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헌터 정다정 (5)
취락을 넘자 울창한 밀림의 군세가 잠시 멈춘 공터에 도착했다. 그곳에 던전이 있었다. 그곳에서 뿜어지는 기분 나쁜 에너지가 주변을 뒤덮어 불쾌한 공기가 일렁거린다.
“끔찍하군.”
모두 인상을 찌푸리며 던전의 입구를 쳐다봤다. 난 헌터A의 말에 처음으로 공감했다. 끔찍해. 던전의 생김새는 역시 ‘탑’이었다. 카멜롯에선 4층의 종탑이었으나 지금은 이끼가 끼고 무너져 가는 돌탑이었다. 입구는 작았으나 그 너머로 무언가가 막대한 살의를 풍기고 있었다. 불쾌함의 근원지인 것이다.
브라질 교섭인은 제 배낭에서 독특하게 생긴 기계를 꺼냈다. 던전 주변의 마나를 조사하여 던전 안의 구조와 위험도를 간이 측정하는 기계라고 한다. 하지만 소용없을 것이다. 솔로몬의 탑은 미친 곳이라 평범한 이론으론 풀이가 되지 않는 곳이다.
모두 머뭇거리고 있기에 홀로 탑을 향해 나섰다. 그러자 헌터C, 랭커가 뒤따라왔다. 그도 나와 똑같은 생각인 모양이었다. 어차피 소용없다면 부딪혀 보는 게 가장 낫다. 교섭인은 우릴 말렸지만 자존심 강한 다른 헌터들도 던전으로 들어가려고 하여 기계 작동을 중지했다.
“하아.”
헌터C는 그래도 탑의 입구에서 잠시 멈칫거렸으나 난 한숨만 내쉬곤 곧바로 뛰어들었다. 걱정이 없는 건 아니다. 다만 나로 인한 문제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일어날 문제 때문이다.
솔직히 지금 난 전혀 위기감이 없다. 불쾌함만 느낄 뿐 이전까지 날 두렵게 했던 기분들이 이번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던전의 주인이자 솔로몬의 탑에서 온 놈은 악독한 힘을 지녔겠지만 날 해치지는 못할 거라는 것도 잘 알았다.
탑에 들어서자 갑작스레 휘몰아치는 바람이 불어왔다. 동시에 주변 공간이 강풍에 쓸리듯 무너져 가루가 되었고, 때가 벗겨진 듯 새로운 공간이 나타났다. 솔로몬의 탑의 안이다. 탑에 들어서자 불쾌함이 이젠 마구잡이로 몸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난 살짝 샐러맨더의 기운을 끌어올려 불쾌한 기운에 대항했다.
“넓어.”
원장님이 그랬지.
솔로몬의 탑은 하나의 세계라고.
극히 일부의 층이 전이했지만 탑의 안은 바깥과 다름없이 하늘도 있고, 땅도 있었다. 저번처럼 미궁이 아니라 숲이었는데, 아마존의 정글보다 포근한 느낌을 주는 숲이었다. 다만 나무의 생김새나 자라난 식물들은 지구에서 볼 수 없는 종이었다.
[으엑, 저 녀석 뭐야?]
지금까지 품에서 잠만 자던 단비가 일어났다. 녀석은 아주 먼 곳을 가리키며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래, 저게 뭐람.”
놈들은 웅크리고 숨어 있었으나 내 시선을 피할 수는 없었다. 탑 안엔 ‘목소리를 들을 수 없는’ 무수한 괴물들의 기척이 느껴졌으나 모두 살아 있는 존재들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만나 본 괴물들 중엔 가장 큰 것 같은데?”
[징그러워. 땅 밑에도 온통 놈이 느껴져.]
그리고 그 무수한 괴물들은 기이하게도 모두 하나의 기운을 가지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하던 난 나무로 비유하자면 괴물들은 사실 단 한 뿌리에서 돋아난 가지들이 아닐까 싶었다. 즉, 저 멀리 보이는 산처럼 생긴 게 본체, 뿌리이며, 저곳까지 가는 길목에 즐비한 마물들은 모두 저 본체의 일부분이라는 것이다.
“땅 밑을 보여 줄 수 있니?”
[얍!]
단비의 힘이 잠시 동안이지만 흙을 투명하게 바꿨다. 난 주변을 둘러보다가 머리를 긁적였다.
단비의 말이 맞았다. 정확히는 가늠할 수 없지만 그림으로 그린다면 난 숲을 짊어진 거대한 문어의 위에 있는 것이다.
산신령 때와 비슷한가? 하지만 그는 제 몸의 일부를 살아 움직이는 생물처럼 만들진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기이한 생물은 처음이었다.
“어쩌면 다 미끼일지도 몰라.”
