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6화 악마 (2)
아직 보수되지 않은 무너진 담벼락을 지나 낡은 철문을 열자 잡초가 자라난 정원이 보였다. 난 흙으로 지저분한 아스팔트 길을 따라갔다. 길목엔 울타리도 없고 가꾸지 않아 더러웠으나 만발한 꽃들은 생기 있게 피어 있었다.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꽃내음을 맡으니 실감이 났다.
길을 따라간 곳엔 낡은 건물이 있었다. 썰렁한 복도를 어슬렁거리고 있자 얼룩진 파란색 경비 옷을 입은 노인만이 내게 인사를 건넸다. 그에게 예배당으로 가는 길을 묻자 친절히 그곳까지 안내해 줬다. 예배당으로 가는 길엔 소독약 냄새가 진동했다. 가까워질수록 경건하고 차분한 음악 소리가 들려왔다. 다만 스피커로 재생되고 있는지 도중도 중 노이즈 소리가 심했다.
예배당 입구에서 늙은 경비가 내게 말했다.
“좋은 분이셨지요. 정말 좋은 분이셨어요.”
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은 김정호 신부님이 계시던 성 요셉 고아원이다.
예배당의 문을 조심스레 열자 이미 추모식이 진행되고 있었다. 뻘쭘하게 들어와 서 있자 예배당 긴 나무 의자에 옹기종기 앉아 있던 아이들이 뒤돌아본다. 어색하게 인사하니, 수녀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왔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수녀는 투박한 관에 안치된 김정호 신부를 만나게 해 주었다. 그의 마지막을 지켜봤었다. 그러나 수습된 시신은 공포로 얼룩진 얼굴이 아니었다. 어딘가 인자한 느낌, 그가 살아온 삶이 깃들어 있는 듯 느껴졌다. 난 그에게 가톨릭식으로 조의를 표한 후 의자에 앉아 추모식을 지켜봤다. 어느 대단한 종교인의 추모처럼 화려하진 않았으나 이들의 슬픔은 진심이었다. 고아원의 아이들은 침울히 김정호 신부님을 애도했다. 그들 중 채 다섯 살도 되지 않는 어린애들도 보였다. 무엇 알긴 하는 건지, 더 이상 만날 수 없다는 걸 너무나 일찍 깨달은 녀석들이기에 글썽이는 눈은 정말 슬퍼 보였다.
난 주머니에서 그의 십자가 목걸이를 꺼냈다. 그의 앞에서 꼭 들려주고 싶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
조용히 묵념하며 각오를 되씹었다.
*
추모식이 끝난 후 오후 시간에 잠깐 아이들과 놀아 주기로 했다. 근처 장난감 가게에서 주문한 장난감들을 나눠주며 때 이른 산타 노릇을 했는데, 아이들은 기쁘게 선물을 받고 활발히 뛰어놀았다. 그 모습에 난 어린 시절, 고아원 때가 생각났다. 그래, 아이들은 원래 저리 근심 없이 뛰어놀아야 한다. 슬픈 일을 겪어도 금세 잊어버릴 만큼.
그러나 내가 있던 고아원은 달랐다.
장난감을 건네는 자에게 선뜻 고맙다는 말을 건네기도 버거웠다.
아이들은 환경에 민감하다.
이곳은 그곳과 다르다.
누구 덕분인지는 명백했다.
아이들에게 선물을 나눠 준 후 원장 수녀님을 만났다. 수녀님은 얘기하길 꺼렸으나 난 현실적인 문제를 알고 싶었다. 결국 거듭된 설득으로 고아원의 재정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문제는 없으나 김정호 신부님의 지원이 끊겼으니 정부 수당과 교에서 받는 지원비로는 많이 부족하여 상황이 점점 힘들어질 거라고 했다. 하지만 원장 수녀님은 크게 내색하지 않았다. 햇빛은 공평히 비춘다고 말하며 잠깐 힘들 뿐 고난은 늘 그렇듯 지나갈 거라고 했다. 난 내가 햇빛이 되어 주겠다고 말하려다가 낯간지러워 참았다.
대신 담담한 수녀님처럼, 나도 담담히 품에서 한 장의 봉투를 건넸다.
“이 정도면 당분간은 괜찮으실 겁니다.”
수녀님은 금액이 얼마인지 알아보지 않았다. 대신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난 어깨를 으쓱하며 안에 담긴 종이를 꺼내 보라고 했다. 내색하지 않아도 힘든 상황인지라 주저하던 수녀님은 내 보챔에 봉투를 열었다.
뭐, 반응은 어느 정도 예상하고는 있었으나 수녀님은 내 생각보다 더 크게 놀라 했다.
마치 흉측한 물건이라도 되는 양 수표를 냅다 버려 버린 것이다.
“이런 큰 금액을……!”
