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요괴 (6)
신 음식을 보면 먹지 않아도 입에 침이 고인다. 그처럼 마물의 힘을 끌어올릴 때도 마찬가지다. 포근이의 기운을 끌어올리기 전엔 몸이 따뜻하게 달아오르고, 야옹이의 힘은 날 조금 더 차분하게 만든다.
그리고 이 녀석의 힘은…….
‘죽이면 안 돼. 죽이면.’
숨을 들이마셨다. 만약 예쁜 강아지를 안은 어린아이를 보는데 행복해지기는커녕 죽여 버리고 싶은 생각이 들면 그 사람은 자신을 제외하고 다른 모든 걸 파괴하고 죽이고 싶어 하는 자이다. 그러니 이 힘은 무척이나 나 스스로를 두렵게 만든다. 지금의 난 강아지도 죽일 수 있을 것 같아.
주변이 죽음으로 물들어 간다.
안개가 녹이 슬어 바스라진다.
마침내 붉은 기둥이 무너지고 주변은 맑아졌다. 그러나 공기는 전보다 더 탁하다. 안개가 사라져 모습을 드러낸 여우 신사도 덧없이 흩어져 갔다. 죽일 수 없는 것도 죽이는 감염의 힘을 난 필사적으로 제어했으나 약간이라도 고개를 돌린다면 분명 발작할 것이다.
“부디 날 구미호님에게 데려다줘.”
간절해진 건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위해서다. 아직 늦지 않았다. 환영에 숨어 자신들은 절대 죽지 않는다고 믿는 저 미련한 여우들을 살려 줄 시간이 내겐 남아 있다. 그러나 여유는 없다.
“제발.”
힘을 드러내면 굴복하리라 생각했으나 그들의 의지는 내 예상보다 더 굳건했다. 분명 미련한 자라도 쉽게 느낄 만큼 주변은 공동묘지처럼 죽음으로 가득 차 있었으나 길을 터 주는 여우들은 없었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을 해치기 위해 힘을 펼치나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살리기 위해서 힘을 제어해야 했다.
‘억눌러. 억눌러. 억눌러.’
다른 방법이 있었으면 했다.
그러나 환영 속에 숨은 여우를 죽이기 위해선. 아니, 아니야. 그들에게 공포를 각인시키기 위해선 이 방법밖에 없었다.
끝내 물러서지 않는 여우들에게 죽음이 전염되기 시작했다. 그들은 곧바로 눈치채지 못했으나 난 말라 가는 가죽과 증발하는 피의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별 관계 없잖아.’
필사적으로 힘을 제어하던 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죽이면 어때? 나와 관계 있는 자들인가? 아니잖아. 모조리 죽여 버려도 날 탓할 자는 없어. 그렇게 따지면 내 손에 불타 죽은 백안마군은 죽어 마땅하기에 죽었던가?
아니지.
죽음은 공평하게.
질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여우들은 차례대로 쓰러졌다.
고통에 허덕이며 고개를 숙인 꼴이 마치 제 죽음을 향해 기도를 드리는 모습 같다고 생각했다.
“내가 들어오려고 해서 들어온 게 아니라요. 안개가 걷어졌다는 건 인정받았다는 얘기겠죠? 사실 저 사람이 내 친구예요.”
그때였다.
쓰러진 붉은 기둥을 넘으며 노란 머리의 빨간 저고리를 입은 소녀가 다가왔다. 상황을 곧바로 파악하지 못하고 혼잣말을 주절거리던 그녀는 이내 죽어 가는 제 동족과 그 죽음을 퍼트린 존재가 누구인지 깨달았다.
하지만 날 탓하진 못했다.
죽음은 공평하게도 그녀에게도 감염되었다. 목을 붙잡고 쓰러져 피거품을 내뱉으며 사지를 떤다.
죽음을 공평하게 찾아왔으나 유독 그녀가 죽어 가는 모습에서 기묘한 기분이 들었다. 난 뒤늦게 소녀가 날 도와주던 자라는 걸 알았다.
이곳까지 날 안내한 자다. 생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겁이 많아 벌벌 떨면서도 날 꾸짖기도 하였던, 거미 요괴가 날 잡아먹으려 한다며 먼저 나서 날 도망치게 해 주려던, 강에 홀로 서서 어찌할 줄 모르던 내게 손을 내밀어 준 소녀.
녀석이다.
녀석이 죽어 가고 있다.
“나 때문에.”
혀를 깨물었다.
