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화 그들의 왕 (5)
수많은 기억들의 홍수, 그녀가 태어나고 죽었을 때까지의 기록들. 난 미나가 되어 미나의 삶을 살았다. 완강해진 정신이 아니었다면 휩쓸려 내 자아를 잃어버렸을 만큼, 난 미나의 기억 속에서 한없이 그녀와 같아졌다. 태어나고 자라나고, 후회하고 기뻐하고.
평범하던 기억들이 지속되던 중에 갑작스레 태양처럼 빛나고 봄바람처럼 기분 좋은 기억들이 선물처럼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기억들은 사랑이었다.
분명 아름답지만 그 끝이 어떻게 끝나는지 난 알았기에, 내가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은 날 너무나 가슴 아프게 했다. 기억들은 이정표처럼 날 하나의 장소로 이끌었다.
그 끝의 장소엔 쓸쓸히 죽어 가던 미나의 마지막이 있었다. 드래곤과의 사랑으로 모든 걸 잃은 채 홀로 외롭게 죽어 간 미나의 마지막 기억. 그러나 그녀는 만연한 슬픔과 후회 속에서 나부를 증오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죽음의 순간에서도 미나는 나부를 그리워했다.
그렇게 한 인간의 삶이 종막을 내리고, 검은 천막이 처졌다. 어둠 속에서 수많은 감정만이 복잡하게 휘몰아칠 때였다. 모든 기억은 끝났으나, 그녀는 내게 말했다. 단지 죽은 자를 흡수한 마물의 기억들에서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난 그제야 깨달았다.
미나는 살아 있었다.
적어도 기억 속에선.
“알았어.”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순수한 기억의 필름에선 뚜렷하게 들려왔다. 이제 내가 해야 할 일은 명확해졌다.
난 세이렌의 기운을 잠재우고 눈을 질끈 감고 떴다. 나도 모르게 맺힌 눈물이 흘려 얼굴을 간질였다.
왠지 실없이 닦아 버리기엔 미안해 가만히 놔뒀다. 한 인간의 삶의 시작과 끝을 보았는데, 눈물 한 줄기가 감상평이라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난 천천히 미나의 동력원, 아니 심장을 들고 나부의 반쪽 심장과 합쳤다. 단지 들고 있었을 뿐인데 무시무시한 힘들이 뿜어졌다.
난 안간힘을 다해 두 힘의 융화를 버텨야 했다. 나부가 내게 이 일을 맡긴 이유를 알겠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몰라도, 내가 아니라면 이건 견디지 못해. 수많은 마물의 힘을 하나의 그릇에 담아 쓰는 난 이질적인 두 기운의 격렬한 반동을 버티는 데 있어서 의도하지 않았으나 어느 경지에 도달해 버린 것이다.
“크악!”
난 활활 불타 버린 손바닥 가죽의 고통을 느끼며 합쳐진 심장을 내려다봤다. 마침내 하나로 합쳐졌다.
영롱히 빛나는 이 구슬에 담긴 힘은 행성의 멸망과 소멸에 관련될 만큼 거대했다. 심지어 모든 상황을 이해하는 나라고 하더라도 당장 이걸 들고 도망칠까 하는 욕망이 생길 정도였다. 하지만 약해진 나부를 피할 수는 있더라도, 원장님과의 관계는 찢어지고 말겠지.
뭐, 찰나의 순간에 든 욕심일 뿐 애초부터 그럴 생각은 없었다.
“두 사람이 원하는 건…….”
이제 남은 건 이 심장을 놓아둘 곳이다. 난 미나를 바라봤다. 이 심장이라면 그녀는 온전히 전생의 기억을 떠올려, 완전한 사람의 감정을 찾을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드래곤의 심장을 가졌으니 인간을 초월한 어떠한 반신적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서로 달라.”
하지만 미나는 그걸 원하지 않는다. 미나의 기억에서,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은 입으로 내어서 전한 게 아니라 어떠한 감정의 전달과 가까웠다. 그래서 난 그 복잡한 감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사랑하나 같이 있긴 싫고, 원망하진 않으나 같이 있으면 증오할 것 같으며, 자기 때문에 고통스러워하는 나부에 대한 슬픔을 느끼나 그럼에도 함께 하고 싶은. 모순적인 감정들의 격돌.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강렬했던 감정만은 모순적이지 않았다.
난 심장을 들고 나부에게로 다가갔다.
“미나는 당신이 희생하는 걸 원하지 않아요.”
그의 갈라진 반쪽 심장에 미나의 동력원이 합쳐진 심장을 내려놓자 갈라졌던 것과 반대로 마치 조화를 이루듯 반발 없이 순식간에 합쳐지기 시작했다. 나부의 몸이 빛난다.
온전한 드래곤의 힘이 느껴진다. 신성하다 못해 거룩하기까지 한 기운들이 뿜어졌다.
