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요괴 (7)
난 달빛 같은 시선을 마주하다 고개를 돌렸다. 달을 따고 싶은 헛된 욕망이 들기 전에 말이다.
[너 같은 존재가 요괴의 왕이 되어서 무얼 하려고 하느냐?]
“무얼 하고자 왕이 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굳이 왕이 될 필요는 없다.]
“다만 요괴들에게 질문을 하고자 합니다.”
깊게 생각해 본 건 아니다.
그러나 대전이로 요계가 작아지고 요괴들이 괴이의 현상에서 현실이 되고자 한다면 그들이 마주친 상황은 지구와 별반 다를 바 없다고 생각했다. 변화를 받아들이고 적응하는 것. 인간이 그랬고, 이계의 주민들이 그러하였듯이.
“그 질문의 답에 따라 그들은 스스로 선택을 하게 되겠지요.”
제법 긴 정적이 흐르고 나서야 구미호가 말했다.
[지천괴왕은 요괴의 운명을 대변하는 자, 허나 넌 대변자가 되어 요괴들이 제 손으로 운명을 선택하게 하려는구나.]
구미호의 목소리는 어딘가 외로워 보였다.
[어쩔 수 없지. 어차피 운명은 비틀릴 대로 비틀렸다. 이제 그런 게 남아 있을 리 없지.]
*
[난 운명을 다하였다. 전이로 생겨난 요계의 구멍은 탐욕스럽게 내 힘을 빨아들여 몸집을 키우고 있어, 비루하게 내 명을 이어 봤자 요계의 멸망을 재촉할 뿐이지. 지금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내 남은 힘을 건넬 자를 말이다.]
구미호는 제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언젠가 원장님이 말해 준 적이 있었다.
지구가 수용할 수 있는 ‘존재력’이란 건 한계가 있어, 강한 자들은 건너오지 못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전이는 커져, 결국 신이라 불리는 존재들까지 전이에 휩쓸린다고 했었지. 저 힘을 잃어 가는 구미호처럼 전이는 더 큰 존재를 먹어치우기 위해 힘을 키우고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난 잠자코 구미호를 기다렸다. 지천괴왕이 되겠다고 말한 순간부터 구미호의 힘을 받겠다고 선언한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구미호는 푸른 눈으로 지그시 날 바라보기만 하였다.
아주 오랫동안.
긴 시간이 지나고 구미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신기한 자이다. 난 지금까지 ‘말’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들어 대화를 나누니 과연, 비범한 자라는 건가?]
그쯤은 알고 있었다. 영수도 마물과 다름없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래서 일부러 혼자 생각하던 구미호의 말에 대답했었다. 마음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교감 또한 통할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곧바로 헛된 생각이란 걸 깨달았지만.
[그러나 비범하기만 할 뿐 강하진 않아. 난 천하를 호령하는 영웅을 좋아한다. 내가 힘을 빌려줬던 대성들이 그러했고, 달기가 그러하였지. 하물며 내 힘을 받을 자니 호조사(狐祖師) 정돈 되어야지.]
구미호에게 인정받는 법은 간단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어려운 일이기도 했다. 난 구미호가 만족할 강한 힘을 내보이기 위해 ‘우연찮게’ 만들어 낸 형의검을 선보였다.
그 힘을 펼치자 월하궁전이 모두 무너지고 난 비어 버린 마나로 공허함에 목말라 하며 갈증에 허덕였지만 구미호는 성에 차지 않아했다
[아슬아슬하게 반선의 경지에 있을 뿐이다. 스스로 장군이라 칭하는 요괴들과 너도 다를 바 없구나.]
구미호의 손짓에 달빛이 강렬해졌고, 무너진 월하궁전은 어느새 이전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난 내가 가진 전력의 힘으로도 구미호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하지만 조급해하진 않았다. 난 숨을 고르며 호흡을 진정시켰다. 어느 정도 기운이 돌아오자 구미호에게 물었다.
“지금 제가 보일 힘 또한 제가 가진 힘입니다. 그러니 이 힘 또한 인정해 주셔야 합니다.”
따분한 표정이었던 구미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림자에 숨은 요상한 고양이를 말하는 거라면 그 또한 네 힘으로 인정하지.]