살점이 도려낼 만큼 세게 깨물어 핏물이 가득 차올랐으나 정신은 또렷해졌다. 젠장, 뭔 자신감이었던가. 그때 이후로 조금 ‘잘 다뤄졌다고’ 방심을 했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다른 길이 있었을 터인데! 내 잘못이다.
퉷-!
피를 뱉어 내며 급히 달려가 죽어 가는 녀석을 안았다. 피부는 꺼멓게 물들었고, 눈은 죽은 생선 눈알처럼 생기가 없었다. 포근이의 기운을 불어 넣자 약간의 혈색이 돌아왔으나 그뿐이었다.
다른 자들도 마찬가지였다.
포근이의 기운은 감염을 늦출 뿐 죽음을 멈추진 못했다. 막기 위해선 오로지 내가 그 힘을 온전하게 다뤄 멈추게 할 수밖에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러나 다시 놈의 힘을 빌려오면 지금의 난… 해내지 못할 거라는 것도 알았다.
“아파.”
포근이의 기운을 먹고 간신히 정신을 차린 녀석이 작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죄책감이 대못이 되어 심장에 박혔으나 고개를 돌리진 않았다. 난 녀석의 최후를 외면해선 안 돼. 여우 요괴는 노란 눈알로 하늘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언니.”
기운이 빠져 헛것이라도 보는 건가. 난 녀석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헛것이 아니었다. 그곳엔 정말 여우 요괴가 있었다. 이 아이와 같은 머리 색깔과 눈동자 색을 하고 있는 여자였다. 그러나 분위기는 정반대라 차분하고 침착했다.
그녀는 심지어 이 상황을 마주했음에도 동요하지 않았다. 그녀가 마치 흔들림 없는 거대한 바위처럼 느껴졌다.
언제부터 저곳에 있었을까.
잠자코 날 바라보던 그녀가 걸음을 시작했다.
“오면 안 돼!”
아직까지 놈의 힘이 주변에 잔재되어 있다. 난 급히 오지 말라며 소리쳤으나 여자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난 죽음의 영역에 들어오기 전에 그녀를 말리려고 했으나 그녀의 발이 경계에 들어오자 행동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신은……?”
반대의 기운이다. 난 주변으로 차오르는 생명을 느꼈다. 단지 그녀가 가까이 다가와 줬을 뿐인데 죽음과 질병은 정화되고 아이와 여우 요괴들도 모두 혈색을 되찾았다. 난 품에서 죽어 가던 녀석을 살폈다. 기절했으나 생명에 지장은 없어 보였다.
“구미호 님인가요?”
한순간에 질병의 마물의 힘을 정화하고 여우 요괴들의 생명을 되찾게 했다. 범상치 않는 힘, 이곳에서 이런 힘을 가진 자. 난 그녀가 구미호임을 확신했다.
“전 그분을 모시는 무녀일 뿐입니다.”
하지만 그자는 아니라고 말했다.
무녀, 단지 구미호를 모시는 무녀라고 하였다. 조용히 다가온 무녀가 손을 내밀어 내 품에 있던 여우 요괴의 이마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녀석을 포함해서 주변의 여우 요괴들 모두 안개에 감싸졌고, 이내 모습을 감추었다.
무녀가 말했다.
“그들이 겪었던 죽음은 찰나의 악몽이 되어 사라지고, 고통스러웠던 기억은 치유되어 이런 일을 겪었다는 것조차 모르게 될 겁니다. 마치 모든 게 환영이었던 것처럼.”
무녀가 손짓하자 다시 안개가 걷혔다. 난 다른 여우 요괴들은 단지 안개를 조종할 뿐, 그녀가 이 안개를 만들어 낸 자라는 걸 깨달았다.
그녀는 구미호의 사당으로 향하는 계단을 올랐다. 난 그녀의 뒷모습만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았다.
무녀는 계단의 반을 올랐을 때 뒤돌아보며 내게 말했다.
“돌아가려거든 신사의 북쪽 길에 난 오솔길로 내려가십시오. 멀지 않아 괴이의 땅으로 들어왔던 경계에 도달하실 겁니다. 올라오시려거든 머뭇거리지 마십시오. 제가 모시는 분은 그리 참을성이 뛰어난 분이 아니십니다.”
구미호가 있는 신사까지 기꺼이 안내를 하는 무녀에게 난 담아 놨던 말을 꺼냈다. 모르는 척 뒤따라가도 되겠지만 내가 불편해서 참을 수 없었다.
