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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203화 (203/258)

# 203화 그들의 왕 (3)

진홍색 드레스를 입고 하얀 침대보 위에 누워 있던 여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오닉스처럼 검고 아름다운 머리카락을 가진 자였다.

저자는 모든 게 인간과 같았다. 인간과 같은 피부와 인간보다 아름다운 머리카락, 정돈된 손톱과 뚜렷한 눈빛. 그러나 난 그를 마주하며 이질적인 기분에 답답했다.

침대에서 일어난 여인은 날 보며 드레스 자락을 쥐고 살짝 무릎을 굽히며 인사를 했다. 그제야 난 무엇 때문에 그것이 소름 끼치는지 깨달았다.

미동도 하지 않은 표정, 단지 무표정이라고 치부하기엔 소름 끼칠 만큼 정적인 얼굴이다. 저것도 아래층의 인형들과 같았다. 그러나 ‘저것’에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희미하고 작아 집중하지 않으면 들을 수 없지만 분명, 저 안엔 목소리가 있다.

그 사실은 몇 가지 모순에 날 혼란스럽게 했다. 내가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건 마물을 포함한 짐승들뿐이다. 그렇다면 저 인형은 인형의 탈을 쓴 어떠한 마물일까? 하지만 목소리와 별개로 저것에서 인형의 증거인 강력한 마나가 깃든 동력원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도 이곳에서 온 이후로 만나 봤던 모든 인형들 중에서 가장 강력한 마나가 느껴진다. 짐작건대 저건, 오타쿠용의 가장 소중한 ‘걸작’이겠지.

“들리는 모양이군.”

혼란스러워하던 내게 오타쿠 용이 말했다.

“네 기묘한 힘은 짐승의 목소리를 듣는다지.”

난 나부란 이름을 가진 드래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 하지만 원장님과 수년을 지내며 드래곤이 어떤 존재인지는 얼추 파악했다. 그자들은 자존심이 세다. 지상 최강의 생물답게 감히 누군가에게 부탁한다고 해서 고개를 숙이지 않는다.

“날 도와줬으면 해.”

그래서 그가 내게 고개를 숙여 부탁을 했을 때, 난 손끝이 떨려 왔다. 믿을 수가 없었다.

부탁을 할 때 고개를 숙이는 건 사람들, 그리고 이종족들에게도 이상할 것 없는 행동이지만 드래곤에겐 다르다. 나부라는 자가 내가 생각하던 드래곤과 완전한 별종, 고개를 숙이는 걸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가 아니라면 그가 부탁할 일이 긍지 높은 존재의 자존심보다 더 중한 일이라는 것이다.

나부는 검은 머리카락의 인형에게 걸어가, 그것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이 또한 내겐 적잖은 충격이었는데 단지 자신이 창조한 걸작을 보는 눈빛이라고 하기엔 나부의 눈빛이 너무나 따듯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도움이 필요했다.”

나부는 조심스럽게 그것을 침대에 눕혔다. 그러며 품에서 어떤 걸 꺼내어 그것의 가슴에 올려놓았다.

그건 열쇠였다.

기묘한 힘을 내뿜는 검은색 열쇠.

“미나. 나의 미나.”

나부는 그것을 바라보다가 열쇠를 들고 드레스에 감춰져 드러나지 않던 홈에 끼우고 천천히 돌렸다. 그러자 그것의 눈빛은 사라졌고, 빛나던 머리카락도 생기를 잃었으며, 피부도 목각인형처럼 차갑고 단단해졌다. 열쇠는 그것의 몸을 여는 장치였다.

그것의 가슴 부근은 두 쪽으로 갈라져 문처럼 개폐되었는데, 당연하게도 인형의 몸 안은 무수한 나사와 톱니바퀴, 기계 장치들로 가득했다. 그 모습이 상당히 기괴하게 느껴졌다.

어처구니없는 상상이 들 정도였는데, 만약 지금 내 가슴을 연다면 저것처럼 인간의 내장 대신에 기계 장치들로 가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실없는 생각이 들 만큼, 저건 인간과 닮아 있었다.

나부는 복잡한 기계 장치 안에 손을 넣고, 마치 더없이 소중한 자신의 보물을 쥐듯 조심스레 빛나는 구를 꺼냈다. 빛나는 구는 어떤 장치도 없어 겉으론 그것을 이루는 부품 중에 가장 별거 없어 보였으나 난 저게 그것을 움직이는 동력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저 작은 구슬에 담긴 바다만큼 깊고 넓은 마나.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라 확실히 저건 나보다 더 강대했다.

“나의 미나는 특별한 짐승의 심장과 ‘날’ 원동력으로 하고 있어. 너, 파르바티의 가디언이라면 잊힌 마물들에 대해서도 잘 알겠지.”

