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7화 자이언트 (3)
축제가 시작되었다.
거인들은 한데 모여 술과 음식을 나눠 먹었다. 술은 과일로 담아 향긋했고, 음식은 단지 별도의 조리 없이 고기를 굽기만 했으나 소금도 있어 맛은 나쁘지 않았다. 음식 중엔 당연 내 고름뱀 구이가 가장 인기가 많았다. 맛있는 음식으로 환심을 사는 덴 성공한 듯했다.
거인들은 좋게 말하면 사교성이 좋고, 나쁘게 말하면 인사불성 술 취한 주정뱅이 같았다. 서로서로 잘 어울렸는데, 날 경계하지 않은 이유도 나처럼 타지에서 축제를 즐기기 위해 찾아온 거인들도 있었기 때문이다.
부족 생활을 하나 수가 적고 다른 부족끼리 상당히 거리가 떨어져 있어 동족을 아끼는 것 같았다. 난 점점 다소 더럽게 생각되던 거인들이 좋아지기 시작했다.
유쾌하고 순진하고 솔직하다. 제멋대로 생긴 얼굴도 볼수록 정이 간다.
술잔을 나누며 낄낄대다 보니 죽마고우처럼 느껴지기까지 했다. 축제는 밤낮을 이어 술을 퍼마시는 게 주된 행사였는데, 난 하루 동안 거인들에게 술을 먹인 후 친구가 되었다고 느꼈을 때쯤 넌지시 지구에 대해서 물어봤다.
원장님에게 미리 들어서 알고 있었긴 했지만 놀랍게도 거인들도 전이에 대해선 알고 있었다. 부르는 의미도 다르고 모든 걸 알지는 못했으나 지구라는 곳이 있다는 걸 알았다.
대전이가 있은 후로 지성이 있는 모든 차원의 생명체들은 지구에 대해서 깨달았다고 하니 거인들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난 우선 이곳에서 처음 만났던 두 얼간이 거인들에게 물어봤다. 그러자 녀석들은 껄껄 웃으며 ‘사냥터’라고 대답했다.
“사냥터?”
“으헤헤, 저은쟁! 저은쟁!”
술에 취해 꼬인 혀로 벌떡 일어나 전쟁을 부르짖는다. 난 인상을 찌푸리며 녀석들을 지켜보다 다른 거인들에게 다가갔다. 마찬가지로 지구에 대해서 묻자, 누군가는 ‘전쟁’ 누군가는 ‘사냥터’라고 대답했다. 그 외에 작은 인간들을 잡아먹는다던가 키워서 노예로 부리겠다고 하는 자들도 있었다.
점점 거인들의 말을 들을수록 내 안은 차갑게 얼어붙어 갔다. ‘거인으로서’ 곁에서 지켜보니 다소 얼빠져 보였기에 친밀하게 느껴졌나 보다. 웃으며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거인의 말에 정신이 돌아왔다.
내 말이 기폭제가 되었는지 녀석들은 한데 모여 서로 어깨동무를 하며 어떤 노래를 불렀다.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기괴한 노래의 가사는 온통 침략과 학살과 다른 종족의 ‘맛’을 찬미하는 잔인한 내용이었다.
난 거대한 몸뚱어리를 접어 두고 내가 인간이었다면 지금 어떨까 생각해 봤다. 역시, 그들은 인류에게 무시무시한 존재다. 놈들의 손이 휩쓸고 지나가면 수십 명의 사람들이 죽고 발길질에 인류가 일궈 낸 문명이 박살 날 것이다.
“에휴, 역시 엿 같은 세계야.”
더 이상 내가 이곳에 있을 이유는 없어졌다. 화합은 개뿔, 전쟁을 대비해야 할 지경이네. 난 원장님에게 내가 보고 들은 걸 말하면 어떻게 조치할지 궁금했다. 헌터들이야 거인에 대한 ‘징조’를 알고 있었으나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제 몸의 백배가 넘는 괴물이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하는데.
죽여라, 먹어라, 부셔라!
