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176화 (176/258)

#176화 요괴 (12)

장치가 가동을 멈췄다.

요계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으나 다른 세계와 결합했던 흔적은 고스란히 남았다. 난 상자를 붉은 주머니에 넣으며 이건 못 써먹겠다고 생각했다.

데이터 수집용이라고 했으니 원장님도 알겠지. 너무 위험해. 만약 요계가 아니라 지구에서 이딴 장치를 가동시켰다면 어떻게 됐을까. 새삼 소름이 끼친다. 지구라는 거, 이렇게 보면 참 멸망하기 쉬운 것 같다니까.

우두머리 요괴들이 죽자 수하 요괴들은 전의를 잃고 뿔뿔이 흩어졌다. 국괴들 또한 벌써부터 혓바닥을 바쁘게 움직이며 요계 전역으로 퍼져 나갔다.

비록 천둥괴조, 오가마와 두더지 요괴는 대요괴라고 할지라도 날 잡기 위해 힘을 합쳐야 했던 수준에 지나지 않지만 대요괴 세 놈이 동시에 덤볐음에도 내 상대가 되지 못했던 건 사실이었다.

해주주의 기억에서도 그만한 역량을 가진 대요괴는 손에 꼽을 정도다. 그러니 이제 만약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 죽이려 드는 대요괴가 있다면, 지금껏 상대해 왔던 요괴들과 격이 다른 놈들일 것이다.

난 굳이 엮이고 싶진 않았다. 특히 요괴들 중엔 신화에서 신과 가까운 능력을 가진 놈들도 있었는데, 내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놈들은 힘의 서열을 벗어난 괴이한 힘을 다루기에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다.

아직 구미호 외에 인정을 받지 못했다. 운 좋게 영수들의 거처를 모두 알고 있는 송화를 알았으니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긴 싫었다.

난 널브러진 해주주와 다른 요괴들을 놔두고 홀로 호금산에 올랐다. 뒤이어 송화가 뒤따랐다. 그녀는 세계가 결합되고 적의를 가진 요괴들이 밀려오는 상황을 겪었음에도 지친 기색 하나 없었다. 대화를 나누며 평범한 면모도 있다는 걸 알았지만 그래도 여러모로 형용할 수 없이 신기한 기운을 풍기는 여자였다.

*

송화의 안내를 따라 절벽을 뛰어넘고 가시밭길을 지나 마침내 호금산의 정상에 도달했다.

굵은 가시나무들로 감춰져 있던 호금산의 정상은 삭막한 산의 외형과 달리 무척이나 아름다운 곳이었다. 그곳엔 백두산 천지처럼 칼데라 호수가 있었는데, 호수의 물빛이 사파이어처럼 반짝였고, 물이 어찌나 맑은지 멀리서 바라봤음에도 속이 다 비쳐 보였다.

반짝이는 호수의 물 밑엔 물고기나 수초 따위는 보이지 않았다. 대신 무언가가 꿈틀거리며 헤엄치고 있었는데, 마물의 힘을 빌려 시력을 돋구어 확인해 보던 난 깜짝 놀라 절로 표정이 찡그러졌다.

“눈알?”

호수에서 헤엄치고 있는 건 눈알. 절대 개별적으로 행동해선 안 되는 인간의 장기 중 하나인 눈알이 틀림없었다. 호수의 중앙엔 고즈넉한 정자 한 채가 세워져 있었는데, 자세히 살펴보니 헤엄치는 눈알들은 모두 정자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게 대체 뭐야?”

기겁하며 소리 지르자 송화가 대답했다. 그녀는 저 기괴한 꼴이 무엇인지도 알고 있었다.

“백두금왕이 천계에서 추방당할 때 선인들은 그의 흉포한 성격을 우려하여 항상 감시할 수 있도록 자신들의 눈알 한쪽을 뜯어 곁에서 지켜보도록 했다고 전해집니다.”

송화는 유례를 설명하며 조금은 쓸쓸한 표정이 되어 말을 끝마치지 못했다.

“그러나 천계는 사라졌으니 저 눈알들은 이제 대체 무엇을 위해…….”

잠시 호수를 바라보던 송화가 내게 말했다.

“따라오시지요. 백두금왕은 호수의 정자에서 기약 없는 휴식을 취하고 계십니다.”

난 곧바로 호수를 향해 내려가려고 했었다. 그러나 호수를 둘러싼 모래사장에 발을 올리자마자 땅이 진동하더니, 발아래에 거대한 구멍이 생겨났다. 난 재빨리 송화를 업고 풍종도보의 경공을 발휘해 뛰어올랐다.

“호랑이?”

거대한 구멍이라 생각했던 건, 거대한 호랑이의 아가리였다. 난 가시나무의 꼭대기에 매달려 들썩거리는 모래사장에서 기어 나오는 호랑이 한 마리를 지켜봤다.

