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3화 요괴 (9)
호금산은 산세가 가팔라 절벽이 많고 뿌리를 뜯어도 순식간에 자라나는 요계의 억센 가시나무들이 우거져 길이란 게 없었으며, 강한 영기를 뿜어내는 태산이라 굳센 요괴들도 길을 잃고 그곳의 터줏대감에게 쉬이 잡아먹히는 영산이었다.
아침이 되면 수만 개의 나뭇가지에 맺힌 이슬에 햇빛이 비추어 금빛으로 빛나 금산이라 부르기도 하는 호금산엔 예로부터 호랑이들이 살았다. 그들은 보통 호랑이가 아니라 호금산의 날카로운 창과도 같은 나무가시밭을 아무렇지 않게 지날 수 있는 질긴 가죽과 호금산의 영기에 끌려 찾아온 강한 요괴들도 잡아먹을 수 있는 단단한 발톱과 이빨을 지녔다.
그리고 호금산엔 백두금왕이 산다.
지천괴왕을 탄생시킨 네 영수 중에 하나로, 백두금왕은 모든 호랑이 요괴들의 왕이었다. 요괴 이전에 만짐승의 왕이었던 호랑이였기에 요괴가 되고 나서도 그 용맹과 강함은 다른 짐승 요괴들과 추종을 불허했는데, 특히 백두금왕은 호랑이 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이 용맹하여 신선들이 마괴를 몰아낼 때 앞장서서 마귀들의 목을 물어 죽인 선봉장이었다.
백두금왕은 그 위용을 인정받아 요괴신선인 요선이 되었으나 태생이 싸우는 걸 좋아하니 결국 천계에 쫓겨나 요계의 사영수가 되었다.
난 산 전체가 온통 거대하고 날카로운 가시나무로 가득한 호금산 아래서 무녀 송화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으며 머리를 긁적였다.
내가 할 일은 간단했다.
호금산의 호랑이들을 제압하고 백두금왕을 만나 그와 싸워 이긴다면 인정을 받는다. 여우들과 달리 호랑이들은 매우 매섭고 사납다고 했지만 그 편이 오히려 낫다.
그러나 난 곧바로 호금산에 입산하지 못했다. 송화의 이야기에 강렬한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신선, 천계라는 게 뭘 말하는 거야?”
처음엔 신선은 특별한 요괴, 천계는 요계의 어떤 곳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구미호가 전력을 내보인 내 힘을 반선이라고 칭했을 때부터 반신반의했는데, 백두금왕에 대한 송화의 설명을 들으니 확실히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내가 아는 세계만 해도 수십 개, 직접 가 본 세계도 열 손가락을 넘지만, 요계에서도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건 주목해야 할 일이다.
내 질문에 대답한 건 금나리였다. 녀석은 하얀 이를 얼뜨기처럼 드러내며 송화를 자랑스럽게 쳐다봤다.
“응! 우리 언니를 무녀로 봉한 것도 수월선자 님이신걸?”
“신선들이 하늘에 계실 땐 흉괴들이 날뛰지도 못하였지요.”
송화가 말을 덧붙여 설명을 했다.
신선과 천계.
요계의 ‘위’에 있는 곳.
난 머리를 올려 하늘을 쳐다봤으나 별과 달만 반짝일 뿐이다. 송화는 신선이 하늘나라에 산다고 했지만 추상적인 표현일 것이다.
요계는 내 상상보다 훨씬 복잡한 곳이었다. 송화의 말에 따르면 천계엔 신선들이 살며 그들은 요계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나 흉괴라 하여 재앙을 일으키는 요괴들이나 ‘지구’로 넘어가려는 요괴들이 있다면 벌을 내린다고 했다.
얘기를 들으니 신선들은 요괴들이 범접할 수 없는 강한 존재들인 것 같았다. 난 요괴들이 그토록 오랫동안 지구의 이면에서 살고 있었다면 지금까지 지구의 역사에 단 한 번도 표면으로 드러나지 않은 게 의아했었는데, 신선이란 중재자가 있으니 가능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요괴들이 신화와 이야기로만 전해질 뿐, 실존의 역사가 되지 않은 건 신선들이 감췄기 때문이었다.
