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4화 잠보
검은 피부에 다부진 몸매, 귀보다 큰 동그란 귀걸이를 한 흑인 남자는 손에 든 뾰족한 날의 창을 우산걸이에 놔두고 우릴 향해 웃으며 말했다.
“Nafurahi kukuona!(만나서 기쁘오!)”
어깨를 감싸는 줄무늬 망토와 갈색 치마는 아프리카 전통 복장인가?
무엇보다 인상적인 건 허리까지 오는 뒷머리와 머리에 매단 토속적인 머리 장신구다. 그는 원장님을 향해선 꾸벅 인사만 했지만 내겐 두 팔 벌려 안아 주며 격한 인사를 나눴다.
“그대는 대단한 자라고 들었습니다. 난 마롤로우의 족장 사미아 오부디아라고 합니다.”
난 손을 가슴에 엑스자로 얹곤 허리를 꼿꼿이 세우며 ‘와깐다 뽀에뻐!’라고 외치고 싶어졌다. 하지만 꾹 참으며 예의 바르게 손님을 대했다.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물원 직원 정다정이라고 합니다.”
재미없는 인사지만 실례를 범하는 것보단 낫겠지. 사실 그에게서 느껴지는 이미지가 어릴 때 봤던 영화의 주인공과 똑 닮아 있어 보자마자 생각이 났다. 물론 실제로 아프리카엔 그런 고대로부터 감춰진 신비한 국가는 없겠지만.
“사미아, 제 직원과 이야기를 나누며 기다리고 있어요.”
원장님은 손님이 부탁한 일을 처리하러 떠났고, 난 그와 단둘이 남아 이야기를 나눴다. 다행히 그는 말을 하는 걸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타리탄지아는 옛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다릅니다. 검은 대지는 이젠 희망과 꿈으로 비옥해지고 있어요.”
그는 아프리카에서 찾아온 마롤로우 부족의 족장이자 아프리카 연합의 일등 교섭인 헌터였다. 또한 그는 아프리카 남동부에 새롭게 세워진 ‘타리탄지아’라는 국가의 부통령이기도 했다(솔직히 조금 놀랐다).
아마 대전이 이후 지구에서 가장 달라진 곳을 뽑자면 아프리카 대륙일 것이다. 대전이 이전엔 아프리카는 가난한 대륙이었다. 기아와 질병, 고위직들의 부정부패, 절대적으로 부족한 생활 인프라. 편견일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교과서에선 대전이 전의 아프리카는 많은 도움이 필요한 곳이라고 배웠다.
하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많이 달라졌다. 아프리카엔 인간의 손이 닿지 않은 대자연이 있었다.
개발되지 않은 아프리카의 넓은 대륙은 이계의 환경이 자리 잡기 적절한 곳이었다. 가장 먼저 마물들이 서식했고, ‘사자와 하이에나의 협동’처럼 가장 빨리 지구의 적응이 시작된 곳이기도 했다.
듣기론 능력자도 아프리카에서 가장 빨리 나타났다고 했었던가?
어쨌든 대부분 위기를 맞이했던 대전이는 도리어 아프리카에 놀라운 변화를 선사했다. 계몽을 선도하는 자들이 인간을 벗어난 능력을 지녀 사회를 바꾸고, 이계의 풍족하고 놀라운 문물들로 경제가 성장했다. 게다가 과거와 달리 열강들의 식민지로 전락하지도 않았다.
대전이의 혼란 속에서 아프리카는 폭발적으로 성장한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아프리카는 혼란스러운 대륙이었다. 그러나 혼란스러운 만큼 일거리도 많아 헌터들이 몰려드니 내 생각으론 아프리카는 지금보다 더 성장할 것이다.
‘즉, 친해져서 나쁠 것 없는 사람이라는 거지.’
