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0화 요괴 (16)
그자의 목소리는 부드러웠으나 울림이 깊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앞에서 거짓말은 하등 쓸모가 없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아.]
내 대답에 그의 눈이 감겼다.
또한 한탄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했다.
[지키고자 했으나 결국 지키지 못하였구나. 이제 우리들의 별조차 그자들의 독선에 지배당하겠지.]
무슨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난 떨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당신은 위대하신 분이며, 또한 우주의 조율자이십니까?”
차마 드래곤이나 용이냐고 물어보지 못했다. 대신 그들이 듣기 좋아하는(원장님과의 경험에 의해 생각해 낸) 칭호를 거론하며 물어봤다. 눈처럼 하얀 육체를 가진 그는 깊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다 한참 뒤에 대답을 들려줬는데 안심을 해야 할지, 의문을 가져야 할지 헷갈렸다.
[아니다.]
분명 용의 기운을 풍기는 자, 용과 비슷하게 생긴 존재였으나 스스로 용이 아니라고 말했다. 난 용기 내어 또다시 질문했다.
“그럼 당신은 어떤 존재입니까?”
이번엔 그자의 대답은 빨랐다. 그러나 부드러웠던 목소리가 아닌 이글거리는 분노가 느껴지는 사납고 거친 목소리였다.
[넌 증오하는 놈들의 수호자이나 우습게도 인간이로구나. 좋다. 내가 누군지, 누구였는지 말해 주마.]
그자가 말한다.
[난 지구의 탄생을 함께했으며 지구를 지키는 유일한 신수, 또한 오래전 용들의 오만을 막고자 했던 어리석은 존재.]
그의 이야기는 짧고 간단했다.
하지만 원장님에게선 들을 수 없었던 이야기, 그리고 그 어떤 인간도 들어보지 못했을 이야기였다.
대전이 이전, 아주 오래전에 지구에 용이 찾아왔으니 그 시대는 공룡의 시대이며, 공룡을 벌하여 멸망시킨 것도 용이었다. 그는 지키고자 했으나 지키지 못했으며 영원히 무저갱에 갇히는 벌을 받았다고 했다.
그 후 인간들이 탄생했을 때 그들이 가진 기묘한 이야기로부터 요계라는 세계가 탄생하고 천계라는 다른 차원을 끌어들였는데 그 여파로 자신은 무저갱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또한 무저갱에서 벗어난 그는 모든 힘을 다하여 두 번 다시 용들이 지구에 찾아오지 못하도록 요계의 힘을 빌려 그들의 시선을 피하는 결계를 펼쳤다고 했다.
난 불현듯 원장님의 말이 떠올랐다. 원장님이 직접 요계로 건너오지 못하는 건 용인 자신조차 이해 못할 특별한 힘 때문이라고 했었지. 설마 그의 힘이었다니.
믿기 힘든 이야기였으나 믿지 못할 것도 없었다. 왜냐면 난 그의 목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저자의 마음은 불안에 떨고 있었으나 거짓을 말하고 있진 않았다.
“그러나 대전이 때문에 결계가 무너진 거로군요.”
이야기를 듣던 난 대전이 때문에 그 결계라는 것도 사라졌다는 걸 이해할 수 있었다. 스스로 지구를 지키는 신수라고 말하는 그. 저리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음에도 자신은 죽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대전이는 힘을 잃어가던 내 몸을 갈기갈기 찢었다. 이제 내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길지 않지. 난 더 이상 감출 수가 없다. 더 많은 자들이 푸른 별의 존재를 알아차릴 것이다.]
이해를 넘는 이야기를 들으면 마치 침대 위에 누워 책을 읽는 것처럼 크게 와닿지 않을 때가 있다. 그의 말은 놀라웠다. 하지만 실감이 나지 않아 멍한 기분만 들었다.
내게 직접적으로 놓인 고민. 하물며 저녁 밥 메뉴 따위를 정하는 고민이었다면 지금보다 더 골치 아팠을 텐데. 정말 오래전 공룡을 멸망시킨 자들이 용들이며, 대전이 이후 원장님을 비롯한 다른 용들이 나타난 것도 그의 힘이 약해졌기 때문이라고 치자. 그래서? 저녁 밥 메뉴처럼 내게 와닿는 무언가가 없다. 어차피 전이는 진행되고 있으며, 원장님 외에 다른 용이 지랄 맞은 성격이라는 건 알고 있었으니까.