“그분들은 사라지셨어요. 구황월의 나무 끝자락에서도, 태심의 동굴에서도 천계로 가는 길은 더 이상 열리지 않아요. 아마… 감히 불경이 예상하자면 신선님들은 천계와 같이 모두 소멸하였겠죠. 도의 극에 다른 자라도 포악한 대전이의 아가리를 피할 수는 없었던 거예요.”
송화는 흉괴들이 날뛰는 것과 요괴들이 허락받지 못한 땅 ‘지구’로 넘어가려고 하는 건 전이의 영향과 더불어 신선들의 부재가 컸다고 했다. 그러며 수천 년 동안 굽어살피던 그들이 혼란함으로 가득한 요계를 방관하진 않을 테니 대전이로 인해 모든 신선들이 멸망했다고 여겼다.
‘대전이 이전에도 이런 괴상망측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니.’
난 지구의 모든 괴상망측한 것들은 대전이 이후 생겨났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마물원 일을 하며 인어나 요괴들과 엮이며 내가 무지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니, 인간들은 모두 무지했지. 대전이 전의 현대인들은 신화와 괴물과 마법은 모두 거짓이라고 생각했었다. 당연하지. 누가 요괴를 진짜라고 생각하겠어?
문제는 사실 진짜 다 존재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제 내게 더 이상 새로운 사실에 놀랄 수 있는 감각 회로가 존재할까 싶다. 지금만 해도 그렇다. ‘고아인 내가 이세계에선 잘나가는 대요괴라고?’
허, 참.
*
호금산에 올라가려는데 요괴들이 같이 따라나섰다. 난 그들더러 산 아래서 기다리라고 했으나 해주주의 요괴 무리와는 다르게 새로 합류한 놈들은 내 말을 거절했다.
“싫소. 대장! 내 명예는 당신에게 종속되었으니, 죽는 곳은 내가 선택하오.”
요괴들은 강자를 숭배하지만 그렇다고 마냥 복종하는 건 아니었다. 특히 저놈들이 그렇다. 도깨비라고 불리는 요괴들은 먼저 덤벼 놓고 박살을 내 놓으니 날 대장이라 따르기 시작했다. 말 잘 듣는 부하라면 모를까 성가시기 짝이 없다.
“아니, 시벌 너네 대장하기 싫다고. 안 말릴 테니까 좀 꺼지래도?”
짜증을 잔뜩 부려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도깨비들은 참 단순했다. 목숨을 살려 준 자를 섬기는데 충성이랄 것도 없는 게 출세에 대한 욕심도 많아 호시탐탐 제 이름을 알릴 궁리를 했다.
“대장의 발목을 잡진 않을 거요! 호금산의 호랑이가 그리 매섭다던데, 어디 내 도깨비방망이와 견줄 수 있는지 궁금해서 그러오.”
지금도 놈들은 호금산에 올라 호랑이 요괴들과 싸워 이름을 알릴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난 협박에도 꿋꿋이 날 따라나서는 요괴 놈들을 둘러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장님이 보면 기가 차시겠군. 요계에 대해 알아보라고 보냈더니 뭔 개짓거리를 하고 있으니.”
난 목적이 요괴들과 상이했다.
지천괴왕이 되려는 대요괴들은 저마다 백귀야행을 하며 요괴 군단을 몰고 다녔다. 백귀야행의 세勢 는 곧 이끄는 요괴의 명성과 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난 지천괴왕이 되려는 과정이 필요했지, 지천괴왕이 된 이후를 생각해 보진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난 인간이다. 요계에 온 이후로 녹색 공기를 마시고 달밤에만 움직이며 하도 치고 박고 싸우다 보니 인간으로서의 감각이 둔해지고 있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요괴처럼 변하고 있었고, 분명 달가운 변화는 아니었다.
“분명 내 줏대는 이쑤시개만 할 거야.”
하지만 난 녀석들을 버리고 도망치지 못했다. 녀석들의 힘은 영수의 인정을 받는 과정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지만 망할 요괴 놈들의 버릇이 옮았는지 기껏 얻은 세를 버리긴 싫었던 것이다. 졸렬한 생각이지만 요괴들을 이끌고 밤하늘을 날면 내 자신이 정말 뽀대가 났다. 단지 그 이유다.
“날 따라나선 건 네놈들이니 묏자리를 챙겨 줄 여유는 없다. 남을 자는 남고, 따라올 자는 각오하고 와.”
