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헌터 정다정 (6)
일격에 이십 마리.
괴물을 모두 죽인 후 헌터들을 지켜봤다. 그들도 몇 마리의 괴물을 상대했다. 그러나 꽤 버거워 보인다. 심지어 랭커마저도. 그는 초능력과 검술을 사용하는 뛰어난 헌터였다. 검술도 어디 이상한 걸 주워 배운 게 아닌 착실한 무림의 무공 냄새가 났다. 초능력에 무공 유저. 누구나 동경할 힘을 가진 자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하지만 그는 동시에 수 마리의 괴물조차 상대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던 난 처음 느끼는 묘한 기분을 느꼈다.
난 항상 도움 받는 처지였지. 구르고, 구르고, 구르고, 고생을 제법 했었어. 요계에서 있을 땐 요괴들과 싸우며 압도적인 위치에서 적을 압살하는 상황이 자주 생겼으나 크게 와닿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계에서의 일이었고 깊게 생각하지 못할 희귀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젠 알겠다.
막상 헌터들과 같이 다니니, 이런 ‘평범한’ 자들 곁에 있으니 확실히 알겠다.
이런 기분이구나.
드래곤이 왜 자기 멋대로 행동하는 기분파인지 어느 정도 이해할 지경이다. 뭐야, 이 짜릿한 우월감은?
물론 그들이 약하다는 건 절대 아니다. 급파 인력이긴 하나 소수 인원으로 던전을 조사하기 위해 선별된 헌터들이다.
지구의 기준에서 보면 강한 자들이 맞다. 그러나 지금까지 항상 지구의 바깥에서 기상천외한 경험들을 해서 그런지, 내가 느끼기엔 겨우 지구인의 수준이구나 싶었다. 크리링을 보는 손오공의 느낌이랄까.
*
쉽게 말하자면 이건 나만을 위한 올림픽대회였다. 그 누구도 금메달을 차지하진 못한다. 아니, 메달은커녕 심지어 참가상까지도.
솔로몬의 탑의 환경이 만들어 내는 지독한 독 안개도, 코끼리도 빠져나오지 못할 늪지대도, 수십 마리의 괴물도, 그 수십 마리의 괴물이 합체한 대형 괴물도 내겐 전혀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이 무력할수록 내 존재는 빛이 났다. 하지만 난 그들이 느끼는 무력함에 공감해 줄 필요가 없다. 헌터들에겐 아니더라도 내겐 이 정도 난관은 당연한 것이다.
그래, 이게 바로 엿 같은 드래곤 레벨이다. 겨우 이런 것에 좌절을 겪으면 지금까지 해 왔던 온갖 수치스러운 행동들과 영문 모르고 죽을 뻔한 위기들이 덧없는 게 되어 버린다.
헌터들은 말조차 하지 못했다.
하지만 베테랑답게 상황 파악은 빨랐다. 아무 말 없이 날 뒤따라왔고, 나도 대수롭지 않게 괴물을 죽이며 앞으로 향했다.
많은 난관을 쉽게 헤쳐 나가 마침내 본체가 있는 곳까지 도달했다.
어떤 존재가 던전을 유지하는 건 익숙한 개념이었으므로 내가 놈을 죽여야 이곳을 벗어날 수 있다고 말해도 헌터들은 무난히 받아들일 수 있었다. 다만 놈에 대한 설명은 이해하지 못하는 듯했다.
“그냥 산으로 보이는데 저게 다 마물의 몸이라는 겁니까?”
헌터B가 산등성이가 둥그런 돌산을 가리키며 내 말에 의문을 표했다.
“그의 말이 맞습니다. 정말 대단한 크기의 마물입니다.”
교섭인이 말을 보탰으나 그는 틀린 말을 하고 있었다. 내가 말한 건 저 산처럼 보이는 게 마물의 본체의 일부라는 거지 마물이라는 게 아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직접 보여 주기로 했다.
“홍식.”
붉은 송곳니가 불길을 쏟아낸다. 빠르게 뿜어진 불길은 돌산을 휘감았고, 그 즉시 놈이 반응했다.
“저 산은 마물이 아니라.”