난 그에게 아껴 뒀던 해백초를 차로 내놓았다. 과연 헌터답게 곧장 차의 효능을 알아보고 내게 고맙다고 말한다. 호감을 얻는 덴 성공한 모양이다.
“원장님이 마물 우리 쪽으로 가시던데, 부탁한 일이란 게 마물과 관련된 건가요?”
그가 마물원을 찾아온 목적이 궁금했다. 내 질문에 그는 ‘파라나나라’를 되찾으러 왔다고 대답했다. 당연히 난 그게 뭔지 몰라 되물어야 했고, 사미아는 기꺼이 파라나나라에 대해서 설명을 해줬다.
“파라나나라는 아주 오래전부터 사냥꾼 부족이 보호하던 마물입니다. 불의의 사고로 몇 달 전 사원에서 파라나나라를 도둑맞았으나 ‘위대하신 분’께서 되찾아 주셨지요.”
“제가 들어본 적이 없는 걸 보아하니 희귀한 녀석인가 보군요.\"
“우리들의, 아프리카의 수호신입니다.”
사미아가 말했다.
그는 ‘대전이’는 불과 몇십 년 전에 일어났으나 대전이 이전에도 작은 전이는 수많이 있어 왔다고 했다.
알고 있었다. ‘인어’들처럼, 지구엔 오래전부터 이계의 흔적들이 있었지.
사미아는 파라나나라는 이천 년도 전에 아프리카에 나타난 마물이라며, 척박한 땅을 풍요롭게 만드는 신비한 힘으로 예부터 아프리카의 수호신으로 추앙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많은 파라나나라가 세월에 버티지 못하고 죽었으며, 지금은 오로지 단 한 개체만이 살아 있다고 했다.
“파라나나라는 풍요와 번영의 상징입니다. 우리들의 대륙을 잘 알지도 못하는 무지한 외압에 의해 아프리카는 격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더더욱 파라나나라의 상징성이 필요합니다. 파라나나라가 아프리카 연합의 규합을 상징하는 수호신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왕노다지가 되어 버린 아프리카이기에 그만큼 벌레들도 많이 꼬인 모양이다. 사미아는 아직까지 아프리카는 토속 신앙을 믿고 있다며, 오히려 대전이로 신비로운 모든 것들이 실제가 되었기에 더욱 옛 신화를 숭배하게 되었다며, 파라나나라만 있다면 연합을 더욱 굳건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그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 보니 원장님이 우리에서 돌아왔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원장님의 깔끔했던 머리와 옷이 지저분해졌다. 그러나 원장님 곁에 파라나나라는 없었다. 홀로 돌아온 원장님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에 붙은 나뭇잎을 털어 냈다.
“다정 씨가 도와주어야 할 것 같네요. 녀석은 바깥으로 나오길 완강히 거절하고 있어요. V-22 구역 왼쪽 박달나무에 있으니 사미아도 데려가세요.”
원장님은 내게 부탁하곤 입을 앙다문 채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내색은 하지 않았으나 마물에게 거절당한 게 꽤 자존심이 상한 듯 보였다. 나도 사미아도 원장님의 심기를 거스르면 좋지 않다는 걸 알았기에 곧바로 관리실에서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어디 보자, V-22 구역이면……. 이쪽이네요.”
난 사미아를 데리고 마물원 우리에 들어갔다. 그는 공간 이동에도 놀라지 않아 했다. 경험해 본 적이 있는 것이다. 박달나무까지 가는 동안 원장님을 어떻게 만났는지 물어봤다.
“그녀는 아프리카를 위기에서 구해 준 여신입니다.”
여신? 대단한 존재이긴 한데 그런 성스러운 느낌은 아닌데. 이야기를 들어보니 원장님은 마물 범람으로 위험에 처한 아프리카를 단신으로 구했으며, 사미아는 그때 원장님의 도우미였었다.
하긴 마물원이 보호하고 있는 마물들만 해도 수가 몇인데. 이런저런 사정들로 이만큼 많아진 거겠지.
