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요괴 (11)
천둥괴조는 요계의 서쪽 끝자락에 옥뇌봉에서 온 요괴들인데, 놈들을 이끄는 거대한 새는 지구의 신화에선 ‘선더버드’라 불리는 유명한 괴물이었다. 날갯짓 소리가 천둥이 되고, 눈빛이 번개가 된다는 신화에 걸맞게, 사납고 위험한 놈은 고래를 집어삼킬 만큼 거대한 덩치로 양해의 바다의 피어오르는 불꽃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천둥을 흩뿌리며 하늘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풍종도보의 묘리로 구름처럼 가벼워진 난 하늘을 날다시피 하며 놈을 쫓았다. 덩치가 큰 만큼 날쌔진 않아 쉽게 놈의 지척까지 따라잡을 수 있었다.
“홍식.”
가까워졌을 때쯤 홍아를 뻗어 홍식을 펼쳤다. 화살처럼 빠르게 붉은 화염이 쏘아졌다.
콰르르릉-!
그러나 놈이 펼치는 힘은 반대로 내가 펼치는 검술보다 훨씬 빨랐다. 놈은 어떠한 사전 행동도 없이 날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눈빛이 번개가 되어 화염을 상쇄시켰고, 곧바로 벼락을 내려 날 강타했다.
“크으으!”
머리털이 쭈뼛 선다. 피부를 타고 흐르는 전기가 날카로운 칼이 되어 혈관을 마구 헤집어 놓는다. 온몸이 타는 고통, 얼마나 지독한지 검 끝을 피뢰침 삼아 번개의 기운을 내뱉으려고 해도 놈의 기운은 내장을 진탕시키며 끈질기게 버텼다.
난 양해의 바다로 곤두박질 쳐 바위도 녹이는 용암에 처박혔으나 몸은 멀쩡했다. 오히려 따뜻한 기운이 차올라 뇌전이 남기고 간 상처를 치료해 줬다. 샐러맨더의 불꽃 덕이긴 하지만 원장님의 마법의 영향도 있는 듯했다.
“후우.”
과연 대요괴란 놈이다.
허투루 생각하진 않았으나 생각보다 더 짜릿한 새끼였다. 하지만 반대로 말하면 난 대요괴라 불리는 놈의 번개에 직격당했어도 이 정도 상처밖에 입지 않았다. 내 상대는 안 돼.
우르릉!
놈은 날 떨어트리곤 유유히 하늘을 날며 천둥소리를 냈다. 난 이빨을 빠드득 깨물었다. ‘새로운 검’을 사용하려고 했으나 형편이 여의치 않다. 결국 난 홍아를 들어 올려 다시 놈을 꿰뚫을 홍염의 화살을 준비했다.
“더 빠르게.”
샐러맨더의 기운에 다른 마력을 섞으면 쉽겠지만 힘을 낭비해선 안 돼. 난 대요괴들을 제압한 후 곧바로 호금산에 오를 생각이었다. 구미호 때를 생각해 보면 최상의 상태로 전력으로 부딪혀도 백두금왕에게 인정을 받을지 확신이 없다.
힘의 낭비가 덜한 홍식의 검만으로 놈을 죽일 생각을 하고 있었을 때였다. 샐러맨더가 있던 곳에 강한 번개가 쳤는데, 곧바로 화염이 산불처럼 일어나며 샐러맨더를 지켜 냈다.
포근이의 힘이었다. 그러고 보면 이 검을 처음 사용했을 때도 지금과 비슷한 상황이었지. 양해의 바다에서 포근이의 모습을 따라 하며 처음 만들어 냈었다. 난 검을 내리고 천둥괴조들과 싸우는 포근이를 지켜봤다.
녀석은 샐러맨더들 사이에선 군계일학이었으며, 요괴들도 두려워하는 천둥괴조들을 상대로도 압도적이었다.
포근이가 숨결을 내뱉자 천둥괴조들이 맞서 번개를 내려쳤으나 화염은 꺼지지 않고 계속해서 뻗어 나가 결국 괴조들을 날개를 불태워 추락시켰다. 숨결은 계속 뻗어 나갔다. 계속해서 말이다.