돌산이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며 불길을 몰아낸다. 이내 몸을 일으켰는데 산의 뿌리가 끝도 없이 커져 갔다.
“놈의 대가리에 지나지 않습니다.”
대지가 흔들린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지나쳐 왔던 숲과 늪, 또한 지평선 너머의 눈으로 파악할 수 있는 모든 지물이 부서지고 갈라지며, 그 속에 감춰 뒀던 시꺼먼 살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몇몇 헌터들이 비명을 질렀으나 굉음에 묻혔다.
이윽고 대지를 부수고 놈이 기어 나온다. 던전에 들어온 순간부터 우린 거대한 마물의 위에 서 있었다.
돌산은 놈의 거대한 머리, 상대했던 괴물은 촉수의 일부분. 예상대로 놈의 생김새는 문어와 같았다. 시꺼멓고 비틀리고 끔찍하게 생겼긴 했지만 기본 형태는 문어다.
놈이 모습을 드러내자 돌산처럼 보이는 놈의 대가리에 거대한 크기의 문신이 생겼다. 원장님이 보면 알 거라더니 저렇게 눈에 띄게 나타나는군. 숫자는 어디 보자, 120? 600은 아니군. 다행이다.
난 무너지는 땅 위에 가만히 서 있었지만 다른 헌터들은 기겁하며 도망치려고 했다. 헛된 일이다. 이곳은 도망칠 곳이 없다. 이 던전 자체가 놈의 몸이다.
들썩이는 대지, 마침내 놈은 제 몸 위에 붙어 있던 ‘자연’을 털어냈다. 한 생물의 태동이라기엔 천재지변에 가까웠다. 브라질 교섭인의 능력으로 헌터들은 무사히 공중에 떠 있을 수 있었으나 상황은 나쁘다.
“이상한 놈이야.”
난 무너지는 대지를 풍종도보의 경공으로 가볍게 이동하며 놈의 머리 위에 올라갔다. 난 놈이 몸을 일으킴으로서 일어난 붕괴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부서진 대지는 검은 무저갱으로 낙하하다가 다시 위에서 떨어졌다. 아마 이 거대한 마물의 몸 주변을 제외하곤 모든 공간의 아래와 위, 좌우는 연결되어 있을 것이다.
한정된 공간, 마물원의 우리와 비슷한 개념이기에 놀라진 않았다.
그래도 솔로몬의 탑의 괴물 중에 이런 거수가 있다는 건 조금 놀랐다. 몸에 산과 강을 키우던 산신령과 비슷한 크기이려나? 놈의 머리 위에서 내려다본 몸의 모습은 기이했다. 문어 다리가 브루클린 다리만 하고, 그런 거대한 다리가 여덟 개나 있어 흐물거리고 있다.
놈 앞에서 난 개미였다.
개미와 인간의 크기.
그러면 머리 위를 기어 다니는 개미를 잡기 위해 사람은 뭘 할까.
휘이이잉-!
그저 다리를 휘두를 뿐인데 공기가 찢어지며 굉장한 바람이 불어왔다. 놈은 날 죽이기 위해 촉수 다리를 내려쳤다.
엄청난 크기에, 빠르기도 하지만 피하지 못할 것도 없다. 경공을 발휘해 영향에서 벗어났지만 충격에 굴러 떨어질 뻔했다.
“단단한 녀석이네.”
저런 공격을 하고도 놈의 머리는 멀쩡했다. 하긴, 사람이 제 머리를 찰싹 친다고 해서 두개골이 박살 나진 않겠지.
쿠워워!
놈은 다시 제 몸의 살점을 이용해 괴물을 만들어 냈지만 전과 다를 바 없었다. 가볍게 해치운 후 놈을 어떻게 죽일지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물리적인 힘으로 이런 무지막지한 괴물을 죽일 순 없다. 다만 우연의 일치로, 일 년 동안 수련한 곳이 ‘거수들의 세계’였고, 그곳에서 난 많은 방법을 깨우쳤었다. 놈보단 크지 않지만 엇비슷한 크기의 괴물과 상대한 적도 많았다.
심지어 이 힘으로 ‘아프수’ 너머 무량성계의 진정한 거수들하고도 싸울 준비를 하기도 했었다. 시공간이 합쳐지며 위험하기에 시도조차 못 해 봤지만 아마 문지기 정돈 상대했었겠지.