죽여라, 먹어라, 부셔라!
야야야아아!
야야야아아!
거인들의 흥겹고 기괴한 노래가 계속될 때 난 축제에서 몰래 빠져나오려고 했다. 망할 전이에 대한 골치 아픈 문제를 직접 대면하고 온 꼴이네. 대전이, 벌써부터 걱정이 된다.
[포탈을 준비해 주세요.]
원장님에게 연락해 공간 이동을 한다고 말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눈치를 살피며 풀숲으로 슬금슬금 뒷걸음질 칠 때였다. 흥겹게 달아오르던 노래가 끝났다. 이 축제를 연 부족의 장이 무언가를 들고 소리쳤기 때문이다.
“토루타쿤!”
도망치려던 난 족장의 손에 들린 찬란하게 빛나는 보석에 발걸음을 멈췄다.
“어머.”
붉은 보석.
루비처럼 붉고 다이아몬드처럼 빛나는 거대한 보석. 거인조차 두 손으로 들어야 할 크기, 만약 지구라면 역사상 가장 큰 보석. 집채만 한 보석.
“토루타쿤! 토루타쿤! 위대한 전사가 된 자에게 영광의 돌멩이를! 기뻐하라, 이곳에 모인 바람의 전사들! 토루타쿤의 승리자에게 세상의 끝에서 주워 온 돌멩이를 하사하리라!”
단지 보석이라면 미련 없이 도망쳤을 것이다. 물론 저 거대한 보석의 ‘외형적’ 가치만 해도 수천억이겠지만 ‘토루타쿤’에 참여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이제 물욕은 목숨보다 못해졌다. 예전엔 이계에서 아무거나 하나 주워와 지구에 팔아도 몇억을 받았다.
윙바레에게 받는 로열티와 마물원의 월급, 원장님의 보너스, 기타 등등으로 통장의 단위가 하늘을 뚫을 기세다. 마물원 입사 초기엔 돈으로 움직였지만 이젠 ‘시시’해졌다.
세상엔, 아니 지구는 아직 돈이 통용되지만 ‘우주엔’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워낙 드래곤 옆에서 미친 규모의 일들을 겪다 보니 ‘돈’이란 게 우주적 시선에서 보면 얼마나 하찮은지 깨달았다.
지구의 돈 백억이 있어도 차원휴게소에선 라면 하나 못 사 먹어.
그런 내가 저 보석에 사고회로가 정지된 건 재화 가치가 아닌 다른 무언가 때문이었다. 수천억의 가치보다 난 더 거대한 걸 저 보석에게서 느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종류의 무언가를! 어쩜 저리 강대한 마력이 아름답게 휘몰아치지?
[원장님, 잠시 할 일이 남아서 미뤄야 할 것 같아요.]
난 홀린 듯 송신기를 켜 원장님에게 말해 뒀다. 와우, 저건 꼭 얻어야 해.
*
토루타쿤은 원장님에게 건네받은 거인들에 대한 자료를 읽을 때, 내가 그들이 정말 야만적이라고 생각했던 결정적인 이유였다. 토루타쿤은 거인들의 언어로 많은 의미를 가지지만 한마디로 해석하자면 생사를 건 토너먼트 싸움이다.
축제를 즐기며 음식과 술을 나눠 먹던 거인들은 토루타쿤이 시작되면 돌변해 서로 피 터지게 싸우는 것이다. 그들 축제의 절정은 유혈이 낭자한 잔인한 싸움이니 야만적이기 짝이 없다.
특히 단지 싸우는 것이라면 괜찮겠지만 토루타쿤은 대상을 ‘죽여도’ 어떤 질책이나 비난을 받지 않는다. 이 부족은 다소 유한 성격인 듯 보이나 자료에 의하면 하루 만에 자신의 부족 반 이상을 학살하고도 대전사로 인정받은 거인의 사례도 있었다.
토루타쿤-!
토루타쿤-!
