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화. 천계 (9)
하늘을 올려다봤다.
짜증 나게 맑은 하늘이다.
방금까지 벼락과 천둥으로 지랄 같던 게 거짓말 같다.
놈은 죽었다. 이랑진군이 내뿜던 빛은 사라졌다. 불길함은 거둬지고 천계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아니, 엄밀히 말하면 천계의 본모습은 이제 사라졌다. 신선들이 살아 있을 때만 해도 공기에서 느껴지는 기운조차 지구와 달랐는데, 이젠 그저 평범하다.
난 복잡미묘한 심정으로 멍하니 하늘을 바라보다 한숨을 내쉬었다. 젠장, 내가 무엇이 되었는진 모른다. 난 항상 검은 짐승처럼 변해 버리면 기억이 희미해졌다. 기억해 내고자 원장님과 사이렌의 도움을 받아도 내 기억이 아니라는 말만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이번엔 또렷이 기억난다. 난 날개 달린 짐승이 되어 천지를 불태우던 번개와 강렬한 빛을 머금은 이랑진군마저 삼켜 버렸다.
“소화제라도 먹어야 하나?”
기억이 생생하기에 찜찜함은 배가 되었다. 차라리 기억하지 못했다면 좋았을걸. 이랑진군을 삼키던 목구멍의 감각마저 확실히 기억했다. 내 뱃속에서 그가 소화되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대단히 역겨웠다. 차라리 유통기한 몇 년이 지난 우유를 마신 게 더 속이 편했을 거야.
“괜찮습니까?”
이랑진군이 죽자 백두금왕을 묶고 있던 보구가 힘을 잃었다. 사실 그는 내가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부터 날 쳐다보고 있었지만 난 애써 시선을 무시했다. 그를 마주하는 게 두려운 게 치부를 들킨 것처럼 부끄럽기 때문인지, 그가 날 어떻게 생각할지 지레짐작해서 그런진 나도 잘 모르겠다.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다. 난 태연히 백두금왕에게 상태를 물었으나 그는 나와 달리 주제를 외면하지 않았다.
[난 신들의 곁에서 그들을 보좌하였다.]
백두금왕이 말했다.
그는 검은 짐승이 된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는지 하나부터 끝까지 목격했다.
그런 그가 ‘감상평’을 남겨 준다.
[하지만 너 같은 존재는 보지 못했다.]
그는 무서워하지 않았다.
다만, 확실히 이전의 날 대할 때와 차이점이 있었다.
전처럼 담배 연기의 냄새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다가오지 않는다.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최대한의 거리에 서서 내게 묻는다.
[넌 대체 무엇이지?]
그 질문에 대해선 내가 해 줄 수 있는 대답이 없었다. 나도 모르고, 모든 걸 알 것 같은 원장님도 모른다. 애초에 내 존재에 대한 답을 누구한테 물어봐야 할까?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라고 했지만, 무지함을 깨우칠 방법은 알려 주지 않았다. 철학적인 의미가 아니라 난 정말 내가 누군지 알고 싶었다. 난 대답하지 않고 괜히 지랄 맞게 파란 하늘만을 쳐다봤다. 대답을 기다리던 백두금왕은 곰방대를 꺼내 담뱃잎을 집어넣었다.
[사실 알고 싶지도 않아.]
그는 더는 묻지 않는다고 했다.
백두금왕과 난 그의 초라한 거처로 돌아왔다.
신은 떠났고, 마왕도 모두 죽었고, 신선들도 없다.
천계는 빈 세계가 되었다. 난 떠나기 전 백두금왕에게 물었다.
“천계에서 계속 지내실 생각입니까?”
백두금왕은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았다. 다만 천계는 이제 곧 노쇠하여 전이를 저항할 힘을 잃어버렸으니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다시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고만 했다.
*
천계에 갔을 때와 마찬가지로 족자를 통해 지구로 돌아왔다. 난 돌아오자마자 원장님에게 달려갔다. 원장님도 날 기다리고 있었는데 천계에 대해서 몹시 궁금한 모양이었다. 그러나 난 그녀가 원하는 대답은 나중에 들려주기로 했다. 우선은 꼭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었다.
“원장님, 나 이제 원장님만큼 오래 살게 되었어요.”
반도의 전설이 사실이라면 내 수명은 인간의 몇십 배가 되었다. 수명이란 가장 큰 장애물이 사라진 것이다. 무엇을 위한 걸림돌이었는지에 대해선 난 굳이 내색하지 않았다. 다만 원장님이 알아줬으면 했다.
“오호.”
원장님은 학구열을 불태웠다. 언제나 그렇듯 날 실험 대상으로 삼으려고 했지만, 이번엔 내가 거절했다. 난 이 사실에 대한 진위를 파악하고자 원장님에게 말한 게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제 뭐, 괜찮죠?”
“뭘요?”
“걱정하실 필요 없다는 거예요.”
