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화 악마 (5)
다정은 지금까지 수많은 위기를 넘겼다.
하지만 정작 그 위기는 완전한 위기가 아니었다.
그가 알지 못하는 깊은 곳에 도사리는, 태초의 이전부터 유구하게 연결된 영혼의 흔적, 그 깊은 아래의 아래. 스스로도 깨닫지 못할 장막 속에 가려진 무언가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는 심지어 심장이 완전히 정지되어 죽음의 문턱을 지나고 온몸의 뼈가 으스러져 장기가 잘게 찢어지는 등 분명 자신이 죽는다는 감각을 느끼는 와중에도 동시에 모순적인 감각 또한 같이 느끼곤 했다.
자신은 죽을 리가 없다.
자신은 절대 죽을 리가 없다.
물론 다정은 제대로 인지하지 못한다.
자신조차 모르는 감춰진 감각이었기 때문이다.
그 모순의 격차는 다정의 영혼과 그 이전의 무언가에 대한 거리감이었다.
인간에 불과한 다정의 영혼은 죽음을 인지해도, 그 이전의 무언가는 소멸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리하여 다정의 모든 위기들은 사실 위장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어차피 죽지 않음을 알기에.
그러나 지금, 그는 파리대왕의 권능으로 인하여 부패와 약화를 거듭하며 인간의 영혼과 육체는 썩어 문드러져 다정은 '인간'의 것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결국 그에게 남은 건 그의 미약한 영혼으로 감춰진, 태초 이전에 새겨진 ‘그것’뿐이다. 인간의 이성, 힘, 영혼 또한 다정이 지금까지 얻은 모든 힘들조차 ‘그것’을 속박하는 보이지 않는 쇠사슬에 지나지 않았다. 이제 그 모든 쇠사슬이 일시적으로 사라진 지금, ‘그것’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검은 뿔의 악마, 솔로몬의 탑의 최정상 운명의 세 여신으로 향하는 입구인 데우스 엑스 마키나의 ‘톱니바퀴’를 소유한 그는 스스로 지옥의 왕인 파리대왕의 왕좌를 이었다고 떠벌리는 거짓된 마왕이었다. 정작 파리대왕의 사생아에 지나지 않는 그의 힘은 신들조차 두려워 마땅했던 마신의 아득한 힘에 비하면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비록 꾸며 낸 힘이라고 할지라도 운명의 톱니바퀴가 그에게 있으니, 능히 부패와 약화의 힘이 그의 손에 존재했다. 그는 제힘으로 운명을 벗어나고자 했다. 저주받을 솔로몬에 의해 갇힌 마인들의 구원자가 되어 우주를 자신의 사냥터로 삼고자 했다. 그러나 그는 제가 믿던 하찮은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존재를 불러내고 말았다.
“이럴 리가 없다.”
검은 짐승,
짐승의 입에 물린 건 자신의 팔과 다리.
“난 마인들의 왕, 악마들의… 왕.”
애처롭게 하나 남은 팔을 뻗어 보지만 짐승은 이미 신체를 삼킨 후였다.
검은 뿔의 악마는 부패와 약화의 저주를 퍼부었다. 만물이 썩는 힘이다. 드넓은 산림은 순식간에 모래의 사막으로 만들 수 있으며, 찬란한 문명을 잊히게 하고 신의 날개마저 떨어트릴 힘이었다. 그러나 검은 짐승에겐 통용되지 않았다. 그에 검은 뿔의 악마는 절망과 더불어 더없는 기묘함을 느꼈다.
분명 보고 있음에도, 저건 없는 거라고 느껴져.
악마는 지금까지 두려움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악의에 태어난 악마이기에, 검은 날개를 가진 이무기에게도 의연히 고개를 추켜들었었다.
그러나 지금 그는 막연한 공포만을 느낀다.
“나는 마계 왕의 후손… 크헉!”
감지할 수 없었다. 인지할 수 없었다. 검은 짐승의 이빨은 마치 처음부터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머리에 박혀 있었고, 자신은 짐승의 입에 물린 채 검붉은 피를 토해 내고 있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생각했다. 어찌 악마인 내가 맹수에게 잡아먹히는 가련하고 작은 짐승처럼 나약하게 느껴지는가? 어찌 마계의 왕을 자처하던 내가 이 부조리함을 당연시 여기는가? 놈은 무엇인가? 신, 아니다. 그 이상의, 아득히 초월한 존재.
“솔… 로몬.”
그의 머리는 짐승의 이빨에 의해 잘려 나갔다.
그러므로 부패와 약화의 권능이 사라졌고, 검은 짐승의 쇠사슬은 온전히 돌아왔다.
짐승은 점점 모습이 변화되어 마침내 인간이 되었다.
*
“흐음.”
난 머리를 긁적이며 내 몸을 내려다봤다.
알몸이다. 새하얀 몸, 놈이 새긴 엑스 X 표식도 없었다.