나부는 빛나는 구를 다시 인형의 안에 삽입한 후 덮개를 덮고 열쇠를 돌렸다. 그러자 그것은 다시 살아 있는 인간처럼 일어났고, 나와 나부에게 귀족처럼 인사를 건넸다. 비슷한 상황에서 내보이는 똑같은 행동, 아마 저 행동은 제 스스로 생각한 게 아니겠지.

“호문쿨루스라고 아니?”

나부의 질문에 난 안다고 대답했다.

흔히 연금술사나 마법사가 만들어 낸 인조인간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 호문쿨루스는 어떠한 개념의 명칭이다. 인조적으로 만들 수 있는 생명, 그것들을 통틀어 호문쿨루스라고 하며, 그 수단에 대해선 무수한 차원만큼 무수하게 존재한다. 하지만 나부는 마물을 언급했으니 그가 말하는 호문쿨루스는 아마 기생 마물일 것이다.

나부는 호문쿨루스에 대하여 알려 주며 내게 부탁할 일에 대해서 말해 줬다. 그가 말하길, ‘미나’라는 이 인형의 심장, 동력원은 주변의 생물을 모방하는 마물의 심장과 자신의 힘으로 창조했다고 했다. 그러나 짐승은 짐승일 뿐, 인간의 감정을 가지지 못하고 있다고 했다.

난 인형에게서 목소리가 들리는 이유를 알았지만 여전히 많은 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인간의 심장을 가졌다 하여 감정이 생겨나는 건 아니더구나. 창조의 섭리는 믿을 수 없이 굳건해서 어떻게 해도 따라 할 수 없었어. 그러니 내가 창조할 수 없다면, 배우게 하면 되는 거야. 이건 나의 마지막 기회지.”

그는 짐승의 심장으로 만들어 낸 인형에게 인간의 감정을 부여하려고 하고 있다. 설명을 들으며 안 건데 끔찍하게도 그는 이전, 어떤 인간의 ‘심장’으로 사람을 만들어 내는 실험을 한 적이 있었다. 실패로 끝난 모양이지만 그는 확실히 미쳐 있었다.

“제가 뭘 하면 되죠?”

“나도 몰라.”

지금까지의 장대한 설명과는 다르게 결론은 막연하기만 했다. 나부는 내게 열쇠 한 개를 건네고 제멋대로 방에서 나갔다.

“내가 인간의 마음 따윌 알았다면… 이러진 않았겠지.”

홀로 남은 난 방에서 나가며 했던 나부의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봤다. 드래곤인 그가 인간을 창조하려는 건 단지 미친 수집가의 괴짜스런 창작 욕구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

“뭘 해야 하나.”

그에게서 받은 열쇠는 수집가 군도를 자유롭게 왕래할 수 있는 비행 탈것의 키였다. 나부는 내가 이곳에서 뭘 해도 되지만 바깥으로 나가는 건 금지했다. 또한 ‘미나’에게서 지금과 다른 목소리가 들린다면 말해 달라고 했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사람의 감정을 인형에게 어떻게 느끼게 한단 말인가?

이 인형, 아니 인형이라고 부르기에도 이상하군. 미나에게선 분명 목소리가 들리나 뚜렷한 감정은 없었고, 마치 갓 태어난 새끼처럼 ‘공백’이 길게 들릴 뿐이었다.

“감정을 느끼게 하려면 일단 감정을 자극시킬 만한 걸 보여 주면 되려나.”

드래곤이 고개 숙여 부탁한 일인데다가 일을 해결하지 않으면 며칠 혹은 몇 달을 잡혀 있을지 모른다. 그래도 뭐라고 해 봐야지 싶어 키를 챙기고 미나를 데리고 나왔다. 그것은 감정이 없을 뿐 내가 하는 말을 모두 알아들어 불편한 건 없었다.

“실환가.”

탈것의 정체는 ‘스타트랙’의 엔터프라이즈호였다. 지극히 매니아스러운 탈것을 타고 난 수집가 군도의 다른 섬들을 향해 이동했다.

이곳은 서브컬쳐의 정수가 깃든 테마파크와 같은 곳이다. 정말 이것이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많은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던 ‘문화’들을 보고 느끼면서 무언가 느끼는 게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절대 내가 이 오타쿠 성지를 돌아다니고 싶어서 그런 게 아니다.

우선 저기 호그와트 성에서 볼드모트 구경하고, 초호기도 타 보고, 포켓볼도 던져 실사 주머니 괴물들도 잡아 보고, 원기옥도 모아 보고, 악마의 열매도 먹어 보고, 닌자도 돼 보고, 집행검도 들어 보고, 카트도 타 보고…….

할 거지만, 날 위해서가 아니라 감정 없는 인형이 무언가를 느껴 봤으면 하는 이유였다.

