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6화. 천계 (5)
“그만두게. 자네의 헛소리에 어찌 반응해야 할지 나로선 아직 잘 모르겠으니.”
내 말재주에 특이한 효과가 있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몇백 년, 혹은 그 이상을 살면서 별의별 이상한 놈을 만나 봤을 드래곤조차 간혹 내 말에 황당하게 쳐다보곤 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내가 내뱉은 말들에 헛소리는 없었다. 난 정말로 세 마왕을 동시에 해치울 작정이었다. 난 황당하게 쳐다보는 백두금왕의 시선에 어깨를 으쓱하며 자신 있게 외쳤다.
“괴왕의 이야기는 찬란할수록 더 강해질 겁니다.”
요괴의 힘, 가진 이야기가 특출날수록 내 ‘괴이’는 빛을 발하겠지. 그뿐만 아니라 난 정말 자신이 있었다. 황풍괴와 독각시대왕과 싸우며 느꼈다. 많은 일을 겪어오며 확실히 난 무언가를 초월해 버렸다는 걸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더는 ‘인간 레벨’이 아니다. 천계에 와서 그런데, 비유하자면 정말 천상계에 도달했다고 볼 수도 있겠다. 신선들을 잡아먹는 재앙인 마왕들조차 내 힘에 압도적으로 굴복했다. 한 마리든, 세 마리든 무슨 상관이랴.
백두금왕은 내 뻗대는 태도를 가만히 지켜보다가 곰방대에 담뱃잎을 집어넣고 깊게 들이마셨다. 이내 회색 담배 연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며 메케한 냄새를 풍길 때, 그가 말했다.
“무모하다고 말하고 싶지만 빌어먹게도 전혀 아니로군.”
그는 알았다고 말하며, 자신이 계획한 ‘삼마왕 유인 계획’을 폐기하고 내 마음대로 하라고 했다. 사타동으로 가는 산맥의 입구에 내려준 백두금왕은 역시 이번에도 ‘배신자’를 처단하기 위해 떠났다. 마왕을 죽이는 것만큼 급한 일로 보여 잘돼 가느냐고 물어봤는데 그는 말없이 담배 연기만 내뿜을 뿐이었다. 난 구름을 타고 떠나는 호랑이 형님의 뒷모습을 지켜봤다. 뭐, 어쨌든 내 일부터 해야지. 이내 몸을 돌려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이번에 상대할 놈은 사타동의 삼마왕, 정체를 듣기로 본래 천계의 신들이 타고 다니던 짐승들로 흰 코끼리, 푸른 사자, 그리고 금시조(金翅蹂)라고 한다. 어떤 힘을 가진진 모르겠으나 그놈들의 몸부림에 한 나라가 멸망할 정도로 거대하다고 했으니, 이번엔 상당히 박 터지는 싸움이 될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
사타동은 거대한 동굴이었다. 입구가 얼마나 거대한지 안에다가 63빌딩을 지어도 남을 만큼 넓어 보였다. 동굴에선 각기 다른 강렬한 기운 세 개가 뿜어져 나왔는데, 이상하게도 그중 하나의 기운은 가장 강력하지만, 어딘가 익숙한 기운이었다. 난 동굴로 향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큰 짐승이라기에 한 공룡만 하겠지 싶었는데, 동굴의 크기나 발자국 따위를 보아하니 내 상상을 훨씬 초월한 놈들인 것 같았다. 동굴 안에는 어둡지 않고 주변이 모두 보일 만큼 밝았는데 횃불은 보이지 않았다. 어떤 마법의 힘도 느껴지지 않는 걸 보니 그저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천계의 신기한 동굴로 보였다.
“크흠.”
놈들은 천계의 나라를 멸망시켰다.
그 증거로 세월이 흘렀음에도 동굴엔 온갖 잔해들이 즐비했다. 찢긴 갑옷, 창과 방패 같은 병장기는 물론이고, 어떻게 들고 왔는지 10m는 넘어 보이는 석탑이나 부서진 집 따위도 보였다. 청사라 불리는 마왕은 한입에 십만 천병을 삼켰다고 하니 멸망시킨 나라 일부가 놈들이 사는 동굴에 떨어진 듯했다.
“아아.”
난 목을 풀며 동굴 깊숙한 곳에서부터 강렬히 빛나는 세 개의 기운들을 바라봤다. 놈들을 무시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내게 망설임은 없었다. 황풍괴와 독각시대왕을 죽였을 때처럼 세 놈을 동시에 상대한다고 해도 기습 따윈 하지 않았다. 굴복시키기 위해서다.
“사타국을 멸망시킨 고약한 짐승 놈들아! 하늘을 대신하여 심판을 내리러 왔으니 곱게 나와 벌을 받거라!”
