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9화 지키고 싶은 것 (2)
정원의 의자에 앉아 그녀와 이야기를 나눴다.
“결국 난 인정받지 못한 겁니다.”
그날따라 먹구름에 달이 가려져 주변이 어두웠다. 저택의 환한 빛과 대조되어 사타리언 부인의 목소리가 더 쓸쓸하게 느껴졌다.
“그토록 노력했는데 장로들은 결국 명분에 가려진 허영을 택한 거예요. 남쪽의 자손을 인정하지 못하는 거겠죠.”
사타리언 부인은 사막왕국을 다스리던 사타리언 왕가의 폐단에 대해서 말해 줬다. 자신은 ‘남쪽’이라 불리는 왕국 오아시스를 다스리던 귀족 가문의 자손이며 왕의 자식이나 태생적인 한계에 봉착해 있다고 하였다.
사타리언 부인의 가문은 대대로 왕가를 섬기는 가문이었다. 대전이로 왕국이 붕괴되고 사타리언들이 지구로 넘어오기 전엔 항상 왕의 그림자로서 재상의 직을 하사받았다. 사타리언 부인도 공주이긴 하나 본래대로라면 대표자의 자리를 이을 수 없었다.
“현재 사타리언들은 두 세대의 갈등으로 병폐에 얼룩지고 있습니다. 과거를 계승하여 전통을 숭배하는 옛 세대, 그리고 대전이가 일어나 왕국이 무너질 때 어리거나 젊었었던 세대. 절 포함한 젊은이들은 비교적 지구에 적응을 잘하여 이처럼 영향력을 가진 세력을 구축할 수 있었습니다.”
사타리언들은 대전이 이후 격동의 시기를 맞이했다. 전통과 변화의 대립인 것이다. 뭐, 대전이 이후 격동을 맞이한 건 지구인도, 다른 이종족들도 매한가지만.
“우리들이 옛 왕국의 귀족들과 장로들을 우대하는 건 전통의 중요성을 잘 알기 때문입니다. 허나 그들은 변화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어요. 모래 위에 지어진 우리들의 찬란한 왕국을 기억하며 아직도 자신들이 세계의 중심이라 생각하고 있지요. 멍청합니다.
불과 몇십 년 전까지만 해도 지구의 존재조차 몰랐던 자들이 어리석게도…….”
사타리언 부인은 장로들에 대하여 신랄하게 비판했다. 부인은 아이들에게 고향을 기억하기 위해 마물 사막 투어를 할 정도로 전통을 중시하는 자였다. 그러나 보다 변화와 적응을 더 중히 여겼다.
만약 사타리언 부인처럼 열린 마인드의 사타리언들이 없었다면 그들이 지구에 잘 적응할 수 있었을까? 매끈거리는 비늘을 가진 도마뱀 인간들이? 아니, 오우거 꼴이 났겠지. 새삼스레 그녀가 대단하다고 느껴졌다. 20년의 시간은 고착화된 관념을 뒤바꾸기엔 결코 긴 시간이 아니었다.
난 장로회가 쓸모없는 전통으로 사타리언 부인을 밀어냈다는 건 이해가 갔다. 하지만 그들은 사타리언 부인의 남편을 지목했다. 지금까지 들어본 말로는 더더욱 이해가 되지 않는 결정이었다.
“하지만 장로회는 남편분을 승계자로 택했잖아요? 이해가 되지 않는데요. 무슨 꿍꿍이가 있는 거죠?”
“제가 필사적으로 승계자가 되려고 했던 건 개인적인 욕심 때문만이 아닙니다. 아마 그이가 무공을 필사적으로 배웠던 이유도…….”
그녀에게 물어보자 부인의 눈가에 다시금 눈물이 맺혔다.
“미안해요.”
내가 준 행커치프로 눈물을 닦곤 대답을 이어 나갔다.