“젠장, 당연한 거잖아.”
그 모습에 난 불현듯 깨달았다.
“그렇게도 사용하는구나.”
애초에 이 힘은 샐러맨더의 숨결을 모방한 것이다. 그때의 포근이는 제 힘을 한 번의 호흡으로밖에 내뱉지 못했으나 지금은 달랐다. 난 화염방사기처럼 적을 불태우기 전까지 끈질기게 타오르는 숨결을 지켜보며 나도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포근이와 마찬가지로 나도 그때와 달라졌으니까.
굳이 눈치채지 못할 만큼 빠를 필요는 없어. 놈의 힘을 뒤덮을 막대한 화염이라면.
“홍식.”
붉은 송곳니의 검 끝에서 단숨에 산마저 불태울 막대한 양의 화염이 뿜어져 나온다. 전에 펼쳤던 홍식에 비해 빠르거나 특별히 강하진 않았으나 ‘규모’가 틀렸다.
이건 단지 방식의 차이다.
다른 마물의 힘을 빌려와 다룬 게 아니었기에 힘의 소모는 적었다. 그저 여러 번 사용할 힘을 단번에 방출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까.
콰르릉!
천둥괴조들의 우두머리는 다시금 지켜보는 눈빛만으로 낙뢰를 내렸다. 그러나 홍식의 화염은 놈의 힘에 찢기고 흩어져도 계속하여 뻗어 나갔다. 놈의 낙뢰가 쉴 새 없이 내려쳤으나, 홍식은 번져 가는 산불처럼 기세를 멈출지 몰랐다.
마침내 거대한 화마가 우두머리 대요괴의 몸에 덮쳤다. 놈은 발버둥 치며 괴로워했지만 불은 꺼지지 않았다. 시퍼런 뇌전을 마구잡이로 방출하던 뇌조는 결국 날개를 펼치지 못하고 추락했다.
꾸룩!
그때였다.
추락하던 놈이 정신을 차리고 날개를 펼쳐 달아나기 시작했다. 놀라운 회복력이었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원장님의 마법 때문이로군.
난 다시 한번 홍식을 준비했다.
원장님의 마법으로 기운을 차렸으나 상처가 모두 쾌유되진 않았다. 놈은 이번 공격에 확실하게 목숨이 끊어질 것이다. 이번엔 낭비 없이 빠르고 정확한 홍식을 펼쳤다. 작지만 놈의 머리를 꿰뚫을 불꽃이 별똥별처럼 하늘을 태우며 맹렬하게 쇄도했다.
꾸루룩-!
그러나 불꽃은 어디선가 날아온 물줄기에 힘을 잃었고, 천둥새의 꽁지깃을 태우는 것에 그치고 말았다.
‘언제 나서나 했더니.’
천둥괴조는 양해의 바다를 벗어나 무량성계 바다의 경계에 들어갔다. 난 바다 너머에서 날 지켜보는 거대한 두꺼비의 시선을 마주했다.
‘와 볼 테면 와 보라는 거군.’
놈은 수괴들의 우두머리, 두꺼비 대요괴 오가마大蝦?였다. 다른 두 대요괴들은 양해의 바다에 건너오지 못했다. 물과 땅에서 사는 놈들이라 차마 발을 딛기 두려운 모양이었다. 그러니 날 유인하려는 듯 괴조들의 우두머리를 무량성계의 바다로 데려갔다.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망설임 없이 풍종도보의 경공을 극성으로 끌어올려 무량성계의 바다에 들어갔다. 아니, 입수했다고 표현해야 하나.
바다의 세계.
깊숙한 심해.
막대한 수압이 느껴진다.
인간의 발과 다리는 물속에선 하등 쓸모가 없었다. 난 내 주위를 감싸는 수백 마리의 수괴들을 둘러봤다. 두꺼비, 상어, 도롱뇽, 어인. 그 외 다양한 해산물 잔치가 벌어졌다.