“난 당신들을 해쳤습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라는 건 변명이 되지 않는다. 아무리 요계의 기운으로 머리가 굳어졌더라도 난 정말 머저리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전 요괴가 아닙니다. 그들 말대로 요괴가 아니니 구미호 님을 만나더라도 소용이 없을 겁니다.”
속일 수 있으면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여우들은 내가 요괴가 아님을 간파했다. 당연히 구미호가 그 사실을 모를 리 없다.
그녀는 내 말에 아무런 표정 없이 담담히 되물었다.
“진심이 아니시지요.”
난 잠시 망설이다가 말했다.
“네. 진심이 아닙니다.”
그렇다고 난 구미호를 만나는 걸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정말 포기할 것이었다면 당장 북쪽 길로 향하는 길을 물었을 것이다. 그저 작은 죄책감으로 혹시 그녀가 모를까 봐 상기시켜줬을 뿐이다. 젠장, 더 이상 머뭇거리는 건 기만 행위밖에 되지 않겠지.
계단을 올랐다.
곁으로 봐도 높은 계단이었으나 직접 오르자 몇 시간을 올라도 끝이 보이지 않았다. 이마저도 여우의 요술이었다. 한참을 오르고 나서 뒤를 돌아보자 계단의 시작점이 보였다. 몇 시간을 올랐으나 기껏해야 몇 계단을 오른 것이다.
난 고개를 들어 계단을 올려다봤다. 시야의 끝에 구미호의 신사가 보이나 걸어도, 걸어도 좁혀지지 않아. 하지만 난 포기하지 않고 그녀를 뒤따라갔다.
* * *
몇 시간을 걸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며칠을 걸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내 머릿속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게 되었다. 잡념이 달아나고 그저 계단의 끝에 도달하기만을 생각했을 때였다.
계단의 끝이 보였다.
난 마지막 계단을 밟고 올라섰다.
마침내 빨갛고 노란 천으로 둘러싸인 구미호의 신사에 도착한 것이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무녀는 그 말만을 남겨 두고 계단을 다시 내려갔다. 난 조용히 숨을 들이마시며 그녀가 내려가는 모습을 지켜봤다. 정확히 288계단이었다. 무녀는 계단 아래서 날 한 번 쳐다본 후 붉은 기둥 바깥으로 나갔다.
“월하궁전.”
구미호의 신사의 간판엔 월하궁전이라 적혀 있었다. 분명 방금까지 햇빛이 감돌던 낮이었는데, 내가 간판을 본 순간 밤이 되고, 달이 떠올랐다. 달 아래 궁전이라. 신비로운 느낌이 든다. 마물원 일을 하며 온갖 기괴하고 다양한 장소를 다녀봤지만 지금처럼 신비로운 느낌은 처음이었다.
신사의 문을 열었다.
입구에 발을 딛자마자 난 그곳에 서있었다. 마치 단편적으로 재생되는 꿈같았다.
호롱불이 은은히 방을 비추는 수수하면서도 고즈넉한 어떤 방에서 인식할 새도 없이 그녀가 나타났다. 가장 먼저 느낀 건 코를 간질이는 분 냄새와 꽃향기였다.
그녈 처음 봤을 땐 절세의 미녀였다. 그리하여 분 냄새가 났는데, 다시 쳐다보니 꽃향기가 나는 흰 여우가 되어 있었다.
‘여우인가, 사람인가. 그건 중요치 않겠지.’
내가 그녈 사람이라 생각하면 푸른 눈을 가진 여인이 되었고, 여우라 생각하면 흰 털을 가진 여우가 되었다. 그러나 한 가지 공통점이 있으니 둘 모두 꼬리가 9개가 달려 있었다.
여우든 인간이든 두 모습 모두 위엄이 있었다. 구미호는 측정할 수 없는 기운을 가지고 있었고, 그에 걸맞은 품격 또한 느껴졌다. 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게 예의라고 생각했다.
[요괴도 아니며, 인간도 아니다. 저자는 대체 무어라 불러야 하지?]
난 질문 아닌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지천괴왕이 되고자 합니다.”
이 한마디면 충분했다. 그러자 구미호는 달처럼 은은한 눈빛으로 날 바라봤다. 구미호의 진짜 목소리는 으르렁거리는 짐승의 울음에 지나지 않았으나, 내게 들리는 목소리는 그렇지 않았다. 마치 자장가처럼 포근한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