“호금산엔 요괴를 잡아먹는 호랑이가 산다더니 상상 이상이네.”

이곳까지 올라오며 호랑이 요괴들의 기운을 많이 느꼈으나 내 발을 따라오진 못했다. 그러나 놈은 거대한 덩치로 호수로 가는 길목을 막고 있으니 따돌릴 방법이 없어 보였다.

“갈 수 있죠?”

송화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난 송화라면 가능할 거라 믿었다. 그래서 있는 힘껏 송화의 꼬리를 잡고 호수 쪽으로 던졌다.

송화는 민망한 듯 얼굴을 붉혔으나 예상대로 무사히 정자에 안착했다. 호랑이는 영수를 섬기는 무녀를 공격하지 않았다.

정자는 벽이 없었으나 긴 지붕에 가려져 있어 안쪽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송화가 안쪽을 바라보며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걸어가는 걸로 보아 백두금왕이라는 자를 만난 걸로 보였다.

“이 녀석아, 원한은 없다.”

난 다시 모래사장을 향해 달려갔다. 거대한 호랑이 놈이 아가리를 벌리며 막아섰지만 난 늦추지 않고 더 빠르게 달려갔다. 마침내 자동차도 발톱 한 개로 으스러트릴 놈의 발이 위력적으로 휘둘러졌다. 그러나 난 피하지 않고 몸으로 막아 냈다. 묵직한 충격이 전해졌으나 버티지 못할 것도 없었다.

“으라차!”

마치 역발산기개세를 내뿜는 천하장사처럼 난 호랑이의 발톱을 꽉 쥐고 하늘 높이 던져 버렸다. 황소마물, 놈의 괴력이었다. 맹수의 왕 호랑이는 들소에 치인 것처럼 날아가 호수에 처박혔다. 목숨은 붙어 있으나 정강이뼈가 부러졌으니 일어나진 못할 것이다.

난 단숨에 호랑이를 제압하고 호수의 중앙, 정자를 향해 뛰어올랐다. 몸을 가볍게 만드는 스위프트덕의 마력, 풍종도보의 경공으로 수십 미터 떨어진 그곳까지 무리 없이 도착할 수 있었다.

정자의 마룻바닥에 오르자 곁에서 봤을 때와 크게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넓이는 두세 배는 더 컸고, 떡갈나무 무늬의 마룻바닥은 분명 목재임에도 푹신하고 따뜻한 감촉이었다.

벽이 없는 정자의 구조상 사방이 탁 트여져 있었는데, 어딜 둘러봐도 은빛으로 일렁이는 호수가 반짝여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그 외 별다를 것 없이 허전한 정자였으나 삭막하거나 볼품없어 보이진 않았다. 정자의 한가운데에 그가 있었기 때문이다.

보통 맹수들은 용맹하고 기개 넘친다. 두려운 발톱과 이빨을 가진 채 점잔을 빼도 무서운 맹수임은 달라지지 않는다. 하지만 그는 호랑이임에도 맹수의 기세보다 학자에 가까운 분위기를 풍겼다.

호전적인 성격이라던 백두금왕은 소문과 달리 안개처럼 차분하고 조용한 자였다. 거대한 앞발을 가졌으나 그 발로 제 턱을 괴고 무서운 입으로는 곰방대를 물고 회색 연기를 내뿜었다. 다만 그의 가죽은 금빛으로 빛났는데, 검은 줄무늬가 어울려져 무척 멋있다고 생각했다.

그는 무언가에 열두하고 있었고, 맞은편에는 송화가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내가 곁에 있는 걸 알고 있었는데도 흐트러지지 않고 오로지 하고 있는 일에만 집중했다.

‘바둑?’

거대한 바둑판을 사이에 두고 그들은 바둑을 두고 있었다. 흰 돌과 검은 돌, 백두금왕이 고심 끝에 돌을 내려놓자 송화가 탄식을 내뱉는다.

난 백수 시절에 인터넷 바둑을 즐겨 한 적이 있었다. 나름 재능이 있거니와 아마추어의 수준에 지나지 않았지만 지금 그 둘이 하고 있는 대국의 수준을 얼추 눈치챌 실력은 있었다.

방금 전의 수로 승부가 결정되었다. 패배한 송화는 여우 귀를 젖히며 한숨을 내쉬었고, 백두금왕은 껄껄 웃으며 바둑판을 정리했다.

난 무엇을 두고 승부를 했는지 몰라 긴장했지만 백두금왕은 별다른 행동을 하지 않았다. 그저 말끔해진 바둑판에 검은 돌을 한 개 올려놓을 뿐이었다.

“어서 오시게. 기다리고 있었네.”