힘을 뿜는 나부의 모습에 난 그가 거짓말을 했다는 걸 깨달았다. 드래곤이라서 약하게 보이길 싫었던 걸까. 심장 반쪽을 잃어도 뭐가 약해질 뿐이라는 거야? 아마 심장을 잃었으면 그에게 남은 시간은 얼마 없었을 거야.
“나부.”
그는 내 말이 들리고 있겠지.
“그녀는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과 자신이 그 때문에 죽어 간다는 것도. 사실을 말해 주지 않는 당신에게 배신감을 느끼면서, 그럼에도 곁에 남고 싶어 했었던 거예요.”
나부는 후회를 남겼지만 그건 미나도 마찬가지였다. 다른 점은 드래곤은 후회를 극복하고자 그들 종족에게만 허락된 힘들을 사용했고, 미나는 순리를 받아들였다.
나부는 눈을 뜨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가 가장 먼저 찾은 건 인형에 지나지 않는 미나였다. 심장이 없는 그건 인간의 탈을 쓴 기계에 지나지 않았다.
“대체 무슨 짓을…….”
곧 나부는 눈물로 일렁이는 눈으로 날 바라봤다. 증오와 분노보다 고통스런 슬픔으로 가득한 눈이었다. 드래곤, 저처럼 강한 존재가 이렇게 비참하고 좌절하는 모습을 보게 될 줄은, 그가 아니라면 절대 몰랐을 것이다.
편견은 강대한 존재라도 피할 수 없었던 건가. 젠장, 저 꼴은 그저 연인을 잃은 불쌍한 사람과 다를 바 없잖아.
나부는 무시무시한 기운으로, 감히 내가 상상할 수 없는 힘을 내뿜으며 날 압박했지만, 난 전혀 두렵지 않았다. 분명 지금 이 순간은 내 인생에서 드래곤을 적으로 돌린 가장 위험한 순간이나 연극의 관중처럼 나부의 슬픔이 끝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내가 심장을 넣었어도 미나는 거부했을 거예요.”
“누가 감히 너더러 판단하라고 했느냐? 감히, 감히!”
“죄송해요. 하지만 미나가 원한 건 소생이 아니라 오로지 당신뿐이었는걸요.”
난 한 개의 열매를 그에게 건넸다.
그러자 열매는 순간 황금색 빛이 되어 나부의 머리를 감쌌다. 나부는 저항했으나 빛은 드래곤의 힘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내 빛이 스며들자 나부의 몸부림도 멈췄다. 그는 조용히 웃었고.
기뻐하다가.
울었다.
*
기억의 빛 무리가 사라지고 나부가 모든 비밀을 알았을 때, 난 두근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의 분노가 날 찢어 버리지 않을까 걱정했으나 나부는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날 바라만 보다가 어디론가 사라졌다.
난 그 즉시 덜덜거리는 다리를 재빠르게 움직이며 수집가 군도를 벗어났다. 나부가 원한다면 날 언제든지 죽일 수 있었으나 마물원으로 돌아올 때까지 나쁜 일은 생기지 않았다.
“원장님, 오해하지는 마세요. 전 절대 나부라는 드래곤을 배신하려고 한 게 아니라…….”
마물원으로 돌아온 난 이 사실을 원장님에게 보고해야 했는데, 말을 하면서도 잔뜩 겁에 질려 입술이 달달 떨려 왔다. 나부에게 있어 난 나쁜 짓을 저지르고 도망간 몹쓸 새끼다. 그리고 나부는 원장님의 동족이었고.
“수고했어요.”
하지만 다행히 원장님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으며 ‘별들의 무덤’으로 한 달간 요양을 지시했다. 벌이 아니라 세이렌의 힘을 극도로 이끌어 내어 내 기혈이 또 비틀리기 직전이라고 한다.
원장님은 날 다른 의미로 꾸짖었는데, 이번엔 자칫하다가 자아를 잃어버릴 뻔했다면서 두 번 다시 내 허락 없이 세이렌의 힘을 이끌어 내지 말라고 했다.
난 별들의 무덤에서 또 지루한 요양을 보내며 이번 일에 대하여 곰곰이 생각해 봤다. 이렇게 무사하게 끝난 것만으로도 기적이었네. 생각할수록 그때의 난 정말 도라이 같았다.
감정에 휩쓸려, 아무리 비애에 찬 여인의 부탁이었다고 하더라도 감히 용의 명령을 거부했다.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내 목숨을 잃을 뻔했다.
즉 내 빌어먹을 다혈질은 아직 치료되지 않은 게 분명하다. 억지를 부릴 상대를 봐 가면서 해야 하는데, 이번엔 드래곤이었으니 정말 미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겠다.
결과적으론 얻은 것 하나 없이 드래곤의 미움만 받고 끝났다. 말만 잘 들었어도 테마파크가 내 건데!
“에휴.”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개운하다.
상쾌하다.
만약 나부의 말을 들었다면 찜찜해서 지금보다 더 기분이 나빴겠지. 내가 언제부터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려고 했는지 모르겠지만 글쎄, 이번 일은 크게 후회가 되지 않는걸.
