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3화. 천계 (2)
엄청 큰 연꽃의 위에 그들이 서 있었다.
생김새는 인간과 다를 바 없었으나 느껴지는 기운은 달랐다. 대단히 신비로운 느낌이라 난 무례임을 아는데도 불구하고 멍하니 신선들을 바라보며 입맛을 다셨다. 신선이란 존재에게 이런 생각을 가지는 건 불경하기 짝이 없겠지만 기묘하게도 그들은 정말 맛있어 보였다. 탐스럽게 열린 복숭아를 보듯이 말이다. 하얀 백의를 입고 연꽃 위에 선 신선들은 저마다 학과 거북이 따위를 옆에 두고 긴 수염을 매만지며 날 내려다봤다. 난 신선들이 분명 살아 숨 쉬는 존재인데도 불구하고 마치 자연의 어떤 풍경들을 보는 것같이 느껴졌다. 신선의 기운, 조화롭고 자연스러우며 맛있는 것. 왜 이런 생각이 드는지 당황스럽지만 이해는 갔다. 난 더 이상 인간이 아니다. 내 안에 아주 끔찍한 녀석들도 몇 마리 있는데, 아마 놈들이 신선들을 잡아먹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마귀들처럼.
백두금왕이 신선들에게 인사하며 날 소개했고, 난 군침을 닦으며 머쓱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안녕하세요?”
신선들은 가만히 날 내려다봤다. 난 괜히 말도 안 되게 식탐이 생겨 버린 게 부끄러워 눈을 마주치지 못했다. 그들은 천천히 연꽃 위에서 학과 거북이를 타고 내려와, 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갑자기 무슨 말들을 속사포처럼 내뱉기 시작했다. 수십 명의 신선들이 날 둘러선 채 저마다 할 말을 내뱉으니 은근히 짜증이 날 정도였다.
“조화에 어긋난 존재이나 또한 조화에 깃든 존재이니, 허어!”
“통달의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더라도 역시 만물 이치를 깨닫기엔 불가하였던가, 원시천존이시여.”
“하지만 그대가 천계에 온 이유 또한 어긋난 운명의 이끌림이라면.”
“마귀 놈들이 악기를 얻어 굴기하니 어긋남에게 도움을 요청하여도 무어라 하리?”
신선들은 저마다 재잘거리더니, 갑자기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한마디를 내뱉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들 좀 도와주겠나?”
“그래서 말인데, 우리들 좀 도와주겠나?”
“그래서 말인데…….”
난 신선들의 요청에 어깨를 으쓱했다. 쉬운 전개였다. 갑자기 등장한 마귀들에게 잡아먹힐 것 같은데 자기들은 어떤 힘도 없으니 내게 도움을 요청한 것이다. 그들이 신선이며 조금은 신비로운 기운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난 냉큼 도움을 줄 생각은 없었다. 물론 난 부탁을 들어줄 생각이다. 단, 확실한 계약 관계를 유지하면서 말이다.
“보상은요?”
천계의 생리가 어떤진 모르겠다. 당황하는 신선들의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저들이 요청하면 누구라도 대부분 알아서 잘 들어준 모양이었다. 요괴들 또한 요선이 되는 걸 큰 기쁨으로 여기니 그들을 위해 일하는 것 자체가 천계에선 명예로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난 다르다. 기브 앤 테이크. 주는 게 있으면 오는 게 있어야지.
“마귀들이 득세하면 파멸의 기는 네가 사는 세계마저 물들이…….”
신선들이 설득하려고 할 때였다. 백두금왕이 껄껄 웃으며 신선들에게 큰 목소리로 외쳤다.
“하하하! 노로하선님, 미안하지만 이 녀석에겐 천계의 명예 따윈 안 통할 거요.”
난 백두금왕을 쳐다보며 따라 웃곤, 신선들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신선들은 분주해졌다. 백두금왕에게 조력자가 온다는 이야기는 들은 주제에 설마 아무런 보상을 주지 않을 생각이었다니. 무언가 줄 만한 걸 찾아 분주하게 흩어진 신선들이 다시 모인 건 한 시간이나 지난 후였다. 그동안 연꽃 위에(의외로 푹신했다) 누워 선잠을 자던 난 신선들이 들고 온 무언가에 깜짝 놀라 벌떡 일어났다.
쓰읍.
보자마자 침샘이 폭발하여 추잡하게 입에 고인 침을 헐레벌떡 삼켰다. 신선들이 들고 온 건 그저 보잘것없는 과일 한 개, 탐스럽게 익은 복숭아였다. 그러나 난 복숭아의 냄새가 내 코에 흘러들어온 순간부터 미칠 것 같은 식욕에 휩싸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김치찌개도 저 복숭아 앞에선 음식물 쓰레기에 지나지 않다고 느낄 정도였다. 겪어 보지 못한 강렬한 식욕에 당황하면서도 저 복숭아가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이건… 무엇입니까?”
한 걸음에 신선들에게 다가갔지만 애써 태연한 척하며 물어봤다.