큰소리로 외치자마자 강렬한 기운들이 순식간에 내게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이내 놈들의 모습이 드러났는데 난 살짝 놀라 헛바람을 들이켰다. 가장 먼저 나타난 놈은 거대한 새였는데, 마물원에서 일하며 많은 짐승을 봐 왔던 내가 느끼기에도 날개 달린 것 중에선 놈의 크기가 제일 크기가 크다고 확신할 수 있었다. 놈은 붕새라고 하여 백두금왕이 설명하길, 날개를 쭉 펴면 태양을 가리고 깃털 하나가 집 열 채를 가릴 만큼 거대한 새라고 하였는데 어느 정도 과장은 있었지만, 확실히 그럴 만하다고 느껴졌다. 이어 도착한 놈들이 시퍼런 피부를 가진 사자와 대리석처럼 하얀 코끼리였다. 놈들의 크기는 붕새에 절반에 지나지 않았으나 그 역시도 어마어마하여 덩치 하나만으로도 무시무시한 위압감을 내뿜었다.
“아이고.”
난 살짝 내 결정에 후회가 생겼으나 이왕 이렇게 된 거 화끈하게 가자고 마음먹었다. 우선 많은 경험 때문에 먼저 우두머리를 족쳐야 하는 걸 알기에 난 가장 강한 기운을 내뿜는 붕새를 향해 뛰어갔다.
[네놈이로구나.]
그때, 붕새가 날갯짓을 크게 했는데 맹렬한 바람이 되어 날 덮쳤다. 황풍괴의 삼매신풍에도 멀쩡하던 나지만 발걸음을 멈추게 하기엔 충분한 위력이었다. 난 잠시 멈춰 서서 놈들을 바라봤다.
“날 아는구나.”
[황풍괴와 독각시대왕을 죽인 놈이 있다고 들었다.]
대답을 한 건 흰 코끼리였다. 놈은 생김새와 달리 아주 고운 목소리를 가지고 있었다. 그뿐만 아니라 듣는 순간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빛이 나며 머리가 어지러웠는데 일종의 교란 마법임을 난 금방 깨달았다. 마물에게 하도 당한 게 있는 터라 난 곧바로 놈의 목소리에 저항했다. 살짝 어지럽긴 했지만, 놈의 힘은 내게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런데 과히 현명하지 못한 놈이다. 하필 우리가 모두 있을 때 주제도 모르고 덤벼왔으니 네놈을 세 조각으로 나눠 몸은 내가, 팔과 다리는 형님이, 머리는 막내가 먹을 것이야.]
놈의 협박에 난 어깨를 으쓱했다.
“넌 나중에.”
흰코끼리의 말이 거슬리긴 하지만 목표를 바꾸진 않았다.
“세 놈 중 막내라더니, 네가 제일 세구나.”
붕새를 향해 외치자 놈은 가소로운 듯 부리를 벌리며 날 노려봤다. 딱히 부정은 안 했는데 다른 두 놈도 입을 다물고 있는 걸 보니 막내라고 해도 힘의 서열은 확실한 듯싶었다. 역시 놈부터 족쳐야겠어. 난 다시 한번 앞으로 뛰쳐나갈 준비를 했다. 그러나 붕새를 상대하는데 남은 두 놈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당연하게도 세 놈을 동시에 상대해야 했다. 난 이빨을 드러내는 푸른 사자와 흰 코끼리를 향해 외쳤다.
“니놈들은 이거면 충분하다.”
그래도 문제는 없다.
이 힘을 사용해 보는 건 처음이지만 삼마왕이 거대한 덩치를 지녔다고 전해 들었을 때부터 불현듯 떠오른 ‘마력’이 있었다. 붕새가 아무리 거대하다고 한들, 사실 놈보단 작았다. 심지어 난 솔로몬의 탑에서 놈과 상대할 때 놈의 몸에 올라타 무수한 분신을 상대해야 했다. 목소리를 듣는 교감의 힘이 아니었다면 훨씬 고전했겠지.
놈의 진짜 정체는 산을 짊어지고 다니는 문어 괴물이었다. 그리고 난 놈을 죽임으로써 강제로 어떤 힘을 빼앗았다. 몸의 살점 일부를 잘라내 조종하는 기괴한 기술이었다. 몸에서 떨어져 나간 살점은 흉측하지만 내 명령을 듣는 병사가 된다. 지금까지 굳이 쓸 필요가 없었고, 난 문어 괴물이 아니기에 효율도 떨어지며 기의 소모도 컸지만, 지금처럼 머릿수가 밀릴 때 성가신 적들을 묶어 두기엔 괜찮은 힘이었다.
“여전히 역겨운 생김새야.”
난 문어 괴물의 힘을 끌어올린 후 허벅지의 살을 잘라 냈다. 단지 힘을 발현하는 과정이었기에 상처는 없었다. 다만 툭 떨어져 나간 허벅지의 살들이 징그럽게 팽창하더니 이내 괴상망측하게 생긴 괴물 두 놈이 되었다.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긴 했지만, 얼굴이 없고 피부가 혈관이 두드러진 살점뿐이라 무척 기이했다.