“절 남쪽의 자손이라며 인정해 주지 않는데 하물며 그이는 어떻겠어요. 장로들은 사타리언 왕가의 핏줄에 인간이 섞이는 걸 불결하게 여겨요. 제가 왕의 직계 자손이었다면 저 또한 파문당했을지도 모르죠. 지금까진 사타리언에게 제 힘이 필요해서 잠자코 놔뒀지만 결국 사달을 일으켰어요.”
그녀가 눈물을 흘린 이유는 자신이 아닌 남편을 위한 눈물이었다.
“장로들이 그이를 없앨 구실로 승계자 결정을 이용한 거예요. 옛 사막 왕국에서조차 잊혔던 오래된 전통을 부활시키겠죠.”
사타리언 부인의 말을 듣던 난 두 사람의 고달픈 삶에 동정을 느꼈다. 그저 사랑해서 결혼했을 뿐인데 참 비극적이다. 부인의 말에 의하면 장로들은 외부인인 남편에게 승계권을 넘겨 줘서 일부러 다른 경쟁자들의 표적이 되게 만들었다.
사타리언 왕가의 전통에 따르면 왕가의 핏줄이 아닌 자가 승계자가 되면 일주일간의 유예 시간이 지난 후 25일에 걸친 의식이 이루어진다. 의식은 스스로 왕의 재목임을 만천하에 알리는 게 목적이며, 그동안 도전자들의 결투를 의무적으로 수락하여야 했다.
도전자들은 오로지 왕가의 핏줄들인 ‘왕자’들만 도전이 가능했다.
의식이 치러지는 동안 도전은 거부할 수 없다. 거부하거나 도망친다면 쫓겨나다 못해 명예를 실추시켰다며 처형 또한 가능하단다.
즉, 남편은 일주일 후 25일 동안이나 사타리언 왕자들과 싸워서 이겨야 했다.
“의식을 거부한다면 우리들을 ㅤㅉㅗㅈ아낼 구실을 주고, 의식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이가 버텨 낼 리가 없어요.”
요약하자면 25일 동안 왕자들의 결투 신청에 버텨 내는 것. 그래도 남편은 무공도 익혔고 사타리언들도 인간보다 특별히 강한 이종족들은 아니다. 해 볼 만하지 않을까?
“그 왕자라는 자들은 강합니까?”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왕자들은 다른 사타리언들과 달리 사막 대전사들의 검술을 익히고 어릴 때부터 태양과 호흡하며 많은 수련을 해 왔어요. 그들은 모두 샌드웜을 단신으로 사냥할 만큼 강한 전사들, 그이가 당해 낼 리가… 없어요.”
부인은 차라리 모든 걸 포기하고 도망칠 각오도 하고 있었다. 의식이 진행되어 남편이 죽는 것보다 자신의 뿌리와 절연한다고 말한다.
‘왕자들은 2층에서 장로들 옆에 있던 놈들을 말하는 거겠지.’
저택에 들어갔을 때 2층에서 강렬한 기운을 뿜는 몇 명의 사타리언들을 확인했다. 난 사타리언들의 듬직한 경호원 정도로 생각했는데 왕자들이었나.
구름에 가려진 달빛이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남편이 허겁지겁 저택에서 뛰쳐나와 부인을 찾았다. 주목이 쏠려 곧바로 나오지 못한 듯 보였다.
부인을 발견한 그가 달려와 흐느끼는 부인에게 말한다. ‘괜찮냐’고. 그도 의식에 대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위험한 건 자신인데 부인에게 먼저 괜찮냐고 물어본다.
부인은 일어나 그를 안았다.
그들은 한참을 부둥켜안고 서로를 의지했다. 부인은 남편을 걱정하고 그는 부인을 걱정한다. 나 따위가 알 리는 없지만 저게 사랑이라는 걸지도 모르겠다.
“여기서 기다려요.”
난 머리를 벅벅 긁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망할 로미오와 줄리엣을 내 옆에서 찍게 할 생각은 없어. 저택 쪽으로 걸어가며 녀석을 불렀다.
