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220화 (220/258)

# 220화 좀비 (1)

원장님의 ‘흔적 지우기’는 일 년에 이르는 긴 시간이 걸린 이후로도 계속 되었다. ‘로드’라 불리는 드래곤들의 왕을 피해 자주 마물원을 오랫동안 비우게 되었는데 그렇다고 해서 마물원에 큰 문제는 발생하지 않았다. 원장님은 일을 잘해 내는 날 믿었고, 나도 이제 지시만 받기보다(여전히 명령을 받긴 하지만) 내 힘으로 보다 능동적으로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하게 되었다. 말하자면 그냥 직원에서 협력하는 하청 업체쯤으로 성장한 것이다.

“느긋하게.”

이번에 ‘금구백사’라 불리는 구렁이 마물을 시작으로 원장님이 맡기고 간 일들을 일주일 만에 몽땅 처리해 버렸다. 그럼에도 아직까지 원장님이 돌아오기까지 한 달 남짓이나 남았다. 즉, 내 휴가가 한 달이나 남은 것이다!

난 백사장에 누워 여유를 만끽했다. 그동안 쉬지도 않고 빡세게 달려왔다. 특히 요계로 건너간 이후부터 지금까지 지랄 맞은 일들이 연달아 발생해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시간이 전혀 없었다. 여유를 사랑하는 낙관주의자인 나로선 이제 한계에 다다랐다.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저 해변에 널린 돌멩이처럼 가만히 지내고 싶었다.

“하, 좋다.”

가져온 콜라병에 빨대를 꽂고 쪽쪽 빨았다. 톡 쏘는 탄산 뒤에 캐러멜 향의 단맛이 혀를 기쁘게 해 준다. 이게 행복이지, 이게 삶이지.

내가 휴가지로 택한 곳은 태평양의 무인도였다. 토지 증명서는 없으나 비공식적으로 이 섬은 내 섬이다. 누감 무어라 지껄이면, ‘캣 맘’에게 가 보라고 하면 된다.

벌써 몇 년이나 흘렀나.

이 섬은 원래 수억 마리의 고양이들로 득실거리던 섬이었으나 내 충고(지금 생각해도 그때의 난 또라이였다.)아닌 충고로 ‘캣 맘’ 드래곤이 다른 세계로 고양이를 데리고 이주하는 바람에 빈 섬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캣 맘은 지구를 떠나며 충고를 해 준 보답으로 내게 이 섬을 줬었다. 이 섬은 인공위성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고 드래곤의 결계로 보호되어 침입자도 없는 조용한 열대 섬이다. 예전에 ‘새끼 대륙 거북’ 사건 이후로 올 시간과 여유가 없어 잊어버리고 있었는데 이번에 평화와 여유를 찾다 보니 이 섬이 불현듯 떠올랐고, 난 망설이지 않고 휴가지로 택했다.

정말 탁월한 선택이었다.

애초부터 고양이들만 살던 곳이라 섬에는 식물과 곤충, 작은 도마뱀들과 거북이만 엉금엉금 기어 다닐 뿐 마물은커녕 큰 동물도 보이지 않았다.

행복하다.

옷 따윈 입지 않았다.

완전한 해방감.

그저 내 몸 구석구석 감싸는 부드럽고 따뜻한 햇볕만을 느끼며, 찰랑이는 파도 소리에 귀 기울인다.

갈증이 날 때쯤, 콜라를 마시면 몸을 타고 올라오는 탄산의 짜릿함에 콧구멍이 찡하다.

이대로 햇볕에 말라 가는 미역처럼, 한 달 동안 지낼 거야.

행복하게.

*

태평양의 어느 섬에서 지낸 지 삼 주일이 지났다. 아무 생각 없이 지냈고, 아무 일도 터지지 않았다. 젠장, 생각해 보니 처음 아니던가? 내 휴가가 이토록 완벽하게 흘러간 건? 이토록 만족스러웠던 휴가가 최근 몇 년 동안 있었던가?

“후우, 이제 문명으로 돌아가 볼까.”

본래 한 달을 지낼 생각이었으나 생각해 보니 남은 일주일은 맛있는 음식을 먹는 데 치중하는 게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난 원장님의 ‘골렘’을 작동시키며 벗어 둔 피서용 하와이안 셔츠를 입고 주머니에 넣어둔 휴대전화를 켰다.

그동안 일부러 휴대전화도 보지 않았다. 어차피 급한 일이 터져 원장님이 날 찾으면, 직접 찾아오거나 차원 통신기가 작동할 테니까 말이다.

“뭐여.”

휴대전화를 켜도 기껏해야 대출안내 문자나 몇 개 왔을 거라고 생각했으나 켜자마자 시끄럽게 알람이 울리며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가득 찼다.

“마흔네 통?”

뭘까.

부재중 전화도 백 통이 넘어간다.

난 어떤 미친놈이 날 찾는가 싶어 느긋하게 확인했다. 처음엔 바로 알지 못했다. 영어로 써져 있기에, 번역기를 켜고 나서야 난 누가 이렇게 날 급히 찾았는지 알게 되었다.

