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5화 가디언즈 (3)
녀석은 때가 되면 자신을 찾아오라고 했다.
어쩌면 언젠가 이런 일이 벌어질 걸 예견한 건지도 모른다.
솔로몬의 탑, 600층의 문지기.
지금까지 싸워 온 숱한 괴물과 악마가 기껏해야 300층도 넘기지 못했음을, 그리고 솔로몬의 탑의 666층 정상으로 갈수록 아득한 존재들이 도사린다는 걸 안다면, 600층의 주인이 가진 힘이 어렴풋이 짐작되었다.
비록 대전이의 여파를 홀로 뒤집어쓴 탓에 본래의 힘을 잃어버린 존재라도.
[이런, 젠장! 미인을 조심하라고 어머님께서 늘 말씀하셨는데. 케르베로스와 드래곤의 둥지를 가는 건 헤라클레스의 시련보다 더 고약하다고! 왜 하필 놈이야? 이봐, 놈에게 힘을 빌릴 바에야 차라리 지옥의 왕을 찾아가라고. 이건 어리석은 짓이야!]
케르베로스의 둥지에 들어가기 전 유니콘은 기겁하며 소리쳤다.
나도 위험하다는 건 안다.
하지만 어쩔 수가 없다.
녀석의 힘이 필요해.
난 홀로 케르베로스의 둥지로 걸어갔다.
첫 번째 만남 때는 수많은 차원을 넘어서 만났고,
두 번째엔 강력한 결계 너머에서 만났다.
그러나 지금은 직접 둥지의 문을 열고 그를 대면했다.
[운명의 시계추가 흔들렸다.]
난 케르베로스의 목에 묶인 쇠 목줄의 열쇠 구멍에 ‘마스터키’를 꽂고 돌렸다.
그러자 일렁거리던 검은 공간들이 순식간에 케르베로스를 향해 빨려 들어갔다.
어긋남과 뒤틀림으로 가득하던 둥지는 어느덧 하얀 방이 되었다.
크르릉!
쇠사슬에서 풀려난 케르베로스가 몸을 일으킨다.
그가 내게 말한다.
힘을 빌려주겠다고.
파르바티는 ‘자신의 근본’이기에 그의 갈래인 자신이 힘을 되찾기 위해선 원장님을 구해야 한다는 알 수 없는 말을 하면서, 또한 ‘나와 함께 함으로써’ 결국 자신은 원래의 자리를 되찾을 거라면서.
“그, 그래.”
게임에는 선택지가 있다.
잘못된 선택지를 고르면 최악의 결과를 맞이하지만, 다행히 저장과 불러오기가 있어서 걱정이 없다. 하지만 현실은 아니다.
만약 내가 케르베로스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귀엽다고 말하면, 돌이킬 수 없게 되겠지.
대체 왜 저런 꼴로 변했는진 모르겠다.
아니, 흔한 클리셰일지도 모른다.
힘을 잃었다더니, 원래의 모습은 쇠사슬과 마법에 묶인 채 적안을 번뜩이던 거대한 삼두견이 맞겠지.
그러나 지금 케르베로스의 모습은 흉악하기 짝이 없었다.
내 심장을 위협하는 흉악한 귀여움.
“허스키, 리트리버, 어… 푸들?”
[묻고 싶은 게 있느냐?]
“아, 아무것도 아니야.”
난 대형견만 한 크기에 ‘3마리의 개’가 적절하게 섞인듯한 ‘케르베로스의 모습’을 보며 머리를 긁적였다.
차라리 머리가 3개였다면 마물같이 보였겠지만 지금 저 모습은 그냥 귀여운 큰 개 한 마리에 불과했다.
이건 무슨 흉악한 마물들을 이끌고 쳐들어가는 게 아니었다. 겉모습만 보자면 고양이, 하프물범, 큰 개, 말에 지나지 않았다.
브레멘 음악대도 아니고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라도 울려야 할 판이네.