“야옹아.”
냐아앙~
그러자 나무의 그림자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예상은 하고 있었으나 진짜 들려오니 약간 소름이 끼친다.
근래에 깨달은 건데 야옹이, 녀석은 마치 내 ‘그림자’ 같았다. 눈에 보이지도 느껴지지도 않지만 어디서나 나와 같이 있다.
야옹이가 총총 다가와 내 곁에서 같이 걷는다. 난 녀석의 힘을 받아들였다. 저택의 조명은 밝았고 숨을 곳은 없었지만 괜찮다. 이 녀석의 힘이라면.
“다정 씨.”
저택으로 걸어가던 그때였다.
사타리언 부인이 날 불러 세웠다.
“그들을 죽일 생각입니까?”
사타리언 부인은 내가 무언가 하려는 걸 눈치채고 질문을 했다. 난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아무리 그래도 난 그렇게 못된 사람은 아니다.
“에이, 제가 그런 사람으로 보여요? 아니에요.”
다시 갈 길 가려던 난 이어진 사타리언 부인의 질문에 멈칫하고 말았다.
“불구로 만드는 것도 안 됩니다.”
난 목덜미를 긁적이다가 어색하게 뒤돌아섰다. 사타리언 부인은 진중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설마요.”
대답이 늦어지고 말았다.
이래선 내가 정말 그러려고 한 것 같잖아. 정말 잠깐 생각만 했었을 뿐이다.
“근데 왜요? 왕자들이 ‘불의의 사고’를 당한다면 도전자가 없으니 의식도 괜찮지 않을까요?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예요.”
역시 사타리언 부인은 눈치가 빨랐다. 그녀는 날 타이르듯 말을 이어 가기 시작했다.
“왕자들은 흩어져 살고 있는 사타리언들을 하나로 규합하는 상징적인 존재입니다.”
왕자들이 가지는 영향력은 사타리언 종족 사이에선 막강했다. 사타리언 부인이 외부적인 영향력을 발휘한다면 내적인 부분은 왕자들의 힘이 더 컸다.
“지금은 장로들의 계획에 동참하고 있지만 사실 왕자들과 장로회는 서로를 이용하는 관계죠.”
또한 사타리언 부인은 장로회가 싫을 뿐, 왕자들은 필요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사타리언 왕가의 개혁을 이끌기 위해서 필요한 상징이라고만 말했지만 대충 그녀가 꾸미는 계획을 알 것 같기도 했다.
그러기 위해선 사타리언 부인이 왕자들의 위, 부동의 지위인 ‘왕’이 되어야겠지만.
“세력이 불균등해지면 장로들과 오래된 귀족들이 지금보다 더 큰 권력만을 가질 뿐이에요.”
왕자는 개인의 힘보다 더 강한 따르고 지지하는 세력의 힘이 있다. 그런데 왕자들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많은 문제들을 야기할 거라며 사타리언 부인은 걱정했다.
“제가 뭘 어떻게 한답니까? 그냥 알아보기만 할 거예요. 알아보기만.”
난 그녀의 괜한 기우에 껄껄 웃으며 왕자들을 몰래 염탐하며 얼마나 강한지 확인만 해 보겠다고 말했다. 절대 들키지 않으며 문제를 일으키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저택으로 향했다.
젠장, 하지만 속으론 솔직히 뜨끔했다. 쉬운 방법을 놔두고 플랜 B를 사용할 수밖에 없겠군.
*
결정식이 끝나고 일주일간의 연회가 펼쳐졌다. 난 어둠에 숨어 하루 동안 왕자들을 관찰했다. 다섯의 젊은 왕자들, 그들은 연회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의식 때문인지 이곳의 별채에 머물렀다.