몇 년 동안 마물원에서 일했다. 굳이 배우고자 한 건 아니지만 기이하고 끔찍한 생물들에 대한 것에 있어 난 지구인 중 가장 견문이 넓다고 볼 수 있다. 놈은 솔로몬의 탑의 마물이다. 뭐, 이런 놈들도 있는 거겠지. 몸의 일부분을 미끼로 삼아 침입자를 죽이는 거대한 괴물이 한두 마리쯤은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잉, 여기서 못 나가잖아. 여기 싫타아! 내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 그동안 난 잘래.]
단비는 이곳이 싫다며 나가자고 보채다가 곧 나갈 수 없음을 깨닫곤 조용해졌다. 내 품으로 기어들어와 잠을 청하는 단비다. 싫어하는 것 같으니 이번엔 녀석의 힘을 빌리지 않아야겠다.
확실히 성가실 뻔했다. 사실 본체는 하나며, 다른 괴물들은 미끼에 불과하다는 걸 몰랐다면 말이다.
교감의 능력, 이럴 때 보면 참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다니까.
솔로몬의 탑에 들어서자마자 상황을 곧바로 파악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른 헌터들이 탑에 도착했으나 난 이미 모든 준비를 끝마친 상태였다. 여섯 명의 헌터들은 모두 무사히 탑으로 들어왔다. 다행히 도플갱어 때와 달리 공간이 분리되거나 하진 않은 것 같았다.
“크악!”
베테랑 헌터들답게 곧바로 상황을 파악했는데 갑자기 헌터A가 가슴을 움켜쥐며 쓰러졌다. 곧이어 다른 헌터들도 괴로움에 몸부림치며 비명을 질렀다. 그나마 멀쩡한 헌터C가 다른 헌터들에게 외쳤다.
“독이다! 모두 독에 대응해! 젠장, 독이 섞인 공기라니.”
난 포근이의 기운만 끌어올려 쉽게 대항할 수 있었지만 다른 헌터들은 아니었나 보다. 헌터C의 호령에 다른 헌터들도 저마다 재주를 부려 중독에 대처해 갔다. 하지만 헌터A는 독을 해독하는 기술이 없는 것 같았다. 괴로워하는 그에게 다가간 난 어깨를 붙잡고 샐러맨더의 기운을 살짝 흘려보냈다.
“아윽, 하. 감사합니다.”
기운은 곧 독을 중화시켰고, 호흡이 가능해진 헌터A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손을 내밀어 그를 일으켜 줬다.
“놈이 가만히 방관할 생각은 아닌 것 같네요. 조심해요. 곧 올 테니까.”
그러곤 헌터들에게 경고했다.
지금보다 더 강력한 독의 안개가 밀려온다고 말이다. 이곳의 주인은 솔로몬의 탑에서 온 사이코패스 괴물답게 쉴 틈을 주지 않고 우릴 죽이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난 더 강력한 독을 가진 안개가 올 거라는 걸 냄새로 눈치챘다.
“저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교섭인이 멀리 숲에서부터 높은 파도처럼 밀려오는 녹색 안개를 가리켰다. 맹독이 가시화되자 공기 중에 퍼진 독조차 견디기 버거워했던 헌터들이 겁에 질렸다. 담담한 건 독을 버틸 수 있는 수단을 가진 자들.
“못 버틸 수도 있어요.”
하지만 과연 장담할 수 있을까?
마물원에서 일하며 위험한 마물들을 많이 상대해 봤지만 특히 성가신 건 독을 가진 놈들이었다. 독이란 위험한 마물들이 가지는 기본 옵션 같은 거다. 그리고 마물의 독은 동물과 달리 단백질 구조로 이루어진 게 아니다.
‘마나’라는 빌어먹을 만능 장치로 독은 무수한 독질을 가진다. 마물의 독은 먹으면 몸이 석화되거나 맨콜피온의 독처럼 타오르거나 심지어 살점이 맛있는 젤리처럼 변하기도 했다.
젠장, 얼마나 고생했었는지.
다행히 내겐 많은 시행착오 끝에 마물의 독도 해독할 수 있는 샐러맨더의 불꽃이 있었지만 헌터들은 아니다. 난 그들이 가진 수단이 얼마만큼 대단하든 저 독 안개를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많은 양은 먹어 본 적 없는데.”
“네?”
“뒤로 물러나 계세요.”
혼잣말에 헌터A가 되묻자 난 그에게 나서지 말라며 경고했다. 내게 만능 해독약이 있는 건 맞았다. 다만 지금까지 난 독을 해독할 때 모두 내가 직접 중독당했을 때에 대처했었다. 혹시 모르니 공격을 해 볼까.
“피해야…….”
“어디로 말입니까?”
안개는 한쪽에서만 오는 게 아니었다. 우릴 노리고 사방에서 밀려든다.
헌터C는 검을 뽑아 들며 특기인 ‘파이로 키네시스’를 발휘했다. 그의 검에 솟아오르는 불꽃에 난 작게 휘파람을 불었다.
암묵적으로 랭커인 그는 무리의 리더였다. 헌터C는 독 안개가 오기 전 없애야 한다며 호령하자 다른 헌터들도 공격을 준비했다.