“저 녀석이 파라나나라예요?”
“그렇습니다. 풍요의 새, 파라나나라.”
박달나무의 수많은 가지를 혼자 독차지하고 있는 거대한 새가 보였다. 생김새가 독특하다. 깃털이 마치 나뭇잎처럼 생겨 박달나무 가지에 앉아 있자 우거진 나무처럼 보였다.
나뭇잎 깃털을 가진 녀석은 꽁지깃털이 몸의 길이만큼 엄청 길었고, 머리에 난 깃도 그만큼 길었다. 공작새와 비슷하나 조금 더 뚱뚱하고 동그란 몸에 날개는 덩치에 비해 무척 작은 편이었다.
‘대단하긴 한데…….’
원장님 머리에 붙은 게 나뭇잎이 아니라 녀석의 깃털이었나? 화난 이유가 있었네. 녀석은 과연 아프리카 풍요의 신으로 추앙받던 마물답게 꽤 깊고 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가 아는 다른 ‘신수’들에 비해선 턱도 없었다. 뭐, 드래곤에게 덤볐으니 깡은 대단한 편이겠지.
“파라나나라! 당신을 지키던 사미아가 왔습니다. 본래 있던 신전으로 돌아가시지요!”
사미아는 파라나나라를 향해 손을 뻗으며 자신과 같이 가자고 말했다. 하지만 파라나나라는 고개를 홱 돌리며 노골적으로 무시했다.
“그날의 사고 때문에 절 용서치 못하시는 겁니까? 부디 수호자들의 불찰을 용서해 주시어 다시 한번 아프리카의 수호신이 되어 주소서.”
사미아는 파라나나라가 수호자들이 자신을 지키지 못해 삐져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다.
난 가만히 녀석을 뚫어지게 쳐다봤다. 아니다. 삐진 게 아니다. 그냥 녀석은… 젠장, 또 복잡한 마물이 등장하셨네.
난 머리를 벅벅 긁으며 녀석 앞에 나섰다.
“왜 가기 싫은지 말해 봐.”
처음엔 녀석은 날 무시했다.
하지만 네가 이곳에 있는 이상 난 널 괴롭혀 줄 많은 방법을 알고 있다며 협박을 하자 쉽게 말문을 열었다.
[이번에 난 깨닫고 말았어. 작고 못된 인간들에 의해 허무하게 포박 당했을 때 말이야. 그래, 사실 난 힘을 잃었어!]
끼이이이-!
파르나나라가 갑자기 날개를 펴고 고개를 추켜들며 긴 울음소리를 냈다. 그러자 나뭇잎 같은 깃털이 가을 낙엽처럼 후드득 떨어졌다.
난 힘없이 나풀거리는 깃털을 보며 말했다.
“아픈 거냐?”
[아니.]
“죽을 때가 된 거야?”
[난 죽지 않아. 다만…….]
녀석의 눈을 마주봤다.
맑고 착한 눈이었다. 그러니 저런 머저리 같은 생각을 하지.
[우리들이 처음 푸른 세계에 둥지를 틀었을 때야. 그들은 지금보다 더 비참했었어. 굶주린 아이들, 지켜볼 수가 없었어. 난 인간들을 좋아해. 내 힘으로 그들을 살리는 걸 즐겁게 여겼어. 동족들도 마찬가지였지. 우린 힘을 잃어 갔지만 대신 많은 아이들이 풍족해졌는걸. 하지만 동족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기쁨을 잊었어. 죽음을 위장한 채 다른 세계로 떠나 버린 거야. 홀로 남은 난 열심히 노력했지만, 난 더 이상 대지를 풍요롭게 만들지 못해. 힘이 없어. 그러니 아이들도 힘없는 날 더 이상 필요치 않을 거야.]