*
지구로 돌아온 난 원장님에게 저녁 식사를 초대받았다. 원장님이 직접 음식을 마련한 경우는 처음이라 들뜬 마음으로 퇴근을 기다렸다.
원장님은 자신이 조성한 마물 우리 중에서도 특히 마츄 우리를 가장 좋아했는데, 이번 식사 장소도 마츄들이 서식하는 천공의 섬이었다. 난 폭포가 떨어지는 하늘의 섬, 그 중앙에 근사하게 마련된 식사 테이블을 보며 박수를 쳤다.
“복귀 선물인가요?”
주변 경치는 이루 말할 것도 없고, 테이블 위에 놓여 있는 음식들은 모두 내가 좋아하는 것이었다. 원장님이 내가 어떻게 김치찌개와 소고기 장조림, 티본 스테이크와 콜라를 좋아하는지 알았는가에 대한 건 둘째치고, 드래곤이 직접 날 위한 음식을 마련했다는 게 감동 포인트였다.
원장님은 와인 한 잔을 미리 하고 있었다. 난 맞은편 의자에 앉아 내 잔에도 와인을 따랐다. 원장님은 식사를 권했고, 난 마다하지 않고 숟가락을 들었다.
‘내가 자주 가는 식당의 김치찌개잖아?’
미세먼지가 심한 서울과 다르게 폐가 뻥 뚫릴 만큼 상쾌한 곳이라 음식도 덩달아 맛있었다. 그래도 원장님과 같이하는 식사라 혼자 밥만 먹기엔 그래서 도중에 시답잖은 이야기들도 나눴다. 주로 나에 대한 이야기였다.
마물원에서 일하며 있었던 일들, 맡았던 임무에 대해서. 난 원장님에게 내가 마물원에서 하고 있는 일들은 모두 인간이 맡기엔 정신 나간 것들이라고 너스레를 떨었는데, 원장님은 웃기만 하였다.
이야기는 자연스레 가장 근래에 있었던 일로 흘러갔다. 원장님이 나부에 대해서 어땠냐고 물었다. 난 원장님 앞이지만 나부를 칭하기에 마땅한 단어가 생각나지 않아 결국 생각나는 대로 말하기로 했다.
“그는 정말 대단한 변태였어요.”
원장님은 살짝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어머, 왜요?”
난 어깨를 으쓱했다. 원장님도 잘 알 텐데.
“사랑을 위해 목숨을 바치는 건 영화 속에서나 나올 법한 일인데, 그 미신과도 같은 짓거리를 위대하신 드래곤님이 하셨잖아요.”
그 뒤 난 드래곤에 대해 폄하한 게 아니라며 오해하지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원장님은 와인을 한 모금 마신 후 내 말에 질문으로 대답했다.
“다정 씨, 용도 사랑을 알까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대답하지 않고 가만히 있자 원장님은 평소 모습보다 감성적으로 변해 턱을 괴곤 눈을 감으며 생각에 잠긴 듯했다.
이내 원장님이 말한 건 나부와 그의 연인에 대해서였다.
“나부가 유희의 대상으로만 여겼던 인간, 그가 살아 있을 적에 한번 찾아가 본 적이 있어요. 단지 궁금해서.”
원장님은 ‘미나’에 대해서 말했다.
평범하기 짝이 없던 인간이었다고.
사랑을 알지 못하는 드래곤이 사랑하기엔 너무나 하찮았던 존재였다고.
“하지만 그가 만든 인형을 봤을 때 난 큰 충격에 휩쓸렸죠. 완전히 똑같이 생긴 인형이라니, 이해할 수 없었어요. 말썽쟁이 기록자가 인간 따위에게 그토록 집중하고 있었다니요.”
난 원장님의 말을 들으며 고개만 끄덕였다. 그래도 같은 드래곤이라 나부에게 벌어진 일이 원장님에게 충격적이었던 것 같았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길게 말하는 의도는 알 수 없었다. 나와 나부의 슬픔에 대해 토론이라도 하고 싶은 걸까? 난 괜히 그때의 감정들이 떠올라 솔직히 말해서 원장님과 더 이상 나부에 대해서 말하기 싫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모르고 있었어요. 어처구니없게도, 둘 사이에 기적과도 같은 결실이 있었다는걸.”
하지만 원장님의 이어진 말에 난 명백한 의도가 있음을 깨달았다. 결실? 인간 세상에서 사랑하는 연인들의 결실이라 하면 보통 가장 크게 쓰이는 의미가 있다. 설마? 난 두근거리는 심장으로 원장님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저번에 말했던 ‘드래곤과 인간’의 아이. 그의 아이예요.”
“우아!”
난 순간 정말 놀라서 혀를 깨물고 말았다. 하지만 점점 생각해 볼수록 어쩌면 드래곤과 인간의 사랑은 크게 놀랄 일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난 봤었기 때문이다.
드래곤과 인간의 자식을. 하지만 별개로 그 여린 소녀가 나부와 미나의 자식이라는 건 상당히 놀라웠다. ‘혜연’이 그들의 자식이라는 것. 세상에, 그 녀석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