당황하며 내게 묻자 난 어깨를 으쓱했다. 사실 정말 별거 아니었다. 내가 가진 것에 비하면 아주 작은 금액이다. 그러나 100명 규모의 고아원을 평범히 유지하기엔 충분한 액수다. 난 세계 재벌기업의 유일 후계자라고 말하며 전혀 부담 가질 필요가 없다고 했다. 당연히 거짓말이지만 수녀님은 그 사실을 알아도 대놓고 되물어 보지 못했다.
성 요셉 고아원에서 나와 집까지 걸어가던 난 문득 하늘을 바라봤다.
“시벌, 날씨 한번 엿같이 좋네.”
티 없이 푸르기만 한 하늘.
서울의 하늘이 정말 오랜만에 화창하다고 생각했다.
*
며칠 후 원장님은 ‘검은 용’에 대해서 말했다.
일전에 내게 설명해 준 적이 있었다. 솔로몬의 탑을 전이시키려 드는 ‘일루미나티’라는 세력과 그곳의 수장이 검은 날개를 가진 용이라는걸. 역시 이번 일은 놈들의 소행이었다.
“케르베로스라는 열쇠가 없으면 안 되기에 관망하였건만, 그는 다른 방법을 찾아낸 것 같군요.”
원장님은 때가 되었다고 했다. 더 이상 한시도 미룰 수 없다며 어떤 일로 인해 ‘로드’의 시선이 잠시 돌려진 지금 사이에 신속하게 이 일을 처리해야 된다고 말했다. 난 원장님의 눈을 바라봤다. 이글거리는 불꽃처럼 강렬한 홍색의 눈은 흔들림 없이 단호하게 느껴졌다.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원장님이 대답했다.
“놈들의 본거지는 찾았어요.”
원장님의 밑에서 일하며 느낀 건데 정작 거대한 일은 단순한 계획으로 흘러가는 일이 많았다. 지금처럼 말이다. 원장님이 말하는 계획이란 건 너무나 단순해서 무식하게 느껴 징 지경이었다. 일루미나티, 놈들의 본거지를 찾았으니 쳐들어가 때려 부순다는 게 다다.
물론 원장님이 천상천하유아독존 드래곤임을 가정해야겠지만 이번 일은 지금까지 해 왔던 일들과 근본적으로 크게 다른 점이 있었다. 그녀가 마음만 먹으면 안 될 일이 뭐 있겠냐마는, 방금 전에 원장님이 말했듯 상대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검은 ‘용’이라고 했잖아.
용과 용의 대결,
지금껏 내가 만나 본 용들처럼 검은 용이 강하다면,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난 감히 상상할 수 없었다. 이제 웬만한 일에도 눈 깜빡하지 않는 나였으나 그래도 이건 아니다. 지구는 파멸할 거야, 반드시!
“다정 씨.”
내가 우물쭈물거리고 있자 원장님은 따뜻한 커피를 타 주며 말했다.
“걱정 마요. 검은 용은 내가 쳐 죽일 테니까.”
그게 문제인데요.
원장님이 쳐 죽인다는 험악한 말까지 쓰는 걸 보니 이번엔 정말 최선을 다할 요량인 것 같다. 난 원장님과 나는 걱정 없으나, 우리 지구가 아파할 것 같다고 말했다.
“설마 이 ‘좁아터진’ 지구에서 싸우겠어요? 세상이 몇 번이나 멸망하려고.”
그러자 원장님은 ‘이미 멸망해 버린’ 차원으로 놈을 끄집어내서 싸우겠다고 말했다. 무시무시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으나 그녀라면 정말 그럴 것이다. 난 침을 꿀꺽 삼키며 결국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물어보고자 했다. 설마하니 그 원장님에게 이런 질문을 하게 될 줄은 몰랐다.
“원장님이 세요, 검은 용이란 놈이 세요?”
단지 ‘복싱 챔피언이 세요, 유도 챔피언이 세요?’ 같은 허접한 질문이 아니다. 어쩌면 원장님이 대답할 간단한 말에 내 운명과 지구의 사활이 걸려 있을지도 몰랐다. 난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원장님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
그때였다.
원장님은 지금껏 보여 주지 않았던, 아주 뜻밖의 행동을 했다.
자존심이 상한다는 듯 붉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기더니 정말 오만하고 자의식 강한 표정으로 피식 웃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허리춤에 손을 올려놓은 모습이 꼭 챔피언 벨트를 한 복싱 선수같이 당당했다.
“내가 발라.”
아, 그렇구나. 곰곰이 생각해 보니 지금까지 원장님에게 감히 비유할 대상을 찾지 못해서 저런 모습을 보지 못했었던 것이다. 딱히 의외의 모습은 아니었어. 아무튼 그렇다고 하니 그런 것이다. 난 의심할 이유가 없었다. 검은 용을 만나 본 건 아니지만 곁에서 지켜본 원장님은 아직까지도 그 깊이를 알 수 없었다.
이제 문제는 가장 근본적인 것만 남았다.
과연, 이번 일은 내가 잘할 수 있을까?
“전 무얼 하면 됩니까?”
원장님은 대답 대신 대뜸 손가락으로 아래를 가리켰다.
