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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69화 (169/258)

#169화 요괴 (5)

기절했던 여우 요괴는 정신이 들자마자 꼬리를 치마 속에 숨기고 귀를 쫑긋 세운 채 땅을 파기 시작했다. 뭘 하려나 싶어 구경하다가 땅굴을 파고 숨으려고 하여 단비에게 부탁했다.

‘저 굴을 흙으로 메워 줘.’

굴에 숨어 있던 여우는 제 발밑에서부터 흙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허겁지겁 기어 나왔다. 어찌나 겁을 먹었는지 꼬리와 귀를 부르르 떨며 맨손이 부르트도록 흙을 팠으나 파낸 즉시 흙은 도로 차올랐다.

“이게 왜 이래? 으악! 지하요괴의 요술이 분명해! 난 이제 죽었다.”

아마 모든 요괴가 다 저렇진 않을 것이다. 지레 겁먹어 또 혓바닥을 축 내민 채 기절해 버린 여우 요괴를 보며 기이한 감각에 휩쓸렸다. 뭐지? 이 괴롭혀 주고 싶은, 다소 멍청하지만 귀여운 녀석은?

난 강제로 기운을 흘려 넣어 녀석을 깨웠다. 일어났긴 했으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노란 눈알을 뺑글뺑글 돌리던 여우 요괴는 날 보더니 꼬리로 내 허벅지를 찰싹찰싹 때렸다.

“이 녀석아!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다가 저어기 묘괴굴의 요괴들이나 도깨비 왕이 듣는다면 잔뜩 화가 나서 경을 치려 들 거야. 엉엉. 아니, 네놈 목청이 하늘의 신선도 놀라 오줌을 찍 쌀 정도니 필히 들었을 거야. 엉엉, 구미호님 곁에서 콩고물이나 얻어먹으려다가 이게 웬 봉변이람.”

녀석은 신기하게도 다른 대요괴들은 그토록 무서워하면서 난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 것 같았다. 난 듣다가 녀석의 신세 한탄이 끝이 나지 않을 것 같아 다시 잡아먹는다고 협박을 했다. 그제야 울음은 멈췄지만 입술을 내밀며 제 불만을 토로했다.

“왜 이렇게 태평해! 읍! 태평합니까요? 만마굴이니 어디 듣도 보도 못한 잡문, 윽! 대단하신 곳에 오셨더라도 지금 이곳엔 요계를 떨게 했던 대요괴들이 몰려 있습니다요. 대체 어쩌려고! 에이씨! 어쩌시려고!”

심지어 조울증 증세까지 보이는 여우 요괴다. 난 씩 웃으며 말했다.

“지금까지 반말해 놓고 웬 존댓말이야. 편하게 말해도 돼.”

“안 잡아먹을 거지?”

“그래. 니가 무서워하는 대요괴들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정신을 못 차려?”

“황하의 메기와 사북 요괴들, 특히 도깨비 왕! 그분들 앞에선 해주주님도 일개 잡괴… 히익!”

여우 요괴는 해주주를 거론하며 대요괴의 무서움을 설명하려다가 제 뒤에 해주주가 떡하니 서 있는 걸 뒤늦게 발견하곤 또다시 굴을 파기 시작했다. 해주주는 뾰족한 다리를 뻗어 얼굴만 흙 속에 파묻은 여우 요괴의 저고리 옷깃을 잡곤 일으켜 세웠다.

“괜찮다. 네 말대로 그것들은 두렵고 무서워해야 마땅한 존재들이다.”

해주주는 날 보며 대요괴들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난 해주주가 설명하는, 과장된 것처럼 보이나 절대 과장되지 않는 기괴하고 끔찍한 힘을 가진 대요괴들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도 알았다. 해주주의 기억을 훔칠 때 봤으니까. 솔직히 궁금했다.

기억 속의 대요괴들은 정말 말도 안 되는 것들이었기 때문이다. 해주주는 도깨비 왕의 설명을 끝으로 잠시 말을 멈췄다가 굳건한 눈으로 날 쳐다보며 말을 덧붙였다.

“그러나 이분이라면 괜찮을 것이다.”

해주주의 말이 시작되었을 무렵에 내 고함을 들은 해주주의 요괴 무리들도 언덕 위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들 모두 해주주의 말을 들었다.

“만마굴은 일평생 들어본 적이 없으나 분명 그는 스스로 수호대장군이라고 칭했었다. 오래전, 내가 아직 새끼였을 때 들어본 적이 있지. 요계에 혼란과 재앙이 내릴 때 봉문을 깨고 나와 요괴들을 지켜 준다는 전설의 항마장군을 말이다.

결례를 무릅쓰고 감히 묻거니와 그대는 그곳의 군주이자 항마장군님이 아니십니까?”

내 대답은 빨랐다.

괜한 오해는 사기 싫었다.

“아닌데요.”

해주주는 눈에 띄게 머쓱해하며 다리를 꼼지락거렸다. 난 어깨를 으쓱하고 목을 긁었다.