원장님은 어리둥절하며 되물었지만 난 어물쩍 말을 흐렸다. 오히려 내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상당히 부끄러운 말이었던 것이다. 어쨌든 난 이번 일의 수확으로 가장 진보적인 발걸음을 내디뎠다고 생각했다. 난 나부의 아내처럼은 되지 않을 테니까.
*
매일 밤마다 그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검은 짐승.
분명 그때, 검은 짐승은 다시 한번 모습을 변화시켰다.
명백히 이상하다.
지금까지 야옹이의 힘인 줄 알았다.
“너, 전에 원장님에게 말하지 말랬지?”
이미 거의 다 말해 버린 후라지만 천계에서 발생했던 변화는 원장님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난 그녀를 믿지만, 때론 무언가를 아는 것만으로도 큰 낭패를 불러올 때가 있었기 때문이다. 무림에서 처음으로 야옹이의 검은 그림자가 내 몸을 휘감았을 때 녀석은 내게 제 입으로 또박또박 말했다. 원장님을 지칭하며 자신에 대하여 말하지 말라고.
침대에 누운 내 배 위에 올라타 눈을 끔뻑거리던 야옹이는 내 말에 지그시 밤하늘같이 빛나는 눈으로 바라봤다. 말하지 않아도, 속마음이 들리지 않아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검은 짐승, 네가 아니라면 대체…….”
검은 짐승이 되었을 때의 기억과 감각이 온전하게 보존되자 난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검은 짐승의 기괴한 힘은 야옹이의 것이 아니다. 아니, 야옹이의 힘은 맞다. 그러나 그저… 그래, 그저 ‘검은 짐승’이 되기 위한 관문에 지나지 않는 정도이다. 문을 열어 그것처럼 되어 버리면 무수한 힘의 갈래가 내 안에서 느껴졌다. 지금까지 교감하고, 강제로 뺏어 온 마물의 힘들과도 비견될 수 없을 만큼 무수한 힘이.
하지만 이끌어 내진 못했다.
비유하자면 사지가 잘린 기분이다. ‘손’이 있던 감각만은 기억하는데 정작 손은 없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그런 슬프고 비통한 감각이다.
“난 인간이 아닌가 벼.”
곰곰이 생각에 잠겨 있던 난 그러려니 하고 생각을 그만뒀다.
지금 와서 인간이 아니면 뭐 어떨까.
사실 불꽃 모유를 내뿜었을 때부터 난 이미 글러 버렸는지도 몰라.
*
원장님이 ‘흔적’을 지우기 위해 연락도 할 수 없는 먼 세계로 떠났을 때였다.
천계 이후로 지루한 나날이 지속하던 어느 날, 마물원에 녀석이 찾아왔다.
“얼레? 너?”
문을 두들긴 자는 전혀 예상할 수 없었던 뜻밖의 여자였다.
오타쿠 용, 나부와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용의 피가 흐르는 인간, ‘정혜연’이었다.
비밀스럽게 감춰진 세계에서 나부와 같이 지내는 줄 알았는데?
난 얼굴을 찌푸리며 정혜연을 살폈다.
“아빠가… 때리던?”
꼴이 말이 아니다. 찰랑거리던 긴 머리카락은 산발이고, 눈은 울었는지 퉁퉁 부어 있고, 무릎은 까져서 피딱지가 앉았고, 손톱도 부러진 상태다. 어쨌든 혜연은 반쪽은 용으로 그녀를 저렇게 괴롭힐 수 있는 존재는 지구에 많지 않았다. 거기다 용의 보호까지 받고 있었으니, 난 범인은 하나밖에 생각나지 않았다. 나부, 설마 그 폐인용이 가정폭력을 행했나? 난 대답하지 않는 정혜연을 보다가 측은함이 들어 담요를 들고 와 어깨에 덮어 줬다. 그리고 조심스레 그녀를 관리실의 소파에 앉힌 후 따뜻한 차를 타줬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지만, 대중 매체에서 많이 본 적은 있었다. 가정 폭력에 못 이겨 가출한 소녀잖아. 비록 망나니 아빠와 딸이 아닌 지고하신 용과 그의 피를 물려받은 딸이라는 점에서 배포가 크게 달라지지만 어쨌든 감정선은 비슷할 것이다. 나도 이 상황이 믿기지 않는데 혜연이 받은 충격이 얼마나 클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젠장, 용을 고발하더라도 가정법원에 출석시킬 수는 있나?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허둥지둥 혜연의 눈치만 살필 때였다.
“아빠가.”
오, 젠장.
난 이어진 혜연의 말에 근 몇 년 동안 들었던 말 중에서 가장 큰 충격을 받고 말았다.
“살해당했어요.”
차라리 가정 폭력을 행한 용에 대한 이야기였다면 더 좋았을걸.
*
원장님에게 수십 번, 수백 번이나 연락을 취했으나 답장하지 않았다.