신선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냉큼 복숭아를 내 눈앞에서 흔들어 보이며 대답했다.
“반도원(蟠桃園)의 복숭아다.”
신선들이 말을 시작했다. 난 그들의 설명을 들으며 저 복숭아가 과일 따위가 아님을 깨달았다. 신선들이 말하길, 이 복숭아는 반도원의 복숭아 중에서도 9천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 귀중한 복숭아로, 구령태묘귀산금모(九靈太妙龜山金母) 혹은 서왕모라 불리는 여신이 떠나는 바람에 이젠 단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고 했다. 내가 이토록 식욕이 폭발한 이유가 있었다. 9천 년에 한 번 열리며, 여신이 키우는 복숭아니 당연했다. 하지만 동시에 단지 먹을 걸 앞에서 이리 쉽게 넘어가는 건 꼴사납다고도 생각되었다. 달랑 복숭아 한 개인데. 젠장, 근데 왜 마음은 당장 일을 해치우겠다고 외치라고 하는 걸까. 저 탐스러운 복숭아를 빨리 맛보고 싶어.
갈팡질팡하며 고민할 때, 백두금왕이 내게 말했다.
“9천 년에 한 번 열리는 반도蟠桃는 인간이 먹으면 태양만큼 오래 산다고 한다. 뭐, 신선의 혀는 믿으면 안 되겠지만 내가 알기론 ‘빛나는 자’가 반도를 한 개를 먹으니 수명이 천 년이 늘었고, 열 개를 먹으니 영생을 얻었다고들 하더구나.”
빛나는 자, 일찍이 마귀들이 나타났을 때 천계를 구한 존재. 그가 인간이었나? 아무튼 백두금왕의 말에 의하면 이 한 알의 복숭아를 섭취하면 수명이 천 년이 늘어난다는 것이다. 선뜻 믿기 어려운 얘기지만 신선과 천계도 존재하는데 뭐, 아니면 어때. 어쨌든 몸에 엄청 좋다는 거잖아.
난 냉큼 손을 뻗어 복숭아를 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복숭아를 든 신선이 홱 손을 돌려 내 손길을 피했다.
“그럼 대신 싸워 주는 건가?”
“오부 코스!”
신선은 약 올리듯 몇 번이나 손을 피하다가 내가 알았다고 공손하게 말하고 나서야 얌전히 복숭아를 넘겨줬다. 난 손에 쥔 복숭아를 바라봤다. 손이 바들바들 떨린다. 아껴먹을까 했다. 하지만 참을 수가 없어, 한입에 삼켰다. 껍질과 씨마저 한입에.
그 순간, 난 정신을 잃고 말았다. 아득해지는 정신을 부여잡으려고 해도 잡을 수가 없었다. 점점 희미해지는 시야 속에서 난 생각했다. 요즘따라 개복치처럼 많이 기절했지만, 설마 너무 맛있어서 기절할 줄은 몰랐어.
*
눈을 뜨자 구름 위였다. 백두금왕의 넓은 등짝이 보인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황무지가 된 천계가 보였다. 기절한 날 데리고 어디론가 가는 듯 보였다. 전엔 백두금왕의 담배 연기 구름을 타지 못했으나, 서왕모의 복숭아 덕인지 난 구름 위에 탈 수 있었다. 그 외에도 뭔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특별히 느껴지는 건 없었다. 정말 천년의 수명을 얻은 건가?
어쨌든 복숭아를 먹었으니 마귀들을 해치워 줘야지.
“어디로 가죠?”
내 물음에 백두금왕이 대답했다.
천계를 위협하는 마귀들, 팔八마왕에 대하여.
*
천계의 마귀, 마왕들에 대하여 백두금왕에게 이야기를 모두 들었다.
“허어.”
말로만 들으면 뭐 그런 새끼들이 다 있는가 싶다. 신선들을 잡아먹는 마왕이라더니, 무지막지하잖아. 죽음을 부르는 바람을 다뤄? 한입에 10만 명의 병사를 삼킬 수 있어? 거참. 더 무지막지한 사실은 놈들은 ‘죽이지 못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백두금왕이 말하길, 마왕은 죽이지 못한단다. 요괴들의 괴이와 비슷했다. 전에 상대했던 도깨비 놈처럼 특정한 방법이 아닌 이상 상대하지도 못한다. 다행히 그들은 이미 누군가에 의해 금강탑, 솔로몬의 탑에 한 번 봉인된 적이 있으며, 대전이의 틈으로 풀려난 마왕들은 ‘굴복’하게 만든다면, 솔로몬의 탑으로 다시 봉인될 거라고 했다.
“죽일 수 없다면 어떻게 굴복시킨답니까?”
문제는 놈들이 쉬이 굴복당할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죽지도 않는 존재에다가 쥐어 팬다고 해서 벌벌 떨며 솔로몬의 탑에 봉인될 놈들은 아닌 것 같은데. 내 질문에 백두금왕이 담배 연기를 뿜으며 대답했다.
“마왕들은 각기 가진 재주와 도술에 있어서, 자신이 제일이라고 자부하는 놈들이다.”
