예상보다 훨씬 잘 싸워, 어느새 카를의 지척까지 당도한 상태였다. 다만 많은 죽음이 있었다. 사막이 붉게 물들고 진한 피 냄새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젠장.’
‘이 힘’을 사용하면 놈을 죽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없었다. 난 바보가 아니다. 아무리 기억이 없어도, 이성을 잃은 내가 원탁의 기사들을 죽일 뻔 했다는 사실을 원장님이 숨겼다는 것을 정황상 눈치채고 있었었다.
그러나 방법이 없다.
최대한 멀리 도망칠 수밖에.
“신의 힘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두 번이나 뒈질 뻔한 놈이.”
놈을 도발하며 스위프트덕의 기운을 끌어 올렸다. 놈의 힘은 모든 걸 태워 버리는 알 수 없는 빛, 그 외의 육체적인 능력은 평범한 수준이다. 일단 놈을 사막 쪽으로 유인한다면 @내가 할 일은 더 많아지겠지.
까락시와 오우거들이 오크들과 격전을 벌이는 전장을 피해 난 풍종도보의 경공을 발휘하여 황량한 사막으로 달려갔다.
“또 도망칠 생각이냐?”
놈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강렬해진 빛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놈과의 거리가 멀어진 후에야 난 눈치채고 말았다.
“안 돼.”
빛이 내리쬐는 곳은 내가 서 있는 곳이 아니었다. 지금까지 중 가장 환한 광채는 까락시와 오우거들의 군대를 내리쬐었다.
그들은 비명조차 내지 못하고 타 죽어 갔다. 잔인하게도 피부가 재가 되어 흩날릴 뿐 즉사하진 않았다. 고통에 몸부림쳐도 빛에 저항할 수도, 빛에서 도망칠 수도 없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내게 유쾌하게 웃으며 술잔을 건네던 자들이 재로 산화되어 간다. 참 간단하다고 느껴졌다.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대량 학살이 일어나다니, 너무 불공평하잖아.
‘가슴이 뜨거워, 불타는 것 같아.’
이상한 느낌이다.
저들이 불타 사라지는 모습을 보고 있자 이상하리만큼 머릿속이 맑아졌다. 이글거리는 분노로 뜨거운 돌을 삼킨 듯 가슴은 타올랐지만 머리는 더없이 냉정했다.
난 죽음을 내리쬐는 빛 기둥을 향해 달려갔다.
“크하하, 더럽고 냄새 나는 놈들에게 정이라도 들었더냐? 넌 저들을 구할 수 없다.”
어느새 눈부신 빛과 가까워졌고, 난 망설임 없이 그 속으로 뛰어들었다.
“스스로 자멸의 길에 들다니 어리석은 죽음이구나.”
자멸?
녀석에겐 내가 성난 멧돼지처럼 화를 이기지 못하고 무작정 뛰어드는 것처럼 보였나?
하지만 나는 홧김에 뛰어든 것이 아니다.
내가 이토록 담담한 건 빛이 그들을 내리쬐던 그 순간 들려온 누군가의 목소리 때문이었다.
[가증스러운 놈의 힘이 느껴진다. 최초의 연결자여. 나를 받아들여 저것을 찢어발기고 씹어 삼켜라.]
녀석이 어떻게 차원을 넘어 내게 말을 걸었는지, 또한 녀석이 왜 카를을 증오하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다.
다만 불현듯 깨달았다. 카를은 계속 저 빛을 신의 힘이라 불렀다. 그러고 보면 원장님이 말한 적이 있었다. 새로 돋아난 내 왼팔을 보면서 말이다.
“신의 힘에 대적할 건 신의 힘뿐이라고?”
원장님은 그자를 보고 한때 신이였다고 했다. 이계의 신이며 원시의 신. 전이에 의해 힘이 갈가리 찢겨 나갔어도 두려운 힘을 가지고 있었던 마물, 아즈모타카.
