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요괴 (13)
“대체……?”
승세가 기울수록 몸은 내 것이 아니게 되어 갔다. 난 코피가 터졌다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그러나 닦지 않았다. 피를 흘리고 있으니 송화가 와서 소매로 닦아 줬으나 소매를 빨갛게 적시고도 코피는 멈출 줄 몰랐다.
몸에 이상이 생겼다. 그러나 신경 쓰지 않았다. 저자는 내가 아니다. 지금은 그저 오로지 흰 돌을 두는 자와 검은 돌을 두는 자만 있을 뿐이다.
‘난 검은 돌을 넷의 수에 둔다. 그러니 난 흰 돌을 미끼로 집을 가로챈다.’
내가 흰 돌을 두고 있음에도 그자가 내가 아닌 것처럼 느껴지는 건 교감의 힘 때문이었다.
“내가 졌다.”
백두금왕의 마지막 노림수를 잡아먹은 수가 결정적인 수가 되었다. 승패가 결정되자 붕 뜬 육체는 다시 가라앉았고, 영혼은 육체로 내려앉았다.
그제야 난 욱신거리는 코와 너무 많이 흘린 피로 인한 어지러움을 느꼈다. 백두금왕은 제 패배를 인정하면서도 도무지 이해하지 못하였다.
곰방대의 담뱃잎이 타들어 간다. 연기를 내뿜으며 그가 질문한다.
“어떻게 이겼지?”
굳이 감출 필요는 없다.
난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며 곰방대를 향해 손을 뻗었다. 백두금왕은 수염을 실룩거렸지만 자신의 곰방대를 건넸고, 난 크게 들이마시고 내뱉었다. 조금은 진정이 되었다.
“내겐 당신의 마음이 모두 읽힙니다.”
구미호와는 마음으로 대화했었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에 이르러, 그녀가 허락하여 교감으로 깊게 연결되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가 눈치채지 못하게 강제로 그의 마음을 읽었다. 그로 인해 내 몸이 내 것 같지 않은 기묘한 감각에 휩쓸렸고, 곧바로 이상을 느낀 육체가 메슥거리는 부작용을 안겼지만, 어쨌든 대국이 진행되는 동안엔 난 두 개의 정신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백두금왕은 마음이 모두 읽히니 이번 바둑은 자신과 수 놀이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고, 난 모든 수를 읽어 승부에서 이길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백두금왕은 내 한마디에 모든 걸 이해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백두금왕은 널 지천괴왕으로서 인정한다.”
그렇게 말하더니 자신의 곰방대를 내게 건넸다. 담배는 피지 않기에 거절하려고 했으나 기이하게도 곰방대가 내 손에 닿자마자 안개처럼 흩어져 내 코로 들어왔다.
그 순간 구미호의 달이 몸에 깃들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형용할 수 없는 미묘한 감각이 깨어났다. 역시 달라진 건 없으나, 무언가 달라졌다.
다시 느껴도 기이한 느낌이다.
“놀음은 끝났다.”
백두금왕이 몸을 일으킨다. 그 순간 호수가 출렁거리며 수백 개의 눈알이 치솟았다.
난 나와 백두금왕을 지켜보는 수백 쌍의 섬뜩한 시선에 불쾌해졌으나 백두금왕은 아랑곳하지 않는 눈치였다. 몸을 일으킨 그가 기지개를 폈다.
난 학자와 같이 고고한 분위기에서 순식간에 바뀌어 가는 백두금왕의 기운을 곁에서 느꼈다. 역시 그는 맹수였다.
“남은 두 놈은 나나 구미호와 달리 성가시기 짝이 없는 자들이다. 하지만 개운할 만큼 날 쉬이 이겼던 네 녀석의 힘이라면… 흥.”
백두금왕이 남은 영수들에 대하여 내게 귀띔이라도 해 주려는 줄 알았으나 뭣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콧방귀를 뀌며 자세한 건 알려 주지 않았다.
그는 유유히 호수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러자 수백 개의 눈알이 갑자기 검이 되어 그에게 덤비기 시작했다. 하지만 백두금왕은 수염을 밉살맞게 이죽거리며 담담히 검들을 마주했다.
“귀찮은 늙은이들, 내 힘이 필요한 주제에 자존심을 꺾지 않는구나.”
위험한 상황이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딱히 위험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송화도 마찬가지로 내 곁에 서서 평안한 얼굴로 백두금왕을 바라만 봤다. 이내 수백 개의 칼과 검이 백두금왕을 찢어놓을 듯 쇄도했다.