그는 그제야 날 불렀다. 송화가 일어나고 난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백두금왕을 마주 보자 또다시 내가 착각했다는 걸 깨달았다. 그는 분명 맹수와 달리 차분하고 조용한 자였으나 황색 눈에 깃든 타고난 기운은 그 어떤 요괴들보다 두려웠다.

날 때부터 먹이사슬의 정점에 있는 존재라서 그럴까, 아무런 적의 없이 날 바라보는 것인데 괜히 오금이 저릴 지경이었다. 또한 그는 요괴라기보다 마물에 가까운 자였다. 처음 느껴보는 복잡한 기운, 요괴도 아니고 마물도 아니며… 신수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그래, 확실히 느껴지는군. 구미호가 자넬 인정했다지? 난 그와 오선이었을 때부터 알던 사이였으나 그리 큰 짐을 짊어지고선 내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 어디 그의 마지막을 가르쳐 주지 않겠나?”

난 팔목을 힐끔 쳐다봤다. 아홉 개의 점이 찍힌 문신이 내게 깃들던 기억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백두금왕의 질문에 숨김없이 이야기해 줬다. 구미호가 전이를 막기 위해 희생했다는 걸 말이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백두금왕은 곰방대에 담뱃잎을 집어넣고 깊게 들이마셨다. 회색 담배 연기가 천천히 공중으로 퍼져 나가다가 이내 사라진다. 백두금왕은 흩어지는 연기처럼 씁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는 누구보다 운명을 신임했었지.”

다시 한번 깊게 담배 연기를 내뱉은 백두금왕이 날 바라보며 말을 이어 갔다.

“하지만 난 믿지 않는다. 운명에 따른다면 야차가 되어야 했지만 난 그러지 않았고, 하물며 요선이 되었으나 그마저도 받아들이지 않았지. 언제나 누군가 내 길을 정해주길 거부하며 살아왔다. 그러나 이쯤 살아오다 보니, 결국 운명은 이 작은 바둑판에 달려 있다는 걸 깨달았지.”

백두금왕이 내게 흰 돌이 담긴 상자를 건넸다.

“난 내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수많은 전장에서 싸워 왔다. 승자와 패자가 정해지기 전까진 물어뜯고, 집어삼키고, 할퀴며, 날뛰었지. 그러나 결국 승자와 패자만이 남는다면 필사를 건 싸움과 이 작은 바둑판에서 벌어지는 싸움도 같다고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덧없는가?”

난 그의 의도를 깨달았다.

구미호는 강한 자를 좋아했지만 백두금왕은 이기는 자를 좋아했다. 그러나 그 방식은 목숨이 오고가는 승부가 아닌 가만히 앉아서 돌을 옮기는 바둑이었다.

송화의 이야기를 들으며 백두금왕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나였다. 피를 보지 않아도 된다는 건 다행이었으나 오히려 이쪽이 더 성가시게 느껴졌다.

“내가 무얼 하겠나. 운명이 따르는 대로 네게 힘을 건네면 될 일이다. 그러나 그럼 재미가 없지. 바둑이나 한 판 두자. 날 이긴다면 이 천하백두의 금왕이 널 지천괴왕으로 인정하마.”

그는 호기롭게 바둑 대결을 펼치자고 말했다. 젠장, 그래 놓고 먼저 흑 돌을 가져가다니. 아마 난 백두금왕을 순수한 바둑 실력으론 결코 이기지 못할 것이다.

“좋습니다.”

하지만 난 대결을 받아들였다.

분명 평범한 방법이었다면 이기지 못했을 테지만 그에겐 미안하게도 내겐 필승의 방법이 있었다.

어차피 내가 이긴다.

난 흰 돌을 꺼내 흑 돌의 옆에 놓았다. 그렇게 대국이 시작되었다.

*

단지 바둑이 아니었다. 격렬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것처럼 육체와 정신이 피곤했다.

이길 수 있는 방법엔 난해하고 많은 집중력이 필요했다. 바둑을 두는 동안 다른 잡념을 할 여유는 없었다.

대국이 과열되고 바둑판의 돌이 어지러이 놓일수록 몸이 붕 뜨는 기분이 들었다. 내 몸을 내가 움직여 돌을 놓으나 단지 그뿐, 만약 영혼이 있다면 몸과 분리되어 대국을 관망하고 있다고 생각될 정도였다.

“흐음.”

흑색의 돌이 가로막아 집을 지으나, 그 수를 일찍이 예상하여 도리어 역으로 잡아먹는다.

“으응?”

하지만 그마저도 미끼임을 아니, 어찌 내가 질 수 있을까. 쌓이고 쌓인 바둑돌의 양세는 흰 돌이 유리했다. 흑색 돌의 모든 수는 읽혔다. 물러가면 잡아먹고, 둥지를 틀면 헤집으며, 미끼를 던지면 절대 물지 않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