멀뚱멀뚱 지켜보자 적은 여기 있다고 한다.
“커피잔에요?”
“아니.”
원장님이 가리킨 건 커피잔이나, 마물원 관리실의 바닥 따위가 아니었다.
“지구의 아래, 악마가 있어요.”
땅 아래, 지하보다 더 깊은 곳.
그곳을 가리킨 것이었다.
*
원장님이 부탁한 내가 할 일은 명확했다.
자신이 검은 용을 몰아낼 때까지 일루미나티의 ‘악마’들을 상대하라고.
일루미나티는 전 세계에 비밀 지부가 있었으나 그 근본은 검은 용과 그를 따르는 악마들이었다. 본거지를 찾았으니 잔가지를 칠 필요 없이 뿌리만을 잘라 내면 되었다.
“악마.”
실행은 불과 이틀 뒤다.
그러나 이상하게 무섭거나 긴장되지 않았다.
오히려 속이 타들어 가는 듯했고, 사막을 며칠 동안 헤맨 듯 심한 갈증이 느껴졌다. 십자가 목걸이를 목에 맨 난 그들의 죽음을 떠올렸다. 이런 감정, 이런 느낌은 처음이다. 복수라는 것, 앙갚음을 하는 것. 애끓는 갈증과도 같았다. 두려움보다 당장 해소하지 않으면 터질 것 같은 분노만이 머릿속을 맴도는 것 같다.
냉정해지려고 했다.
생각해 보면 난 김정호 신부님과 그다지 엮인 게 없다.
그의 복수를 할 만큼 유대가 깊었었나?
아니다.
사실 내 인생이 원래 그렇다.
인간관계.
올리비아? 사타리언 부인? 내 ‘가족’들?
아니면.
그럴 리는 절대 없겠지만 원장님?
그들이 죽어도 지금처럼 복수심에 불타오를까?
하지만 그 유대가 어찌 되었든.
빌어먹을.
당장 김정호 신부님을 죽인 악마의 목구멍에 십자가 목걸이를 처박아 주고 싶었다.
냐앙~
늦은 새벽까지 잠들지 못할 때, 어디선가 나타난 검은 고양이가 내 배에 올라탔다.
야옹이는 밤하늘 같은 눈으로 날 바라보며 눈을 끔벅거렸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니 기분 좋은지 골골골 소리를 냈다. 이 녀석, 평소엔 무시하더니 이럴 때 애교를 피우네.
“복잡하게 생각할 일이 아니야.”
복수의 감정에 사로잡힌다고 해서 그게 뭐 어쩌라는 건가.
에라, 빌어먹을. 난 상당히 충동적이고 다혈질이었다.
원체 그런 놈이 조금 심각해졌다고 해서 지금 느끼는 감정을 애써 무시하며 냉정해지려고 하니 머리만 아파질 뿐이다. 지금부터 스스로 나 자신을 높게 쳐 주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난 냉정한 쿨 가이가 아니다. 쫌생이다. 그리 생각하니 답답하던 마음이 상쾌해졌다. 그래, 쳐 죽이면 되는 것이다. 김정호 신부님을 죽인 악마를 찾아 무참히, 아주 무참히 쳐 죽이면 되는 거야.
*
마인의 층에 사는 악마들은 한때 마계라 불리던 거대한 차원의 악마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별을 멸망시킬 힘을 지니고 있었으나 오랫동안 탑에 봉인되어 서로 싸움을 거듭하였고, 다른 이의 생명을 잡아먹음으로써 힘을 얻는 마인들은 유일하게 같은 동족의 생명은 탐하지 못해 결국 그들은 파멸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멸종의 앞에서 하나의 악마가 나타나니, 검은 뿔을 가진 악마는 스스로 파리대왕의 왕좌를 이었다고 말하며 마인들을 이끌고자 했다. 그의 힘은 정말 사악한 마왕과도 같이 강하여 수없이 되풀이된 근족 살해로 약해진 마인들을 압도하여 이내 마인들의 왕이 되었다.
그러나 그의 기묘한 힘은 본래의 힘이 아니라 우연히 주운 운명의 톱니바퀴 덕이었다.
톱니바퀴를 가진 그는 비틀린 운명을 지니게 되어 멸종으로 향하던 마인들을 이끌고 솔로몬의 탑의 봉인을 부수려고 했다. 그러나 결국 600층의 벽조차 넘지 못하니 마인들의 왕은 멸종되어 가는 악마들의 초라한 왕으로 남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절망의 늪에서 비루한 왕좌를 지키며 소멸만을 기다리던 그의 앞에 누군가가 나타나 그에게 속삭이니, 검은 날개를 가진 자가 방법을 알려 줬다. 그로 인해 그와 몇몇 마인은 탑의 봉인에서 해방되어 바깥으로 나오게 되었고, 지금도 호시탐탐 봉인의 탑에 갇힌 동족들을 증오하는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자 기회를 엿보고 있다.
무수히 넘쳐나는 생명의 탐식, 무한히 차려진 만찬을 기다리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