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4화 좀비 (5)
며칠 후 흔적 지우기를 끝내고 돌아온 원장님에 의해 순식간에 사태는 종료되었다.
원장님은 수십만 명의 몸속에 기생 중인 ‘알’과 내가 동결시킨 모체숙주의 기생마물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시에 해치우는 방식으로 가볍게 사건을 해결했다. 정말 용이 아니라면 할 수 없는 방법이다.
사후처리는 ‘협회’에게 맡겼다. 국제 재해 대책 기구에선 용의 개입을 숨기고 헌터들에게 공을 돌렸는데, 명단에 내 이름은 없었다. 당연하겠지만 참 졸렬하다.
숙주에서 벗어난 감염자들은 점점 호전되고 있었으나 여전히 방심할 수 없이 위험한 수준이었다. 윙바레라도 수십만 명의 감염자들을 수용하여 치료할 수 있는 시설이 없어 원장님이 도움을 줬다. 공간 이동 마법으로 릭스틴 연구소의 사막에 윙바레사의 시설들을 옮긴 것이다. 그곳에 감염자들에게 남은 상처와 흔적을 치료하기 위해 바스테 병원과 릭스틴 연구소, 또한 세계적인 의료인들이 모였다. 올리비아가 말하길, 이번 위기가 기회가 되어 의료 분야에 있어 대단한 협력과 증진을 촉진시킬 시대적 도약이라고 했다. 뭐, 난 단지 당분간 올리비아의 머리가 미역 줄기에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만 들었다.
대강 일이 정리된 후 마물원으로 돌아온 난 원장님에게 랭커들과 대립했던 일들을 말했다. 난 늘 그렇듯 잘난 체하며 직접 대면해 보니 랭커들도 별거 아니었다고, 내 힘이 엄청 뛰어남을 느낀다고 자랑했다. 번데기 앞에 주름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드래곤 앞에선 하찮은 일이겠지만 솔직히 이번 경험은 나도 놀랍기만 했다. 어렴풋이 유추하고는 있었지만, 정말 한 자릿수 랭커들도 내겐 이젠 별게 아닌 자들이 되었다. 세계에서 가장 유능한 헌터들이 말이다. 몇 년 전 TV 프로그램 따위를 보며 그들의 삶을 부러워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말이지.
“잘했어요. 이젠 귀찮은 일들이 더 늘어날 거예요.”
원장님의 대답에 난 머쓱해서 뺨을 긁적였다. 칭찬인지 꾸짖는 건지 헷갈렸다. 난 원장님에게 정말 잘한 짓인지, 힘을 숨기는 게 나았을지 물어봤다.
“많은 견제를 받겠죠.”
원장님이 대답했다.
“이번 일로 다정 씨는 공개적으로 랭커보다 강한 자가 되었고, 소문은 순식간에 퍼져 헌터들 사이에서 다정 씨는 여러 가지 이유로 요주의 인물이 되었겠죠.”
원장님은 날더러 폭풍의 눈이라 부르면서 이제 많은 세력이 날 견제하려 들 것이며, 지구의 헌터들뿐만 아니라 그들과 연관이 있는 다른 세계의 어떠한 존재마저도 유심히 지켜볼 거라고 경고했다.
역시 힘을 숨겨야 했었나? 헌터들의 관심을 끄는 건 원장님 말대로 귀찮고 성가신 일이다. 보다 쉬운 방법도 있었는데 성질머리를 못 이겨서 괜한 일을 벌인 것 같았다.
“그래도 뭐 상관없겠죠.”
신난 아이처럼 방방 뛴 게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이고 있을 때였다. 원장님이 대뜸 다가오더니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날 어린애 대하듯 하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은 ‘칭찬’이다. 전에도 이런 적이 있었지. 내가 원장님의 마음에 들게 일을 잘 처리했을 때.
“난 다정 씨가 약아빠진 뱀이 아니라 당당한 사자가 되었으면 해요. 금색 갈기를 자랑하며 송곳니와 발톱을 감추지 않는 사자가.”
난 원장님의 비유를 이해했다.
그저 앞으로도 지금처럼 하라는 의미다. 어차피 마물원 일을 하며 드래곤의 가디언으로서 계속 지낸다면 소동을 피할 수 없으니, 괜히 발톱을 숨기지 말고 드러내라는 것이다. 문득 내가 생고생을 하면서도 왜 지금까지 이 일을 포기하지 않았는지에 대해서 깨달았다.
원장님의 성질은 나와 똑 닮았다. 정말 통하는 게 있어. 사자가 되라고 했을 때 난 괜히 뿌듯했다. 날 이해해 주는 것 같아 기뻤다.
“어흥.”