아랫도리가 허전한 게 영 기분이 나쁘다. 난 얼른 턱시도를 주워 입었다.
젠장, 어쩌다가 뜯겨나갔는진 몰라도 턱시도에 자가 복구 기능이 있어서 다행이다.
“살았니?”
내 앞엔 머리가 잘려 나간 검은 뿔의 악마가 있었다.
정말 미친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머리통만 남았는데도 눈을 껌뻑이며 살아 있다니.
난 미간을 좁히며 생각해 봤다. 그래서, 누가 저 꼴로 만든 건데?
망할 녀석이 기이한 힘을 써서 날 공격했을 때만 해도 큰일 나는 줄 알았다. 온몸의 마력이 텅텅 비어 정말 마물원에서 일하기 전의 평범했던 인간으로 돌아가는 경험은, 하루아침에 백만장자가 길바닥에 거지가 되는 것처럼 끔찍했다. 솔직히 이때만 해도 난 죽었구나 싶었다. 그러나 놈이 신부님을 죽인 범인이라는 걸 깨닫고 이전까지 느껴 본 적 없었던 막대한 짜증을 느꼈고, 텅 빈 내 안에 무언가 이상한 게 기어 들어온다 싶더니 그 이후부터 기억이 잘 나지 않는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머리통만 남은 놈이 있다.
이 똥 누고 덜 닦은 기분, 시험지를 받자마자 만점을 받은 것 같은, 내가 하지도 않았는데 저절로 모든 일이 끝나 버린 상황은 확실히 답을 찾지 않으면 답답해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야옹아, 네가 그랬니?”
난 야옹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분명 마지막에 녀석의 목소리가 들린 것까진 기억한다.
야옹.
야옹이는 내 질문에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야옹, 하며 울었는데 왠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원래 야앙~ 하면서 우는데, 저건 마치 일부러 모르는 척하려고 울음소리를 내는 것같이 들렸다.
“아깐 말만 잘하더니. 개 같은 새끼.”
그래도 고양이니 최고의 모욕은 개 같다는 거겠지.
난 야옹이를 욕하며 기지개를 폈다. 에이, 찝찝하긴 하지만 나중에 알아보도록 하고.
“그럼, 이제.”
난 아직까지 살아 있는, 머리통만 남은 검은 뿔의 악마에게 다가갔다.
곧 놈의 숨이 끊어지리란 걸 알았지만 이대로 곱게 보내 주긴 싫었다.
“나만의 시간이다.”
난 턱시도의 안주머니에서 십자가 목걸이를 꺼내었다.
그리고 그의 뿔을 쥐어 잡고, 있는 힘을 다해 뜯어 냈다. 뿔은 이마에 박혀 있어, 뽑자 움푹 파인 상처가 남았다. 난 그 상처에 십자가 목걸이를 아주 천천히 밀어 넣었다. 살점을 지나, 두개골의 딱딱한 감촉이 느껴졌으나 역겨움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솔직히 말해서 웃음이 나왔다. 이상한 생각이 스쳤기 때문이다. 사후세계는 ‘아직까진’ 믿진 않지만 만약 김정호 신부님의 혼이 있다면 그는 천국에서 이 모습을 내려다보며 뭐라고 생각할까? 인자한 태도로 너무 잔인하다고 날 탓할까, 아니면 괘씸한 녀석을 혼내 줬다고 기뻐하다가 천사한테 뒤통수를 맞을까?
난 손에 묻은 피를 털고 일어났다. 검은 뿔의 악마는 이제 검은 뿔 대신에 십자가가 이마에 박힌 채 죽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악에 찬 눈빛에 섬뜩함을 느꼈으나 대갈통만 남은 녀석이 무얼 어찌할까. 메타 소드를 들었다. 아무런 힘을 담지 않는 철검이다. 빌어먹게도 지금 난 겉모습은 멀쩡해도 기혈이 뒤틀린 상태다. 그러나 이 볼품없는 철검이라고 하더라도 놈을 죽이는 데엔 충분할 것이다.
콰득!
검을 내려 꽃았다.
머리통에 깊게 박아 넣자 놈은 검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다만, 기묘하게도 내가 죽였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마지막에 그를 죽인 건 내가 아니야.
놈은… 이해할 수 없지만 자살한 건가?
내게 목숨을 뺏긴다는 게 굴욕적으로 느껴졌나? 그래서 자결을 택한 건가?
그때였다.
치솟은 검은 연기, 하늘을 감싸더니 무언가로 변하기 시작했다.
“시벌.”
난 검붉은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문을 보며 엿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
죽음.
죽어 가는 그.
절망과 두려움이 남았다.
검은 짐승에게 잡아먹히는 자신은 약자였다.
그러나 검은 짐승이 사라지고,
약하디약한 인간이 나타나자 두려움은 곧 분노로 치환되었다.
