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4화 천계 (3)
황풍괴는 사납게 울며 날 노려봤지만, 난 놈의 눈빛에서 겁을 집어먹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놈이 마왕 중 가장 소심하고 겁 많은 놈이라고 하더라도 자기보다 하찮은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끼진 않는다.
황금 털이 난 거대한 쥐 새끼 앞에 난 그야말로 고양이와 다름없었다. 이게 아마 ‘존재력의 차이’겠지. 나 또한 서서히 깨닫고 있는 부분이다. 예전엔 내가 아득한 존재에게서 느꼈던 그 격렬한 격차를 이젠 적이 내게서 느낀다. 팔대 마왕이나, 신선을 잡아먹는 마귀조차 내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걸 말이다.
[이… 이놈!]
겁 많은 개가 함부로 짖는다고, 놈은 날 공격하기 시작했다. 듣기로는 죽음을 부르는 바람, 삼매신풍을 다룬다더니 과연 놈의 주변에 막대한 바람이 휘몰아치며 모래가 쓸려 나가더니 이내 강력한 토네이도가 되어 날 덮쳐 왔다. 그 자체로도 강력한데, 바람에는 사멸死滅의 기운까지 느껴졌다. 어딘가 익숙한 낫을 든 사신의 기운과 흡사해서 금방 알아볼 수 있었다.
[5만 천병이 내 삼매신풍에 살이 썩어 들어가니 어디 네놈이 당해 낼쏘냐?]
찍찍찍-!
황풍괴는 쥐 새끼가 찍찍거리듯 웃으며 날 조롱했다. 삼매신풍, 막강한 모래 폭풍은 모래사막을 뒤집으며 큰 위력을 발휘했다. 그러나 난 폭풍이 날 강타하기 전까지도 태연히 서 있기만 했다.
대처할 방법은 많으나, 백두금왕의 조언을 잊지 않았다. 팔대 마왕은 요괴의 괴이와 비슷하여 죽일 수 없으니 탑에 봉인하기 위해선 그들의 재주를 꺾어야 한다.
“그렇다면.”
휘이이잉-!
바람이 날 덮칠 때, 난 마음껏 두 팔을 벌렸다.
내 몸은 순식간에 폭풍에 휩쓸려 공중으로 떠올랐다. 무수한 모래 알갱이가 총을 쏘는 것처럼 날 때린다. 바람에 깃든 죽음이 내 목을 옥죄 온다. 사막을 뒤집는 강풍이 칼날이 되어 내 몸을 갈기갈기 찢어 버리려고 한다. 그렇게 점점 폭풍의 중심에 들어갈 때, 난 힘을 발휘했다.
스위프트덕, 녀석의 힘은 바람을 밟는다.
아무리 강풍일지라고 하더라도 녀석들은 바람을 제 발아래로 둔다.
풍조도보의 경공은 그러한 특성을 극대화한 무공, 단순한 경공이 아닌 바람을 밟아 달리는 신묘한 기술이다. 언뜻 다리가 간질거리더니, 발을 내려다보니 스위프트덕과 같은 거대하고 노란 오리발이 생겨났다. 물속을 헤엄치는 게 아닌, 바람을 헤엄치는 스위프트덕의 ‘장치’이다.
난 폭풍에 휩쓸려 몸을 뒹굴다가 아무렇지 않게 벌떡 일어났다. 거목마저 뽑혀 나갈 정도의 강풍은 더 이상 내게 해를 끼치지 못했다. 바람은 내 아래에 있었다. 내가 딛고, 내가 서 있는 곳이 바람이다. 밀려오는 해일에 서핑보드를 타듯 위태로웠지만 위험하진 않았다. 난 강풍을 파도 삼아 강풍을 쏘아 대는 놈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말도 안 돼! 오… 오지 마!]
놈은 더더욱 강력한 바람을 내뿜었으나, 바람의 세기는 내게 큰 의미가 없었다.
다만 삼매신풍에 깃든 죽음의 기운도 강해졌는데, 그마저도 내 안에 존재하는 기운과 맞물려 어떤 해를 끼치지 못했다. 한 번 당한 기운에다가 이미 흡수한 힘이다. 놈이 나보다 아득하게 강력한 존재력을 지니지 않는 이상 통하지 않아 마땅히 버텨 낼 수 있었다.
찍찍찍!
성큼성큼 다가갈수록 놈은 쥐 수염을 바들바들 떨었다. 마침내 지척까지 도달하자 삼매신풍을 거두고 모래 구덩이를 파고 후다닥 지하로 숨으려고 하였는데, 난 한순간에 달려가 놈의 뒷덜미를 잡고 끌어올렸다.
찍!
저항하며 꼬리를 휘두르고, 크고 날카로운 앞니로 깨물지만 육체적인 힘은 내 발끝도 미치지 못했다. 난 담담히 놈의 뒷덜미를 잡고 지그시 누른 후, 겁에 질린 눈동자를 마주하며 고민했다. 죽음의 바람을 재주로 부리는 녀석이니 굴복시키려면 바람을 이용해야 할 텐데 내게 그런 힘은 없다.