난 뒤를 돌아봤다. 야옹이가 어느새 나타나서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난 녀석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지만 녀석이 정말 고양이다운 놈이란 건 잘 알았다. 이 귀여운 망할 녀석은 절대 그 힘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아닙니다. 제가 가진 건 다른 힘입니다.”
[잔말 말고 보이기나 하여라.]
난 어깨를 으쓱하며 숨겨 놨던 붉은 주머니를 꺼냈다. 몇 년 동안 지내며 익숙해질 법도 한데 아직까지 오금이 저려 온다. 난 구미호의 눈치를 살피며 주머니를 살짝 열었다.
[자, 잠깐!]
그 즉시 구미호는 심상치 않음을 눈치채고 멈추라고 소리쳤으나 난 씩 웃으며 주머니를 활짝 열었다. 그러자 대비하고 있음에도, 그리고 날 향한 적의가 아님에도 난 잠깐 정신을 잃을 뻔했다.
주머니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천지를 진동시키는 굉음을 내질렀는데, 귓구멍이 아니라 몸 전체, 영혼이 있다면 영혼마저 뒤흔드는 것 같았다. 기운은 곧바로 사라졌으나 남긴 흔적은 어마어마했다.
난 여우 요괴 꼬마와 똑같이 행동하는 구미호를 보며 뺨을 긁적였다. 아홉 개의 꼬리를 치마폭에 욱여넣고 여우 귀를 손으로 감싸 쥔 채 납작 엎드려 바들바들 떤다. 방금까지 광대한 신비로움을 선사하던 구미호였기에 저 모습은 좀 깨네.
물론 이해는 한다.
원장님의 적의가 깃든 기운을 바로 앞에서 마주했는데 저 정도면 양호하지.
바들바들 떨던 구미호는 고개를 살짝 들어 힐끔힐끔 주변을 둘러보더니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점잖게 앉았다.
[이런, 하마터면 남은 혼도 모조리 달아날 뻔했구나.]
자기가 생각해도 머쓱한지 정말 놀랐다며 너스레를 떨더니 붉은 주머니를 가리키며 말했다.
[용의 기운을 어디서 얻었지?]
“그 전에…….”
[아니, 말하지 말거라. 죽음을 앞두고 괜한 의문을 남기고 싶진 않으니.]
난 말해 줄 생각이 없었지만 구미호가 먼저 나서 내 입을 막았다. 내가 말하고 싶은 건 하나였다. 그래서 날 인정해 주냐, 안 해 주냐. 미리 확답을 받긴 했으나 내가 생각해도 억지였다. 괜히 찔러서 난 다시 한번 말했다.
“이 힘을 인정해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다행히 구미호는 제 말을 잘 지키는 자였다.
[네가 그 기운을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또한 그 기운이 널 해치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자격이지.]
구미호가 제 사당에서 내려와 내게로 걸어오기 시작했다.
[좋다. 네게 내 힘을 건네주지.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나 이 또한 운명의 비틀림이라면 내가 판단할 게 아니지.]
기이했다.
구미호가 가까워질수록 월하궁전에 뜬 달이 내게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하지만 달의 크기는 변하지 않았다. 하늘 높이 뜬 달, 구슬 정도의 크기 그대로 내게 내려온다. 이내 내 앞에 선 구미호는 손을 뻗어 내 팔목을 잡았다. 마치 차가운 바람이 스치듯 팔에서 느껴지는 감촉은 기묘했다.
[조화의 구슬이 네게 깃든다.]
하늘에 뜬 달이 내 팔목에 내려앉았다. 작은 구슬 정도의 크기였으나 풍기는 기운은 달과 비견할 만했다. 내 작은 팔목이 하늘이라면 달이 떴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달은 서서히 저물었다.
난 가만히 저무는 달을 지켜봤다. 어느새 저문 달이 내 몸 안으로 깃들었고, 이내 문신처럼 흔적이 남았다.
난 팔목에 생겨난 문신을 매만졌다. 아홉 개의 동그란 점이 반원을 그리며 찍혀 있었다. 마치 과학책에서 봤던, 태양이 뜨고 저무는 순간들을 이어서 찍은 파노라마 같았다.
