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화 폭풍
“왜? 다정 씨와 지내서? 하지만 위수는 마물이 아닌데? 모르겠어. 하지만 저게 정말 세계수라면, 난 정말 얼마나 대단한 걸 ‘주워’ 키운 거지? 좋아. 좋다고. 굉장해.”
원장님의 무서운 모노드라마는 한참 후에야 끝이 났다. 불현듯 정신을 차린 원장님이 알아볼 게 있다며 날 쫓아냈고, 단비가 보석을 먹은 것보다 더 충격적인 원장님의 모습에 난 군말 없이 집으로 돌아왔다.
“좋냐? 어? 좋아?”
단비는 집에 와서도 신나 하며 이리저리 뛰어놀다가, 야옹이에게 냥냥펀치를 맞고 나서야 조용해졌다. 저렇게 기뻐하는 모습을 보니 화를 내기도 애매하잖아. 난 녀석에게 비싼 고기 하나 대접했다고 생각하며 잊기로 했다.
게다가 어차피 이 녀석의 힘이 강해지면 내 힘도 늘어난다. 단지 드루이드를 이용한 환경 변화 외에도 녀석은 내 그릇을 넓혀 줬다.
제 말로는 무슨 날 뿌리 삼아 힘을 흡수한다고 했는데, 아무튼 단비의 강함은 내 강함과도 직결되는 것이다. 그러니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야지.다음 날, 마물원에 출근하자 산발머리의 원장님이 나와 한 가지 말만을 해 줬다. 내가 데리고 다니는 단비는 최초의 세계수며, 날 양분 삼아 큰다고 말이다.
그 외에 자세한 이야기는 안 했으나 드래곤을 저리 당황시킨 걸 보면 이 녀석, 꽤 대단한 녀석인 것 같다.
*
긴 휴가를 마치고 마물원에 돌아왔어도 지루한 나날들이 계속되었다. 젠장, 한참 지랄 맞던 때가 오히려 낫다고 느껴지니 나도 확실히 달라졌다.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겁 없는 사람들처럼 위기에 중독된 거야.
오늘도 지루하게 자리에 앉아 마물원 일과표나 작성하고 있을 때였다.
“꺄아아아아아악!”
원장실로부터 들려오는 긴 비명.
난 즉각 자리에서 일어나 메타 소드를 꺼내고 마물의 힘을 끌어올렸다. 전능에 가까운 드래곤인 원장님도 때론 저런 의외의 모습을 보여 주긴 했으나 지금처럼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는 경우는 처음이었다.
난 잔뜩 긴장한 채 다가올 상황을 대비했다. 뭐지? 드디어 제2의 대전이가 발생했나? 마왕이라도 강림한 건가? 아니면 드래곤 로드?
쾅!
“폭풍!”
원장님이 문을 부서져라 열며 소리쳤다. 몹시 당황한 모습이다. 저렇게 격조 없는 모습은 처음인데.
“저그?”
난 그 모습에 참지 못하고 농담을 해 버렸으나 원장님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명을 지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폭풍이 온다!”
“저그? 저그?”
원장님은 내 실없는 소리를 일축할 겨를도 없었다. 나더러 재빠르게 숨으라고 하더니 무지막지한 마나를 뿜어 대며 다양한 마법 결계를 만들기 시작했다.
마물원에 걸린 결계로도 모자라 원장님이 직접 결계까지 친다. 무언가 사달이 난 게 분명해. 젠장, 장난칠 때가 아님을 깨닫고 난 후다닥 자리에서 일어나 도망쳤으나, 어디로 숨어야 할지 몰라 그냥 원장님 뒤에 있었다.
딸각.
그때였다.
마법으로 보호되고 있는 관리실의 문고리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결코 열릴 리 없는 문이 너무나 쉽게 열리고 만 것이다! 원장님은 기겁하며 눈을 질끈 감았고, 난 겁에 질려 누가 문을 열고 들어올지 상상했다. 폭풍저그? 폭풍저그야?
“얼레?”
무시무시한 괴물 혹은 악마 혹은 드래곤쯤은 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문을 열고 들어온 자는 추레한 몰골의 노인, 백발의 산발, 지저분하게 자란 수염, 술 냄새가 밴 낡은 양복을 입은 늙은 남자였다.
“여전히 날 싫어하는군, 파르바티.”