문제는 다른 것에 있다.
난 그의 힘에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얻지 못할 것에 대한 욕망이 피어올랐다. 보아하니 그가 요괴로 위장하고 있긴 했으나 지천괴왕을 정하는 건 맞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드래곤에 대하여 치가 떨리도록 분노하고 있으니 드래곤의 가디언인 내겐 힘을 건네주지 않겠지. 결국 목적을 이루지 못했다.
지금까지의 과정에서 많은 힘을 얻었지만 허무한 결말이다.
‘이제 남은 건…….’
난 그를 바라봤다. 내게 적의는 없다. 용의 가디언이라고 하더라도 내게 분풀이를 할 생각은 없는 모양이다.
어차피 자신은 죽어 가고, 결계는 사라졌으니 그럴 필요가 없다는 걸 깨닫고 있는 거겠지. 그러나 난 이대로 지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아직 남은 게 있다.
놓친다고 하여 아무런 상관은 없겠지만 찝찝해서 못 버텨.
“송화는 당신의 무녀였지요. 그녀는… 죽었습니까?”
그때였다.
지금까지 유하던 그가 역정을 내기 시작했다.
[인간! 인간이여! 난 별의 멸망을 말하는데 넌 한 생명의 생사를 걱정하는구나. 이 어찌 어리석은가.]
천지가 요동친다.
요계가 그의 분노에 반응하여 뒤흔들린다. 죽어 간다고 하더라도 그는 내가 쳐다볼 수 없는 영역에 있는 존재였다. 그래, 확실히 신이라고 부를 수 있겠지.
“스읍.”
정말 오랜만이다.
원장님과 지내며 느낀 건데 가끔씩 터져 나오는 지랄 맞은 성격은 절대 고쳐지지 않았다. 가끔씩 원장님에게 대드는 것도 익숙해져서 그렇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사실 난 처음부터 그랬다. 원장님도 쩔쩔매던 ‘캣 맘’에게 대들고, 짜증 난다고 날 한 입에 삼켜 버릴 수 있는 마물들을 쥐어 패고.
“지이~ 랄하지 말고 말해 봐.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
난 지구를 위한 그의 희생을 들어주며 찬양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선 게 아니다.
“내가 뭘 해 주길 바라는 건데?”
그의 백색 가죽이 붉게 물들자 하늘에서 천둥벼락이 내려치고 땅이 갈라지며 지진이 일어났다. 하지만 난 담담히 한숨을 쉬며 말을 이어 갔다.
“어차피 죽을 거라면 힘 좀 나눠 주던가.”
지랄은 괜히 지랄이 아니다.
천지도 분간 못하고 날뛰는 놈을 지랄 같다고 하지. 내가 생각해도 우습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그가 드래곤이 아닐까, 날 해치면 어떻게 할까 두려워했던 주제에 ‘선’을 한번 넘으니 거칠 게 없잖아.
하지만 한번 화를 풀고 나자 서서히 지랄을 대신하여 이성이라는 놈이 찾아왔다. 난 재빨리 안주머니 안의 부적을 꺼내 도망칠 궁리를 했다.
[너.]
그때였다.
격동하던 요계가 멈춘다.
분노하던 그도 백색으로 돌아왔고 목소리도 부드러워졌다.
[그렇지. 역시 넌 인간이로군. 좋다.]
그가 입을 벌려 녹색 구슬을 내뱉었다. 구슬 안엔 휘몰아치는 강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난 저걸 본 적이 있다. 저것에 비하면 한참 뒤떨어지지만 분명 비슷한 기운, ‘여의주’였었지.
[받아라. 내게 남은 마지막 힘이다. 그들의 힘에 비하면 미약하여 티끌에 지나지 않으나 보탬이 될 것이다. 구슬을 삼키면 지천괴왕이 되어 요계들이 널 따르겠지.]