그를 저주한다. 두려워하던 검은 짐승은 존재하지 않으니 그에 대한 원망이 폭발했다. 악마는 자신의 뿔을 자르고 철 조각을 이마에 박아 넣는 놈에게 분노하며 악의를 내뿜었다. 하지만 자신에게 남은 건 톱니바퀴밖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복수를 원했다. 운명의 톱니바퀴를 돌리면 자신은 살아날 수 있다. 하지만 또다시 검은 짐승이 나타난다면 저항할 수 없이 먹힐 게 분명하니, 검은 뿔의 악마는 되돌릴 수 없는 거대한 상처를 남기고자 했다.
넘실거리는 악의로서,
그의 복수의 대상은 지구의 모든 생명에게 향했다.
검은 뿔의 악마는 인간이 검을 제 두개골에 박아 넣는 동안 입을 벌려 어금니에 박아 놓은 톱니바퀴를 깨물고, 혀를 사용하여 시계방향으로 돌렸다. 무수한 운명의 조각 중 단 하나의 톱니바퀴에 지나지 않으나 강력한 악마의 혼을 매개체로 마침내 인과율이 작동하기 시작했다.
그 순간, 그의 몸은 검은 연기가 되어 하늘로 치솟았다.
톱니바퀴가 그에게 선사한 건 그의 소망.
이내 하늘에 악마들이 조각된 거대한 문이 나타나니.
그건 솔로몬의 탑과 연결된 마계 지옥의 입구였다.
강렬한 불길함을 내뿜으며 문은 서서히 열리기 시작했다.
*
세상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어차피 악마들의 둥지, 만들어진 세계였다.
난 하늘 위에 나타난 꺼림칙한 문을 무시한 채 재빨리 들어왔던 입구를 향해 뛰어갔다. 간신히 내가 딛고 있던 대지가 무너지기 전에 문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지옥의 문은 사라진 후였다.
“원장님은 괜찮겠지.”
같이 들어오긴 했어도 어차피 원장님은 저곳에 없었으니까.
난 골렘을 타고 지상으로 향했다. 마물원으로 돌아가 느긋하게 커피나 마시면서 기다리고 있으면 곧 검은 용을 상대하고 온 원장님이 내가 느끼고 있는 의문들에 답해 주겠지. 악마들의 둥지의 하늘에 나타난 거대한 문, 사용하지 말라 했던 야옹이의 힘에 대한 부작용. 어쩌면 세이렌과 원장님의 마법으로 기억하지 못하던 부분을 떠올리게 될지도 몰라.
얼마 지나지 않아 골렘이 지상으로 나왔다. 난 입에 고인 매캐한 흙먼지를 뱉어 내며 문을 열고 나왔다. 가장 먼저 한 건 지구의 푸른 하늘이 그리워 위를 올려다보는 것.
“어머, 시벌.”
내 머리 위, 하늘엔 뭉게구름 대신 문이 있었다.
주변이 그림자로 뒤덮여 어두웠던 건 구름이 태양을 가렸기 때문이 아니었다.
거대한 문, 저 깊은 지하의 악마 둥지에서 보았던 문과 같다. 하늘을 가득 메운 거대한 문은 그림자만으로도 서울 도시가 모두 가려졌다. 어찌해야 할지 몰라 멍하니 바라볼 때, 문틈이 서서히 열리기 시작한다. 그와 동시에 심장이 옥죄이며 머리가 지끈거렸다. 단지 육체가 느끼는 고통이 아니다. 이제껏 느껴 보지 못했던 강렬한 육감의 경고, 위험의 수준이 달라. 난 확실히 느꼈다. 저 문이 열리면 세계는 멸망할 거야.
“원장님…….”
내 본능과 이성 모두 원장님을 찾았다.
이 사태는 원장님이 아니라면 막을 수가 없다.
그러나 이미 늦어 버린 것 같다.
통신기를 작동시키기 전에, 문은 점점 열리고 있다.
이내 문 너머에 도사리는 어떤 것의 형체를 알아차렸을 때였다.
[음하하!]
갑자기 내 몸에서부터 무언가가 쑥 빠져나왔다.
깜짝 놀라 쳐다보니 나무의 줄기였다.
줄기는 콘크리트 바닥에 뿌리를 내리더니 순식간에 거대한 나무로 자라났다. 어찌나 큰지 심지어 하늘에 나타난 문과 맞닿을 만큼 커졌다. 이내 나무는 덩굴과 가지로 반쯤 열렸던 문을 휘감았다. 난 덩굴로 문을 묶는 나무를 바라보며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알고는 있어.
저 나무가 뭔지.
[이 몸, 등장!]
단비였다.
세계의 끝에서 아홉 세계의 조각을 흡수하고 오랫동안 잠들어 있던 녀석. 세계수라곤 했지만 내게 보여 준 모습은 황금 털의 원숭이에 지나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게 뭐야, 불길한 문을 덩굴로 감싼 거대한 나무의 모습은 ‘세계의 나무’라 칭하기에 부족할 것 없어 보였다.
세상에, 진짜였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