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4화 가디언즈 (2)
글루토니를 데리고 관리실로 돌아올 때였다. 녀석은 털도 하얀 게 마치 찹쌀떡 같아서 내 등에 착 달라붙었다.
폭신폭신하고 물컹물컹한 주제에 이상하게 잘 달라붙어서 처음에 녀석이 등에 올라탔을 때 떨어질까 손 받침을 해 줬지만 걷다 보니 괜찮을 것 같아 가만히 놔두고 걸었는데, 녀석은 떨어지지 않았다.
촉감만 물컹할 뿐 무게도 전혀 느껴지지 않는다. 게다가 흡착력이 이상할 정도다. 결국, 궁금증이 도진 나머지 난 녀석의 한계를 시험해 보기로 했다.
등에 얹고 힘차게 마물 우리를 달려 봤다. 풍종도보의 경공을 밟는 와중에도 녀석의 까이까이 우는 소리는 계속 들렸다.
어디에도 잘 붙는 자석인가? 머리에도 올려 보고 배에도 붙여 보고 심지어 종아리에도 붙여 봤지만 어떤 격렬한 몸부림에도 녀석은 떨어지지 않았다.
논리적으로 불가한 현상이기에 난 글루토니가 가진 다른 능력이 아닐까 생각했다.
까이!
보통 마물들은 날 친구라고 생각하지만 녀석처럼 격렬하게 사랑을 표현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녀석은 어릴 때부터 키웠던 포근이처럼 부담스러울 정도로 날 좋아했다. 갖춘 능력에 비해 육체적인 힘은 형편없는 정도라서 땅에 떨어트려 놓으면 짧은 몸을 바둥바둥거리며 쫓아왔는데, 만약 녀석을 데리고 다니려면 차라리 몸에 붙이고 다니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솔직히 포근이를 떠나보내고 옆구리가 허전하긴 했다. 단비는 잠들어서 언제 깨어날지도 모르겠고, 야옹이는 도도해서 불러도 오지 않는다.
요새 하도 마왕이니 괴물이니 꿈자리 나쁘게 만들 놈들하고만 싸워 대서 내 안의 큐티 파워가 말라 들어가는 것 같았다.
지우 옆에 피카츄가 있듯이 이런 귀여운 녀석이 옆에 찰싹 붙어 있는 것만으로도 심적으로 안정되는 느낌이다. 물론, 글루토니의 힘은 피카츄의 백만 볼트처럼 전체 이용가 수준은 아닌 것 같지만.
“어머, 얘!”
관리실로 돌아왔을 때였다. 마담의 손에 잡혀 억울한 표정을 지은 채 쓰다듬질을 당하고 있던 야옹이가 갑자기 급발진하여 내게 달려들었다. 동시에 등에 매달려 있던 글루토니도 이상한 울음소리를 내더니 후다닥 뛰어든다.
검고 하얀, 두 마물이 서로 노려보며 견제한다. 겉보기엔 귀엽지만 어떤 놈들인지 아는 난 긴장한 채 신경전을 지켜봤다.
야옹이는 샐러맨더와 세계수, 심지어 신수였던 봉황마저 기선 제압 했던 선례가 있었지만, 글루토니는 만만치 않은 상대인 것 같았다. 다른 마물에 무관심하던 야옹이가 먼저 덤벼들 정도니까 말이다.
어떻게 한담. 고양이는 서열 정리 안 하면 계속 싸운다던데 놔둬야 하나?
캬옹!
카이!
내가 머뭇거릴 때, 일은 벌어지고 말았다. 둘은 격렬한 울음소리와 함께 엉겨 붙었다. 데굴데굴 구르는 녀석들을 말리기 위해 난 재빨리 달려갔다.
“뭐냐, 너희?”
하지만 행동을 멈추고 얼빠진 표정으로 쳐다만 보게 되었다. 예상한 모습이 전혀 아니었다. 글루토니와 야옹이는 격하게 싸우는 대신 격하게 서로 핥고, 빨고, 부둥켜안고, 확실히 표현하자면 정말 지랄을 했다.
글루토니는 그렇다 쳐도 야옹이의 저 애정 표현은 몇 년 동안 전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가끔 높은 곳에 올라갔을 때 기분 좋게 울음소리를 내며 내게 눈 키스를 해 준 게 다다.
어이없게 쳐다보던 난 심지어 둘이 몹시 난감한 짓까지 하려 들기에 말려야 했다. 이 새끼들 뭔데 이리 친밀해?
*
다음 마물은 귀찮고 성가시지만 어쩔 수 없이 녀석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아무리 꼴 보기 싫은 변태라고 해도 녀석의 힘은 진짜였다. 특히 ‘악마’를 대적할 때 놈의 힘은 내가 가진 어떤 힘보다 가장 큰 도움이 되었었다.
“유니콘이 힘을 빌려주려나.”
