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1화 그들의 왕 (1)
놈은 검었다.
그 외에 별다른 감상은 들지 않는다. 너무 검어서 검은 색깔 구름이나 그림자, 검은색 크레파스로 칠한 도화지나 검은 사포를 보는 것 같았다. 태산 후지산의 드넓은 장관이 놈에 의해 검게 물들었다. 현무암 바위 위를 스멀스멀 기어오는 놈은 거대한 가스와 같았으나 때론 짐승처럼 형태를 갖추기도 하였다.
놈은 날 본 순간 내 존재를 용납하지 못하여 갈기갈기 찢어 버리고 싶어 했을 것이다. 나도 놈을 보자 본능적으로 그를 죽여야 할 천명과 같은 운명을 느꼈다. 요괴들의 이념을 대변하는 지천괴왕, 그와 대척점에 있는 역괴는 나의 모든 것을 반대하고 있었다. 존재도, 가치도, 의미도.
역괴는 나와 가까워질수록 점점 뚜렷한 형체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윽고 놈은 검은 그림자에서 완전한 형상으로 탄생했는데, 수십 개의 머리를 가진 뱀이었다.
“홍식.”
놈을 향해 샐러맨더의 불꽃을 피우자 놈의 머리 중 하나가 홍식과 같은 불꽃을 피웠다. 홍식은 놈이 뿜어낸 완벽히 같은 힘에 상쇄되었다.
난 포근이의 기운을 잠재우고 아이스독의 힘을 이끌어 냈다. 그러나 빙하처럼 거대해진 얼음을 만들어 놈을 향해 낙하시키자 놈의 다른 머리에서 강대한 냉기가 휘몰아치더니 똑같은 크기의 얼음을 만들어 내 내 공격을 쇄빙시켰다. 어떤 힘을 이끌어 내도 마찬가지로 놈의 머리는 같은 힘을 냈다.
난 그제야 놈의 수많은 머리가 내가 가진 힘의 갈래의 수와 일치하다는 걸 깨달았다. 아이스독의 차가운 냉기도, 죽음에 가까운 힘도, 확장하는 성질도, 전염되는 것조차도, 역괴는 내 모든 힘을 모방했다.
날 죽이고 자신이 주인이 되려는 역괴는 역모의 존재. 내가 가진 어떤 수단도 놈은 그림자처럼 고스란히 따라 했다. 빌어먹을 소년 만화에서나 나올 법한, 그야말로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다.
“기린, 바루나, 유니콘, 또한… 케르베로스.”
역괴를 죽이기 위해선 내 자신을 뛰어넘어야 했다. 그러나 우습게도 그건 정말 쉬운 일이었다. 두려워 차마 이끌어 내지 못했던 수많은 힘들이 내 안에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난 내 안에 잠시 머물다 쫓겨난 신수의 힘을 불러냈고, 죽음에 이를 뻔한 위기를 겪으며 마침내 역괴를 죽일 수 있었다.
“요괴, 요괴인가.”
역괴를 죽이자 놈은 내 안에서 다시 태어나 나의 요괴가 되었다. 기괴하고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이었으나 그럼으로 내 힘은 더 강해졌다.
이전까지 난 지천괴왕이라도 요괴는 아니었다. 요괴란 괴이의 존재를 품은 자들. 난 어떤 괴이도 없었고, 지천괴왕으로서의 괴이는 지위의 상징일 뿐 날 완전한 요괴로 거듭나게 하진 않았다. 그러나 이제 나는 요괴의 탄생을, 나로 하여금 목도하게 되었다.
내 이야기는 요괴들에 의해 탄생했다. 그리고 이야기가 있으니, 반푼이 요괴에서 진정한 요괴로 거듭났다.
역괴를 죽인 내 이야기는 이미 모든 요괴들이 알고 있었고, 달을 무서워하는 도깨비와 하늘을 보좌하는 여우신의 이야기처럼 대단히 격 높은 하나의 괴이가 되었다. 난 내 안에 자리 잡은 괴이의 존재를 느낄 수 있었다.
젠장, 난 이제 완벽히 인간이 아니게 되었다. 이젠 이력서에 종족을 ‘인간’ 대신에 ‘요괴’ 아니, 요괴도 인간도 마물도 섞인 잡탕찌개 인간이라고 적어야 할 판이다.
난 역괴를 죽인 후 요괴들을 만나지 않고 곧바로 마물원으로 돌아왔다. 이제 요괴들에 대해 알고자 한다면 모든 걸 알 수 있게 됐기 때문이다.
역사의 이야기에 깃든 모든 요괴들의 괴이를 파악할 수 있었고, 그들의 의지를 대변하며 그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수도 있으며, 그들로부터 힘을 얻을 수도 있게 되었다. 그게 나의 괴이, 역괴를 죽인 괴왕로서의 괴이였다.