*

난 신나고 재밌었지만 저것의 목소리에 미동은 없었다. 용이 꾸민 현대 미디어문화의 총본산에서 저리 무감각하다니, 난 역시 인형이 마음을 가지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엔 이걸 먹어 볼까.”

오타쿠 용의 섬들은 굉장했다. 리얼리티를 중시하여 영화의 장면을 꾸며 놓았다 싶으면 그 안에 존재하는 대부분의 것은 다 실재하고 있었다. 그래서 놀다가, 아니 체험을 하다가 배가 고파지면 음식을 주워 먹어도 아무 이상이 없었다.

단지 골렘, 인형이 만들어 낸 음식이긴 하나 간이 딱 맞다. 어떻게 이렇게 만들었는지는 몰라도 음식은 정말 맛있었다.

난 버터 맥주와 거대 고기 등을 먹다가 흔히 일본 애니메이션에서 나오는 카페에 들려 파르페 같은 디저트를 먹었다.

“응?”

그때, 난 처음으로 정적이던 미나의 목소리가 조금 높여지는 걸 느꼈다. 난 먹던 초콜릿 파르페를 내려놓고 미나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다르다. 확실히 달라졌다. 정적이고 공백이던 목소리가 아니라 묘한… 마치 집착과도 같은 감정.

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파르페의 초콜릿을 숟가락으로 퍼 그것에게 내밀었다. 그러자 지금까지 수동적으로 내 말에만 움직이던 인형이 스스로 움직여 초콜릿을 먹었다. 이때, 인형에 지나지 않던 미나의 목소리에 확실한 감정이 깃들기 시작했다.

“식탐이라.”

첫 감정이 식탐인 건 이상할 일은 아니다. 중요한 건 이게 ‘인간의 감정’인가.

내가 막연하다고 느낀 이유였다. 짐승도 인간이 느끼는 대부분의 감정은 느낀다. 하지만 분명, 인간과 마물은 다르다.

그 미묘한 차이를 난 자세히 알지 못한다. 그래도 무생물에 가깝던 그것의 목소리에 변화는 있었으니 기대해 볼 만하다고 느껴졌다. 만약 미나가 완전히 사람의 감정을 느낄 수 있다면 난 인간을 창조한 기적에 도움을 보탠 건가?

“한입 더 먹을래?”

미나의 목소리가 강렬해졌다.

*

난 식탐이라고 생각했지만 미나는 다른 음식엔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유독 초콜릿에만 집착하는 건 무척이나 이상한 일이었다.

그날, 오타쿠 용에게 이 사실을 말했는데 그는 웃기만 할 뿐 별다른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 다음 날, 오타쿠 용은 밤새 만들었다며 어떤 곳으로 그것과 날 데리고 갔다. 난 입구에서부터 코를 찌르는 ‘달콤한 냄새’에 어이가 없었다.

“나의 미나가 좋아한다기에 준비하였지.”

그가 만든 건 초콜릿 공장이었다.

미친놈이다. 초콜릿을 좋아한다고 하루 만에 이걸 만들었다. 움파룸파족은 어디서 공수해 왔지? 아니, 지가 윌리 웡카라도 돼? 뭐, 확실히 효과는 있었다. 갑자기 미나가 초콜릿 호수에 돌진하더니 빠져서 허우적거리기까지 했으니까.

*

그 후 일주일이나 지났다.

그것이 초콜릿에 큰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만 알아냈을 뿐 더 이상 진전은 없었다. 현대 문화도 대부분 경험시켰고, 이대로 가다간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오타쿠용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인간의 감정을 느끼게 할 방법을 모르겠습니다.”

“괜찮아. 넌 잘하고 있어.”

“초콜릿을 좋아한다는 것 따위만 알아냈잖아요. 그건 인간의 감정이라기엔 너무…….”

“아니, 그 초콜릿이 중요한 거야.”

나부는 밝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나의 미나는 인간의 감정을 가지고 있어.”

그는 확신에 차 있었다.

“그게 중요한 거라고. 초콜릿.”

이미 나부는 미나라는 인형을 인간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했다. 일주일 동안 지내며 느낀 건데, 그는 수집가였지만 제 컬렉션들에게 큰 열정은 보이지 않았다. 한번 만든 장식장은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단 하나의 인형, ‘미나’를 제외하곤.

어쩔 수 없이 방으로 돌아온 난 침대에 누워 생각에 잠겼다. 인형을 보던 그의 눈빛은 너무나 확연하여 나라도 알 수 있었다.

그래, 마치 연인을 보는 듯했다. 난 그가 드래곤이라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가정을 떠올렸다.

이상하잖아. 그는 저 인형을 소중히 여기는 게 아니야. 저 인형은 단지 대신하고 있을 뿐이야. 믿을 순 없지만 나부는 인간을 좋아했었던 것 같다. 위대하신 드래곤이, 하찮은 인간 따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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