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요괴 (10)
원장님은 목적에 충실했다.
날 요계로 보낸 건 요계를 조사하기 위한 파견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원장님은 목적을 이루기 위한 어떤 장치까지 개발하였다.
난 쪽지를 읽어 갔다.
설명서에 가까웠다.
[취급 주의]
1.개요
[요계는 지구의 전이를 촉진시키는 요소 중 중요도가 높아 실험 장소로 적합함. 이 장치는 요계의 데이터 수집을 위한 용도로만 사용되며, 성공 시 전이를 늦출 수 있는 획기적인 수단이 될 거라고 사료되어짐. 다만 차원을 다루는 만큼 위험도가 높아 결합과 안정을 위주로 조율되었음.]
이 장치는 원장님이 요계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자신만의 지식으로 전이를 늦추기 위한 장치였다.
“대장! 뭣 해? 에라이, 쌍!”
끼이이이!
콰르르릉-!
와르르! 쾅쾅!
밀려드는 요괴 대군과 그 모습에 안달 복걸하는 우리 쪽 요괴들의 비명이 가득하여 시끄러운 와중에서도 난 꿋꿋이 설명서를 읽었다.
2.목적
[요계는 지구에 귀속된 세포 차원이나 그 규모가 상당하여 지구의 전이에 막대한 영향을 끼치고 있음. 그러나 지구는 전이가 반복될수록 차원이 확장되나 요계는 한정되어 있으며, 존재력의 용량이 한계에 다다름. 이대로 조치를 취하지 않고 방관한다면 차원 붕괴가 일어날 위험이 있으며, 붕괴의 영향력으로 지구에 제2의 대전이를 일으킬 위험이 다분하다고 여겨짐. 따라서 두 가지 수단을 사용하여 방비함. 첫 번째 수단은 가디언의 역량에 달려 있으며, 이 장치는 두 번째 수단에 불과하고 실험적 성격이 강함.]
뭐야, 이렇게 중요한 목적이 있었어? 단지 요계를 조사해 달라고만 했잖아. 이번엔 나름 준비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더 물어봤어야 했었나. 원장님은 ‘첫 번째 수단’에 대한 추신도 적어 놨다. 이 추신을 읽고 있을 때쯤이면 자신의 기운을 사용한 시점이니 알맞은 때라고 말하며 요괴들을 설득하여 지구로 이주할 방안을 모색하라고 했다.
어쩐지 저번에 원장님에게 보고했을 때 날 믿는다고만 하더니 꿍꿍이가 있었다.
‘미리 알려 주지 그랬냐.’
원장님은 참 쓸모없고 못되기만 한 버릇이 있었다. 뭐, 결국 난 꼭두각시처럼 그녀가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만.
그게 싫다는 것이다.
[이 장치는 차원과 차원을 결합하여 존재력의 균등화를 강제로 실행하며 존재력의 이식을 목적으로 함. 강제 연결은 몹시 위험하나 요계가 지구의 세포 차원이라 그에 따른 부작용은 감수할 만한다고 여겨짐.]
난 원장님의 설명서를 읽으며 구미호를 떠올렸다. 구미호는 요계의 붕괴를 막기 위해 자신을 희생했다. 자신이 가진 존재력이 너무 막대하여 요계가 붕괴되기 전에 스스로 죽음을 택한 것이다.
이 장치는 쉽게 비유하자면 물이 가득한 물탱크에 호수를 꽃아 여유가 있는 다른 물탱크로 뽑아내는 장치였다. 무슨 요계가 지구에 귀속된 세포 차원이라 가능하며 그마저도 일시적인 방편에 불과하다고 설명서엔 적혀 있었으나 자세한 건 모르고 알 필요도 없었다.
설명서의 끝엔 작동 방법과 경고가 적혀 있었다.
[가동 시간은 10분이며, 시간이 지나면 장치는 자동으로 멈출 겁니다. 이 장치는 개폐자의 기억과 마나, 즉 다정 씨의 경험에 영향을 받아요. 하지만 존재력의 균등 배출을 위한 장치니 걱정은 하지 마세요. 장치가 가동되는 구역은 힐링 필드가 발동되고 있으니 그들이 다치는 일은 없을 거예요. 그럼에도 위험에 처한다면 상자를 닫아 강제로 중단시켜요.]
“대장!”
설명서를 다 읽고 나자 요괴 군단이 기슭 아래까지 도달한 후였다.
하지만 난 놈들에게 신경 쓰지 않고 머리를 긁적이며 상자만을 바라봤다. 설명은 복잡했지만 원리는 간단했다. 이 상자를 열면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한 ‘다른 세계’와 이 주변 일대가 10분 동안 결합되어진다. 다만 그에 따른 결과를 예상할 수 없으니 망설였다.
“모두 귀갑둔석진을 펼쳐라!”
