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화 요괴 (14)
놈은 요괴들의 시체 위에 누워 있었다. 시체마다 도깨비불이 떠 있었는데, 일렁이는 불꽃 안엔 그들이 죽어 가는 모습이 희미하게 투영되고 있다.
놈은 마치 나무에 열린 과일을 따 먹는 것처럼 도깨비불을 집어 들곤 삼켜 버렸는데, 그럴 때마다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놈의 곁엔 피투성이가 된 송화와 나리가 있었다. 송화는 겉모습에 비해 상처는 없었으나 그녀가 뒤집어쓴 피는 모두 금나리의 것이었다.
작은 여우 요괴는 송화의 힘으로 간신히 목숨이 붙어 있을 뿐 위태로운 상황이었다. 놈의 발밑으로 많은 요괴들이 살아 있었으나 그의 앞에 무릎 꿇고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아드득-!
난 발을 오므리고 엎드린 채 죽어 있는 해주주를 바라봤다. 그는 마지막까지 저항했는지 입가의 거미줄이 놈의 지척까지 뻗어져 있었다.
보통 거미 요괴들은 죽기 전에 배를 뒤집으며 굴욕적으로 죽어 간다. 하지만 무리를 이끌던 반사동의 해주주의 시체에선 그 어떤 굴욕과 두려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끝내 저항하며 싸우다가 전사한 것이다.
이를 꽉 깨물어 입안이 피로 차올랐으나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비릿한 피의 맛만큼 기분이 엿 같을 뿐이었다. 그는 내가 목숨을 구해 준 후로 내게 많은 도움을 주었다.
빌어먹게도 세이렌의 힘으로 난 그의 기억을 대부분 알았기에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이는 아니었지만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곁에 있었던 친구처럼 느껴졌다.
고개를 들어 해주주를 죽인 그를 쳐다봤다. 놈은 대요괴다. 느끼지 못할 리가 없다. 이미 다른 요괴들은 끈적이는 죽음의 냄새를 맡고 도망친 후였다. 하지만 놈은 여유로웠다. 도깨비불마저 내 분노에 휩쓸려 꺼지는데도 시체 위에 누운 놈의 표정은 오만하기 짝이 없었다.
찢어 죽이겠다. 씹어 죽이겠다. 이제까지 그 어떤 상황에서도 지금처럼 강렬하게 누군가의 죽음이 목적이 된 경우는 없었다.
내가 살기 위해 죽인다가 아니다.
죽이기 위해 죽인다.
난 필히 다짐하며 놈에게 걸어갔다.
“이제 한 마리 남았다지?”
놈의 목소리는 크고 거칠었고, 호탕하기까지 했다. 놈의 덩치는 곰처럼 컸으나 낡은 가죽옷과 넝마 바지를 입은 하찮은 꼴이다.
그러나 요계의 모든 요괴들은 그를 경외했다. 놈은 도깨비들의 왕이다. 대요괴들마저 함부로 왕이라는 칭호를 붙이지 않지만, 놈은 그 누구에게나 도깨비 왕이라고 불렸다. 검은 외뿔을 가진 도깨비. 신과 요괴의 사이에서 살아가는 도깨비들의 왕이자 우두머리.
놈이 질문했으나 죽이는 데 있어 대화를 섞을 필요는 없다. 난 터져 나오는 분노만큼 힘을 아끼지 않았다. 끌어올린 마물의 힘이 메타소드에 깃들자 검은 거대한 낫이 되었다. 무기라고 하기엔 볼품없었으나 누군갈 죽이는 게 무기의 본분이라고 한다면 내가 가진 그 어떤 무기보다 제 기능에 충실한 검이었다.
바람이 불어오다 내 지척에서 흔적을 감춘다. 이 힘은 바람마저 죽인다. 단신의 힘으로도 다루기 벅찬 미라 마물의 기운과 죽음이라 불리던 마물, 그림리퍼의 힘이다.
오로지 상대를 죽이기 위해서 끌어올린 힘을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놈을 향해 휘둘렀다.
“허허허!”
보이지 않고.
막을 수 없으며.
피하지도 못하는 검이었다.
그러나 죽음의 기운은 놈의 근처에서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다시 한번 낫을 휘둘렀으나 죽음이 닿기도 전에 사라진다.
놈은 막거나 피하거나 하지 않았고, 하물며 움직이지도 않았다.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살아 있는 생명이라면 내 힘에 저항은 할 수 있을지언정 죽음 자체를 사라지게 할 순 없다. 놈이 내 이해를 넘어 날 아득히 뛰어넘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건가?
도깨비 왕은 그제야 시체 더미에서 일어나 너털웃음을 지으며 소리쳤다.
“허허! 검은 동짓달 아래 비추어 보리를 핥으면 쌀이 되고, 물은 불씨가 되며 군중은 와해되고, 달과 해는 저무니, 죽지 않는 날 죽이겠다 하여 어찌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젠장.
대화를 섞고 싶진 않았었다.