그래서 사자 흉내를 내며 원장님의 등을 장난스럽게 두들겼지만 곧바로 별들의 무덤으로 유배당하게 되었다.
“음.”
무너지는 하늘에 폭발하는 별들을 바라보며 원장님과의 관계가 아직까지 친밀히 장난칠 단계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살을 깨물기라도 했으면 큰일 날 뻔했어.
*
별들의 무덤, 멸망하는 세계.
어떤 힘을 끌어올려도 상관없는 곳이다. 난 이곳에 온 김에 찜찜하던 의문을 풀기로 마음먹었다.
혹시나 싶었다.
‘그림리퍼’과 싸울 때 단지 서로 죽고 죽이는 행위만으로도 녀석의 힘이 내게 뒤섞일 정도로 깊은 교감을 했다. 그래서 이번에도 혹시나 놈의 어떠한 힘, 마력을 이끌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러나 없었다.
내 안에, 놈의 힘은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마물의 힘을 사용하며 숨 쉬듯이 익숙한 감각이라 잘 알았다. 교감을 하여 놈의 머릿속을 들어다봤어도 마력은 내게 전해지지 않았다.
“이해할 수 없어.”
그 점은 내게 강렬한 의문을 선사했다. 마물이라 하여 모든 힘을 얻지 못하는 건가? 난 교감의 힘으로 마물의 마력을 빌리거나 얻을 때 깊고 강력한 교감을 바탕으로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물이 힘을 빌려주기 싫거나, 아예 날 미워하더라도 난 강제로 빼앗은 전적도 있었다. 그래서 내 힘이 강해질수록 단지 교감만 나눈다면 힘을 얻을 수 있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번엔 달랐다.
애초에 이 교감의 힘은 설명하기 버거운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난 지금까지 깊게 생각해 보지 않은 의문점에 대해서 고민했다. 교감으로 힘을 빌려온다고? 그렇다면 마물이 없는데 어떻게 힘을 빌려왔지? 포근이가 내 품을 떠난 지가 언젠데, 난 아직까지 이토록 강렬히 샐러맨더의 힘을 빌려오는 거지? 전에도 생각한 적이 있었다. 이 질문에 원장님은 내 힘은 공간에 제약이 없다고 했다. 그러나 그렇게 쉬운 얘기는 아닌 듯했다. 단 한 번의 교감으로도 마력을 계속 발휘할 수 있다는 건 역시 이상하다.
어쩌면, 지금 이런 생각을 하는 나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지만 이미 내겐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마물의 힘들이, 내가 단지 몰랐을 뿐. 교감으로 깨달아 버린 게 아닐까?
물론 말도 안 되는 가정이다.
그러나 정말 만약에 그렇다면.
헤롯의 자주벌레의 마력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것도 이해가 간다. 내겐 애당초 없었던 힘이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다른 마물의 힘은 무엇이란 말인가?
“답은…….”
수많은 일들을 경험하고, 수많은 난관을 넘고, 수많은 힘들을 얻으면서 점점 깨닫는 게 있었다. 내 그릇이 더 크고 넓어질수록 난 점점 달라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변화의 끝에, 내가 가진 모든 의문의 해답이 존재할 거라는 것도 알았다.
언제가 될지는 모른다.
얼마나 더 많은 힘을 가져야, 얼마나 더 그릇이 넓어지고 커져야 알 수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난 반드시 이 찜찜하고 불쾌한 의문을 해소하리라고 생각했다.
*
헤롯의 오만함은 감히 영광을 신이 아닌 자신에게 돌렸고, 신은 노하여 벌을 내리니 헤롯은 벌레에게 먹혀 최후를 맞이했다.
*
“드디어 끝났다.”
난 점점 푸른색을 되찾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검은 하늘이 사라지고 햇볕이 들기 시작했다. 빌어먹을 나이트메어와 악몽의 마물들이 사라졌으니 이제 대규모 광란 사태는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난 야옹이의 힘을 거두며 주변을 둘러봤다. 악몽으로부터 어린 소녀를 지키고 있던 사제들이 내게 다가온다. 그중 인자하게 생긴 중년의 남성이 내게 물었다.
“피곤하군요. 이럴 땐 목구멍에 기름칠을 해 줘야 합니다. 저녁에 삼겹살에 소주라도 한잔하시겠습니까?”
“사제님이 술 마셔도 되요?”
내 말에 검은 사제복을 입은 사제님은 껄껄 웃으며 수습 신부나 그러지 자신은 악마 잡는 신부로 술기운 따위는 능히 이겨 내니 괜찮다고 했다. 핑계는. 그냥 술을 좋아하는 아저씨잖아. 내가 알았다고 하니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단골집으로 안내한다고 한다.
그는 검은 사제, 김정호 신부다.
