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1화 헌터 정다정 (1)
원장님에게 무저갱의 신수로부터 들었던 이야기를 말해 줬다. 난 그녀가 설령 공룡을 멸망시킨 드래곤 중에 하나라고 할지라도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원장님은 자신의 종족, 드래곤에 대하여 이야기하는 걸 꺼려 했다. 하지만 이번엔 오래전 있었던 일들에 대하여 입을 열었다. 이야기엔 원장님이 왜 다른 드래곤들에게 미움을 받는지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신수의 이야기와 같았다.
드래곤의 개입과 그로 인한 공룡의 멸종. 교과서에서 배우듯이 지구에 충돌한 대규모 운석과 그로 인한 기나긴 빙하기에 의해 공룡은 멸종했다. 문제는 그 운석이 무작위적인 우주의 우연이 아니라 ‘누가’ 의도를 가지고 지구에 불러들였다는 게 문제지.
원장님은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의 드래곤들은 오만한 족속들이라며 그들을 참을성 없는 머저리들이라며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들은 과정의 중요성을 이해하지 못해요. 병에 깔끔하게 포장된 오렌지주스만을 먹고 싶어 하지, 씨앗을 심어 나무를 기르고 열매를 맺어 오렌지를 주스로 가공하는 과정이 있다는 걸 알지 못하죠. 고약한 놈들.”
원장님의 이상한 비유에 난 맞장구치지 못하고 뺨만 긁적였다. 의도는 알겠는데 왜 하필 오렌지주스야.
‘마시고 싶었던 거야?’
원장님은 관리실 냉장고에서 오렌지주스를 꺼내 벌컥벌컥 마셨다. 보통 음료수라고 하면 커피만 마시지만 용도 짜증 나는 이야기를 할 때면 목이 타는 모양이었다.
“난 처음부터 그들의 방식에 동의하지 않았어요. 그날 겪었던 비참한 종의 멸종이 기폭이 되어 잘난 척하는 머저리 드래곤들에게 반기를 들고 하는 일마다 훼방을 놓았죠. 흥, 오렌지나무를 세계수로 착각했을 때 얼마나 재밌던지.”
원장님의 얘기는 퍽 흥미로웠다.
드래곤에 대하여 알려진 거라곤 어찌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존재라는 것밖에 없다. 아마 지금부로 난 지구상에서 그들에 대하여 가장 많이 아는 인간이 되었을 것이다.
‘잘못된 다수의 집단과 반발하는 소수의 개인. 사람하고 다를 바 없네.’
드래곤도 가진 힘에 비해서 사람처럼 좀생이 구석이 있어서 그들의 집단에 반발하여 뛰쳐나온 ‘일부’ 드래곤들도 있었다. 원장님이 그랬고, 들어보니 ‘캣 맘’이나 ‘오타쿠 용’도 그러하단다. 흠. 재밌는 이야기지만 내게 있어 가장 흥미로운 건 원장님의 나이였다.
‘공룡이 살아 있을 때부터 살아왔다면 대체…….’
드래곤의 속사정보다 더 궁금한 건 대체 그녀의 생일케이크엔 몇 개의 초를 꽂아야 하는가?
“그때부터라면… 몇억 년도 전이잖아요? 와, 원장님 엄청 오래 사셨네.”
“정확히는 6501만 년 전이에요.”
원장님은 아득한 세월을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했다. 물론 용이니까 나이가 많을 거라곤 생각했지만 산수가 불가능한 수준이잖아.
황당한 표정으로 쳐다보고 있자 원장님이 말했다.
“오해하지 마요. 물론 인간의 관점에선 가늠조차 못하겠지만 용들도 그리 오래 살진 못해요.”
“하지만 그때부터 살았다면…….”
“살아온 삶의 시간이 행성의 역사와 동일시되진 않아요.”
드래곤이 과학을 논하게 될 줄이야. 난 최대한 멍청한 표정을 짓지 않으려고 했지만 내 머리론 쉽게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입을 오물이며 되물어야 했다.
“이해가 힘든데 쉽게 말해 주세요.”
원장님이 대답했다.
말투가 조금은 날 깔보는 듯하다.
“시간이란 상대적이라고, 인간들에게도 널리 알려진 개념일 텐데요. 모든 차원과 행성의 시간은 각기 달라요. 지구의 시간으론 6500만 년 전이나 다른 차원에선 불과 몇천 년 전 일어난 혹은 며칠 전에 일어난 일이 될 수도 있죠.”
시간의 상대성, 물론 안다. 소설이나 영화에서 무슨 시간여행이니 뭐니 해서 자주 다루잖아.