그 너머에 힘을 회복 중인 천둥새와 유유히 날 지켜보는 거대한 두꺼비 오가마가 있었다. 놈과 마주하고 난 뒤 난 나른해지는 기분을 피나도록 주먹을 꽉 쥐며 저항했다.
‘개 같은 놈일세.’
오가마大蝦?, 해주주의 기억에 따르면 놈은 산의 정기를 빨아먹는 두꺼비 요괴다. 수천 마리의 수괴들이 득실거리는 황하에서도 대요괴로 인정받는 몇 안 되는 놈이며, 놈이 가진 특기는 ‘정기를 빨아들이는 것’이다.
마법도 아니고 어떤 저항할 수 있는 개념의 힘이 아닌 ‘기괴하고 요사스러운’ 요괴의 힘이었기에 난 빠져나가는 마력을 막을 수 없었다.
수백 마리의 수괴를 뚫고 내 힘을 야금야금 흡수하는 오가마를 죽여야 했다. 호금산에 곧바로 오르려고 생각했던 건 이처럼 성가신 대요괴들이 더 몰려오는 걸 걱정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여유 부릴 단계는 지났다.
난 세 가지 힘을 끌어올렸다.
이 힘이라면 다른 요괴들을 무시한 채 오가마와 천둥괴조만을 죽일 수 있겠지.
검을 들어올렸다. 아니, 이제 검이 아니라 거대한 몽둥이다.
투박한 몽둥이는 점점 거대해졌다.
쿠라라락-!
내 모습에 두꺼비 요괴가 물거품을 뿜어냈다. 그러자 수백 마리의 수괴들이 내게 덤벼든다.
난 잠자코 힘이 모이길 기다렸다.
[…마.]
하지만 난 다시 한번 힘을 내려놓아야 했다. 머릿속에 들려오는 희미한 말소리. 누가 내게 말을 걸고 있다. 이번엔 요괴들 때문이 아니었다. 난 내 발 밑, 깊이를 알 수 없는 어두운 심해로부터 상승하는 거대한 기운을 느꼈다.
‘익숙한 기운.’
마침내 내가 녀석이 누구인지 깨달았을 때, 머릿속에 울리는 말소리도 뚜렷해졌다.
[엄마!]
날 엄마라고 부르는 녀석.
목소리는 귀엽게 들리나 심해로부터 헤엄쳐오는 녀석을 본다면 그 누가 귀엽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흠, 물론 얼굴은 귀엽긴 하지. 문제는 덩치다.
[엄마를 괴롭히지 마!]
난 끌어올린 힘을 ‘휩쓸리지 않도록’ 몸을 고정하는데 사용해야 했다. 녀석은 기특하게도 내게 적의를 보이는 요괴들을 자신의 적으로 여겼다.
장관이다.
수백 마리의 수괴들이 저항하지 못하고 한 입에 꿀꺽 삼켜지고, 단지 헤엄치는 녀석의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휩쓸려 박살 나는 광경은.
아주 무섭기 짝이 없어.
물속이라 소리는 나지 않지만 난 박수를 쳤다.
[여기가 네 구역이구나. 미안해.]
굳이 말하지 않아도 마물도 내 마음을 들을 수 있었다. 특히 녀석처럼 깊게 교감되어진 마물은 말이다. 녀석은 내 말에 거대한 눈망울로 날 바라봤다. 반짝이는 유리알처럼 맑은 눈이었다.
[언제나 보고 싶었어, 엄마.]
난 머쓱해서 뺨을 긁적이며 말했다.
[내가 남자인 건 둘째치더라도 난 엄마가 아니래도 그러네. 진짜 엄마와 만났었잖아.]
기쁘지만, 어색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내 말투는 괜히 날 서 있었다. 하지만 녀석의 대답은 따뜻했다.
[난 기억해. 엄마는 인간이지만 어린 날 위해 주던 그 모든 순간들을. 그러니까 엄마라고 부를래.]