왼팔이 화학 반응을 일으킨 것처럼 순식간에 폭발적으로 팽창했다. 이윽고 오른팔도 거대해졌다. 부풀어 오른 두 팔은 두 손가락으로 코끼리를 쥐고 들어 올릴 수 있을 만큼 거대했다.
그리고 난 거대해진 두 손으로 빛을 찢었다.
*
아즈모타카는 고대에 존재하던 원시의 신이다. 그러나 오만함으로 천계의 신들에게 반기를 들었다가 결국 패배했다. 그 후 사지가 찢겨 신의 지위를 박탈당하고 하찮은 짐승이 되었다.
그러나 한때 신들로부터 ‘마왕’이라 불리며 온갖 신비한 것들을 찢어발기는 짐승의 힘은 분명 천계의 신들에게조차 큰 위협이었을 것이다.
-원시의 밀림에서, 파르바티.
*
본래 빛이란 건 손으로 잡을 수 없는 입자이자 파동이다. 그러나 이 두 손으론 확실히 빛을 찢어발길 수 있었으며 찢긴 빛은 종이처럼 팔랑거리다 흩어지더니 사라졌다.
‘그가 힘을 빌려준 거야… 왜?’
아즈모타카의 힘은 지금의 내 그릇으론 담을 수 없는 힘이었다.
바스테 병원에서 주술사와 싸울 때, 놈이 주술로 녹인 마물 수만 마리의 힘을 사용해 잠깐 힘을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난 몇 분을 버티지 못하고 지치고 말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그가 내게 힘을 빌려줬다. 난 이 힘을 받아들였을 때 ‘괴력난신’이라 표현했다. 이성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힘이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주술을, 빛을, 마법을 두 손으로 찢어발길 수 있단 말인가?
빛이 사라졌다.
‘다행이야, 늦지 않았네.’
까락시와 오우거들은 화상 때문에 몸이 새빨갰으나 정신만 잃었을 뿐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과연 투쟁종족, 인간과 달리 대단한 생명력이다.
쿵!
나는 고릴라처럼 거대한 두 손으로 놈을 위협하며 천천히 다가갔다.
카를은 재밌고 역겨운 버릇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가 우위일 땐 실컷 떠들다가 수세에 몰린다 싶으면 입을 다물고 눈알을 굴리기에 바쁘다.
놈은 또다시 빛을 내뿜었으나 이제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난 손으로 빛을 찢어 없앴다. 계속해서 빛 기둥이 생겼으나 날 멈추진 못했다.
마침내 놈의 앞에 섰다.
악수를 나눌 수 있을 만큼 가까운 거리.
거대한 두 팔로 몸을 지탱해 두 다리가 붕 떠 있는 난 놈의 내려다봤다.
놈은 더 이상 힘을 사용하지 않았다. 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외쳤다.
“안 돼, 이래선 안 돼.”
평소에 오만하고 여유로웠던 만큼 수세에 몰리자 놈은 더더욱 추해졌다.
“내가 누군데, 감히 내가 누군 줄 알고. 난 위대한 힘을 약속받고, 선사받았다. 절대 인간 따위에게 질 리가 없어, 안 돼.”
난 머리를 긁적이려다가 손가락이 너무 크다는 걸 깨닫고 뺨만 실룩거렸다.
“이봐, 나도 너처럼 될까?”
놈은 이해하지 못하고 날 쳐다만 봤다.
“만약 나도 너처럼 누군가에게 죽을 때가 오면 그렇게 추하게 발악할까? 내가 누군데, 원장님한테 위대한 힘을 선사받았는데 질 리가 없는데. 이딴 개소리나 하면서?”
“…뭐?”
“됐다, 빨리 끝내자.”
나는 손을 들어 놈을 내리쳤다.
모래가 분수처럼 치솟아 사구가 만들어질 만큼 막강한 충격이었으나, 주먹에 약간의 아픔만이 느껴졌다.
“어차피 죽으면 못 쓸 텐데, 그거 나 주라.”
놈은 등껍질에 숨은 거북이처럼 오리하르콘 갑옷으로 전신을 감춘 채 몸을 웅크리고 공격을 버텼다.