난 으드득거리며 낮고 위협적인 목소리로 놈에게 말했다.
“그럼 넌 죽지 않는 불사신이라도 된다는 것이냐?”
죽음에 가까운 힘이 통하지 않는 건 죽지 않는 존재밖에 없다. 놈은 내 말에 큰 목소리로 신(神)인 자신이 어찌 죽겠냐며 호통쳤다.
원장님과 지내며 분명 신이라는 존재가 있음을 알고 있었다. 또한 그 신이라는 자들이 일반적인 종교의 개념에 서 있는 신이 아니라는 것도 배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신은 신이기에 그들은 인간의 개념을 벗어난 불가사의한 능력과 초자연적인 힘을 지니고 있었다.
‘아니야. 놈은 신이 아니다.’
놈은 스스로 신이라 칭했지만 난 믿지 않았다. 고작 저놈 따위가 신이라고? 그보다 더 아늑한 기운을 풍겼던 구미호와 백두금왕조차 신은 아니었다. 다만 내가 모르는 기묘한 힘을 가지고 있음이 분명했다. 옛 조상들이 놈을 신이라고 착각했을 만한, 불가사의한 어떤 괴이를 가지고 있는 거겠지.
놈이 말했다.
“작은 아해(阿孩)야! 나와 어울려 노니 천하의 보물이 네 것이 되고 절세의 미녀가 네 품에 절로 안길 것이다. 그러니 얼쑤 놀아 보자꾸나!”
놈이 거구의 몸을 흔들며 춤을 춘다. 그럴 때마다 요괴들의 시체가 발에 짓밟혀 뭉개졌다. 허리춤에 매단 술병을 꺼내 왈칵왈칵 술을 마신다. 놈에겐 지금 상황이 장난에 지나지 않아 보였다.
“홍식.”
난 가증스러운 놈을 향해 샐러맨더의 기운을 쏟아 냈다. 죽음의 개념이 통하지 않는다면 물리적으로 태워 죽일 생각이었다.
“흥!”
그러나 놈은 재빨리 넝마에서 빨간 부채를 꺼내어 휘둘렀다. 그러자 홍식의 불길이 닿기도 전에 부채의 바람에 날아가 흩어졌다.
샐러맨더의 힘은 보통의 불이 아니다. 태우고자 하면 끈질기게 타오르는 마물의 불꽃이니 바람 따위에 꺼지진 않는다. 즉 저 부채 또한 불가사의한 요괴의 힘이었다.
“고얀 놈!”
방금까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던 놈의 표정이 구겨졌다. 웃을 때도 괴물 같던 얼굴이 화를 내자 절의 사천왕 동상을 보는 듯 흉악하게 일그러졌다. 놈은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서 거대한 방망이를 꺼내더니 벼락 같은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도 감히 능통(能通) 감투를 훔쳐간 놈들처럼 욕심이 그득하여 감히 날 두고 괴왕이 되려 하는구나! 으하하. 어디 한번 나와 붙어 보자. 천지의 조화가 내 손에 있는데 네놈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으냐? 으하하!”
“시끄럽다, 주정뱅이 새끼야.”
잠시 요계가 다른 세계와 결합됐을 때, 깊게 교감했던 마물들과 만나며 이끌어 낼 수 있는 힘 또한 강해졌다. 난 조잘거리는 놈을 향해 빙창이 된 메타소드를 던졌다. 빙설 세계의 아이스독들의 기운이 깃든 얼음의 창은 순식간에 주변을 얼어붙게 만들고 서리를 내리며 놈을 향해 쇄도했다.
“호잇!”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놈은 ‘파란 부채’를 꺼내어 휘둘렀고, 빙설의 힘은 허무하게 흩어지고 말았다.
‘힘이 사라졌다.’
샐러맨더의 불꽃도 아이스독들의 빙설의 힘도 이끌어 내지 못했다. 놈은 부채를 집어넣고 도깨비 방망이를 휘둘렀다.
크아악-!
분명 거리는 수십 미터가 떨어져 있었는데 방망이는 바로 내 옆에서 휘둘러져 대비할 틈도 없이 처맞았다. 극심한 고통은 참을 만했으나 맞은 곳이 부풀어 오르더니 마치 ‘혹주머니’처럼 늘어졌다.
“으하하!”
놈은 그 모습이 퍽이나 재밌는지 껄껄대며 다시 춤을 추기 시작했다. 지랄 같은 새끼. 어디 이것도 막을 수 있나 봐라.
괴이를 찢어발기는 괴력난신, 아즈모타카의 힘을 끌어올리자 내 몸은 근육질로 부풀어 올라 거구가 되어 놈의 덩치를 압도했다. 놈이 기괴하고 불가사의한 힘을 다룬다면 아즈모타카의 힘으로 찢어발기면 되겠지.
난 달려가 두 주먹을 내질렀다.
“허?”