“흐음.”
놈의 꼬리를 피하려다 고개를 추켜올렸는데, 문득 저 멀리 하늘에 닿을 만큼 웅장하고 지고하게 솟아난 산봉우리가 보였다.
황풍령의 사막이 끝나는 곳에 있는 산이었는데 보기만 해도 아득한 높이였다. 만약 저런 곳에서 떨어지기라도 한다면 엄청난 공포와, ‘바람’을 느낄 거야. 난 스위프트덕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렸다. 몸이 변화되는 수준까지 도달하자 난 인간이 아닌, 마치 녀석들처럼 털이 자라나고 부리와 튼튼한 발이 생겼다.
“쥐새끼야.”
황풍괴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목덜미를 꽉 쥔 후, 난 높은 산을 향해 발을 내디뎠다. 처음엔 천천히, 그리고 몸이 뜨거워지고 활력이 돌자 망설이지 않고 전속력으로 내달렸다.
휘잉이잉!
그때와 같았다.
아니, 그때보다 더 강렬했다.
그저 달리는 것뿐인데 바람이 찢겨 내 뒤로 흩어진다. 고막을 울리는 맹렬한 소리는 내가 내달리는 흔적이다. 시야 멀리 보였던 바위를 순식간에 스치고 지나간다. 무작정 달렸다. 달리는 것 하나를 삶의 목적으로 삼는 스위프트덕처럼. 난 마치 그때의 마물 경기장에 있는 듯했다. 내 곁에 힘껏 내달리는 ‘덕후’ 녀석이 있는 듯했다.
“내겐 황홀한 바람이 너에겐 두려움이 될 거야.”
그렇게 난 높은 산까지 뛰었다.
*
하루 밤낮을 달려 마침내 높은 산의 정상까지 도달하자, 내 사타구니는 그때처럼 피로 젖어 있었다. 오랜만이다. 마찰로 살점이 다 벗겨질 만큼 강하고, 오랫동안 달린 적은. 그때도 느꼈지만 상쾌하고 개운하여 머릿속 스트레스가 다 날아간 기분이 들었다. 뭐, 녀석에겐 아니겠지만.
“아직 멀었어.”
황풍괴는 기운이 다 빠져 눈이 금방이라도 죽을 것 같이 탁했지만 굴복하진 않았다. 상관없다. 애초에 내 목적은 단지 달리는 게 아니었다. 녀석에게 강렬한 바람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난 놈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몸을 꽉 껴안은 후, 산 아래 까마득한 절벽을 내려다봤다. 이곳까지 올라오는데 스위프트덕의 속력으로도 반나절이 걸렸다.
잘 몰라도 지구에서 가장 높은 산보다 더 높지 않을까. 천계라 그런지 정말 기이한 광경이었다. 산 정상 맞은편엔 절벽이 있었고, 그 아래는 일직선으로 떨어지는 구간이었다. 어디 하나 걸릴 데가 없으니 떨어지면 그대로 지면까지 낙하한다.
대체 몇 분이나 떨어지게 될까? 곤두박질치는 과정에서 느끼는 바람들은 확실히 ‘죽음의 바람’이겠지.
마왕은 죽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죽일 수는 있으나 사념이 있는 이상 계속 부활한다. 놈을 굴복하여 봉인하지 않으면 언젠가 다시 나타날 것이다.
절벽으로 다가갈수록 젖은 휴지처럼 축 처져 있던 놈이 발광하기 시작했다.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걸 무서워하는 건 날개가 없는 생물이라면 당연한 것이다. 다행히 녀석에게도 통용되는 두려움이었다.
[뭐 하는… 거야. 떠… 떨어트리려고?]
난 절벽의 끝에서, 난 놈의 겁에 질린 말에 히죽 웃었다.
“아니, 같이 떨어질 거야.”
삼매신풍, 막강한 강풍을 부리는 마귀다. 절벽으로 떨어트려도 재주를 부려 살아날지도 몰랐다. 그러니 꽉 잡고, 같이 떨어질 수밖에.
“얍.”
찍찍-!
놈을 꽉 붙잡고 짧은 기합과 함께 망설이지 않고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절대 죽지 않는다는 걸 아는 나조차도 고개를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득한 높이에 오금이 저려왔다.
엄청난 높이라 떨어지는 시간 또한 굉장히 길었다. 지면에 곤두박질쳐 몸이 박살 나는 걸 상상하기엔 충분한 시간, 죽음을 기다리는 시간이다.
떨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내 품에 있던 놈이 점점 사라지기 시작했다. 물리적으로 사라진 게 아닌, 마치 원래부터 환상이었던 것처럼 흩어져 없어졌다. 마지막으로 보여 준 표정을 보아하니 아마 ‘굴복’한 듯싶었다. 제가 가진 재주로도 날 해칠 수 없었고, 그 바람으로도 벗어날 수 없는 상황에 당도하니 굴복한 거겠지. 겁 많은 마귀라더니, 싱거운 녀석이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떨어져 보니 문제다.