유니콘, 처음 만났을 때 녀석은 우리에서 나가게 해 달라며 내게 제안을 했었다. 녀석의 목적은 단 하나였다. 여자들을 만나게 해 줘.
두 번째 만났을 때도 녀석은 일관성 있는 녀석이었다. 결과적으로 보면 혜연을 구할 수 있었지만 유니콘의 목적은 혜연이었다.
유니콘은 강력한 마물중에서도 특히 자기주장이 뚜렷한 놈이었다. 내게 힘을 빌려줄 때도 목적과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빈손으로 찾아가 도와 달라고 하면 아마 유니콘은 거절할 것이다. 아니면 조건을 내걸겠지. 연락처엔 여자라곤 공적인 번호밖에 없는 내게 여자를 소개시켜 달라고 하려나. 아니, 번호가 있다고 해도 어떻게 뿔 달린 말 새끼랑 소개팅을 해 달라고 해? 젠장, 내키진 않아도 일단 교섭은 해 봐야지.
구름 위에 있는 유니콘의 둥지로 가기 위해선 이동 골렘이 필요하기에 우선 창고에 들러 골렘을 가져왔다. 그러나 하필 동력석의 에너지가 바닥이 나 충전 시간이 필요했다.
관리실엔 마담이 있어 껄끄러워 골렘의 동력석을 갈아 끼운 뒤 주차장에 앉아 충전을 기다릴 때였다.
“킁. 녀석도 기운을 느꼈나?”
마담의 기운은 강렬하다.
예전엔 느끼지 못했으나 교감의 힘이 강해지면서 난 용이 가진 폭풍처럼 맹렬하고 깊은 바다처럼 고요해 깊이를 알 수 없는 힘을 느끼게 되었다. 이 힘은 너무 강하여 숨기지 않으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느껴진다.
그리고 녀석도 마찬가지다.
마담에 비해선 형편없지만 녀석은 나부를 따라간 뒤로 그 기운을 미약하게나마 품게 되었다.
그래도 전에는 ‘인간’ 냄새가 더 강했는데 용과 인간의 혼혈아 아니랄까 봐 단기간에 그 기운을 풍기게 되었다. 아마 그래서 녀석도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마담의 기운을.
난 마물원의 정문을 여는 정혜연을 보며 인사했다.
원장님이 드래곤 슬레이어라 자칭하던 인간들을 일격에 말살한 후 혜연은 인간 사회로 돌아가게 되었다. 듣기론 여러 사정 때문에 그만뒀던 학교를 다시 다닌다는 모양인데, 하굣길에 들렸는지 혜연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난 혜연의 가방에 달린 작은 인형들을 바라봤다. 세상에, 저걸 가방에 달고 다녀? 인형 중엔 날 기절시켰던 강력한 나부의 ‘인형’도 있었다.
“왜 왔어?”
하굣길에 들렸다고 해도 사실 놀러 온 건 아니라는 건 나도 잘 알았다.
하지만 난 정혜연이 가볍게 놀러 온 마음으로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굳은 표정을 보아하니 그런 건 아니겠지만.
“강대한 기운이… 느껴졌어요.”
정혜연은 내 생각보다 훨씬 ‘기운’들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녀석이 말하길, ‘아빠’처럼 강력한 기운들이 마물원에서 수없이 느껴지더니, 이내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정혜연은 얼마 전에 마물원에서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음을 짐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사라진 기운들에 걱정하던 정혜연은 또다시 강렬한 기운이 느껴지기에 무슨 일이 일어났을까 걱정됐다고 했다.
“뭐, 별일은 아니고 그냥…….”
“어머, 어머! 네가 그 아이로구나!”
어느새 관리실에서 나온 마담이 호들갑을 떨며 정혜연의 손을 잡고 반갑게 인사했다. 소심한 혜연은 쭈뼛거리다가 이어진 마담의 말에 깜짝 놀라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했다.
“나부의 딸. 오호호! 비록 반은 인간이라도 해츨링을 보는 건 언제나 즐겁지. 오호호!”
“아! 아… 안녕하세요. 저… 그… 지고하고 위대하신…….”
“호호. 그냥 편하게 마담이라 부르렴.”
마담은 용과 인간의 혼혈인 혜연을 친절하게 대해 줬다. 나부에 대한 몇 가지 말들을 혜연과 주고받다가 할 말을 나누라며 자리를 비켜 줬다.
혜연은 마담이 관리실로 들어가자마자 동그란 눈으로 내게 말했다.
“저분, 드래곤…….”
“맞아. 그것도 겁나 세.”
“굉장히 친절하신 분이세요.”
“허. 나한텐 아주 개떡 같은 일만 시켰었다고. 넌 아빠가 드래곤이니까 그래.”
“아빠…….”
“앗.”