난 놈의 머리 위에서 녀석에게 말을 걸었다. 거대하고 사악한 놈이라 소통하기에 난해했다.
[내 말 들리지?]
지금까지 예외는 없었다.
솔로몬의 탑은 마물들은 사악해.
이놈도 마찬가지.
놈은 탑에서 벗어나길 희망했다.
이유는 간단하다. 세상을 잡아먹고 싶어 한다.
[날 따라간다면 살려 줄 수도 있는데.]
그렇다는 대답을 기대한 건 아니다. 역시 놈은 세 개의 촉수를 휘두르며 몹시 화를 냈다. 결국 난 검을 들어올렸다. 홍아는 철검이 되고, 이내 검붉은 바늘이 되었다.
작고 볼품없지만 이건 정말 위험하다. 거수들을 상대하며 깨달았었다. 놈들과 싸우려면 같은 크기가 되거나, 놈들도 어찌하지 못하는 힘을 사용해야 한다는 걸.
개미가 아무리 인간을 물어 봤자 사람은 죽지 않는다. 하지만 그 개미가 총알개미라면 끔찍한 격통을 선사하고, 지독한 독을 품은 독충이라면 인간마저 죽일 수 있다.
이 바늘은 단순해 보이지만 무려 네 가지의 마력이 깃든 콤비네이션이다. 1년간의 목숨을 건 수련으로 깨우친 힘으로 저런 놈을 상대하기엔 최적의 기술이다.
콕.
그저 바늘을 집어넣는 너무나 허무한 시작. 그러나 점점 죽음은 깃들어 온다.
끄에에에에!!
거대한 덩치에 비해 먼지에 불과한 바늘에 놈이 천둥 같은 비명 소리로 울며 괴로워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덩치로 발버둥을 치니 대지진이 일어나는 것 같다. 하지만 몸에서 퍼져 나가는 독은 피할 수 없으며 막을 수 없다. 마침내 놈의 전신에서 살점이 갈라지며 불길이 솟구쳤다.
용광로 안의 녹아내리는 쇳물처럼 놈의 몸은 붉게 물들어 녹아 간다. 놈의 고통이 전해져 온다.
난 입술을 깨물며 참아 냈다. 악마라도 죽음은 괴로워한다.
젠장, 빨리 끝나면 좋을 텐데 이 힘은 그런 자비로운 게 아니다.
쾅! 쾅! 콰앙-!
놈의 내부에서 ‘전염’되는 ‘불꽃’은 이내 살점과 뼈와 장기를 엉망으로 만들고, 시뻘겋게 달아올라 피부로 분출되었다. 놈의 몸이 순차적으로 폭발하기 시작했다. 촉수가 터져나가자 체액과 기름같이 검은 피가 튀어나와 비처럼 내렸다. 거대한 괴물이 터져 죽는 건 끔찍한 광경이었다.
콰앙!
놈의 여덟 다리와 몸을 터트리고, 이내 돌산같이 거대한 대가리마저 부풀어 오르기 시작했다. 그와 동시에 내가 바늘을 집어넣었던 구멍에서 죽음을 퍼트리고 온 메타소드가 튀어 올랐다. 난 놈의 몸을 한 바퀴 돌면서 죽음을 전염시키고 헤집어 놓고 온 바늘, 메타소드를 주웠다. 검붉은 바늘은 다시 철검이 되었다.
놈이 터지기 전, 높게 뛰어올랐다.
마침내 차오르는 화염이 놈의 몸을 터트리며 바깥으로 분출되었다.
그 모습이 꼭 화산이 폭발하는 것 같다. 거대한 화산, 젠장. 내가 벌인 일이지만 새삼 끔찍하다.
[너.]
거대한 덩치만큼 놈의 살점과 체액은 주변 일대를 오염시켰다. 난 기름 같은 피로 얼룩진, 꿈틀거리는 살점의 위를 걸으며 놈에게 다가갔다.
[그게 네 본모습이구나.]