내가 가만히 있으니 해주주가 나서서 요괴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난 상자를 쥔 채 놈들 앞에 나섰다. 원장님의 지시대로 장치를 작동시키며, 설명서를 읽었을 때부터 생각해 왔던 말을 소리쳤다.
이 장치, 너무나 닮았다.
“어디로든 문!”
상자가 열렸다.
단지 그뿐이다.
그러나 요계가 변하기 시작했다.
변화를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송화였다. 내가 여우들을 죽일 뻔했던 순간에도 태연히 걸어왔었던 송화는 이번엔 허겁지겁 뛰어오며 소리쳤다.
“이건……! 용혈이 강제로 열리고 있잖습니까! 대체 무슨 짓을……?”
“괜찮아요. 원장님은 도라에몽이니까.”
“네?”
당황하는 송화를 진정시키며 난 담담히 요계의 변화를 바라봤다. 파란 깡통 고양이의 도구는 절대 실패하지 않아. 문제는 감당하기 버거운 결과를 불러올지도 모른다는 거지만. 뭐, 원장님이 날 믿으니 내게 이 장치를 맡겼겠지.
내 교감의 힘은 마물의 힘을 빌린다. 하지만 요계엔 마물이 없었다. 아마 원장님이 이 장치를 위급할 때 사용하라고 한 것도 그 때문이겠지.
진군하던 세 요괴 무리도 급격히 변화하는 요계에 허둥지둥 물러나기 시작했다. 지금 이곳에 서 있는 자들은 더 이상 날 향한 적의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보다 더 중한 것, 자기 자신의 생존 때문에 날 신경 쓸 겨를이 없는 것이다.
천둥새들이 우레를 뿌리며 날개를 펼쳤지만 놈들은 더 이상 날지 못했다. 뜨거운 기류가 소용돌이쳤고, 이내 땅이 무너지고 빈자리가 용암으로 차올랐으며, 하늘은 붉게 물들더니 재를 뿌리며 활활 타는 화염의 비를 내리기 시작했다.
양해의 바다다.
한시적인 영역이지만 분명 요계의 일부분이 양해의 바다처럼 변했다. 그리고 그곳은 내 기억, 내 경험 속에 있는 곳이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수괴, 놈들은 살아 움직이는 강을 타고 호금산까지 헤엄쳐 왔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차올랐다. 제한된 구역이지만 그곳은 하늘까지 모두 물로 차올랐다. 여기까지 느껴지는 바다의 소금 내. 일정 구역이 깊은 바다가 되어 버린 기괴한 모습은 뒤죽박죽 엉망이 된 어린아이의 꿈같이 느껴졌다. 저곳도 내가 아는 세계다. 거수들의 세계, 무량성계의 형용할 수 없이 깊고 넓은 바다.
이 장치는 주변의 존재력을 다른 세계로 배출한다. 하필 내가 서 있는 곳에 많은 요괴들이 몰려 ‘존재력’ 또한 쌓였기에, 환경은 또다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북쪽 방향의 평야 쪽이었다. 멀지 않은 곳에 활활 타오르는 불의 세계가 있건만, 그곳은 전혀 영향을 받지 않은 채 얼어붙었다.
남극처럼 빙하가 돋아났으며, 매섭고 시린 바람이 휘몰아쳤다. 땅을 헤엄치는 묘괴굴의 요괴들은 추위를 버티지 못하고 지상으로 몸을 내밀었다.
저곳도 내가 아는 곳이다.
니플헤임, 빙설로 덮인 안개의 나라. 그리고 녀석들의 세계. 난 하얀 머리를 매만지며 쌓여 가는 빙설을 지켜봤다.
“오랜만이다, 드래곤 스케일.”
주변 일대가 바뀌어 세 개의 다른 세계가 공존하니 복잡하고 기묘했지만 환상적이며 아름답기도 했다.
난 오른쪽 끝에서부터 시선을 두고 천천히 반대편까지 둘러봤다. 몸을 움직일 것도 없이 고개를 돌렸을 뿐인데 세 개의 세계가 한눈에 들어왔다. 불과 물과 얼음의 세계는 서로 엮이지 않으며 철저히 경계가 나뉘어 있었다. 하지만 휩쓸린 요괴들은 아니었다.
생소한 환경에 괴로워하며 벗어나려고 했으나 양해의 바다에서 벗어나도 무량성계의 바다가 나타나니,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원장님의 공간 이동 마법에 휩쓸렸을 때와 같아. 하지만 계속 느껴져. 이 박탈감, 확실히 위험해.’
장치의 위험성에 대한 원장님의 생각은 옳았다. 요계의 일부에 지나지 않으나 다른 세계와 결합된 건 너무나 위험했다. 심지어 나조차도 주변 공간이 물에 젖은 종이처럼 찢어지기 쉬운 상태라는 걸 느낄 정도였다. 영 못 써먹을 장치로군.
‘10분.’
난 메타소드를 꺼냈다.