“1호, 2호.”
저래도 내 ‘일부’다. 마찬가지로 다른 힘을 깃들게 할 수도 있었다.
녀석들은 내 힘을 받고 급속도로 커지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징그러운데 대륙 거북의 힘마저 불어넣으니 꿈에 볼까 무서운 괴물로 성장했다. 녀석들은 각각 푸른 사자와 흰 코끼리에게 달려갔다. 전에 실험해 본 결과, 내 힘에 반응하여 꽤 강했으니 두 마왕의 발을 잠시 묶어 두기엔 충분한 전력이라고 생각했다.
“우선 네놈부터다!”
놈이 날갯짓하며 강풍으로 난 밀어내려고 했으나 바람을 밟는 풍종도보의 경공에는 바람의 세기 따윈 상관이 없었다. 난 가볍게 날듯이 뛰어가 놈의 지척까지 당도했다. 아무리 크기가 커도 머리를 떼어 내면 죽을 것이다. 놈의 목은 대교大橋만큼 길고 컸으나 베지 못할 것도 없었다.
[흥, 가소로운 놈.]
홍아가 놈의 목을 가르기 직전이었다.
갑자기 놈이 사라졌다 싶더니, 저 멀리 동굴의 바깥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한 번 날갯짓으로 9만 리를 간다는 운정만리붕, 내가 바로 새들의 왕이다.]
놈이 쇄도하자 폭풍을 마주하는 것 같은 충격과 동시에 순식간에 내 눈앞에 놈의 거대한 부리가 보였다. 그에 대염홍식으로 맞서려고 했으나 놈의 부리 안에서 무언가가 번쩍했고, 그 순간 공간이 무너지는 익숙한 박탈감을 느꼈다.
*
주변이 온통 어두컴컴했다. 느껴지는 건 서늘한 기운뿐이다.
놈이 이상한 재주를 부려 날 다른 곳으로 보냈다는 것만 알았다. 별 괴상한 일들을 다 염두에 두고 있었지만, 이 상황은 꽤 난감했다.
“야.”
주변을 둘러보던 난 이 기이한 공간에 나만 있는 게 아님을 깨달았다. 놈은 제 형제들을 놔두고 날 이곳으로 보냈다. 어떤 곳인진 모르겠으나 놈이 생각하기에 이곳이 날 죽이는 데 있어 마왕의 도움보다 더 가치 있는 장소였다.
“여긴 어디냐?”
마왕들을 상대하며 느낀 건데 놈들은 주절주절 떠벌리는 걸 좋아했다. 애초에 자신이 가진 재주가 으뜸이라고 생각하는 놈들이니 잘난 척하는 건 당연한 건가?
[네놈은 음양이기병이란 호리병에 갇혔다.]
어디선가에서 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의 기운이 사납게 날뛰고 있어 위치를 파악할 수는 없었다.
호리병에 갇혔다는 놈의 말, 부리에서 번쩍 빛나던 게 호리병이었나?
“여기가 뭐하는 곳인데?”
보통 호리병에 갇혔다는 말을 들으면 터무니없지만, 이곳은 천계, 지구가 아니다.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 곳이라 난 그러려니 하며 놈의 말을 들었다.
[음양의 기운이 가득 찬 곳이니, 신선들마저 견디지 못한다.]
처음엔 그저 서늘한 느낌뿐이었다. 그러나 말 한마디를 내뱉은 순간부터 매서운 화염이 솟구치더니 날 휘감고 불태우려고 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곧 화염은 시린 냉기가 되어 순식간에 턱시도가 빳빳하게 얼어붙어 버렸다. 엄청난 뜨거움과 차가움이 반복되니 음양이기병이란 명칭이 이해가 갔다. 그야말로 음양의 기운이 가득한 곳이다.
“냉탕, 열탕. 딱 좋구만.”
하지만 내겐 우스울 뿐이었다. 샐러맨더는 용암에서 헤엄치고 아이스 독은 빙하에 굴을 판다. 음양의 기, 이렇게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난 음양의 모든 기운을 지니고 있었다. 그야말로 난 잡탕찌개 같은 놈이다. 그것도 팔팔 끓는 김치찌개에 민트초코까지 곁들인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찌개. 어쩌면 나야말로 전이 때문에 난잡해진 세계를 대변하는 존재가 아닐까?
[결국, 음양의 조화가 과도하게 뭉치면 가장 두려운 허상이 현실로 탄생한다.]
붕새는 멀쩡한 내 모습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놈은 태연한 목소리로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네놈의 두려움은… 그래, 두려워 마땅하구나.]
그때였다.
저 멀리, 어디엔가 무엇이 나타났다.
난 보자마자 천계에 온 이후로 가장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어엉?”
아니, 진짜야?
이건 반칙이잖아.
난 내게 날아오는 붉은 날개를 가진 ‘드래곤’에 어찌할 줄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