떠날 요괴 말리지 않을 생각이었으나 내 말에 오히려 해주주와 그를 따르는 요괴들마저 호금산에 오를 작정 같았다.
“쓰읍.”
내 뒤에 선 수백 요괴들을 보자니 기이한 기분이 들었다. 놈들은 비록 요괴들이나 날 따른다. 처음으로 내 인생에서 우두머리가 되어 버린 것이다. 마물들을 돌보며 ‘우두머리’ 개체를 자주 봐 왔다. 녀석들은 마물이긴 하나 느끼기에 다른 개체에 비해 기개 자체가 달랐다.
포근이만 해도 그렇다. 동족을 지키기 위해서 불의 어룡에게도 맞서 싸웠었다. 하지만 내가 어떤 무리를 이끈다고? 기이한 기분은 본래의 내 모습과 현재 내 모습의 차이에서 오는 이질감이었다.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굳이 비유하자면 난 무리 짓는 늑대가 아니라 고독하게 사냥하는 호랑이… 젠장, 아무튼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난 호금산의 기슭으로 올라갔다.
내 뒤로 요괴들이 따른다. 호금산엔 흉포한 기세를 내뿜는 사나운 놈들의 기척이 즐비했다. 놈들을 넘어 더 깊숙한 곳엔 웅크린 무언가가 있었다. 자세히 느낄 순 없지만 놈이 분명 백두금왕이겠지.
거대한 가시가 빼곡히, 험하게 자라난 산 입구. 난 걸음을 멈추고 호금산을 올려다봤다. 살벌하기 그지없는 산이다. 산의 속살이 그대로 드러난 암벽에 잎사귀 하나 없는 나뭇가지들은 맹수의 뻣뻣한 털 같아 언뜻 보면 거대한 맹수가 웅크린 모습 같다.
그르르-!
크진 않지만 천둥소리보다 무섭게 들리는 울음소리.
“으앗, 수호대장군! 난 해주주 님과 여기 남을래. 괜찮지?”
간간이 울리는 호랑이의 울음소리는 요괴들마저 겁을 먹게 했다. 난 꼬리를 말고 귀를 젖힌 금나리를 해주주에게 맡겼다. 해주주는 금나리를 귀찮아하는 눈치였으나 내 부탁에 기슭에 남아 주기로 했다.
“백두금왕을 뵙기 위해선 산군들의 호환을 견뎌야 합니다. 그들은 여우들과 달리 상대를 오로지 자신이 인정한 자와 먹잇감으로만 구분하니 대부분의 요괴들은 금왕을 뵙기도 전에 금산에 뼈를 묻고 말지요.”
송화의 말에 난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겁주는 겁니까?”
송화, 그녀의 성격은 생각보다 더 괴팍했다. 신비롭지만 따분하고 재미없는 성격일 거라 생각했는데, 말투를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은 것 같네.
“준다고 하여 두려움이 생긴다면 더한 이야기도 들려드리지요. 그러나 그대에게서 두려움이 전혀 느껴지지 않습니다. 뒤의 요괴들이 벌벌 떠는 것에 비하면 그대는 너무 평안하지 않습니까?”
날 따라오겠다고 바락바락 소리 지르던 도깨비놈과 다른 요괴들은 송화의 말대로 호랑이 울음소리를 들은 이후로 입을 다물고 불안한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고 있었다. 지금 하산하라고 하면 냉큼 알았다고 말할 꼴이지만 지들이 내뱉은 말은 감수해야지.
“다만 두려움과 별개로 조심하셔야 합니다. 호금산에 초목이 자라지 않은 이유는 죽은 요괴들의 독기가 땅에 파묻혀 있기 때문입니다. 방심하시면 가시나무의 양분이 될지도 모르지요.”
송화의 말은 비약이 아니었다. 정말 호금산은 산이긴 하되 초목이 여문 보금자리라기보다 맹수들이 득실거리는 위험한 둥지 같았다.
그러나 이 꺼림칙한 두려움은 내게 익숙한 것이다. 마물원 일과 별반 다를 바 없잖아?
송화가 옆에서 걷고 내 뒤를 요괴들이 따른다. 난 망설임 없이 백두금왕의 호금산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하지만 결의와 달리 몇 걸음 걷지 못했다.
“스으으읍격! 스으으으으읍격!”