“그러나 세간에 드러나지 않는 신비로운 수호문의 군주가 틀림없겠지.”

만마굴, 즉 마물원이 해주주가 말하는 수호문과 의미가 비슷하긴 하다. 대전이를 대비하며 마물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을 구하는 일을 하지. 이래 설명하니 정말 정의로운 곳 같네.

“그래도 군주라고 부를 정도는 아닙니다. 만마굴엔 정말 나보다 한 만 배… 아니, 숫자로 연산하기 미안할 만큼 강한 분이 계시거든요.”

해주주는 여러 쌍의 거미 눈을 끔벅이며 말했다.

“그래선 마치 ‘용’이라도 되는 듯 들립니다.”

용.

난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한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네. 요괴들도 드래곤을 알고 있구나.

*

여우 요괴의 안내 덕에 평범한 길로 찾았다면 절대 찾을 수 없을 구미호의 영역까지 수월하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곳까지 가는 길은 길이 아닌 곳이었다. 바다 위를 걷거나 바위를 파내어 지하굴로 향하거나 심지어 나무를 오르기까지 했다.

마침내 험준하고 기괴한 길목을 지나 구미호가 기거한다는 영산의 정상에 도착하였다.

산 정상에 세워진 거대한 사당.

입구에 세워진 토리이鳥居, 붉은 기둥이 마치 일본의 신사神社와도 같았으나 그 안의 건물은 중국 신당과도 비슷하였고, 한국의 절과도 비슷한 생김새였다. 높은 계단의 끝에는 붉고 노란 천들로 감싼 사당이 보였다.

‘이 기운.’

그곳에서 마치 신수를 범접할 때와 비슷한 기운이 느껴졌다. 구미호의 기운이겠지. 한중일 역사 속에서 구미호만큼 강렬하고 깊게 흔적을 남긴 요괴는 없었다. 사당의 생김새가 증명하듯 구미호는 동북아시아권에선 가장 유명한 요괴였다.

그곳엔 다른 요괴들은 없었다.

여우 요괴의 길 안내 덕에 내가 가장 빨리 도착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토리이 아래에서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많은 기척들이 느껴졌다.

‘구미호를 지키는 여우들.’

여우 요괴가 신신당부한 대로 해주주와 다른 요괴들은 산 아래에서 기다렸다. 녀석의 말에 따르면 초대받지 않는 자들은 아무리 토리이를 넘어가려고 해도 다른 곳으로 쫓겨난다고 했다. 구미호를 만나기 위해선 우선 그들에게 인정을 받아야 했다.

‘까라면 까야 하는 거지.’

다만 힘으로 굴복시키거나 강제로 통과할 수는 없었다. 여우 요괴의 말만 들었을 땐 여차하면 절차를 무시하려고 했으나 실제로 보니 알겠다. 신당 전역에 깔린 자욱한 안개, 평범한 게 아니야.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빛나지 않으니 마법도 아니라 저항도 못 한다.

‘구미호를 지키는 여우들은 이면의 세계에 사니, 안개가 미치는 곳에선 그들은 양면에 존재한다.’

해주주의 기억을 읽을 땐 놈들의 힘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으나 직접 겪으니 알 것 같았다. 마물원에서 몇 년 동안 수백 번이나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단지 감이지만 그때와 비슷하다는 걸 깨달았다. 붉은 기둥 아래에 숨어 있는 그들. 원장님의 환각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마물들과 비슷해. 안개 속에선 그들은 실체와 환각의 경계에 있는 건가? 만약 저곳에서 함부로 행동했다간 영영 신당을 찾지 못하겠지.

같이 따라오던 여우 요괴는 토리이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이 앞으론 혼자 가야 해.”

녀석은 머뭇거리다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만지작거리며 말을 이었다.

“힘내. 다른 녀석들이 구미호님의 힘을 받는 거보다 그래도 네가 받았으면 해.”

요계에 온 첫날, 호의로 날 백귀야행에 데려다주었다가 곤란한 일에 처하게 된 녀석이다. 물론 그 덕분에 녀석은 목숨을 건졌으니 샘샘인가?

“고맙다.”

난 녀석의 노란 머리를 쓰다듬었다. 녀석은 귀를 젖히며 싫어했지만 난 아랑곳하지 않았다. 요괴에 대한 첫인상이 녀석이라서 다행이다. 참 정이 가는 녀석이란 말이야.

난 녀석을 뒤로하고 토리이로 향했다. 안개가 자욱하여 코앞도 보이지 않는다. 마물의 힘으로 시력을 아무리 키워도 안개 너머가 보이지 않았다.

“기분 나쁜 적막이야.”

토리이를 넘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난 차분하게 앞만을 보고 걸어갔다. 안개가 살아 움직이는 뱀처럼 몸을 휘감겨 온다. 문득 옛 영화가 생각났다. 젠장, 갑자기 괴물이 튀어나오면 아무리 나라도 심장이 덜컹 내려앉겠네.