*
난 일본에서 마물원으로 돌아오자마자 며칠이나 다른 세계에서 지내야 했다. 요양 차 떠난 세계는 별들의 무덤이라는 곳으로 그곳은 서있는 것만으로도 몸의 기운이 빨리고 감기는 물론 괴혈병, 간염, 관절부식 등 각종 병마에 걸리고 부작용으로 정력 감퇴까지 유발하는 무시무시한 세계였다.
원장님은 역괴를 죽이고 온 내 상태를 보더니 단기간에 너무 갑자기 많은 기를 받아들여 위험할 수 있다며 넘치는 기를 잠재우기 위해서 마치 마이클 베이가 만든 SF영화처럼 온통 부서지고 박살 나고 폭발하는 별들의 무덤에서 며칠 동안 지내길 권고(협박)했다. 내가 괴이를 품으로서 요괴의 기를 품게 되어 몸의 모든 기혈들이 뒤틀려 엉망이 되었기 때문이라나. 원장님은 날 별들의 무덤으로 보내며 드디어 내가 인간을 벗어난 무언가가 되어 간다고 축하했다.
무슨 다섯 살 아이가 마침내 보조바퀴를 떼고 자전거를 탈 수 있게 된 것도 아니고, 대수롭지 않은 심심한 반응이었다.
별들의 무덤은 수많은 세계 중 가장 끔찍한 세계였다. ‘세계’라고 부를 수도 없는, 그야말로 무덤이었으니까. 전이에 의해 휩쓸려 부서진 행성의 조각들이 이곳에서 분해되고 폭발하고 소멸되었는데 몸의 기운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기가 빨려 상당히 고통스러운 며칠이 될 것 같았다.
난 별들의 죽음도 이내 하루 만에 지루해져 원장님이 지정한 세이프 존을 돌아다녔다. 그러다 기이하게도 검은 옷 조각과 부서진 검, 창등을 발견했다. 이들은 전이에 휩쓸려 하필 이곳까지 쓸려왔다가 죽어 버린 불쌍한 모험가들일까?
이틀이 지나자 그마저도 지겨워져 곽운 스승님이 가르쳐 준 무림의 수련 방법인 명상 수련을 시작했다. 기가 안정되기 전까진 힘을 끌어내면 위험했기에 시작한 심상心象의 수련은 의외로 큰 성과를 얻었다. 하긴, 별이 죽어 가는 끔찍한 곳에서 마음을 가다듬으니 어느 누가 강직해지지 않을까?
*
별들의 무덤에서 지낸 지 며칠이 지나자 대부분의 기가 안정이 되어 무사히 지구로 돌아올 수 있었다. 원장님에게 위로 휴가를 받은 난 곧바로 사우나에 들른 후 단골 식당에 가 김치찌개를 먹고 맥주 6캔을 사서 집에 돌아왔다.
난 맥주 한 캔과 말린 오징어를 들고 침대에 누워 그동안 밀린 사회뉴스들을 찾아봤다. 역시 전이 이후 세상의 뉴스는 지루할 거리가 없었다. 내가 역괴를 죽이고 요괴들의 왕이 되어 인간을 벗어나던 때, 세상도 만만치 않게 미쳐 돌아갔다.
“얜 아직도 지랄인가 벼?”
그중 특히 내 관심을 끄는 뉴스가 하나 있었다. 유튜브에서 요즘 가장 유명한 동영상, [할로윈 축제의 악몽] 이란 제목의 동영상이다.
“쯧쯧, 이런 걸 보면 역시 원장님이 훨씬 낫지.”
얼마 전 미국 시카고에서 열린 할로윈 퍼레이드에서 발생한 사고가 고스란히 녹화된 동영상. 난 영상을 보며 역시 ‘용’은 원장님이 가장 낫다고 생각했다. 영상 속엔 용이 만들어 낸 악몽이 담겨 있었다.
시카고의 길거리는 각종 기괴한 코스튬을 입고 축제 퍼레이드를 즐기던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축제의 열기는 사람들과 딱히 분장이 필요 없을 것 같은 이종족들도 같이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할로윈의 분위기에 신나고 들뜬 자들이 퍼레이드를 펼치던 축제의 절정에서 끔찍한 사고가 터졌다.
시작은 덩치가 10M는 넘을 듯한 피에로였다. 인형이라기엔 너무 자연스럽고, 분장이라기엔 너무 끔찍한 피의 피에로. 이때까지만 해도 사람들은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마냥 즐거워했다. 하지만 점점 거대하고 기괴한 어떤 것들이 거리에 나타나자 퍼레이드 현장은 순식간에 혼비백산이 된다.