그들은 매우 계획적이게 하루를 보냈다. 새벽에 일어나 점심까지 검술 수련, 사타리언 왕가의 전통 검술이라더니 과연 매서워 보인다. 또한 놀란 건 수련 상대로 ‘무림인’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왕자들은 무림인으로부터 검술을 확인받고 단련해갔다. 왕자들은 제법 강했지만 내 존재를 알아차리는 자들은 없었다.
의외인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공부를 할 때도, 휴식을 취할 때도 그들 주변엔 사타리언이 아니라 다른 이종족들이 더 많았다. 역사를 포함한 다방면의 지식은 지구인 교사에게 배움을 받았다.
‘나름 반듯한 자들이로군.’
하루의 일과를 관찰했을 뿐이지만 생각보다 괜찮은 자들이라고 생각했다. 장로회에 이용당해 남편을 죽이려 드는 못된 놈들이 아닌, 목적을 가진 야망 있는 청년들 같은 느낌이다. 물론 그 과정만 다를 뿐 결과는 똑같다는 게 문제지만.
더 이상 그들을 염탐할 필요를 못 느꼈다. 확실해졌다. 남편이 아무리 노력해도 절대 왕자들을 꺾지 못한다. 지금 그의 실력으론 역부족이다.
‘플랜B.’
왕자들을 어떻게 할 수 없다면.
남편을 어떻게 해 보는 수밖에.
그날 밤, 정원으로 그를 불러냈다.
“무공을 가르친 스승님이 어떤 분이시죠? 무림에서 오신 분이던가요?”
그가 대답했다.
“무림인은 아닙니다. 하지만 매우 저명한 무인이셨습니다. 비실거리던 절 이 정도로 단련시킨 것만으로도 굉장하신 분이시죠.”
헤이아치 머리를 고수 중인 남편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월 과외비 3900만 원이나 들었다고요.”
알고 보니 저 머리도 그 저명한 무인이라는 자가 시켜서 한 머리였다. 그래, 평범한 지구인인 그를 제법 무공 흉내를 내게 만들었으니 가르치는 실력은 꽤 있는 자다. 하지만 그뿐이다. 3900만원에 배울 무공이라면 확인할 것도 없다.
일단 그와 대련하여 실력을 가늠해 볼 생각이었지만 난 시간을 아끼기로 마음먹었다.
“왕자들과 싸워도 이길 수 있게 강하게 만들어 드리죠. 5일 뒤 의식이 시작되니 단기 속성으로.”
어디 보자.
내가 무림에서 그의 가르침을 며칠 동안 받았더라. 무공에 재능이 없다던 날 한 달 만에 이 정도로 성장시켰지. 5일이면 무공을 가르치기엔 너무 짧은 시간이다. 하지만 그는 다르다.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 드래곤을 제외한다면 아마 가장 강한 사람이니까.
난 우선 원장님에게 연락했다. 다행히 원장님은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원장님, 부탁드릴 게 있어요.”
난 급한 일이라며 그와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을 가르쳐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자 원장님은 휴대폰으로 연락처 하나를 보냈다.
‘실화야?’
헤어질 때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른다고 생각하고 꼴값을 떨었는데.
원장님에게 이게 진짜 그의 번호냐고 물어보니, 무림인이더라도 비둘기 전서구 따위를 쓰지 않는다고 말했다. 젠장, 이럴 거면 진즉 가르쳐 주던가.
난 그의 번호를 ‘스승님’이라 저장하고 통화를 시도했다. 다행히 무림이 아니라 지구에 있는지 연락이 갔다.
[헹 헹 씨우 씽 쪼이 와이 워 썽 완 뉜~]
대체 누가 설정해 줬는지 통화 연결음으로 당년정(當年情)이 흘러나왔다. 설마 스승님이 직접 설정한 건가?
[누구십니까?]
전화를 받았다.
어색해. 무림인이 누구십니까? 라니.
“스승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내가 필요할 때마다 찾는 도라에몽은 원장님이었지만, 이번엔 그의 도움이 절실했다. 도와줘요. 곽운에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