“혹시 제가 다녀간 차원들 중에서도 지구와 시간 개념이 다른 곳도 있었나요?”
그렇담 나도 저런 상대적 시간을 보냈던 적이 있었던 건가? 하지만 지금까지 경험으론 다른 세계에서 보낸 시간은 지구의 시간과 다르지 않았다. 원장님은 고개를 저으며 화이트보드를 가져와 검정색 마커펜으로 여러 개의 점을 찍었다.
“이건 과거의 시간.”
그리곤 점들 사이에 긴 선 한 개를 그렸다. 그러자 흩어져 있던 점들이 선으로 서서히 모이더니 이내 선과 합쳐졌다.
“이 선은 전이 이후의 시간을 의미해요. 같아졌어요. 이제 어느 차원을 둘러봐도 지구와 같은 시간대를 가져요. 마찬가지로 다른 차원도 지구와 같은 시간 개념으로 흐르죠.”
전이.
차원이 합쳐진다는 건 공간만이 아니라 시간도 합쳐지는 것이라며, 결국 시공간이 공유되는 하나의 우주가 될 거라고 했다.
“문제는 이마저도 불확실해 어딘가에는 시간이 다르게 흘러가는 차원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거예요. 어쨌든 수고 많았어요. 다정 씨 말대로 요괴들이 지구로 넘어온다면 준비할 게 많아질 것 같군요. 오래 걸릴 것 같으니 다정 씨는 쉬고 싶은 만큼 쉬다가 진저리날 때쯤 출근하세요.”
난 원장님으로부터 무기한 휴가를 받았다. 몇 달이나 요계에 있다 보니 지구에서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이 그리웠었다. 일단 돼지고기 김치찌개다. 수십 그릇을 먹어 주겠다. 바늘로 찌르면 피 대신 김치찌개 국물이 나올 만큼 퍼먹을 것이다.
“잠깐.”
김치찌개를 먹을 생각에 서둘러 퇴근 준비를 하던 난 문득 생각이 나 원장님에게 말했다.
“원장님. 그럼 우리 마물원에 있는 쥐라기 공원, 그거 설마…….”
원장님은 음흉한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공룡이 정말 그 공룡이었군. 잠깐, 그럼 공룡은 사실 ‘멸종’한 게 아니었네.
*
일주일 동안 김치찌개를 퍼먹었다. 식당에 가서 사 먹기도 하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기도 했다. 이제 마지막으로 직접 끓여 먹고자 재료를 사기 위해 마트를 돌아다녔다.
“비싸! 좀 깎아 줘요!”
“아니, 꼬마야. 마트에서 가격을 어떻게 깎니.”
정육점에서 찌개용 고기를 살 때였다. 마트의 야채 코너에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기둥에 가려져 손님이 누군지 확인할 수 없었다.
“아저씨, 한우 세트 저거, 가장 비싼 거 세 개 포장해 주세요.”
“네네. 감사합니다.”
귀찮아서 구워 먹지 않는 한우용 구이 세트를 세 개 주문하곤 야채 코너를 향해 걸었다. 괜히 걸음이 빨라졌다.
“그럼 양파랑 당근 같이 살 테니까 파 한 단 서비스 주세요.”
“얘! 파 한 단이 양파 당근보다 비싼데 어떻게 서비스로 줘? 아니 준다고도 안 했는데 왜 봉지에 담아. 거기 아가씨, 동생 좀 말려 보렴!”
기둥을 돌자 마트 직원과 실랑이하는 진상 손님이 보였다. 금발의 머리카락에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꼬맹이였다.
꼬마의 옆엔 분위기는 다르지만 녀석과 자매가 분명한 금발머리의 여자가 난처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둘 다 과하게 샛노란 머리카락이었지만 어색하게 느껴지진 않았다.
저 하얀 원피스 아래로 삐져나온 털북숭이가 어색하지. 저런, 굳이 숨기지 않아도 되는데. 이종족도 버젓이 돌아다니는 현대 사회에서 꼬리쯤이야.
난 어린이 과자 선물 세트와 1.5리터 콜라를 사고 한우를 챙겼다. 그리고 살금살금 자매의 뒤로 들키지 않게 걸어갔다.
“그럼 내가 소원 하나 이루게 해 줄 테니까 감자 한 박스…….”
“얘가 고른 거 다 결제해 주세요.”
난 녀석의 뒤통수를 꾹 누르며 카드를 건넸다. 녀석은 깜짝 놀라는 바람에 이제 노란 귀까지 튀어나왔다.
“함부로 요술을 쓰면 안 돼.”