북유럽 노르딕계의 갈색 머리, 좁은 코와 하얀 피부, 그리고 검은 안대를 차고 있는 걸 제외하면 느껴지는 기운도, 외형에서 풍기는 분위기도 평범한 노인이었다. 나쁘게 말하면 지저분한 거지 몰골이다. 하지만 겉모습과 달리 절대 무시해선 안 될 존재겠지. 다른 건 둘째치더라도 무려 ‘용’의 이름을 부르며, ‘반말’까지 했다.
그가 겁대가리를 상실한 미친 사람이거나 원장님이 용이란 걸 모른다고 가정할 수도 있지만 그럴 확률은 적다.
무엇보다 원장님이 어색해하며 ‘존댓말로’ 그를 대했다.
“무슨 볼일이시죠?”
적개심이 가득하긴 하지만 말이다.
기본적으로 찾아온 손님이 인간이든 엘프든 예의를 갖추던 원장님이 차 한 잔을 대접하지 않았다.
“인사나 하러 왔지.”
하지만 노인은 아랑곳하지 않고 슬금슬금 걸어와 제멋대로 응접실의 소파에 앉았다. 순간 원장님이 어떻게 나올까 가슴이 철렁했지만 유혈 사태는 벌어지지 않았다.
“다정 씨, 마물들 먹이 줄 시간이죠?”
아침에 다 주고 왔다.
원장님이 내가 이곳에 있길 원하지 않는 것이다. 난 고개를 끄덕이며 관리실을 나왔다. 그자가 누구이며 원장님과 무슨 대화를 나눌지 몹시 궁금했으나 어쩔 수 없었다.
“웬 날씨가…….”
관리실에서 나오자 분명 아침까지 맑았던 푸른 하늘이 온통 먹구름이 가득 차 어두컴컴했다. 난 까마귀들이 가로수 가지에 앉아 있는 걸 보며 의아하다고 생각했다. 동물이 마물원에 어떻게 들어왔지?
콰르릉!
“얼레? 웬 지랄이야.”
심지어 먹구름이 가득 찬 하늘에서 천둥 번개까지 내려쳤다. 우연이라기엔 저 노인의 등장과 너무 잘 맞아떨어지잖아. 하지만 주변엔 그 어떤 마력도 느껴지지 않았다. 원장님의 눈치를 살피며 지내온 몇 년의 생활로 내 감은 심지어 모기의 기운도 눈치챌 정도다. 그런데도 노인에게선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지.
이상한 노인이야.
*
마츄 우리에서 털북숭이들과 놀아 주고 있으니 원장님이 관리실로 오라고 연락했다. 노인은 십 분도 지나지 않아 떠난 것 같았다.
우리에서 나오니 하늘은 다시 쾌청했다. 가지 위에 앉아 있던 검은 까마귀들도 없어졌다. 역시 이상해.
관리실의 문을 열자 응접실의 소파에 앉아 아직까지도 긴장한 모습을 보이는 원장님이 있었다.
“누구예요?”
넌지시 물어보니, 원장님은 한참 후에 대답했다.
“웬즈데이.”
수요일? 이상한 이름이네.
원장님은 굳은 표정으로 내게 말했다.
“다정 씨, 저 노인과는 ‘반드시’ 친하게 지내요.”
“네? 저하고 엮일 사람은 아닌 것 같은데…….”
“아뇨, 이미 엮었어요.”
저렇게 심각한 표정의 원장님, 처음 본다. 아니, 비슷한 느낌은 있었지. ‘로드’를 언급할 때 저런 얼굴을 했었는데.
“내 말 명심해요. 저 뒷방 노인네가 움직인 건 내가 아니야. 언제가 될진 모르나 그는 시침이 부러질 때 다정 씨를 찾아올 거예요.”
원장님은 웬즈데이라 불리는 노인이 언젠가 나를 찾아올 거라며 반드시 그의 대화에 경청하고 부탁을 들어주며, 반발하거나 거절은 절대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가장 명심할 건 절대 그의 말을…….”
원장님의 마지막 말은 지금까지 해 왔던 당부와 모순적이었다. 이상하다고 느꼈으나 날 일단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가로수마다 앉아 있는 까마귀들을 봤다. 아파트에 도착하고 나서도 주차장의 차 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을 봤다. 집에 돌아오고 나서도 베란다의 난간에 앉아 있는 까마귀들을 봤다.
“여기 70층인데…….”
꺼림칙하여 커튼을 치려고 할 때였다.
냐아앙!
갑자기 야옹이가 뛰쳐나가더니 난간에 앉아 있던 까마귀를 재빠르게 낚아챘다.
으드득!