“릭스틴 연구소?”

전화와 메시지, 모두 릭스틴 연구소에서 온 것이다. 난 빠르게 메시지들을 읽었으나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 수가 없었다. 오래된 메시지엔 전화로 알릴 사안이 아니라며 이 메시지를 보게 된다면 급히 자신에게 연락을 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으나 최근 메시지를 보니 좀비 바이러스니 뭐니 해서 알아듣지 못할 말만 가득했다.

릭스틴 연구소의 올리비아 ‘소장’이 보낸 메시지들이다.

올리비아, 릭스틴 연구소의 박사. 소장이라고 했으니 지금은 릭스틴 연구소의 책임자가 되었나.

그녀에겐 도움을 많이 받았었다. 미라 마물에 의해 발생한 마물 병을 치료하기 위해 내가 파견되었을 때부터, 바스테 병원에서의 사건까지.

나라는 남자, 은혜를 아는 멋진 남자. 난 그녀가 어떤 부탁을 하든 능히 들어줄 마음이 있었다.

난 도와주겠다고 메시지를 보낸 후 곧바로 그녀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 스마트폰이 인공위성 폰에다가 이계 기술력이 접목된 최신형이라 다행이다. 이 망망대해 한가운데 있는 섬에서도 신호가 갔다.

“흠.”

마지막 메시지는 불과 이틀 전.

너무 안 받아서 삐졌나.

신호만 일 분이 넘도록 계속 가던 그때였다.

딸깍.

연결되었다.

“무슨 일로 전화…….”

[다정 씨! 어디 있었어요? 아니, 것보다 빨리……!]

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상당히 다급한 올리비아의 목소리. 첫 만남에 내 뺨을 핥던 느긋하고 태평스러운 올리비아의 성격과는 어울리지 않았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는 거겠지. 내 도움이 필요한 올리비아가 내게 연구소로 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며 어디 있냐고 묻자 난 대충 태평양 어디의 섬이라고 했지만 올리비아는 즉시 비행기를 보낼 테니 좌표를 보내라고 했다. 한시도 빨리 릭스틴 연구소까지 와 줬으면 한다니 무슨 일이 벌어져도 단단히 벌어진 모양이로군.

“제가 그쪽으로 갈게요.”

[대부분의 항공 루트가 차단되어서 지금부터 준비하려면 수습해야 할 게 많아요. 것보다 국제재해대책협회 직속기라면 허용 루트로 반나절 만에 오실 수 있을 거예요.]

“괜찮아요. 비행기 따윌 타고 가는 게 아니니까. 흠, 어디 보자… 한 20분이면 되겠네요.”

[네? 태평양 인근이면 지구 반 바퀴 거리인데…….]

난 곧 보자는 말과 함께 걱정하지 말라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제한이 있지만 에너지원만 충분하다면 전이로 커져 버린 지구라도 몇십 분 만에 한 바퀴를 돌파할 수 있는, 가치로 환산할 수 없는 비행기가 내겐 있다.

난 골렘에 올라타 곧바로 릭스틴 연구소로 향했고, 말한 대로 20분 만에 지구 반대편 사막에 도착하게 되었다.

*

붉은 바위와 모래만이 존재하는 호주의 사막 깊숙한 곳엔 마물과 이계에 의해 발생한 질병을 연구하는 릭스틴 연구소가 있다.

“하와이안 셔츠는 좀 아니지.”

골렘에서 내린 난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여름 셔츠를 벗고 턱시도를 입었다. 여전히 연구소엔 어울리지 않지만 피서용 여름옷보단 낫겠지. 난 올리비아의 다급한 요청으로 곧바로 릭스틴 연구소까지 날아왔다. 자세한 사정은 알 수 없었으나 올리비아는 위급한 상황에 처해있고, 내 도움이 몹시 필요한 듯했다.

“소장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골렘에서 내리자 활주로에서 빡빡 머리의 검은 선글라스를 쓴 아저씨들이 다가왔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골렘’을 봐도 당황하지 않았다. 느껴지는 기도 제법이고 능력자에 훈련 받은 자들이다. 예전 게르반 형제 사건 이후로 보안이 강화된 건가? 저번엔 이처럼 그럴싸한 활주로도 없었지. 마물 연구소로서 어느 정도 입지가 다져진 모양이다. 난 도로 끝에 태양이 내리쬐는 붉은 사막과 어울리지 않는 근미래적인 건물을 바라봤다. 돔 형태의 연구소, 천천히 개폐되는 강철 문을 보고 있자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미라 마물이 발생시킨 전염병을 조사하기 위해 왔을 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확연히 달랐다. 뭐, 그때에도 이유 없는 자신감이 있긴 했었지만 긴장도 하고 아무 도움이 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꼭 그런 느낌이다.

‘이 몸 등장’

마치 빨간 팬티를 입고 다니는 만화 속의 영웅처럼 어떤 사건이라도 해결할 수 있을 것 같다.