그가 말한다.
“그러니 그 자부심을 뭉개면 되는 일이다.”
백두금왕의 말은 이러했다.
마왕들은 저마다 특이한 재주를 지니고 있는데 그 재주로 인해 신선들을 잡아먹는 마왕이 되었다고 했다. 그러니 놈들의 재주에 대한 오만함을 꺾으면 놈들은 평범한 요괴가 되어 솔로몬의 탑에 봉인될 거라고 했다. 하지만 방법이 괴상하고 난해했다. 예를 들어 황풍괴라는 마왕을 굴복시키려면 단지 쥐어패는 게 아니라 똑같은 힘과 맞서거나, 그 힘을 아무렇지 않게 받아내야 한다고 했다.
“너라면 가능하다.”
내 걱정과 달리 백두금왕은 날 믿었다.
“네 안에 느껴지는 수많은 기운, 너라면 가능해.”
*
백두금왕은 날 황풍령(黃風嶺)이라는 사막에 내려주고 자기는 다른 할 일이 있다며 떠나 버렸다. 황풍령이란 곳은 천계가 아직 황무지가 되기 전에도 마귀들이 득실거리던 사막으로, 황풍대왕이라는 마왕이 다스리는 곳이었다. 내가 할 일은 이곳에서 황풍대왕, 황풍괴를 잡아 족쳐서 솔로몬의 탑으로 봉인시키는 것이다.
“흐음.”
난 휘몰아치는 모래폭풍을 지켜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사막 곳곳에 크고 작은 기운들이 느껴지지만 가장 큰 기운은 모래사막 깊숙한 곳에 있었다. 백두금왕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론 놈은 무시무시한 바람을 다루니 함부로 놈을 찾아 지하에 기어 들어가다간 생매장을 당할 수도 있었다. 그럼 놈을 불러내야 하는데.
난 눈을 뜰 수 없이 강하게 몰아치는 모래폭풍 사이를 걸어들어갔다.
그리곤 놈의 기운이 느껴지는 곳에서 멈춰서, 땅 아래를 보며 소리쳤다.
“이놈아! 네가 황풍대왕이더냐? 어디 나와 싸워 보자꾸나!”
내가 살던 지구에서나 통용될 욕설들은 놈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다.
그래서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 했다고 난 놈이 알아듣기 쉬운 욕들로 놈을 도발했다.
“겁에 질린 쥐새끼, 제 굴에 숨어 벌벌 떨고 있구나. 나와라, 이놈!”
모래바람이 따갑고 불쾌한데, 놈은 아무리 도발해도 지하에 숨어 꼼짝하지 않았다.
젠장, 백두금왕이 황풍괴는 마왕이나 소심한 요괴라서 마주치는 것부터 문제라더니.
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봤다. 놈을 꺼낼 방법은 많다. 하지만 괜히 겁에 질리게 해서 도망치게 만든다면 귀찮아지니, 놈이 스스로 나오게 하는 방법을 사용해야겠다.
사막에 비가 내리면, 아래에 빗물이 고인다. 저 깊은 땅굴에 숨어 있는 놈은 물에 몸이 젖는 게 익숙하지 않겠지. 이 힘은 근래에 들어 간신히 불러낼 수 있게 된 힘이다. 정확히는 빌린다기보다 불러낸다는 것과 가깝겠지.
“착한 녀석.”
난 하늘에 몰려드는 먹구름을 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한 번도 그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어쩌면 녀석은 날 친구라고 여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이렇게 부른다고 해서 반가워하며 후다닥 와 주진 않겠지. 첫 만남엔 날 집어삼키려 하기에 나쁜 녀석인 줄 알았지만, 알면 알수록 착한 녀석이란 말이야.
“바루나.”
이내 먹구름에 언뜻 거대한 물고기의 형상이 비추어지더니, 모래폭풍만이 휘몰아치던 황량한 사막에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분명 이 황풍령에선 처음 있는 일일 것이다.
모래가 축축이 젖어드나 빗물을 흡수하지 못하고 아래로 고이게 되니, 곧 놈이 머무는 땅굴까지 빗물이 스며든다. 난 땅 아래, 놈이 발버둥 치는 기운을 느끼며 바루나에게 말했다. 고맙다고, 그러자 청동 잉어는 사라졌고 먹구름은 순식간에 흩어졌다.
[크… 카악! 누구냐? 어, 어떤 놈이야?]
내 발아래가 들썩거린다. 내가 뒤로 물러나자마자 웬 황금 털을 가진 거대한 쥐 새끼 한 마리가 튀어나와 씩씩거렸다. 놈이 황풍대왕, 황풍괴. 신선을 잡아먹는 마왕이로구나.
“별거 없네.”
신선들마저 두려움에 떨게 했던 마왕이라고 하더라도 난 전혀 무섭지 않았다.
오히려 기이한 설렘마저 느껴졌다. 분노한 놈이 날 발견하곤, 제가 가진 무시무시한 도술을 부릴 때까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