쿵-!
쿵-!
쿵-!
주먹으로 파운딩하며 수십 차례나 내려쳤다. 젠장, 아무리 아즈모타카의 힘이라도 오리하르콘은 부술 수 없는 모양이다. 난 가만히 놈을 내려다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난 느껴져.”
고개를 돌려 저 멀리 사막을 바라봤다. 온다. 우연일까? 때마침 오크 라덴에서 일어난 현상 중에서 가장 거대한 게 오려고 하고 있다.
난 놈의 발을 잡고 그곳으로 뛰어갔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막의 모래들이 팝콘처럼 튀기는 곳에 도착했다.
오크 라덴에 넘어온 이후 이 현상은 수없이 목격했다. 그러나 이건 규모가 다르다. 태풍이라도 위력이 모두 같은 게 아니듯이 이 현상도 규모와 위력이 달랐다. 평범한 현상이 진도 4의 지진이라면, 이건 12쯤 될 것 같다.
쿠쿠쿠쿵-!
이내 전조가 시작된다.
모래뿐만 아니라 거대한 바위 또한 튀어 오르기 시작한다. 난 놈을 꽉 쥔 채 가만히 기다렸다.
이제 곧 솟아오른다.
콰콰쾅-!
하늘로부터 그림자가 드리운다. 운동장만큼 넓은 그림자는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 엄청난 거석의 것이었다. 구름을 가르고 땅으로 쇄도하는 거석, 그와 동시에 치솟아 오르는 땅.
하늘과 땅에서 쇄도하고 솟아오르는 바위기둥이 맞물리는 현상이다. 평범한 건 크기가 집채만 했지만 이번엔 바위 넓이만 해도 축구장보다 더 넓었다.
난 솟아오르는 바위에 앉아 카를을 보며 말했다.
“그 빛이란 게, 뭘 말하는 거였지?”
예상대로 카를은 대답하지 않았다.
난 한숨을 쉬며 하늘을 바라봤다. 바람을 찢는 소리가 매섭다. 순식간에 하늘에서 내려오는 괴석과 가까워진다. 어디서부터 쇄도하는 진 몰라도 운석 충돌로 생각해 보면 소름이 끼친다. 저기에 얼마나 많은 에너지가 담겨있는지 예상조차 할 수 없었다.
또한 이 바위들은 얼마나 단단하기에 이 충격은 버티는지도 알 수 없었다. 한 가지 알 수 있는 건 이 두 바위 사이에 있으면… 음. 압축 프레스에 짓눌린 고기 조각이 되어 버리겠지.
오리하르콘 갑옷이 피난처라도 되는 걸까. 나는 꼼짝도 하지 않는 카를을 바닥에 내려놓고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뱉어 놈을 묶었다.
그제야 놈은 발버둥을 치며 도망치려고 했으나, 난 거미줄을 태우는 빛을 손으로 찢으며 기다렸다.
아라크네의 거미줄이 쌓이고 쌓여 마침내 빛으로도 쉽게 태우지 못하게 됐을 때, 두 거석이 부딪치기 바로 직전의 아슬아슬한 순간에서 나는 풍종도보의 경공을 극성으로 발휘해 달아났다.
충돌 지점에선 벗어났으나 방심할 순 없었다. 난 ‘바람을 밟으며’ 최대한 멀리 도망갔다. 아무리 바람을 타는 스위프트덕의 힘이더라도 공중에는 지지대가 없어 속력을 낼 수 없었다.
이대로 바닥에 고꾸라져도 난 죽지 않겠지만 여파에 휩쓸린다면 장담할 수 없다.
쿠콰아앙---!
“크아악!”
마침내 두 거석이 부딪쳤고,
멀리 도망갔다고 생각했으나 여파에 휩쓸려 고막이 터지고 사구에 처박혔다.
“살았다, 시벌.”
온몸의 뼈가 부서진 것 같으나,
살긴 살았다. 난 모래를 헤치고 구덩이에서 나와 거대한 바위기둥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