그러자 놈도 손을 뻗어 내 손을 막았다. 이내 육탄전으로 이어졌다. 난 들소처럼 난폭하게 덤벼들어 놈의 두개골을 박살 내고 다리뼈를 부러트리려고 했으나, 놈은 내 힘에도 꼼짝도 하지 않고 제자리에 서 있었다.
지금 나는 거대한 바위마저 뽑아 으스러트릴 괴력을 지녔으나 놈에겐 어찌 된 일인지 전혀 통하지 않았다.
“씨름으로 붙어 보자는 것이냐? 좋지! 날 싸리 빗자루 따위와 비교하지 말거라. 으하하!”
안간힘을 써 봤지만 놈을 때릴 수도 넘어트릴 수도 없었다. 도리어 난 놈의 우악스러운 손길에 잡혀 내동댕이쳐졌다.
“크하학!”
피를 쏟아 내며 한참을 뒹굴었다. 간신히 멈췄을 땐 멀리 떨어져 있던 송화와 나리가 있는 곳까지 날아간 후였다. 온몸의 뼈가 부러졌는지 숨을 쉬는 것도 벅찼다.
지랄맞을 상황에서 엿 같은 일들은 많이 겪었지만 지금처럼 무기력한 건 처음이었다. 대체 어찌해야 하지? 내가 가진 모든 힘이 놈에게 통하지 않는다. 정말 놈은 신이라도 된다는 건가? 난… 난 어떻게 해야 하지?
안 돼.
내 힘으론 무리야.
원장님, 원장님을…….
“두려워하지 마세요.”
그때, 귓가에 들려오는 나긋한 목소리에 정신이 돌아왔다. 방금까지 복수심과 분노로 치를 떨었던 주제에 지독한 고통을 맛보니 난 꼬리 말린 개새끼처럼 굴었다.
내가 뭐랬더라? 원장님에게 믿어 달라고 했었지. 쪽팔리는 새끼.
“송화.”
그녀의 목소리에는 힘이 있었다.
난 정신을 차리고 몸을 일으켰다. 아직 모든 힘을 다해 부딪쳐 본 건 아니야.
“나리는?”
“괜찮아요.”
“녀석을 데리고 피해요. 되도록 멀리.”
난 안주머니의 마법 부적을 만지작거렸다. 다소 고통스럽겠지만 이걸 찢으면 난 마물원으로 돌아가게 되어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다.
“지랄.”
부적을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어쩌면 마물원에서 일하며 내게 일어난 가장 큰 변화는 가진 힘도, 재력도, 인맥도 아닌 각오의 차이가 아닐까.
해주주와 요괴들이 죽은 것도 스스로 각오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내가 겁을 집어먹고 꼬리를 말면 난 입만 떠벌리는 병신 새끼에 불과했다.
애초에 가만히 있었으면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 지천괴왕이 되겠다며 설쳤고, 그로 인한 결과다. 그러니 감당해야 해. 예전의 나였다면 결코 이해 못 했을 거야. 목숨보다 중요한 각오라니, 우습지.
사실 지금도 잘 모르겠다. 뭣 때문에 내가 이렇게까지 움직이는지. 다만 확실한 건 지금 놈을 죽여 해주주와 다른 요괴들의 한을 풀어 주고 싶단 것이다.
놈은 너무나 여유로웠다.
가만히 날 지켜보며 노래나 부른다. 역겨운 표정으로 날 조롱한다. 난 검을 쥐고 일어나 달려가려고 했다. 하지만 송화의 말에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는 신화에서 태어난 존재.”
송화가 말했다.
“신화의 바탕이 된 괴이가 아닌 신화를 바탕으로 태어난 괴이의 존재. 괴이에 대한 두려움이 뭉쳐 탄생했으니 그에겐 어떠한 힘도 통하지 않아요.”
그녀는 도깨비 왕에 대하여 알고 있었다. 난 입술을 깨물며 되물었다.
“그렇담 이기는 방법이 없다는 겁니까?”
송화는 지금까지 놈과 싸우며 있었던 괴현상을 언급하며 설명했다.
“그가 죽지 않는 건 이야기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며, 얼음과 불을 조종하는 부채와 혹주머니를 만들거나 떼어 내는 방망이, 결코 이길 수 없는 씨름 또한 이야기의 한 갈래입니다.”
송화는 신화에서 태어난 요괴는 신화의 이야기에서 죽는다고 말했다. 이해하기 힘들었으나 믿을 수밖에 없었다. 송화의 금색 눈동자는 흔들림 없이 굳건했다.
“도깨비는 마주하는 상대에 따라 강해져요.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옛이야기에서 그러하였듯 그가 스스로의 꾀에 넘어가게 하여 겁을 집어먹게 만드는 것입니다. 도깨비가 인간을 두려워하면 이야기는 끝이 나는 법이니.”
난해한 방법이다. 온갖 공격을 해도 꼼짝도 하지 않는 놈이다. 대체 어떻게 놈을 겁먹게 하지? 머릿속만 복잡해질 때, 송화가 이어서 하나의 이야기를 들려줬다. 도깨비와 관련된 구전신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