거인들이 족장의 말에 열렬한 환호성을 질렀다. 난 서로 뚝배기를 깨는 싸움에 기뻐하는 거인들을 보며 역시 인간과 어울리긴 힘들다는 생각을 했다. 이해하기 힘든 문화다. 난 이 잔인하고 야만적인 싸움에 참가할 이유가 없었다.
“토루타쿤!”
저 보석이 걸려 있지 않았다면.
난 토루타쿤을 연호하며 참가하려는 거인들 무리에 자연스레 합류했다. 저거 내 거다, 내 거야.
거인들은 마을에서 약간 떨어진 곳에 세워진 투박한 경기장으로 향했다. 보석에 대한 욕심으로 가득해 무리에 어울려 가다 보니 어찌어찌하여 내가 토루타쿤의 첫 번째 출전자가 되었다.
“으헤헷! 토루타쿤!”
내 상대는 뾰족한 창을 다루는 사냥꾼 거인이었다. 거인의 기운은 읽기 힘들었으나 느껴지는 힘은 절대 만만하지 않았다. 지구를 기준으로 두자면 랭커쯤 돼야 상대할 만할까?
그는 창을 이리저리 휘두르며 날 위협했다. 구경꾼들이 함성이 지르며 처형을 요구한다.
“흐음.”
난 놈을 잠자코 바라보기만 할 뿐 관심은 없었다. 그보다 내 상태에 대해서 냉정한 평가가 필요했다.
난 스케일링의 법칙이니 뭐니 해서 제약으로 인해 많은 힘을 내지 못한다. 본래의 힘을 다루지 못하는 내가 이 몸 상태로 마물의 힘과 혼합이라고 된다면 거대화가 풀릴 위험이 있다.
적어도 많은 거인들에게 둘러싸인 채 높은 단상에 앉은 족장, 그가 들고 있는 저 보석과 가까워지기 전까진 들켜선 안 돼.
그럼 내가 익숙하지 않은 거인의 몸으로 싸움에서 이기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토루타쿠운!”
거수의 몸조차 꿰뚫을 날카로운 창을 내세우며 덤벼드는 거인. 난 놈의 아랫도리를 보며 피식 웃었다. 그래, 내가 최소한의 동작으로 거인들을 이기는 방법. 바로 급소 공격이다.
“으차!”
사냥꾼 거인의 몸놀림은 대단히 민첩했으나 무공을 배운 나와 비견될 건 아니다. 난 힘을 아끼기 위해 창이 가슴을 스치는 아슬아슬한 상황까지 기다린 후 재빨리 몸을 틀어 피하면서 힘찬 발길질을 했다.
거인들은 제 질긴 가죽과 단단한 근육을 신봉하여 몸을 지키는 방어구가 없었다. 기껏해야 허리에 두른 가죽 치마뿐.
난 사용할 수 있는 모든 힘을 응축한 발차기로 정확히 놈의 가랑이 사이를 가격했다(거인족들의 무리는 남녀로 구분되어 있어 이 부족원들은 모두 으깨 버릴 땅콩들만이 있었다.).
억!
합창하듯 동시에 들려오는 비명.
구경꾼들도, 토르타쿤에 참가하는 자들도, 심지어 족장마저도. 모두 하나같이 같은 표정으로 저도 모르게 손을 벌벌 떨었다.
비명을 지르지 못한 건,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고통에 휩싸인 사냥꾼 거인뿐.
“미안하지만 봐줄 수가 없다.”
깨져 버린 녀석은 발라당 누워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그가 발버둥 치며 고통을 호소하자 거인들은 모두 동조하며 눈물을 흘려 줬다. 거인들은 회복력이 뛰어나 기능엔 문제가 없겠지만 당장 느끼는 고통은 어마어마할 거야.
결국 그는 전투 불능이 되었고, 승자는 내가 되었다. 난 픽 웃으며 참가자들에게 외쳤다.
“내 고향에서 난 땅콩 수확자라고 불렀지.”