그때였다.
백두금왕이 만 짐승을 두려움에 떨게 했던 포효를 내질렀다. 으르렁거리는 낮은 울음소리는 오히려 그 어떤 소리보다 크고 웅장히 들려왔다.
단지 포효일 뿐인데 검과 칼은 순식간에 가루로 박살 났고, 호수조차 증발하여 이제 호금산의 정상은 삭막한 황무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백두금왕은 자신을 감시하던 눈알을 순식간에 해치웠다. 저자의 행동, 지금까지 잠자코 있었을 뿐, 이젠 움직인다는 거겠지.
그는 구미호와 달리 전이에 생명을 뺏기지도 않았고, 어떠한 사명도 느껴지지 않았다. 하지만 신나는 얼굴이 되어 어디론가 떠나려고 하니 난 재빨리 소리쳤다.
“이제 어디로 가십니까?”
백두금왕이 뒤돌아 날 쳐다봤다. 대답을 머뭇거리던 그가 이내 입을 연다.
“난 올라가렷다. 삼라만상이 비틀리고 더러운 것들이 기어 나와 신령한 자들을 옥죄어 오니 내 묏자리는 저 위가 아니고서야 어디 있단 말인가?”
백두금왕이 말을 끝마치고 하늘을 향해 뛰어오르자 날개가 달린 듯 끝도 없이 날아갔다. 난 송화를 쳐다봤다. 그녀는 말하지 않아도 내 질문을 알아차리곤 고개를 끄덕였다.
“천계와 신선들은 소멸되었다고 하는데 당신은 그곳으로 가시는 겁니까?”
하늘 높이 올라가는 백두금왕에게 소리치자, 그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지 어디론가 사라졌을 뿐 소멸되었진 않았다. 다만 그곳은 한번 다녀온 자만이 찾을 수 있으니, 요계에선 찾을 방도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기이하게도 너하곤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구나. 으하하, 운명을 믿지 않는 내가 운명을 말하다니. 으하하하!”
그는 호탕하게 웃으며 구름 너머로 사라졌다. 단지 하늘로 치솟은 게 아니다. 난 잠시 후 익숙한 공간의 비틀림을 느꼈다. 그는 영수이긴 하나 ‘워커’이기도 했다. 스스로의 ‘걸음’으로 차원을 이동한 것이다.
난 운명이니 뭐니 하는 것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그의 말대로 정말 언제가 될진 모르나 그하곤 다시 만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호금산에서 하산한 난 곧바로 세 번째 영수를 찾으러 갔다. 지체되면 또다시 대요괴들과 싸울 수 있으니 날 뒤따르는 백귀야행 무리들의 사정을 신경 쓰지 않으며 속도를 높였다.
바람처럼 달렸으나 며칠이 걸렸다. 송화와 난 마침내 세 번째 영수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곳은 어두컴컴한 동굴이었는데, 입구는 작으나 어찌나 어두운지 눈을 부라리며 안을 보려고 해도 도무지 보이지가 않았다. 마치 살아 있는 어둠이 동굴 안을 밝히길 거부하는 것 같았다.
송화가 말했다.
“이곳은 그자, 아니 그것이 숨어 있는 저승문의 입구.”
지금 마주할 영수는 그 어떤 요괴보다도 이상한 요괴였다.
“명심하십시오. 그것은 그저 괴이일 뿐입니다.”
요괴란 괴이의 영역에 있는 것들. 따라서 살아 움직이는 생물만이 요괴라고 부르는 게 아니었다. 놈과 이어진 동굴은 저승문이라고 하여 한 사람만이 오고갈 수 있었다.
만약 둘 이상이 동굴에 들어간다면 저항할 수 없이 죽음의 길로 걸어갈 거라고 하였다. 송화는 내게 경고했지만 그녀 또한 세 번째 괴이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다.
“멀지 않았습니다. 부디 신명의 흐름이 당신에게 깃들길.”
송화는 뒤쳐진 요괴무리에 합류하기 위해 떠났다. 난 홀로 남아 동굴을 쳐다봤다. 꺼림칙하고 불쾌해.
“불쾌한 게 한두 번도 아니고.”
잠자코 지켜보던 난 어깨를 으쓱하고 그곳을 향해 걸음을 내디뎠다.
*
동굴을 걸었다.
어두운 동굴은 아무리 안력을 키워도 앞이 보이지 않았다. 샐러맨더의 불꽃을 밝혀도 어둠은 물러가지 않았다.