다른 기연과 영약처럼 내게 특별히 어떠한 기운이 생겨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힘은 분명 구미호의 모든 것이었다. 그녀는 안개처럼 점점 모습이 옅어졌다.
난 구미호의 마지막을 지켜보며 고개를 숙였다. 그녀가 내게 힘을 건넬 때 찰나지만 서로의 마음을 들여다볼 만큼 깊게 연결되었었다. 그래서 구미호가 전이를 늦추기 위해 제 목숨을 희생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또한 그녀가 죽음을 벗어나고자 했다면 진즉 요계는 무너졌을 거라는 것도 말이다.
구미호는 사라지기 전에 어떤 말을 전하려는 듯 으르렁거렸으나 전과 달리 목소리가 들려오지 않았다. 마음으로 생각하는 것조차 버거웠기 때문에 단지 짐승의 울부짖음이 되어 버린 것이다.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걸까.’
구미호가 사라지자 월하궁전도 환영처럼 사라졌다.
“하아.”
난 주변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방금 전까지 겪었던 모든 일들이 춘몽처럼 느껴질 만큼 햇빛이 너무 화창했다.
[해가 떴어.]
단비가 말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해가 떴네.”
[그리고 달도 떴네.]
“달?”
단비에게 물었으나 녀석은 대답하지 않았다. 깊게 잠들어 버린 것이다.
*
그래, 그랬군. 당신의 영혼.
호조사가, 무엇이더냐.
어차피 세상은…….
*
구미호는 주왕(紂王)의 총비(寵妃)가 되어 중국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일본으로 건너와 전국을 어지럽혔다. 그러나 때론 오대선(五大仙)이 되어 번영을 베풀고 백제의 멸망을 예고하며 상서의 상징이 되기도 했다. 구미호는 변덕스럽다.
천하에 죽음이 만연하면 번영을 베풀어 다산을 기원하지만 세상에 번영이 너무 과하면 스스로 재앙이 되어 죽음을 선사했다. 그러한 구미호의 변덕으로 인해 여우 구슬에 조화의 기운이 깃드니 음과 양은 생명을 키우는 양분이 되었다.
*
계단을 내려가자 무녀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구미호의 죽음을 알았다. 나에게 부탁하길 여우들에겐 구미호님이 영영 사라진 게 아니라 내게 힘을 건네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올라갔다며 말해 달라고 했다. 어려울 것 없었기에 알았다고 대답했다.
안개가 자욱했던 신사는 마찬가지로 햇빛이 화창했고, 하늘도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난 다시 세워진 붉은 기둥 아래 모여 있는 여우들을 보며 뺨을 긁적였다.
“와! 냄새가 달라졌어. 너 정말 구미호 님의 인정을 받았구나. 굉장해! 어떻게 한 거야?”
여우 꼬마가 달려왔다. 녀석은 날 무서워하지 않고 해맑게 말을 걸어왔다. 나머지 여우 요괴들도 날 경계하지 않았다. 무녀의 말대로 여우들과 소녀는 내가 자신을 죽이려 했다는 걸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난 구미호와 있었던 일을 숨기고 무녀가 부탁한 대로 거짓말을 했다. 구미호가 날 인정해 힘을 주고 신선이 되어 하늘로 갔다는 말을 하자 여우들은 기뻐했다.
“흠흠, 난 알고 있었지. 네가 대단한 요괴라는 걸!”
유일하게 내가 요괴가 아님을 간파하지 못했던 여우 요괴가 너였어. 잠깐, 다른 여우 요괴들은 지금 내가 요괴가 아닌 걸 알잖아?
난 무녀를 쳐다봤다. 그녀라면 알고 있을 것 같았다. 무녀는 말하지 않아도 내 궁금함을 눈치챘다. 귓속말로 말하길, 구미호 님의 힘이 깃든 난 이제 요괴와 다를 바 없단다.
“여우의 눈도 속일 정도니 다른 영수님들도 그대가 인간임을 알아차리지 못할 겁니다.”
마치 구미호 외에 남은 세 영수도 아는 듯한 말투였다. 구미호의 힘을 얻은 건 좋았으나 나머지 영수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그녀가 영수에 대해 안다면 작은 단서라도 얻고 싶은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