변화된 요계의 환경에도 굳건히 적의를 드러내는 놈이 세 마리 있었으니 놈들은 무리의 우두머리 요괴다. 내 움직임을 따라 놈들도 따라온다.
“성가셔.”
놈들과 가까워질 때였다.
다른 요괴들이 허덕이는 사이 빠르게 처치하려고 했으나 벌써 적응한 놈들이 있었다. 난 세 마리의 대요괴들을 뒤따르는 수십 요괴들의 기척을 느꼈다. 망할, 수백 마리를 상대하는 것보단 낫지만.
두근거리는 심장이 몸을 데우고 긴장감에 혀가 메마른다. 격돌을 대비하며 양해의 바다에 발을 디뎠을 때였다.
“어어… 오오!”
원장님은 이 장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세계를 결합시킨다고 했지.
그렇다는 건.
뀨우-!
놈은 성체 샐러맨더라서 저런 귀여운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하지만 녀석은 마치 날 알아봐달라는 듯, 어릴 때부터 자주 내던 울음소리를 힘겹게 만들어 발성했다. 아무렴 내가 널 기억하지 못할까.
녀석은 어릴 때처럼 내게 안겨 왔다. 젠장, 마치 코끼리 세 마리를 동시에 안겨 든 것 같다.
“오… 구오구, 내 새끼.”
하지만 무겁다고 내팽개칠 순 없지. 괴력을 발휘하며 녀석을 안아들고 동동 어부바까지 해 줬다. 허리가 끊어질 것 같지만 참아야 했다. 녀석은 이제 무리를 이끄는 우두머리였으나 내 앞에선 여전히 애기였다.
‘뜨거워.’
녀석을 안아들자 몸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의 기운이 맹렬히 타오르기 시작했다.
“너, 더 강해졌구나.”
아무리 포근이의 기운을 자유자재로 쓴다고 해도 녀석이 곁에 있는 것과 없는 건 발휘되는 힘이 다른 것 같았다. 녀석은 전보다 더 강해져서 덩달아 내가 받아들이는 불꽃도 한층 더 강렬해졌다.
뀨.
반갑게 몸을 비비적거리던 녀석이 갑자기 토라져 몸을 돌렸다. 지금까지 왜 자길 찾아오지 않았냐고 따진다.
“인마, 내가 얼마나 바빴는데. 알았어. 미안해. 이제 자주 찾아갈게.”
난 일에 치여 살아 자식과 놀아 주지 못하는 부모라도 된 것처럼 머쓱해져선 일이 바쁘다며 핑계를 댔다. 포근이의 자립을 위해 만나지 않으리라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괜한 걱정이었다는 생각이 드네.
요괴들은 갑자기 내가 포근이와 가족상봉을 하고 있자 당황한 눈치였다. 남은 시간은 이제 7분쯤 남았나. 녀석과 뒹굴거리고 싶지만 할 일은 해야겠지.
“녀석들을 데리고 뒤로 물러나 있어. 위험해.”
결합된 곳은 양해의 바다, 샐러맨더의 영역이었다. 난 용암 아래 느껴지는 수많은 샐러맨더의 기운에 포근이에게 말했다. 녀석, 벌써 이렇게 많은 무리를 이끄는구나.
크아앙!
하지만 녀석은 오히려 다른 샐러맨더를 불렀다. 용암 아래서 거대한 샐러맨더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전에 양해의 바다에서 포근이와 싸웠던 다른 샐러맨더 우두머리인가? 포근이는 이제 녀석들의 우두머리가 되어 있었다.
‘하긴, 원래 이런 녀석이었지.’
지금에 비해 좁쌀만 하던 시절부터 날 위해 싸워 주던 용기 있는 녀석이다. 난 녀석이 위험해지는 걸 원치 않았으나 그보다 더 제 의지를 꺾고 싶지 않았다.
콰르릉-!
내가 잠자코 있자 놈들이 먼저 선제공격에 나섰다. 번개가 몰아친다. 경계할 만큼 강한 공격이었다.
화르륵!
그러나 샐러맨더들이 내뱉은 화염을 뚫지 못했다. 샐러맨더의 불꽃은 보통의 불이 아니다. 요기가 담긴 번개마저 불태워 버렸다.
“어디까지 내다본 거야.”
번개를 완전히 태운 건 아니라 샐러맨더들도 상처는 입었다. 그러나 금세 상처가 아물었다. 난 빛나는 오리하르콘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원장님의 마법, 힐링 필드가 이걸 말하는 거였군.
“맡길게.”
뀨!
포근이와 샐러맨더들이 천둥괴조들을 상대할 때, 난 ‘홍아’를 움켜쥐고 괴조들의 우두머리를 향해 달려갔다. 양해의 바다에서 있어서인지, 포근이가 곁에서인지 내 힘은 전과 비교할 수 없이 강렬한 불꽃이 될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