*
금지 구역 마물들의 힘을 빌린 것만으론 부족했다. 캣 맘이 말하길 드래곤들은 탐욕이 많아 자신의 둥지, ‘레어’라는 곳에 수많은 보구와 보물을 쌓아 놓는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들으니 마물원에 원장님의 레어가 있음을 알아차렸다. 마물 방호복을 비롯하여 골렘, 영약, 마도구 등을 원장님은 필요할 때마다 ‘원장실 옆 창고’에서 그것들을 꺼냈는데, 마물원의 금지 구역까지 출입할 수 있는 나라고 해도 그곳만큼은 한 번도 들어가 보지 못했다.
“마스터키라면 열 수 있겠지. 하지만 둥지의 마법은 매우 강력해서 키가 부러질지도 몰라.”
마담은 레어를 열기 위해선 둥지를 만든 드래곤 본인이나 파르바티의 마스터키가 필요하다고 했다.
다행히 열쇠는 있었다. 하지만 로드의 감옥에 갇혀 있는 원장님을 구하기 위한 용도였다. 레어를 열다가 부러지기라도 하면 본말이 전도되기에 차마 레어를 열진 못했다.
“내일은 태양이 울부짖는 날이야. 일식이 끝나면 드래곤들은 동면에 들 테니 그때가 기회겠지, 프티.”
마담은 내일 정오에 드래곤의 둥지로 향하는 포탈을 열어 주겠다고 했다.
정혜연은 그동안 나부가 남긴 마도구들을 가지러 갔다.
유니콘은 아예 정혜연의 딸랑이를 자처한 듯 혜연의 곁에서 떨어지질 않았고, 흉악한 마물이라지만 외견상 개와 하프물범에 지나지 않는 두 마물은 마담이 데리고 갔다.
어쨌든 가진 힘이 강렬해서 들킬 수 있기에 힘을 숨길 수 있는 인공물을 만들어 준다나.
마담이 만들고 있는 인공물을 잠깐 지켜봤는데 그냥 애완견 목걸이에 지나지 않았다. 특히 야옹이는 굳이 목걸이가 필요 없었으나 마담은 야옹이 것도 만들며 직접 ‘nocturne’이란 애칭도 새겨 넣었다.
“망할, 내일이라니.”
다가올 엿 같은 상황들이 예상되어 지끈거리는 머리를 달래고자 온종일 침대에 누워만 있었다. 드래곤을 상대하진 않지만, 아무리 조심한다고 해도 드래곤의 감시자와 맞붙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최악의 가정인 드래곤들이 동면에서 깨어난다는 상상은 아예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엿 같은데 더욱 머리만 죄는 끔찍한 가정이기 때문이다.
난 지금까지 상대해 온 적들을 생각하며 드래곤의 감시자가 얼마만큼 강할지 유추해 봤다. 마담이 말해 주긴 했지만 듣는 것만으론 이해하기 힘들었다.
“신록수의 주인, 또 뭐야 마계 대장군? 지랄이다. 지랄.”
확실한 건 가디언들이 무척 강하다는 거다.
원장님은 특이하게도 내가 약할 때부터 감시자로 임명했다. 하지만 마담이 말하길, 다른 드래곤들은 감시자를 정할 때 적어도 ‘세상에서 가장 강한’ 존재를 원한다고 했다. 한 세계, 쉽게 말해 지구에서 가장 강한 존재 정도다.
“저번에 만났던 놈은 가디언도 아니랬나?”
특히 ‘로드’는 우주를 제힘으로 물들이기 위해 수많은 가디언을 임명하여 전 우주에 퍼트리고 있다고 한다.
시발, 자기들이 무슨 XX냐?
오크 라덴에서 만난 ‘세뇌’의 힘을 가진 놈도 로드의 가디언이었는데 기껏해야 ‘후보생’ 수준이라고 했다. 진짜 무서운 놈들은 로드의 곁에서 보좌하는 감시자로, 마담은 그를 신들보다 약간 약한 수준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마담은 대단히 깔보는 어투로 말했지만, 무시하지 못했다. 제대로 된 신을 만난 적은 없지만 우딸리깔딸리의 여왕이 반쪽짜리 신에 불과하다는 걸 생각해 보면…….
젠장, 그래도 전혀 짐작할 수 없잖아.