*

연구소 내부도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연구원들도 몇 명 없었고, 시설도 지금보다 열악한 편이었다. 그러나 입구를 지나자 로비에서부터 방호복이나 의사 가운 따위를 입은 사람들로 북적거렸고, 복도마다 배치되어 있는 경호원과 방마다 이상한 기계들도 잔뜩 있는 걸 보자니 릭스틴 연구소도 많이 성장한 것 같았다. 암울하게도 좋은 현상은 아니다. 릭스틴 연구소가 성장한 건 그만큼 전이가 진행될수록 ‘마물 병’이 위험하게 전파되고 있다는 증거일 테니까.

난 안내를 따라 소장실에 도착했다. ‘올리비아 소장’이라 적힌 문패가 걸려 있는 걸 보자니 감회가 새롭다. 노크를 하자 안에서 우당탕탕 소리가 들리더니 잠시 후, 올리비아가 문을 열어 줬다.

“다정.”

힘없는 목소리로 반가움의 포옹을 하는 올리비아, 난 살짝 코를 찡그렸다. 이런 표현은 실례지만 올리비아에게서 식초 냄새가 났다.

“소장 되셨네. 축하해요.”

릭스틴 연구소의 병리학 박사에서 소장이 된 걸 축하해 주고자 들고 온 선물을 건넸다. 별건 없고 이동용 골렘의 창고에 처박아 뒀던 마물 조개의 진주였다. 마물 우리를 청소하다가 주운 건데 예쁘기만 하지 쓸모가 없고 팔기도 귀찮아서(통장의 잔고를 세는 데 10초가 넘어간 이후부터 돈에 연연하지 않게 되었다.) 창고에 놔둔 건데 올리비아라면 좋아할 것 같았다.

“와아.”

반짝이는 거대 진주에 올리비아의 지친 얼굴이 순간 밝아졌으나 이내 부담스럽다고 마음만 받겠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난 절대 남에게 부담스러울 만큼 선물을 주는 위인이 아니라며, 이건 길 가다 주은 돌멩이 수준이라고 대답하며 진주를 다시 건넸다.

“아, 고마워요. 다정. 정말 크고 예쁜 ‘돌멩이’네.”

올리비아는 이상하게도 크게 실망한 표정으로 진주를 받았으나 고맙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보석을 싫어하는 편인가?

“무슨 일이예요? 몰골이 심각하신데.”

올리비아는 피곤에 절여진(식초 냄새가 나서 그렇게 생각한 건 절대 아니다.) 미역 같았다. 올리비아의 녹색 곱슬머리는 평소보다 더 얽히고설켜 있어 썩은 미역 같았고, 볼은 홀쭉하고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은 맛 간 동태눈인 데다가 활기 넘치던 목소리는 잠기다 못해 간신히 내뱉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차라리 붉은 눈의 마물이 더 나았어요.”

올리비아는 커피를 타 주며 내게 그동안 발생한 ‘마물 병’에 대하여 설명해 줬다. 미라 마물에 의해 발생한 전염병은 우습게 여길 정도로 심각한, 일명 ‘좀비병’에 대해서였다.

*

그 무시무시한 병은 두 달 전, 말레이제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동남아시아에서도 의료 체제가 발달한 편인 말레이제도의 여러 나라들도 미처 대처하지 못하고 단 두 달 만에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집어삼킨 공포스러운 전염성을 가진 전염병은 곧바로 상황을 파악하고 백신 제조에 나선 릭스틴 연구소를 비롯한 중요 기관들조차 지금까지 전혀 병의 실체를 파악도 하지 못했다.

단지 증상만을 알 수 있었을 뿐.

올리비아는 아무것도 알 수 없어 병명을 지칭하지 못했다고 했으나 연구원들 사이에서는 ‘좀비 바이러스’라고 부른다고 했다.

“절체절명의 상황이에요. 백신을 만들어 내지 못한다면…….”

말레이제도를 넘어 인도차이나반도까지 전염되던 좀비 바이러스는 국제기구의 협력으로 타이 만에 생겨난 ‘이계비경’에 감염자들을 모두 몰아넣는 것에 성공했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현재 릭스틴 연구소가 전두지휘하며 감염자들을 치료할 방안을 찾고 있지만 전혀 갈피조차 잡지 못했으며, 감염자들을 수용한 이계비경의 방어선마저 붕괴되기 직전이라 극단적인 선택마저 강요받고 있는 지경이라고 한다.

극단적인 방안.

수십 만 명의 감염자들을 모조리 죽이는 것, 마치 조류독감에 걸린 닭들을 살처분하듯 인간을.

올리비아의 말을 듣던 난 예전에 겪었던 불쾌한 경험이 떠올랐다. 한 때 날 비건vegan[완전채식주의자]으로 만들었던 사건. 가축들이 살처분하는 현장을 직접 목격했을 때의 충격.

난 역겨운 기분을 진정시키고 침착히 올리비아에게 질문했다.

“감염자들을 직접 만나 봐야겠어요.”

올리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릭스틴 연구소의 격리실에 감염자를 ‘보호’하고 있다고 했지만 난 올리비아를 괴롭게 했던 이유 중에 하나임을 눈치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