긴장감 속에서 은근한 공포가 밀려왔다. 난 두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더 무서운 걸 생각해 냈다. 경매장에서 카르마 녀석들을 소탕하기 전,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던 원장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이깟 안개쯤은 괜찮구나 싶어진다.

꽤 긴 시간을 걸었을 때였다.

고요하던 안개 속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꺼져라.”

“엉?”

첫말이 꺼지라고?

그들이 안개 너머에서 속삭이듯 작게 말한다.

“넌 요괴가 아니다.”

가슴이 철렁했다.

“우리 눈을 속일 수 있을 것 같았느냐?”

“넌 요괴가 아니니, 그분을 뵐 수 없다.”

“그러니 우린 널 인정하지 않는다.”

“여우의 선의로, 널 왔던 곳으로 돌려보내 주마. 다신 요계를 찾지 마라. ‘인간’과 ‘요괴’의 경계에 있는 자여.”

놈들의 목소리가 또렷해질수록 안개는 점점 더 진해졌다. 이내 딱딱한 감촉이 느껴질 만큼 안개가 무거워지더니 날 휘감기 시작했다. 당황하며 샐러맨더의 기운을 내뿜었으나 효과는 없었다.

“젠장!”

안개가 몸에 질척하게 달라붙자 익숙한 감각이 전해진다. 원장님의 공간이동 마법이 시작되기 전 느껴지는 박탈감. 이 안개는 날 바깥으로 밀어내려고 하고 있다. 그것도 아주 먼 곳으로!

마침내 박탈감이 최고조로 다다르자 붕 뜨는 감각이 느껴졌다. 젠장! 다시 요계로 넘어올 순 있어도 언제 이곳까지 찾아온단 말인가. 게다가 내가 꾸물거릴 때 다른 놈들이 지천괴왕이 되면 골치 아파질 텐데.

어쩔 수 없다.

받아들일 건 받아들이고 대책을 강구하자. 충분한 대비를 하지 못한 내 잘못이야. 원장님의 마법이라면 이들의 안개에도 충분히 대처할 수 있겠지.

난 포기한 채 기묘한 안개가 날 바깥으로 몰아내길 기다렸다.

“뭐야.”

하지만 붕 뜬 감각만이 느껴질 뿐 내가 서 있는 곳은 그대로였다. 난 안개 너머 여우 놈들에게 소리쳤다.

“뭘 뜸 들여? 할 거면 빨리해.”

안개 너머 여우 요괴들이 사부작거리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내 안개는 전보다 더 진해져 뭉쳐 놓은 솜사탕처럼 되었다.

그러나 내 몸은 여전히 사당 안이다. 안개가 짙어져도 날 몰아내진 못했다.

“뭔가 잘못된 모양이지?”

이렇게 된 이상 이판사판.

난 메타소드를 꺼내고 여우 요괴의 기척이 느껴진 곳으로 달려갔다. 그곳에서 귀와 꼬리가 달린 여우 요괴들과 마주쳤으나 이내 놈들은 안개가 되어 흩어졌다.

나도 어찌할 수 없었으나 놈들도 마찬가지였다. 한참을 기다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다. 끝내 놈들이 먼저 소리치기까지 한다.

“이게 대체 무슨!”

“토리이가 열리지 않아요!”

“그런… 그럼 그는 환각과 현실이… 모두… 하나가 된 존재란 말이냐?”

“놈! 어떻게 했느냐?”

나도 모른다.

왜 이러는지 나도 몰라.

멀뚱히 서서 이 귀찮은 기다림을 언제까지 해야 할지 생각했다. 내 힘으로 안개를 없애는 방법. 있긴 있지만 그건 너무 위험해.

주변 안개가 흩어졌다 짙어졌다 지랄을 하는 걸보니 여우 요괴들이 안달 난 모양이었다. 난 머리를 긁으며 고민에 빠졌다.

그때였다.

“녀석.”

난 깨달았다.

냐아아앙!

내 발등에 느껴지는 따듯함에 그제야 말이다.

‘어디에나 있는 녀석.’

갑자기 어디선가에서 나타난 야옹이는 내 발등을 배로 깔아뭉개고 여유롭게 누워 그루밍을 하고 있었다. 요계에 있을 땐 녀석의 힘과 항상 동화되어 있었다.

아마 안개가 날 밀어내지 못하는 건 이 녀석의 힘. 어디에나 있는 기묘한 성질 때문인가? 그 때문에 환각과 현실의 경계에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을 밀어내는 여우들의 힘조차 통하지 않았던 건가? 환각의 나도, 현실의 나도. 모두 존재해서?

모르겠다. 이 녀석의 힘은 내가 판단하고 재단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맞다, 그렇지.

기괴함만 따지면 요괴들보다 훨씬 기묘하고 꺼림칙한 힘을 가진 녀석이 내 편이었지.

냐앙!

한참 그루밍을 하던 녀석은 날 올려다보며 하품을 했다. 마치 이 지겨운 상황을 빨리 끝내라는 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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