혜연은 아빠라는 말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우울해했다. 난 저런 감정을 모르지만 아마 굉장히 아플 것이다. 얼마나 같이 지냈는지, 추억이 얼마나 쌓였는진 관계없이 단지 가족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말이다.
하지만 어떻게 위로해 줄지 몰라 괜히 귀여운 글루토니를 보여 줘야 하나 싶었지만, 이 지랄맞은 게 갑자기 혜연을 보고 이빨을 드러내기에 등에 숨겨야 했다.
“아빠를 죽인 건 그들이 아니었죠?”
당황하던 난 혜연의 질문에 콧등이 간지러웠다.
거짓말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고, 설명해 달라는 혜연의 말에 아는 것을 모두 말해 줬다.
*
한번에 설명하긴 힘든 일이라 혜연과 난 몇 번이나 질문과 답을 나눴다.
그 뒤, 모두 이해한 혜연이 내게 말했다.
“도와드릴게요.”
짧은 말이지만 내포된 의미는 깊었다. 혜연이 멍청이가 아니라면 모든 상황을 이해하고 저런 말을 내뱉었다는 것인데, 이 일이 혜연에게 나처럼 많은 위험을 감수할 만한 일일까 싶었다. 이유가 충분한 나라고 해도 무모하게 느껴지는데 혜연은 오죽할까.
난 괜히 간지러운 얼굴을 박박 긁으며 혜연에게 이유를 물었는데, 자신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복수라고 하였다. 유약하게만 보이던 혜연이라고 하더라도 용의 피는 흐르는 모양이었다.
후우.
한숨이 나왔다.
보통 정신머리가 제대로 박혀 있다면 위험할 걸 알기에 혜연의 도움을 거절해야 한다. 하지만 난 아니다. 난 정상과 거리가 멀다. 혜연이 도와주겠다고 했을 때 기쁘기까지 했다.
난 혜연이 마물원을 찾아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고민을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름의 각오는 했을 것이다. 그런데 내가 무슨 권리와 이유로 막을까? 스스로 도와주겠다는데 거절하기도 우습다. 만약 거절하면 내 꼴은 위선자나 다름없다.
내가 마담에게 떼를 쓰는 건 괜찮고 혜연이 내게 부탁하는 건 도리가 아니다 이거야?
“그래서, 넌 뭘 할 수 있니?”
하지만 각오와 별개로 혜연의 도움이 필요한가 아닌가는 중요했다. 전에 만났을 때처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면 도움을 받을 이유가 없다. 혜연은 내 말에 망설이지 않고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교과서 대신 뭘 들고 다니는 거야.”
혜연이 꺼낸 건 마법 지팡이였다. 확실히 마법 지팡이라고 생각했다.
세스트랄의 꼬리털로 만들어진 딱총나무 지팡이처럼.
생긴 것도 비슷하고 느껴지는 힘도 예사롭지 않아.
“전 아빠처럼 강하지 않아요.”
지팡이는 나부가 준 것이었다.
용의 선물, 인형 따위가 날 기절시킬 정도니 제대로 마음먹고 준 무기라면 얼마나 귀할지 상상이 가지 않았다.
“용의 힘은 물려받지 못했으나 대신…….”
혜연은 마법을 다룰 줄 안다고 했다. 나부와 지내던 시간 동안 마법을 배웠는데, 칭찬에 인색하던 아빠가 유일하게 칭찬까지 해 줬다고 한다.
일단 스승이 용이고, 본인도 용의 피가 흐르고, 딸 바보 아빠의 거짓 칭찬이 아니라면 용에게 칭찬까지 받을 실력이니 더는 볼 것도 없었다.
난 직접 마법까지 보여 주려는 혜연을 말리며 알았다고 했다. 평범한 마법이 아니라 용의 마법으로 꽤 대단한 모양이지만 사실 지금 난 마법보다 더 간절한 도움이 필요했다.
“음, 그럼 우선 도와줄 게 하나 있는데.”
띵!
마침 이동 골렘의 충전이 끝났다.
난 혜연에게 웃으며 말했다.
도와주기로 했으니 당장 해야 할 일이 있다고.
*
[확실히 말해 두겠는데, 널 위해서가 아니라 네 옆의 숙녀를 위해서 도와주는 거라고.]
외뿔의 하얀 말이 푸드덕거리며 말한다.
[다시 만나 기뻐, 레이디.]
혜연은 알아듣지 못했지만 본능에 따라 무척 기분 나빠했다.
난 고풍스럽고 낭만적인 구름 정원 위에서 작업 거는 유니콘과 질겁하는 혜연을 보며 어쩌다가 이 지경까지 왔는지 살짝 걱정이 들었다.
[내 등에 올라타, 레이디. 네 고운 하얀 발에 밟히는 구름에 질투가 나잖아.]
“저기 아저씨, 이 말 원래 눈이 이래요? 변태 같아.”
“잘 아네. 역시 감이 좋아.”
어쨌든 두 마리 포섭 성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