산보다 거대했던 문어의 몸은 사실 위장된 육체였다. 이것도 놈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놓칠 뻔했다. 기괴한 능력이다. 육체 안에 진짜 몸을 숨기고 있다니. 사람으로 치면 두개골 안에 진짜 사람이 있는 거잖아.
솔로몬의 탑의 주인이자 평야를 짊어지고 다니던 거대한 문어, 놈의 진짜 모습은 내 주먹보다 작았다. 해삼처럼 돌기가 있는 꿈틀거리는 촉수,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마물이라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다.
끄으윽!
놈은 기어서 자신의 갈가리 찢겨진 가짜 육체에 기어 들어가려고 했다. 난 발로 놈을 짓밟아 멈춰 세웠다. 이 정도 크기면 괜찮겠지. 들고 가 원장님에게 보고해야겠어.
[내 몸에서, 네 몸에서 느껴진다. 다른 층의 악마가.]
놈의 본모습을 마주하자 이제 마음이 선명하게 들렸다. 놈은 발버둥을 멈춘 채 날 쳐다봤다. 눈은커녕 얼굴이 어디 있는지도 모르겠으나 왠지 날 보는 것 같았다.
[그는 먹혔다. 나도 먹어치울 셈인가? 싫다. 난 하나가 되지 않아.]
난 놈의 목소리를 잠자코 들었다.
놈이 말하는 다른 층의 악마가 미라 마물이라는 걸 알았다. 무량성계에서 수련할 때 알았는데 난 놈의 힘을 빌린 게 아니었다.
놈이 내 안에 깃들어 있었던 것이다. 원장님이 조사해 줬는데 미라 마물을 가뒀던 봉인 우리는 빈 상태였다고 한다.
원장님은 놈이 나와 한번 교감한 이후로 날 차지하기 위해 의식 속으로 기어 들어온 것 같다고 했다. 놈의 힘을 이끌어 낼수록 제정신을 유지하지 못한 건 그 때문이었던 것이다.
뭐, 이제는 상관없다. 더 이상 놈은 내 안에 존재하지 않으니까.
“얼레?”
작은 해삼 같은 놈이 갑자기 꿈틀거리더니 내 발에 찰싹 달라붙었다. 심지어 몸에 점점 흡수되듯 발에 기어 들어오기까지 했다. 설마 이 새끼, 기생마물이었나?
난 재빨리 샐러맨더의 불꽃을 둘러 놈을 밀어내고 발로 차 버렸다.
[도리어 네놈을 먹어치워 부화할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힘을 숨겼던 놈이 믿을 수 없는 속도로 튕겨져 날 덮쳤다. 반응할 수도 없이 내 입으로 파고들어, 식도를 타고 뱃속으로 사라졌다.
꺼억.
맛없어.
“시벌.”
곧바로 손가락을 넣고 토했으나 빈속에 위액만 올라왔다. 이 시벌롬의 해삼 새끼는 왜 갑자기 내 입에 들어와 스스로 먹힌 건가.
난 놈의 마지막 말을 기억하며 곧바로 힘을 끌어올렸고, 몸 상태를 확인하기 위해 허둥지둥 대처 방법을 찾았지만 약간의 포만감만 느껴질 뿐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놈의 기운도 느껴지지 않았고, 달라진 건 전혀 없다.
“뭘 먹은 거야.”
설마 이대로 소화되고 끝인가?
하품하다 날파리 삼킨 정도가 아니잖아. 난 목을 쓰다듬으며 놈이 들어오던 감촉을 떠올려 봤다.
착각이 아니라면 분명 내 목구멍으로 넘어가다가, 갑자기 도로 기어 나오려고 했었던 것 같은데.
젠장. 돌아가면 종합 건강 검진을 받아 봐야겠다. 물론 병원이 아니라 드래곤인 원장님에게. 이상한 거 주워 먹지 말랬는데.
*
“자, 해치웠으니 돌아가요.”
브라질 교섭인의 능력으로 공중에 떠 있던, 하지만 검은 피와 체액을 피하진 못했던 헌터들은 엉망이 된 꼴로 날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멀리 보이는 문을 가리켰다. 전과 마찬가지로 탑의 주인을 없애자 문이 생겨났다. 먼저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하자 그들이 허겁지겁 달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