요괴 중 종달 요괴라고 있다. 종달새에 사람 얼굴이 달린 괴조인데, 녀석들의 능력은 자신에게 향하는 위협을 미리 느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위협의 대상이 자신과 얼마만큼 거리가 떨어져 있는진 상관치 않았다.
난 종달 요괴의 시끄러운 경고에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봤다. 잠시 후, 내가 가진 ‘센서’에도 놈들이 느껴졌다. 기감이 밝은 거미 요괴인 해주주 또한 눈치채고 말을 했다.
“옥뇌봉의 천뢰조들! 서방의 번개를 부리는 요괴들이 여기까지 왔단 말인가?”
놈들이 시야로 식별할 수 있을 만큼 가까워졌다. 몰려드는 먹구름에 거대한 딱따구리들이 있었는데, 깃털은 파란색이었고, 부리는 노란색이었다.
놈들은 가끔씩 인위적인 번개를 흩뿌리며 이곳으로 곧장 오고 있었다. 적의가 느껴져, 목적은 명백해. 우선 경쟁자를 제거하려는 모양이로군.
“스으으으으우우우웁격!”
그때였다.
종달 요괴가 또 울고 자빠졌다.
난 이제 고개를 틀어 북쪽 평야를 쳐다봤다. 그곳에서 요괴들의 기운이 느껴지나 눈으로 보이진 않았다. 다만 넓은 평야가 지진을 일으키며 바다처럼 출렁거리고 있었다.
이번엔 송화가 말했다.
“묘괴굴의 땅요괴들까지 나섰군요. 이런, 성가시겠어요.”
살에 소름이 돋고 까칠까칠 따가운 게 놈들이 날 얼마나 적대하는지 피부로 느껴질 지경이다.
“스으으… 웁!”
이번엔 달려가 종달 요괴를 냅다 차 버렸다. 위험을 미리 경고하는 건 고마운데, 너무 시끄럽다. 안 그래도 골치 아파 죽겠는데.
하늘에서, 지하에서 요괴가 오더니 이젠 바다 요괴까지 등장했다. 물에 사는 수괴들은 ‘물’을 타고 이곳까지 왔다. 과연 요계라 기상천외한 것들이 많네. 살아 움직이는 거대한 강이라니.
“날 노리고 왔군.”
흑목산에서 경고했었고, 소문에 퍼져 내가 구미호의 인정을 받았다는 걸 알 것이다. 즉, 놈들은 내 강함에 상관없이 덤벼드는 요괴들, 만만치 않은 자들이다.
놈들은 가까운 곳에서 멈췄다. 세 요괴 무리는 서로 세력이 맞닿아 있었으나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다.
지금 동시에 나타나는 타이밍도 그렇고, 온전히 적의가 내게만 쏟아지는 것도 그렇고 역시.
난 흑목산에서 사용했던 묘리로 놈들이 들리게 큰 소리로 외쳤다.
“다구리 치러 왔냐?”
세 요괴 무리가 합심하여 내게 맞서니 주변이 요괴들로 득실거렸다.
젠장, 쉬운 얘기다. 특출한 경쟁자를 제거하기 위해서 힙을 합치는 건 지구에서도 흔한 일이지.
“많아도 너무 많아.”
놈들의 선두에 선 요괴 세 놈.
하늘을 날며 번개를 치는 새, 땅을 헤엄치는 땅요괴, 물을 수족처럼 다루는 수괴. 이길 수 있다. 나라면 가능하다. 문제는 놈들은 날 ‘다구리’ 칠 생각이다. 나머지 수백 요괴들이 덤벼들면 나라고 해도 당해 낼 수 없다. 내 세력이라고 해 봤자 놈들의 세에 십분지 일 수준이니 버티기에도 벅차.
“원장님은 이런 상황을 예상했을까? 에이, 설마. 아무리 혜안이 뛰어나다고 해도…….”
적의를 태우며 슬금슬금 덤벼오는 놈들을 보던 난 품에서 붉은 주머니를 꺼냈다. 구미호를 겁줄 때 사용했던 원장님의 기운이 담긴 주머니였다. 지금은 기운이 모두 빠져나갔지만, 사실 이 안에 담긴 건 원장님의 기운만이 아니었다.
상자 한 개와 쪽지가 있었다.
그리고 쪽지엔 경고 문구가 크게 적혀 있었고.
[취급 주의]
가끔 내 상사지만 정말 무섭다.
아니, 드래곤이니까 당연한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