녀석과는 잠깐 만났을 뿐이다.
심지어 그 만남도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다. 그냥 녀석의 어미를 찾아 주기 위해 아주 약간 노력했을 뿐인데.
[엄마는 내 가족이야. 그리고 내 가족은 모두의 가족이지. 엄마는 걱정하지 마. 나쁜 녀석들, 혼내 줄게.]
깊은 바다 아래, 심해에서부터 거대한 그림자가 올라온다. 그러자 요괴들마저 두려워한다.
대요괴 오가마라도 다르지 않았다.
난 이토록 넓고 광대한 바다가 한순간에 가득해지는 광경을 목도했다. 생명이 자아내는 대자연을 넘어선 웅장함에 이유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대륙 거북이 무리.
그들이 날 위해 나서줬다.
황하의 수괴들도, 집채만 한 두꺼비 대요괴도, 천둥을 뿌리는 괴조도 그들의 행진 앞에선 아무것도 아니었다. 모든 저항은 헛되었고, 코끼리의 발걸음 앞에 놓인 개미 떼에 불과했다.
대륙 거북,
단지 둥지를 찾아 바다를 헤엄치는 것만으로도 지구의 막을 수 없는 재앙이라 불리던 녀석들. 그러나 단지 전이로 인해 사라진 둥지를 찾던 것에 지나지 않았었지.
인류는 그 몸짓에 저항할 수 없었다. 그런데 그들이 명백한 적의를 가지고 해치려 드니, 그 누가 막을 수 있을까?(이런 생각을 하며 원장님이 떠올랐지만 논외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들이 지나간 자리엔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
[난 엄마를 잊지 않아. 우린 절대 잊지 않아.]
대륙 거북은 또다시 깊은 심해로 헤엄쳐 갔다. 난 깊은 심해로 사라지는 그들을 지켜보며 말했다.
[나도 널 잊지 않아.]
*
곧 장치가 가동을 멈추지만 이제 상관없다. 남은 대요괴는 한 마리. 빙설의 세계에 갇힌 채 저항하는 묘괴굴의 땅요괴밖에 없었다.
이미 묘괴굴의 요괴들은 니플헤임의 마물들에게 호되게 당하고 있어 내가 손쓸 건 그다지 없었다.
“아이스독들…….”
난 묘괴굴의 거대한 두더지 요괴를 상대로 거세게 달려드는 수백 마리의 아이스독들을 지켜봤다. 녀석들은 볼 때마다 마음이 시큰해졌다.
일주일의 생애, 난 녀석들과 평생을 같이했었지. 비록 짧은 시간이었으나 난 절대 아이스독들의 생애가 덧없이 사라졌다고 폄하할 수 없었다. 녀석들은 누구보다 충실히 삶을 살다가 갔으니까.
아이스독들은 신기하게도 누가 내 적인지 아는 것 같았다. 내가 다가가자 약속이라도 한 듯 우르르 길을 터준다. 난 아이스독들의 이빨에 몸이 얼어붙어 가는 두더지 요괴를 향해 홍아를 휘둘렀다.
마무리를 짓고 장치가 멈추기만을 기다리던 그때였다.
캉캉-!
갑자기 아이스독들이 내 곁으로 몰려오더니 짖기 시작했다. 난 무의식적으로 흰머리를 매만졌다. 확실히 모르나, 왠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젠장, 설마 이 녀석들.
허리를 숙여 녀석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자, 첫 만남에도 불구하고 거부감 없이 손길을 받아 줬다. 그뿐만이 아니라 아이스독들이 몸을 비비적대며 애교를 피우는 탓에 난 발라당 넘어져 까칠까칠한 얼음 같은 혓바닥 공격을 당해야 했다.
날 핥아 주는 녀석들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다.
“그 아이들의 아이들의… 너네들은 대체 몇 대손일까?”
일주일의 삶.
그러나 확실히 세상에 남겨졌구나.
하하하-!
난 아이스독들의 애교 세례에 몸이 얼어붙어 가면서도 목이 터져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