아무래도 스위프트덕의 힘만으론 내 몸을 온전하게 보호하지 못할 것 같았다.
다행히 시간은 많았다. 난 아라크네의 거미줄을 뽑아 내 몸을 칭칭 감고 쏘아 내어 절벽에 붙인 후, 반동으로 절벽에 몸을 꼬라박기 전에 마츄와 스위프트덕의 힘으로 충격을 줄이고 무사히 지면에 안착했다. 스파이더맨도 울고 갈 멋진 액션이다.
“여긴 어디야?”
황풍괴를 없앤 건 좋았는데, 너무 멀리 와 버린 모양이다. 주변을 둘러보니 황무지로 변한 천계에서는 보기 힘든 녹림이 우거진 숲이었다. 그러나 풀 냄새와 꽃향기 대신 퀴퀴한 냄새만이 가득했다. 아무튼 천계에는 기분 나쁜 곳만 잔뜩 있는 것 같다.
“이제 남은 건 일곱인가.”
백두금왕이 내가 마왕을 죽이면 다음 마왕이 있는 곳을 알려 주겠다고 했으니, 난 잠자코 자리에 앉아 백두금왕을 기다렸다.
멍하니 앉아 마왕의 재주에 대해 생각해 볼 때였다. 어디선가 바람이 불어왔다. 기묘하게도 내 머리 위에서 아래를 향해 부는 바람이었다. 이상하게 생각해 고개를 들었을 때, 난 바람과 함께 기이한 힘이 내 안에 스며드는 걸 느꼈다.
“어라?”
힘이다.
무언가의 힘이다.
내게 깃들어, 날 강하게 만들 힘이다.
그러니 알 수 없었다.
황풍괴를 죽여서 이런 현상이 일어났음은 안다.
그런데 왜?
교감의 힘 덕분일까?
아니, 것보다 이건…….
난 문득 후지산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역괴를 죽인 후 내게 깃든 힘들은 교감의 힘에 의해서가 아니었다. 백두금왕은 마왕들이 요괴와 더없이 가까운 존재라고 하였다. 어쩌면 이 현상은 지천괴왕의 지위, 힘 덕분일지도 모르겠군.
마력이 충만해짐을 느낀다. 또한 무언가 뚜렷한 목적성도 깨달았다.
난 자리에서 일어나 스위프트덕의 힘을 이끌어 올렸다.
그리고 제자리에서 한 번 뛰었는데, 살짝 뛰었음에도 거목의 위를 구경할 수 있었다.
강해졌다. 마치 무중력이라도 된 듯 바람과 중력에 영향을 거의 받지 않았어.
기이했다. 어떻게 삼매신풍을 다루는 황풍괴를 봉인하였다고 하여 스위프트덕의 힘이 강력해졌을까? 고민하던 난 문득 그저 이 또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놈들이 요괴라면 이해가 간다. 괴이엔 어떠한 연관 관계나 법칙이 통용되지 않는다. 내가 스위프트덕의 힘으로 황풍괴를 처치했기에, 그러한 연관 하나만으로 ‘괴이’가 생겨났을지도 모른다.
“모든 마왕이 다 이렇다면…….”
게임으로 비유하자면…….
와우, 이거 완전 파츠 강화 구간인데?
*
기다리고 있자 백두금왕의 연기 구름이 날아왔다. 구름은 내 옆에 살포시 내려앉더니 갑자기 목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마침 독각시대왕이 지배하는 영역과 가까운 곳이구나. 타거라, 누각 앞까지 데려다 주마.]
백두금왕은 재밌는 재주도 있었다. 연기 구름을 통해 목소리를 전할 수도 있는 건가? 구름에 올라타자, 알아서 어디론가 날아가기 시작했다. 다음 마왕은 ‘독각시대왕’이라 불리는 마귀였다. 난 백두금왕에게 다시 한번 놈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님은 뭐 합니까?’
설명이 끝나자 난 넌지시 물어봤다.
신선들의 위협이 되는 마왕들이 설치는데 백두금왕은 어디서 무얼 하는 거지?
[난 다른 상대할 자가 있다.]
“마왕 말입니까?”
[아니, 신선들이다. 대방주들처럼 천계를 배신한 놈들이지. 천계와 신선의 일을 부끄럽게 외부인에게 맡길 수는 없으니 내가 처리해야 한다.]
그도 그만의 사정이 있는 듯했다.
백두금왕은 천천히 갈 테니 조금 자 두라고 했다.
‘반도’라는 복숭아를 먹은 이후 이상하게 며칠을 굶어도 배가 고프기는커녕 목도 마르지 않았다. 약간의 피곤함만 있을 뿐이라 그의 말대로 구름 위에서 선잠을 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