녹색 구슬이 내 손으로 날아왔다. 난 빛나는 힘을 지닌 구슬을 손에 쥐고선 눈썹을 구기며 그를 쳐다봤다. 이해할 수 없었다.
“왜 내게?”
난 놈이 증오하는 용의 수호자, 또한 한 일이라곤 징징대는 놈에게 지랄 한번 부린 게 다였는데.
의문에 그가 대답했다.
[네가 인간이라서 그렇다.]
“…인간이라서?”
[오만한 용보다 악독한 생물, 신임을 주어도 어느새 배신을 하는 더러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너희 종족의 비열함에 내 힘을 보탠다. 어차피 네가 인간이라면, 제 주인마저 배신할 테니.]
예상은 했지만 선의로 준 게 아니구나. 난 어깨를 으쓱하며 구슬을 삼켰다. 준다는데 마다할 건 없지.
“크윽!”
이번엔 달랐다.
다른 영수들에게 인정을 받았을 땐 기묘한 변화만 있었을 뿐 힘이 달라지는 건 없었으나 그가 건넨 힘은 곧바로 격렬한 반응이 왔다. 하지만 격통은 잠시뿐, ‘내 그릇’이 깨진 않았다. 난 팔목에 빛나는 문신을 매만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영수들이 준 건 힘이 아니었어. 기묘한 힘으로 내 그릇을 넓혀 주었구나.
만약 구미호와 백두금왕, 저승문의 괴이를 차례대로 걸쳐오지 않았다면 이 힘을 받았어도 견디지 못하여 뱉어 내고 말았을 거야.
힘을 흡수하자 용과 닮았던 그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단전에서 휘몰아치는 이 막대한 힘이 단지 죽어 가는 자의 마지막 숨결에 지나지 않다니. 용은 아니더라도 그는 강력한 존재임은 확실했다.
사라지는 그의 눈빛은 허무하면서도, 분노에 차 있었다. 그러나 몸의 반이 사라져 마침내 가루가 되어 버렸을 때.
으하하하하!
무저갱이 그의 웃음소리로 가득 찼다. 무엇이 그리 기쁜지 한참을 웃던 목소리는 이내 서서히 사그라졌고, 그의 흔적은 더 이상 세상에 남지 않게 되었다.
“송화.”
그가 죽자 무저갱의 깊은 곳에서부터 송화가 떠올랐다. 기절해 있던 그녀는 샐러맨더의 기운을 불어넣자 곧바로 정신을 차렸으나, 날 보더니 기겁하며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난 금빛으로 빛나던 그녀의 눈동자에서 더 이상 신비로움을 찾을 수 없었다. 송화는 날 기억하지 못했다.
“에휴.”
어깨를 으쓱하고 날카로운 발톱을 휘두르며 저항하는 송화의 뒷덜미를 가격했다. 난 기절한 그녀의 꼬리를 잡고, 무저갱에서 벗어났다.
*
무저갱에서 내려왔을 때 벌써 수많은 요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들 중 지천괴왕을 노리던 대요괴들도 있었으나 얌전히 날 지켜만 볼 뿐이었다. 요괴들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내가 요괴들의 왕, 지천괴왕이 되었음을.
“으앙, 언니!”
난 송화를 나리에게 데려다주고 요괴들 사이를 걸어갔다. 내가 지나가는 자리를 요괴들이 비켜서며 길을 터준다. 여우 요괴, 도깨비, 호랑이, 수괴와 천둥새, 국괴와 금목괴, 또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수많은 요괴들을 지나 이곳에서 가장 높은 언덕까지 걸어갔다.
그들은 기다리고 있었다.
지천괴왕의 명령을.
내가 무엇을 말하는가에 따라서 세상은 달라진다. 요계뿐만 아니라 분명 지구도 많은 변화를 맞이할 것이다.
하지만 난 처음 생각과 변함이 없었다.
“너희에게 선택을 주겠다.”
지금까지 지구의 이면에서 그림자로밖에 살아가지 못하던 요괴들.
“역사의 반대편에 서 있지만 너희들도 분명 지구의 주민이었다. 모습을 드러내진 못해도 신화로 남아 뭇 인간들을 두려움에 떨게 하며, 그로 인해 지혜를 주기도 했지.”