난 연락을 받으면 곧바로 마물원으로 돌아오라고 신신당부하는 메시지만 남긴 채 결국 홀로 어마어마한 문제에 대해 당면하게 되었다. 목구멍이 말라와 뜨거운 커피를 단번에 마시며, 난 혜연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겠니?”
혜연은 그날에 대해서 힘겹게 말을 꺼냈다.
숨겨지고 감춰진 세계에 침범한 ‘인간’들에 의해 용이 죽던 그날에 대하여.
“그들은 자신들을 자랑스럽게 소개했어요.”
혜연이 말했다.
나부를 죽인 자들은 스스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드래곤 슬레이어’라고.
*
허무맹랑했다.
내가 원장님을 비롯한 용에 대하여 자세히 몰랐다면 어물쩍 믿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용에 대해 잘 아는 내 머리로는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혜연이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지만 분명 그녀가 본 것과 실제 발생했던 상황은 크게 왜곡되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인간 따위가…….”
나도 ‘한때’ 인간이었던 입장으로 인간이란 존재를 깎아내리고 무시하지는 않았다. 그들은 대전이에 적응했고, 강해졌고, 대전이 전이라면 믿기지 못할 초인적인 힘을 얻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개미가 아무리 벌크 업을 해도 인간을 집어 던질 수는 없다. 아무리 강한 인간이라고 하더라도 드래곤 앞엔 개미였다.
“아빠는 그들에 의해… 심장이 뜯겨 나가서… 난, 난 도망칠 수밖에…….”
하지만 혜연은 겨우 인간 셋이 용을 죽였다고 말했다.
전 인류가 상대해도 승산이 있을까 말까 한데, 겨우 셋이.
“일단 진정하고 쉬어. 원장님이 오면 자세히 알 수 있을 거야.”
절박한 자의 떨리는 목소리를 왜곡해서 듣는 나쁜 버릇은 없었지만, 이번만큼은 혜연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주지 못했다. 나부의 힘을, 그의 심장이 내뿜던 아득한 신의 기운을 직접 목격한 나라서 더더욱 말이다. 하지만 나부가 인간에게 죽은 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큰일이 발생했다는 건 알았다. 어찌 되었든 이번 일은 내 능력 바깥의 일이다.
혜연은 나부가 심장이 뜯기기 전에 자신에게 공간이동 마법을 시전하여 마물원 근처로 보냈다고 했다. 원장님과 다르게 나부는 공간 마법에 미숙했다. 그녀는 많이 지친 상태였다. 기가 사납게 날뛰고 불안정한 건 심리적인 이유만 있는 게 아니었다. 어지러운 기, 만약 혜연이 평범한 인간이었다면 진즉 장기가 뒤집어져 죽었을 정도다. 난 혜연에게 힘을 사용했다. 세이렌의 힘을 약간 사용하여 반강제적으로 재워야 했다. 그 과정에서 그때 발생했던 기억을 읽고자 했으나 혜연은 ‘용의 피’가 흐르는 탓에 쉽지 않았다. 강제로 읽으면 나나 그녀가 백치가 될 수도 있었기에 그런 위험은 감수하지 않았다.
쉬이익!
초조함과 불안감에 휩쓸려 머리가 지끈거린다.
잠든 혜연을 지키며, 반나절 동안이나 기분 나쁜 불쾌함을 느끼던 그때였다.
허공에 ‘문’이 생겨났다. 다행히 원장님이 내 연락을 받고 곧바로 마물원으로 돌아온 것이다. 난 공간의 문을 지나는 원장님을 보자마자 벌떡 일어났다.
“원장님!”
사정은 메시지로 남겨 원장님도 상황을 알고 있었다.
원장님은 가라앉은 붉은 눈동자로 혜연을 바라보다, 내게 시선을 돌렸다.
난 원장님의 굳은 표정에서 불길함이 더욱 강렬해짐을 느꼈다.
설마, 진짜인가?
“다정 씨.”
원장님은 따로 이야기할 게 있다며 원장실로 불렀다.
“나부는 인간에게 죽지 않았어요.”
난 원장님의 낮고 침착한 목소리를 들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인간에게 죽지 않았다. 하지만 죽은 건 맞는다는 거잖아.
“인간 따위에게 죽었다면 레테의 강은 흩어졌을 거예요.”
원장님은 마물원으로 오기 전, 이미 조사를 하고 온 모양이었다.
그녀는 나부의 쉼터에 관해 이야기를 하며 자신이 봤던 것에 대하여 말해 줬다.
나부는 죽었다. 시간이 없어 자세히 확인하진 못했으나 분명 용이 죽은 자리에서 발생하는 소멸의 여파를 확인했다고 한다. 하지만 감히 인간 따위가 용을 죽이진 못했을 거라고 했다.
“그를 죽인 자는…….”
원장님은 말을 흐리다가, 아주 드물게 흔들리는 시선과 두려워하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끝맺었다.
“빛나는 자, 마루트루드라(MarutRudra).”
난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지금까지 단지 ‘로드’로만 알고 있던 그의 진짜 이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