심지어 뻗어진 내 손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고, 느껴지지 않은 곳을 걷기만 했다. 아니, 이제 걷는다는 느낌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내가 가만히 있는지, 걷고 있는지 헷갈린다. 어둠은 지랄 맞게도 아늑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든다. 사람은 밤을 무서워할 뿐 어둠은 좋아한다고. 어둠은 안식을 준다.
머릿속이 비워져만 갔다.
속으로 숫자를 세었다.
어느덧 86,000초를 세었다.
하루가 지났다.
그러나 끝은 보이지 않는다.
시작인지 끝인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난 걷고 있었던 걸까, 단지 멈춘 채 숫자만 세고 있었을까?
손을 뻗어 보려고 했으나 보이지가 않아 얼굴을 더듬었다. 하지만 내 얼굴이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 내가 나인지도 헷갈리기 시작했다. 요람의 아이처럼 잠이 밀려온다.
‘괴이.’
그럴 때마다 마물의 힘을 끌어올렸다. 내 정신은 내 생각보다 훨씬 나약해 심연에 삼켜져도 저항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마물의 힘이 몸에 감돌자 난 ‘하나’가 아니게 되었다. 그럼으로 다시 내가 나임을 자각했다.
세 번째 영수, 그건 괴이다.
살아 움직이는 요괴가 아니다.
난 되풀이되는 어둠이 사실 모두 세 번째 영수였다는 걸 깨달았다.
빌어먹을 아늑한 어둠과 망각되는 기억, 이 현상 자체가 ‘요괴’이었던 것이다. 세 번째 영수는 ‘현상’이었다. 사라지는 여우계단, 나가는 길을 찾지 못하는 미로,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나 사실 내려가는 언덕. 그처럼 괴이한 현상이었다.
되풀이되는 어둠.
난 걸음을 멈췄다.
괴이를 깨트리는 건.
또 다른 괴이.
괴력난신怪力亂神.
주술을 찢어발긴다. 마법을 삼킨다.
정상적이지 않거나 이성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현상은 그의 발톱에 무너진다.
아즈모타카의 속삭임이 들려오자, 드디어 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
동굴을 나오자 들어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같은 풍경이 보였다. 동굴의 끝과 시작이 똑같은 것이다.
난 근처 연못으로 가 세수를 했다.
“후우.”
세 번째 영수, 그것에게도 인정을 받았다. 난 연못물에 비춰진 내 얼굴을 쳐다봤다. 요계의 물은 맑아서 거울처럼 볼 수 있었다.
내가 아니면 변했다는 걸 알지 못할 것이다. 평소의 내 눈동자는 원래 갈색에 가까웠는데.
이젠 검디검네.
*
세 번째 영수의 인정을 받았다.
이제 남은 영수는 단 한 마리.
난 우선 네 번째 영수부터 만나려고 했다. 송화가 위치는 알려 줬으니 찾아가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얼마 걷지 않아 숲에서부터 무언가가 튀어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도깨비불?”
하얀 불덩이다.
하지만 그것에서 송화의 기운이 느껴졌다. 잠시 망설이던 난 손을 뻗어 불을 만졌다.
그 순간, 그녀의 기억이 스미어 들어왔다.
*
기억은 습격을 당할 때의 기억이었다. 내가 세 번째 괴이에 발이 묶여 있을 때, 요괴들은 놈의 습격을 받았다. 끝까지 저항하던 해주주는 죽었다. 그 외 많은 요괴들도 죽었다.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는 요괴들만이 남았을 때, 놈은 피투성이 송화의 머리에서 하얀 불을 끄집어냈다.
놈은 메시지를 전했다.
[네 무리를 구하고 싶거든 날 찾아와라.]
외뿔의 사내는 말을 끝내자마자 제 방망이를 들어 지네 요괴를 내려쳤다. 지네 요괴는 내게 술을 건네주던 자였다.
“난 역시 누군가를 이끌 성격이 못 돼.”
도깨비불을 손에 쥐고 비틀어 없앴다. 놈의 힘은 손바닥에 화상을 남길 만큼 뜨거웠으나, 내 안에 활활 타는 그것만은 못했다.
네 번째 영수의 위치는 안다. 무시하고 영수를 찾아 인정을 받으면 지천괴왕이 된다. 하지만 어리석게도 난 그리 현명한 놈이 아니었다.
놈의 기운을 쫓아 달리며 곰곰이 생각했다. 대체 내가 어떻게 하면 놈이 가장 극심하고 지독한 고통 속에서 죽어 갈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