그들을 하나하나 가리키며(정확히 어떤 부분) 으깨는 모션을 취하자 지목당한 거인들은 모두 움츠러들었다. 아, 사람은 욕심을 부리면 이토록 잔인해질 수 있었던가. 거인들을 잔인하다고 욕한 내가 미안할 지경이네.
*
내 차례가 올 때까지 토루타쿤을 구경했다. 싸움은 격렬했다.
죽거나 기절하거나 하여 상대방을 완전히 다운시켜야 승자가 되는 잔혹한 승부다. 하지만 그중에서 난 기이한 승리 방식을 발견했다. 우습게도 거인들은 유일하게 입고 있던 옷 하나가 벗겨져 알몸이 되면 상당히 수치스러워하며 패배를 인정했다.
언뜻 제한 없는 경기로 보였으나 암묵적인 룰 하나가 있었던 것이다. 옷이 벗겨지면 패배라니, 이종격투기라고 돼? 자체 심의 규정하는 거야? 이해할 수 없으나 그렇다는데 뭐.
난 옷을 벗기는 것보다 땅콩을 깨트리는 게 더 수월했으므로 최소한의 동작만으로 거인들을 박살 내며 위로 올라갔다. 땅콩 수확자라는 우스운 별명은 이제 ‘뼈 절단자’ ‘검은 살인마’ ‘살점 분쇄자’에 이어 가장 무서운 별칭이 되어 갔다.
어느덧 참가자 중 여덟 명이 남게 되었다. 이제 제법 참가한 거인들을 상대하기 힘들어졌는데 8강에서 만난 놈은 제 가랑이를 집중적으로 보호하는 영리한(그 전의 거인들이 멍청하다고 볼 수 있겠지만) 놈이었다.
놈은 상당히 성가셨다. 섣불리 덤벼들지 않으며 기회를 엿봤는데, 필살 땅콩 깨기를 사용할 틈이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타격으로 승부해야 했는데, ‘거대화’의 마력만을 발휘하고 있는 내 공격으론 약점이 아닌 곳엔 큰 상처를 줄 수 없었다.
‘이 정도면 괜찮을 거야.’
결국 아주 약간, 아즈모타카의 완력을 발휘해야 했다. 난 몸을 숙인 채 덤벼드는 놈의 등을 향해 두 주먹을 내려찍었다.
크아악!
등을 가격당한 놈은 거친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얼레?”
하지만 그마저도 노림수였다. 놈은 먹이를 노리는 뱀처럼 끈질기게 손을 뻗어 내 치마를 붙잡았다. 거인의 완력은 손쉽게 내 허리에 두른 가죽옷을 벗겨 냈다.
“으헤헤, 커억. 내가 이겼다!”
놈은 피를 토해 내면서도 껄껄 웃으며 내 가죽 치마를 들어 올렸다. 이걸 노렸군. 약삭빠른 놈이다. 명예롭진 않아도 확실히 편한 방법이지.
“내가 알몸으로 보이나?”
하지만 내겐 통하지 않는다.
엄밀히 말하면 옷을 벗기는 게 승리가 아니라 상대를 알몸으로 만들어 수치심을 줘야 이기는 것이다. 그러나 내겐 수치심을 극복할 엄청난 것이 있었다. 바로 원장님이 만들어 준 매직 팬티다.
“꺼져.”
그 사실을 알아차린 놈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렀다. 난 방심한 놈을 향해 다리를 세차게 휘둘렀다. 그렇게 놈도 박살 내고 승자가 되었다.
“응?”
보통 승자가 정해지면 거인들은 환호로 응대해 주나 이번엔 이상하게 침묵만이 감돌았다. 뭔가 싶어 둘러보니 거인들의 표정이 상당히 이상했다. 녀석들은 어느 한곳에 시선이 고정되어 눈도 깜빡거리지 않았다.
“뭘 봐, 시벌.”
분명 입고는 있으나 괜히 수치심이 들어 난 후다닥 가죽을 주워 허리에 둘렀다. 뭐야, 이 새끼들? 설마 아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