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며 만약의 사태를 그려 봤다.
수많은 드래곤의 감시자가 날 족치기 위해 덤벼든다.
번쩍거리는 무기와 갑옷을 입고선.
생각해 보니 가뜩이나 쪽수도 밀리는데 장비빨도 밀리네.
내겐 신수가 만들어 준 메타소드가 있지만 따지고 보면 이 무기는 맥가이버칼이다. 내 힘에 반응하여 모습과 성질을 바꾸지만, 정작 내가 가진 ‘가장 강한 힘’엔 반응하지 않았다. 그 외의 장비라곤 턱시도,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다다.
‘장비빨’이 얼마나 중요한진 천계에서 마왕 놈들과 싸우며 절실히 깨달았다. 적들은 태상노군의 보구처럼 값지고 엄청난 마도구를 가지고 있을 텐데, 너무 불리하잖아.
원장님의 레어만 열 수만 있다면 나도 마도구의 힘을 빌릴 수 있을 텐데, 젠장.
하지만 열쇠는 부러질 수 있고, 원장님 본인이 아니면 열지도 못한다.
무슨 지문이나 홍채 인식이라도 필요한가?
“엉?”
‘본인이 아니라면 열 수 없는 문’이라는 생각했을 때 문득 한 가지가 떠올랐다. 어쩌면, 혹시 어쩌면 녀석이라면 가능하지 않을까?
불가능하더라도 시도해 봐야겠지.
난 곧바로 침대에서 일어나 마담에게 달려갔다.
*
관리실에 앉아 고양이 섬, 아니 고양이 대륙에 먹이를 주러 간 마담을 기다렸다.
시간이 없다. 내일 정오에 포탈이 열리니 지금 당장 해결해야 한다.
화드득-!
초조하게 마담이 돌아오길 기다리던 그때, 공간이 일렁거리더니 산산조각이 난다. 이내 ‘공간’에 대리석으로 만들어진 투박한 문이 생겨났다. 포탈이다.
원장님의 세련된 방법에 비하여 볼품없지만, 차원과 차원을 자유 왕래할 수 있는 대단한 ‘문’이다.
“마담!”
난 대리석 문이 열리고, 고양이 털로 엉망인 마담이 나오자마자 용건부터 말했다.
“레어를 만든 드래곤만이 레어를 열 수 있다고 하셨죠! 어떻게? 홍채나 지문 인식이라도 하나요?”
마담이 가볍게 옷을 털자 고양이 털이 한 번에 떨어지며 봄철 꽃가루처럼 관리실을 어지럽혔다.
난 콧구멍을 간질이는 털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소리쳤다.
“아니면 어떤 방법을… 으엑!”
입을 다물어야 했다.
마담이 고양이 털을 마법으로 모두 모아 내 목구멍에 쑤셔 박으려고 했기에.
난 마담의 손에 들린 농구공만 한 고양이 털 뭉치를 지켜보며 얌전히 대답을 기다렸다.
“별거 없어, 프티. 레어는 드래곤의 마력으로 열리니까. 어머, 얘 좀 봐. 참 귀엽지 않니?”
다행히 마담은 털 뭉치를 태워 버리고는 ‘고양이 사진 컬렉션’을 홀로그램처럼 비추는 이상한 마도구를 꺼내 흐뭇하게 바라보며 내 질문에 대답해 줬다.
난 마담이 보여 주는 고양이들을 보며, 참 귀여워서 고양이 프로듀스 101만 마리를 개최하면 센터를 할 미모라고 칭찬했다.
“어머, 그것참 좋은 생각이구나.”
딴 대답을 하는 마담이 짜증 나 한 실없는 소리였으나 마담은 진지하게 내 칭찬을 받아들인 모양이었다.
섬 전체가 바다에서 떠오르던 장면이 생각났다. 마담이라면 정말 개최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여튼 드래곤들이란.
“제 소중한 한 표를 드릴 테니 답만 알려 주세요.”
마담은 눈썹을 치켜올리고 고개를 끄덕이더니 드래곤이 레어의 문을 여는 방식에 대하여 알려 줬다.