피의 피에로는 날카로운 이빨로 사람들을 집어삼키고 내장을 쏟아 내는 좀비는 제 뚫린 몸으로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집어넣기 시작했다.
즉시 헌터들이 투입되어 놈들을 막아 보지만 역부족이었다. 괴물들은 한참동안 인간들을 학살했다.
마침내 길거리의 모든 인간들이 놈들에게 먹혔을 때, 폭죽이 터지며 하나의 글귀가 나타났다.
[trick or treat!]
그와 동시에 끔찍한 괴물들의 몸이 ‘터졌고’, 잡아먹혔던 사람들도 기절만 한 채 무사히 구조되었다. 인간들에겐 악몽의 재난과 다름없던 게 단지 누군가의 ‘할로윈 장난’이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그제야 생물과 다름없던 괴물들이 인형임을 깨닫고, 이런 기상천외한 일을 벌일 자가 그밖에 없다는 걸 알았지만 책임을 묻지 않았다. 아니, 감히 물을 수가 없었다.
범인이 용이기 때문이다.
그가 자유의 여신상을 메이드로 개조했을 때도, 만리장성을 자기 집 성벽으로 쓴다며 훔쳤을 때도, 파리 개선문을 뜯어다가 자기 집 정원 입구로 사용한다고 당당히 말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인간은 감히 그에게 책임을 묻지 못했다. 단지 빌어먹을 ‘오타쿠 용’이라며 욕만 했을 뿐이지.
“살짝 부럽긴 한데. 무시무시한 덕질이잖아.”
영상을 보며 난 새삼 또다시 느꼈다. 그래, 역시 원장님은 좋은 드래곤이다. 사리사욕이 아닌 우주의 질서를 위해 행동하는 드래곤이다. 지구를 제 전용 장난감 전시장으로 생각하는 오타쿠 용에 비하면 천사나 다름없지.
“원장님은 저 드래곤하고도 아는 사이이려나.”
그동안 저 오타쿠용의 많은 패악질에도 원장님은 반응하지 않았다. ‘캣 맘’ 때처럼 저 용하고는 엮일 일이 없겠지. 다신 원장님 외에 다른 용은 만나기 싫어.
“잠깐, 안 돼. 왜 스스로 플래그를 세우고 지랄이야.”
난 급히 동영상을 끄고 오타쿠 용에 대한 생각을 지웠다. 괜히 말을 내뱉었다가 불안이 현실이 된 게 한두 번인가? 난 마치 무당처럼 내 앞에 놓인 불행은 기가 막히게 알아차려서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모처럼 휴가를 받았으니 오랜만에 여행이나 갈까. 이세계 모험이 아닌 뜨끈뜨끈한 온천여행이라도…….
아.
“원장님.”
갑자기 내 옆에 나타난 원장님이지만 이젠 놀랍지도 않다. 젠장.
“다정 씨. 할 일이 생겼어요.”
원장님이 화난 얼굴을 한 채 이처럼 무례하게 나타나 내게 일이 생겼다며 말을 한다. 어째서 난 원장님의 다음 말이 예상이 가는 걸까?
“이젠 못 참겠어. 그는 도를 넘었어. 드래곤의 명예를 실추시키는 그의 행동을 막을 의무가 내겐 있어요.”
원장님이 묻는다.
오타쿠 용이라는 자, 아냐고.
들어봤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원장님은 이번 할로윈 퍼레이드 사건을 언급하며 대체 그가 왜 그러는지 알아본다며 지금 곧바로 그에게 찾아가서 질문할 거라고 했다. 근데, 왜 날 데리고 가려는 거지?
“원장님, 이 일에 꼭 제가 필요한 겁니까?”
“다정 씨가 힘든 건 없을 거예요.
“드래곤을 만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힘든 일인데요.”
캣 맘 때의 나와 지금의 나.
둘을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난 그때에 비해 수천 배는 강해졌다. 하지만 결국 용 앞에선 빌어먹을 ‘밥’이다.
“거기다 휴가, 위로 휴가. 적어도 이 휴가가 끝나기까지만 절 가만히 놔둬 주시면 무척이나 고마울…….”
급히 불쌍한 척을 해 봤지만 원장님의 대답은 냉혈한 그 자체였다.
“그럼 취소.”
“네?”
“휴가 취소.”
휴가를 준 것도 자신이니, 취소하는 것도 자신이라는 건가? 제발 드래곤도 고소 가능한 노동법도 있었으면 좋겠네.
“역시.”
원장님이 웃으며 날 바라본다.
난 뒷말은 삼켜, 속으로만 생각했다. 역시 용은 용이구나. 거참 젠장맞을 용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