내가 준 선택은 두 가지.
“하지만 지구는 이계와 뒤섞여 혼란해졌다. 이제와 요괴라고 하더라도 그림자에 숨어 지내리라 강요할 게 무엇이냐? 멸망하는 요계에서 괴이로 남아 사라지라고 어떤 빌어먹을 새끼가 강요하더냐? 너희들도 인간과 다를 바 없다.”
요계에 남는지, 따라올지는 그들의 선택에 달렸다. 이대로 두면 요계는 점차 사라지겠지만 요괴들이 줄어들면 그 속도는 늦추어진다.
하지만 요괴들이 지구로 넘어온다면 기괴하고 괴상망측한 요괴들이 적응할 수 있을까?
“다만 각오를 하고 대가를 치루며 변화를 적응할 수 있는 자만이 날 따라와라.”
그건 내가 정할 게 아니다. 잡탕찌개가 된 지구에 기묘한 맛을 내는 조미료가 추가된다고 해도 뭐가 달라질까. 마찬가지겠지. 오히려 이계인들의 입장보단 더 낫다.
“그러나 너희들이 지구에서 재앙이 되어 흉괴가 된다면 장담컨대 지천괴왕보다 더 무서운 존재가 너흴 용서치 않을 것이다.”
지천괴왕의 힘은 요괴들의 의지를 대변하는 힘. 최초의 지천괴왕은 요괴들을 대신하여 요계의 재앙인 어룡을 죽일 힘을 얻었지만 이번엔 다르게 나타났다. 난 지구로 통하는 공간의 문을 열었다. 드래곤인 원장님조차 열지 못했던 문이 열렸다.
남는 자도 있었으나, 대부분 문을 향해 걸었다.
그중엔 송화와 나리도 있었고, 지구에 적응하기엔 너무 위험하고 흉포한 괴이를 가진 요괴들도 있었다. 하지만 스스로 선택을 했으니 그 책임을 감당할 자들일 것이다.
만약 그렇지 못하면 뭐, 원장님이 나서겠지.
*
내게 남은 일들을 모두 처리하고 마물원으로 돌아갔을 땐 벌써 수개월이 지난 후였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았지만 많은 게 달라졌다. 특히 내가 얼마나 강해졌는지 나조차도 짐작할 수 없었다.
“후우.”
마물원에 도착하자 요계에서 있었던 일들이 마치 깊고 진한 꿈을 꾼 듯했다. 이제 현실로 복귀한 기분이다.
묘한 허탈감을 느끼며 관리실의 문을 열자 원장님이 날 반겨 줬다.
“다정 씨!”
처음엔 반겼다.
“다정 씨.”
하지만 순식간에 그녀의 목소리는 차가워졌다.
“네.”
“다정 씨.”
그러며 내가 대답했음에도 불구하고 내 이름을 두 번 불렀다. 원장님의 저런 모습은 오랜만이었다.
“짜증 나네.”
살기를 흉흉하게 풍기며 내게 다가오더니 버럭 화를 내기까지 한다. 영문을 몰라 멀뚱멀뚱 쳐다보던 난 이어진 원장님의 말에 원인을 알 수 있었다.
“그거, 짜증 나는 힘이야. 용케도 융화된 모양이지만 자칫하다간 죽을 뻔했어. 다정 씨, 그렇게 좋다고 아무 힘이나 덥석 주워 먹다간 뒈질 수도 있어요. 네?”
평소 교양 넘치던 원장님은 상스러운 소리까지 하며 날 꾸짖었다.
“이번 한 번은 넘어가는데, 다음부턴 발바리마냥 그러지 말아요. 다정 씨는 내 가디언이니까 다른 새끼가 예쁘다고 귀여워해 줘도 뿌리칠 줄 알아야 해요. 알겠어요?”
원장님이 빨간 머리카락을 벅벅 긁으며 원장실로 들어갔다.
쾅-!
거칠게 문을 닫아 마물원이 진동했지만 역시 마법의 문이라 부서지진 않았다. 원장님이 화를 내는 경우는 많았어도 지금 같은 경우는 처음이었다. 난 목을 긁적이다 어깨를 으쓱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