드래곤의 레어를 오로지 본인만이 열 수 있는 건 ‘마력’ 때문이었다. 드래곤마다 가진 마력이 각기 다르다. 그리고 마력마다 특성이 있는데, 원장님은 주술사, 나부는 기록자였고, 마담은 ‘대지모신’이었다.
따라서 드래곤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드래곤의 레어를 열지 못한다. 제아무리 드래곤이라고 하더라도 드래곤 마력의 특성을 흉내 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 아, 뭐였죠? 그, 있잖아요. 지금 상황에서 쓰는 말.”
하지만 그 절대 불가능한 방법을 들었을 때, 난 도리어 팔짝 뛸 만큼 기뻤다.
“프티, 아무리 고귀한 존재라도 가끔 저급한 단어를 쓰기도 한단다. 내가 못할 줄 아니? 좆 됐…….”
“유레카!”
“어머.”
있었다.
드래곤도 불가능한 일이 가능한 유일한 존재가.
과연 인맥은 대단하다. 인연이라고도 포장할 수 있겠지.
원장님이 그들에게 잘 대해 줬기에 가능한 일이다.
아니, 어쩌면 그때 내가 그들을 무시했더라면 결코 이런 생각은 하지 못했을 거야. 녀석의 고통을 공감하지 못하고, 원장님에게 ‘그녀’가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면 전혀 몰랐겠지.
“마담, 당장 갈 곳이 있어요.”
그들의 위치라면 알고 있다.
원장님이 몹시 소중히 지키던 자들이니까, 위치 정보는 기록되어 있어.
“뭔가 깨달은 모양인데 당장 말해 주지 않겠니?”
난 마담에게 말했다.
슬픈 부녀에 대하여.
딸을 잃은 어떤 남자와 그 딸을 대신하는 ‘미씽 슬라임’에 대하여.
“잊힌 마물, 폴리모프의 근간이 되는 존재··· 로드에 의해 멸종되었다고 들었는데.”
굳은 표정으로 곰곰이 생각하던 마담은 내 쪽을 보더니 씩 웃으며 말했다.
“유레카!”
*
정나리는 ‘파르바티’로 변했다.
물론 원장님이 대해라면 나리는 샘물에 지나지 않았지만 나 또한 느낄 수 있었다.
같은 ‘물’이라는 걸.
형질마저 복사하는 미씽 슬라임의 힘은 드래곤 본인만이 열 수 있는 레어마저 열리게 했다.
나리의 손이 원장실 옆, 평범한 나무문이나 드래곤의 레어의 입구인 창고의 문고리를 잡자 꿈쩍도 하지 않던 문이 스르르 열리기 시작했다.
레어가 열려 기뻐하던 그 순간이었다. 미씽 슬라임은 형태를 잃고 액체로 녹아내리고 말았다.
“나리야!”
중년의 남성이 미씽 슬라임에게 달려가 소중하게 안았지만, 액체는 형태를 갖추지 못했다.
난 재빨리 마담을 보며 부탁했다.
다행히 마담은 내가 말하기도 전에 미씽 슬라임을 살펴봤다.
“걱정하지 마, 잠시 힘을 잃었을 뿐이니까.”
미씽 슬라임은 드래곤을 잠깐 흉내 낸 것만으로도 힘을 잃었다.
다행히 시간이 지나면 회복하는 모양이라, 난 마물원의 남은 둥지를 알려 주며 회복되기까지 그곳에서 요양하라고 했다.
“고마워요, 아저씨.”
남자는 웃으며 말했다. ‘딸 친구’의 부탁이니 당연한 거라고.
“원장님이 무사히 돌아오길…….”
난 ‘부녀’를 마물원의 빈 우리에 데려다주고 그곳의 열쇠를 건넨 후 관리실로 돌아왔다.
원장실의 창고, 드래곤의 레어.
대체 뭐가 있을까, 어떤 값지고 희귀하고 대단하고 엄청난 보물들이 있을까? 명목은 충분하니, 몇 개 빼돌려도 용서해 줄 거야.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마담과 같이 원장님의 레어에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