감자 한 박스를 사려고 요술까지 부리려는 여우 요괴를 꾸짖으며 딱밤을 때렸다. 일주일 동안 나름 적응을 잘한 모양이지만 마트에서 가격을 깎는 걸 보면 영 이상한 걸 배운 것 같다. 화들짝 놀라 얼어 있던 나리는 내 목소리를 듣더니 귀를 쫑긋 세우며 머리가 땅에 닿도록 고개를 숙였다.
“우앗! 왕을 여기서 뵙나이다.”
“까불지 말고 편하게 해.”
나리는 곧바로 고개를 들더니 내 손에 들린 신용카드를 보며 눈을 반짝였다.
“히아! 그거 네모난 종이 같은 거, 황금이 들어 있는 요술 종이지? 왕께선 인간계에 적응을 참 잘하나 봐?”
“카드라는 거야. 나중에 하나 줄게. 근데 용케도 날 찾았네?”
“냄새 맡고 왔지. 우리 언니가 코는 기가 막히게 좋걸랑.”
송화, 그녀는 나리의 곁에서 아무 말 없이 옅은 미소만 지으며 서 있었다. 헤어졌을 땐 날 기억하지 못했었는데.
“자, 받아.”
사 놓은 선물을 건네자 나리가 꼬리를 살랑거리며 기뻐했다. 송화도 고개를 살짝 숙여 감사를 표했다. 난 괜히 어색해서 콧잔등을 긁적이며 물었다.
“나 기억해요?”
송화, 신수의 무녀.
의도야 어찌 되었든 요계에서 그녀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지천괴왕이 될 수 없었겠지. 하물며 죽었을지도 몰라.
많은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난 그 기억들을 송화가 기억해 줬으면 했다. 단지 조종당한 게 아니었으면, 송화의 의지가 조금이라도 담겨 있었으면.
“언니?”
나리가 송화를 보며 인상을 찌푸린다.
“엥? 왕은 또 왜 웃어?”
이내 날 보며 이해할 수 없는지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송화는 내게만 들리도록 요술을 부려, 작게 속삭였다. 내 마음을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지만 송화의 대답은 날 정말 기쁘게 했다.
‘모든 건 다 자신의 의지였었다고.’
요계에선 나리는 철부지였으나 지구에선 송화를 대신하여 제법 그럴듯하게 살림을 하고 있었다. 난 녀석에게 필요한 물건들을 사 주기로 했는데, 장난감 코너에서 나리의 걸음이 멈췄다.
“장난감 사려고? 귀엽네.”
내가 놀려도 녀석은 꿋꿋이 인형 한 개를 골라서 왔다. 인형을 보던 난 웃음을 멈춰야 했다.
대체 왜 저렇게 기괴하고 못생긴 인형이 마트 장난감코너에 있는지 모르겠다. 이계인들의 괴상한 취향까지 고려한 건가? 어쨌든 인형은 그와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
“두 개 가지고 와.”
거대하고 징그럽지만 우아하고 근사한 거미인형이었다.
*
송화가 날 기억하지 못한 건 오랫동안 정신에 깃들어 있던 신수가 빠져나온 여파였었다. 그 후 며칠이 지나자 송화는 모든 걸 기억했고, 날 만나 한마디를 건네주고 싶었다고 했다. 날 택하여 도움을 준 건 자기의 의지였다고 말이다.
송화는 요괴들이 지구의 삶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싶어 했다. 난 그들 자매에게 내가 왕이라는 명분으로 요괴들을 도와주라며 두둑한 금액이 들어 있는 체크카드를 줬다. 김치찌개나 사 먹는 내가 많은 돈 놔둬 봤자 어디 쓸 곳도 없다. 뭐, 이제 이만큼의 돈도 벌고자 하면 충분히 벌 수도 있고.
갑자기 송화와 나리가 라스베이거스로 넘어가 마피아들 상대로 일생일대의 도박을 하지 않는 이상, 평범한 현대인의 삶을 누리기엔 부족할 것 없을 돈이겠지. 송화에게 받은 도움의 보상치곤 짠 편이었지만 그 이상은 도와주지 않아도 괜찮다 싶었다. 다른 요괴들도 저들처럼만 적응할 수 있으면 좋을 텐데.
*
“여전히 거대하고… 끔찍한 세계야.”
원장님은 아직 할 일이 많이 남아 있었지만 난 바쁜 원장님을 졸라서 ‘무량성계’에 도착했다. 산(인간 기준)을 기어 다니는 기차만 한 지렁이들을 보며 참 잘 골랐다 싶었다.
“손오공에겐 시간과 정신의 방이 있었지만, 내겐 원장님의 공간이동 포탈이 있지.”
수련 장소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