이야기를 들으며 주먹에 힘이 잔뜩 들어갔지만 가까스로 참을 수 있었다. 난 저 새끼같이 미련한 놈을 하나 알고 있었다. 예전에도 비슷한 놈을 봤었지. 오리하르콘 찾는 돼지 녀석. 그땐 한 대 두들겨 패 줬지만, 지금은 굳이 그럴 필요가 없겠지.
난 사미아에게 내가 들은 걸 고스란히 말해 줬다. 그러자 사미아는 눈물을 흘리며 파라나나라에게 다가갔다. 파라나나라는 날개를 파닥거리며 도망치려고 했으나 약해진 터라 날지도 못하였다. 결국 나뭇가지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오, 우리들의 수호신이여.”
사미아는 나무 밑동에서 발버둥치는 녀석을 부드럽게 안아 줬다. 그는 마물의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했다. 그러나 파라나나라는 모두 알아들었다.
“선조들은 당신께 기대 왔습니다. 우리들은 당신이 베푼 사랑으로 자라 왔지요. 그러니 당신이 나약해진다고 하여 어찌 내치겠나이까.”
발버둥치는 파라나나라의 움직임이 서서히 조용해졌다.
“우리들은 더 이상 당신에게 기대지 않을 겁니다. 대신 우리가 보살피겠습니다.
위대한 파라나나라여, 용맹한 전사는 늙으면 젊은이를 가르치는 선생이 되고, 현명한 통치가도 시간이 지나면 결국 자리를 물러나야 하는 법입니다. 하지만 현재의 모습이 어떠하다고 하여 결코 노인의 과거를 폄하하거나 무시하지는 않습니다. 당신께선 지금까지 그래 왔듯이 그저 우릴 지켜만 봐주십시오.”
내가 마물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더라도 지금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진 알 수 있다. 난 원장님에게 연락했다.
곧이어 도착한 원장님에 의해 파라나나라는 본래 있던 신전으로 돌아갔다. 이번 일은 쉽고 편하지만 머릿속이 포근해지는 일이었네.
“고맙습니다. 그럼 전 이제 피의 의식을 치르도록 하겠습니다.”
“네?”
집에 돌아가 오랜만에 라이언 킹이나 보려던 난 사미아의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원장님이 웃으며 내게 말했다.
“그의 복수를 위해 남겨 뒀어요. 다정 씨도 따라가 보는 게 어때요? 그는 훌륭한 사냥꾼, 배우는 게 있을 거예요.”
사미아는 파라나나라를 포함해 아프리카의 신성한 마물들을 포획하고 밀수해 간 놈들을 아프리카의 적이라며 복수를 하겠다고 벼르고 있었다. 원장님은 사미아의 ‘피의 의식’을 치르는 곳을 따라가 보라며 내 대답도 듣지 않은 채 공간 이동 마법을 펼치기 시작했다.
어쩐지 좋게 끝난다 했더니.
젠장.
*
그는 사냥꾼이었다.
간담이 서늘할 만큼 무서운 사냥꾼.
원장님의 마법으로 우린 밀수업체의 본거지 중앙으로 곧바로 이동했다. 사방이 힘깨나 쓰는 적들로 가득한 곳에 말이다.
그곳에서 사미아는 자비가 없는 손속으로 ‘피의 의식’을 거행하기 시작했다. 그가 창을 휘두르자 건물이 잘려 나갔다. 그가 창을 던지자 수십 명의 목이 떨어졌다.
뒤늦게 알았으나 그는 아프리카 헌터들 사이에서 ‘검은 표범(어쩐지 느낌이 들더라니)’이라 불리며 위험도 SSS랭크, 헌터 랭크 30위 안에 드는 강자였다.
피의 의식이 끝난 후에 난 아프리카에서 그에게 창술을 배울 기회를 가졌다. 특히 노련한 사냥꾼의 투창 기술은 ‘아이스독’의 힘을 다루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오오, 자연이 그대를 거부하리라. 역시 친하게 지내야 할 사람이 맞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