자세히 설명하면 ‘악마’라 규정짓는 괴물들을 퇴마하는 ‘오타방’이란 종교 단체의 사제였다. 그는 한국 내에서 가장 덕망 높은 사제인데 가톨릭의 구마사제와 비슷한 역할을 하고 있다. 전에 악령 들린 소녀를 구마하기 위해서 마물원에 도움을 청하여 나와 같이 나이트메어를 몰아낸 적이 있었다. 그 당시엔 크게 도움은 되지 않았으나 열정이 상당하여 지금은 꽤 뛰어난 수준의 퇴마 실력을 가지게 되었다.
“며칠 동안 고생하셨어요. 드디어 놈들을 모두 몰아냈네요.”
“제가 고생한 게 뭐 있겠습니까. 다 다정 씨의 강인함 덕이지요.”
자신은 한 게 아무것도 없다며 말하는 김정호 신부의 손에는 아직까지 악마의 검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난 성수로 몸을 정화하는 의식을 치루는 김정호 신부와 사제들을 바라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싸우는 사제님들이라, 묘하네. 덕분에 일은 수월하게 처리했지만.
이번에 솔로몬의 탑의 일부가 한국에 전이되었는데 그 여파로 수백 명의 마을 주민이 단체로 발작을 일으켰다. 광란 상태에 빠진 주민들은 닥치는 대로 ‘생명’을 파괴하기 시작했다. 다행히 시골에서 발생한 데다가 ‘오타방’이 미리 알아차려 대처를 해 피해가 번지기 전에 막아 낼 수 있었다. 난 며칠 전, 전처럼 김정호 신부의 요청으로 악마들을 때려잡기 위해 왔다. 이젠 나이트메어나 악몽의 괴물 따윈 새끼손가락으로도 죽일 수 있었으나 큰 문제가 발생했다. 아무리 나라고 해도 악마들과 광란에 찬 마을 주민들을 동시에 상대하기엔 벅찼다. 전이된 탑을 없애기 위해선 탑에 들어가 시험을 통과하거나 ‘주인’을 죽여야 했는데, 그동안 풀려난 악마들이 사납게 날뛴 탓이다.
다행히 오타방의 구마사제들이 파견되어 김정호 신부를 주축으로 악마에 쓰인 마을 주민을 구마하여 난 솔로몬의 탑을 없애는 데 주력할 수 있었다. 탑의 주인은 예상보다 더 성가셔 며칠이 걸렸는데 신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몇천 명의 피해자가 나왔을지도 몰랐다.
“한 잔 받으세요.”
난 일이 모두 끝난 후 김정호 신부의 단골 가게에서 그와 저녁을 같이했다. 그는 신부답게 예의가 바르면서도 입담에 거침이 없었다.
이번에 며칠 동안 악마와 싸우며 친해졌는데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난 그와 농담을 나누며 술잔을 기울였다.
좋은 사람과 나누는 술은 세월없다. 난 술에 취하지 않아 괜찮았지만 그는 결국 잔뜩 술에 취해 눈마저 풀리게 되었다. 으레 그렇듯 밤과 술이 깊어지니, 선뜻 꺼내기 힘든 대화까지 나누게 되었다.
나에 대해 궁금했던 그는 내 가족에 대해서 물었고, 난 고아라고 대답했다. 난 분위기가 어색해지기 전에 바로 그가 신부, 그것도 구마사제가 된 이유를 물어봤다.
그는 나와 같은 고통을 겪었었다. 평범한 목사였던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이 ‘검은 뿔’의 악마에게 죽은 이후, 복수를 결심했다. 그러나 솔로몬의 탑의 악마는 다른 이계에서 온 괴물이나 마물들과 다르게 베일에 감춰진 채 혼자선 절대 정보를 알아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오타방의 사제가 되었다.
“사실 얼마 전…….”
김정호 신부는 말을 하다가 십자가 목걸이를 손에 쥐며 묵묵히 눈을 감았다.
“사실 얼마 전, 9년 동안이나 찾지 못했었던 놈의 흔적을 처음으로 발견했습니다.”
이내 말을 꺼낸 김정호 신부,
그는 증오하는 악마의 흔적을 발견했다고 했다. 자세히 알려 주지는 않았으나 복수에 진전이 있음을 기쁘게 여기는 것 같았다. 내가 무어라 할 건 아니었으나, 다만 그가 걱정되어 난 넌지시 말했다.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지 말씀해 주세요.”
그는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성직자로서 가져선 안 되는 마음이겠죠. 그러나.”
그의 가라앉은 눈빛 너머, 난 이글거리는 무언가를 찾은 것 같았다.
“복수. 그 시간이 오면, 그건 오로지 나만의 시간이 될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