능력자, 헌터.
불꽃이 뿜어지고 흙바닥이 뒤집힌다. 초능력자의 힘이다. 하지만 불로 태워도, 흙으로 덮어도 안개는 없어지지 않고 오히려 영역을 넓히며 스멀스멀 밀려왔다.
나 또한 샐러맨더의 불꽃을 던져 봤으나 독무는 움츠러들기만 할 뿐, 없어지진 않았다. 요란한 힘들이 펼쳐지는 와중에 유일한 수인 헌터인 여자B는 할 게 없었는지 활시위를 당겼다.
난 화살이 안개를 가로지르는 모습을 지켜보다 한숨을 내쉬며 안개 속으로 걸어갔다. 야옹이의 힘이 발휘되고 있는 터라 알아차린 자는 아무도 없었다.
결국 이렇게 되는 건가. 조금 멋있는 상황을 기대했는데.
*
난 더부룩한 속을 달래며 그들에게 걸어갔다. 안개는 없어졌지만 그들은 쉽게 무기를 내려놓지 못했다. 황당한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답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난 대수롭지 않게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걱정 마요. 내가 다 먹었어요.”
안개 속에서 난 마물의 힘을 응용하여 입으로 모든 독을 빨아들였다. 폐에 가득 찬 독은 순식간에 포근이의 힘으로 불타올라 정화되었다.
이런 씨, 다시 생각해도 화나네. 멋있게 없앴으면 괜찮을 텐데 누가 독 안개를 먹어서 해치워? 그러니 저런 멍청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지. 그들은 믿지 못하는 것 같았지만 정말 독 안개는 없어졌으니 믿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트름을 하자 매캐한 연기가 올라왔다.
괜히 짜증이 났다. 난 그들을 뒤로하고 얼른 탑의 주인을 해치우기 위해 저 멀리 본체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어디 가십니까?”
“따라와요.”
“하지만 일단 여기서 상황을…….”
“싫음 말고.”
내가 단독 행동을 하자 교섭인이 말렸지만 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그냥 원장님의 임무에만 집중해야겠다.
어슬렁어슬렁 걷고 있자 뒤에서 헌터들이 날 따라오기 시작했다. 독을 집어먹는 내 모습에 감명했나? 보통이라면 혼자 행동하려는 날 미친놈 취급하며 놔두겠지만 이번엔 이상하게도 랭커마저 날 뒤따라왔다.
기이한 던전에 기이한 행동을 하는 정체 모를 날 왜 따라오는진 몰라도 나름 현명한 판단이네.
*
놈은 잔뜩 화가 나 있었다.
특히 내게 엄청 화가 나 있었는데, 그럴 만도 했다. 난 마물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고, 반대로 마물에게 내 목소리를 들려줄 수도 있었다. 안 그래도 화 많은 솔로몬의 탑의 마물인데 내가 넌 이제 뒤질 거라고 복창을 해 대니 어찌 참을 수 있을까.
“옵니다.”
벌써 네 마리째다.
놈의 일부분에 불과한 괴물이 날 습격해 온다. 헌터들에게 경고를 하지만 결국 해치우는 건 나였다.
게임으로 비유하면 어그로가 끌렸다. 그런데 탱커가 혼자 다 잡는 격이다. 힘을 숨기지도 아끼지도 않았다.
난 심연의 악귀처럼 생긴 끔찍한 괴물을 향해 기다란 얼음의 창을 던졌고, 놈은 순식간에 얼어붙어 조각조각 깨졌다. 지금까지 모두 단 일격에 괴물을 없앴다.
단언컨대 괴물이 절대 약한 건 아니다. 오히려 무척 강한 편에 속한다. 저 랭커의 헌터라도 꽤 버겁게 해치울 만큼 말이다.
크어어억!
땅에서부터 촉수가 솟아오르더니, 곧 괴물의 형태로 바뀌어 간다.
착실히 괴물을 죽이며 놈의 화를 돋우자 이제 수십 마리의 괴물이 덤벼 왔다. 한 마리씩 덤비다가 갑자기 수십 마리라니, 졸렬하기 짝이 없다. 이 탑의 주인은 로봇 만화 주인공들이 합체할 때 자비 없이 방해하는 악당 같은 놈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위기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마물원 입사 때와 비교하지 않아도 지천괴왕이 되기 전까지의 나였으면 지금 상황은 충분한 위기였다. 한 마리도 버겁게 상대했을 테고, 갑자기 수십 마리가 나오니 내 안에 깃든 끔찍한 마물들의 힘을 빌려서, 정신을 잃어 가며 힘겹게 싸웠겠지.
하지만 지금은 그저 그래.
“염화의 고리.”
검을 들자 붉은 송곳니, 홍아가 되었다. 날 샐러맨더의 불꽃을 끌어올려 염화의 고리를 펼쳤다. 마치 산불처럼 번져 나가는 막대한 화염의 고리는 순식간에 괴물들을 불태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