내가 놀란 건 단순히 야옹이가 까마귀를 잡아먹어서가 아니다. 평소엔 아무것도 먹지 않던 야옹이가 까마귀를 잡아먹었기 때문이다.
으드득, 으드득.
야옹이의 작은 입에 깃털이 뽑히고 살점이 뜯기는 까마귀의 눈알은 너무나 섬뜩했다.
그 뒤로, 까마귀들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
오랜만에 출장 임무가 떨어졌다.
원장님은 일본에서 어떤 일이 발생했다며 내가 해결할 일이라고 했다. 난 그녀가 건넨 자료들을 읽었다. 피해 사건에 대한 기록이었는데, 동봉된 사진들은 모두 끔찍했다.
“마물인가요?”
강제로 뜯겨 나간 사지, 그러나 피 한 방울 남김없이 말라 죽은 남자. 살인도 아니고 사고도 아니다. 이런 식의 죽음은 마물의 소행이 분명하다.
“아뇨.”
하지만 원장님은 의외의 대답을 했다. 마물이 아니란다. 그렇담 성질 더러운 이종족인가?
“다정 씨와 관련된 일이예요.”
원장님은 이 일은 ‘이계’에서 발생한 일이 아니라고 하며 나와 관련된 일이라고 했다. 그러며 어떤 세계를 언급했는데, 난 그 즉시 이해하고 화가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빌어먹을 새끼들.”
그렇게 경고했건만.
난 이빨을 깨물며 증기가 가득 찬 머리를 달랬다. 분명 그들에게 대가 없는 자유는 없다고 말했었다. 젠장, 그런데도 일을 저질렀으니 그 대가가 뭔지 똑똑히 알려 줄 수밖에.
난 곧바로 일본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다행히 아직까지 놈들의 소행은 일본에서만 발생했다.
이 일은 따지고 보면 내가 발단이었다. 난 죽은 피해자들의 넋을 달래 줄 의무가 있다.
빌어먹을. 첫 사례를 남기는 게 끔찍이 싫었지만 다른 놈들에겐 이번 일로 똑똑히 각인될 것이다. 지구에서 어울려 산다는 게 뭘 뜻하는 건지 알게 되겠지.
*
일본 시코쿠 카가와현의 작은 시골 마을. 시노키 우동이 유명한 이 한적하고 평화로운 마을은 근래 마물소동으로 시끄러웠다. 작은 마을에서 발생한 여덟 건의 사망 사건은 전이로 떠들썩한 현대 사회에서도 큰 이슈였다.
잔인하게 죽은 피해자들은 서로 어떤 연결점도 없는 무작위 대상으로, 일본의 경찰도, 능력자 대응반과 헌터들도 모두 이 사건들을 마물의 소행이라고 단정 지었다. 하지만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으나 전이의 흔적은커녕 마물의 경로조차 파악하지 못했다.
당연했다.
이 사건은 마물의 소행이 아니니까. 난 이 비참한 참극을 조사하며 그들이 보지 못했던 공통점을 발견했다. 피해자들의 ‘머리카락’이다.
남녀노소 특정 짓기 어려운 피해자들은 단 하나의 공통점, 살아생전에 그들은 모두 건강하고 긴 모발을 가지고 있었다. 난 마을에서 발생한 살인사건들의 주기를 확인하며 점점 범인이 어떤 ‘괴이’를 가지고 있는지 확신했다.
몇 개월 전 발생한 첫 사망자로부터 시작하여 18일 주기로 사망자가 발생, 몸이 난도질당하고 피가 모두 빨린 채 죽은 사람들.
“놈은 내일 다시 사냥에 나서겠지.”
마지막 피해자로부터 오늘이 17일이 된다. 놈은 오는 자정에 반드시 움직일 것이다.
아직 이 마을엔 사냥감이 있었으니까. 놈의 다음 사냥감, 피해자를 특정 짓는 건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염색이나 시술을 하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진 사람을 찾는 건 무리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막상 찾고자 하니 바로 발견한 것이다.
마을 중심가에서 약간 벗어난, 한적한 주택가에서 그자를 본 순간 깨달았다.
놈은 아껴 두고 있었던 것이다.
저 길고 검은 아름다운 머리카락,
분명 저자가 다음 사냥감이다.
난 기척을 숨긴 채 전봇대 아래에서 자정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시골 마을은 밤이 되자 불이 모두 꺼져 전봇대의 노란 불빛만이 을씨년스럽게 거리를 비췄다. 마침내 자정이 되는 순간, 하수구에서 검은 머리카락들이 기어 올라왔다.
“역시 영묘?毛로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