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화. 가디언즈 (5)
그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움직였다.
휘몰아치는 바람과 하늘에서 떨어지는 거대한 석기둥(오크라덴에서 보았던)을 피해 혜연이 가리킨 곳으로 향한다. 난 야옹이의 힘을 빌려 기척을 숨겼고, 정혜연은 ‘마법’을 사용했다. 우린 꽤 오랫동안 별문제 없이 지나갔다. 오히려 너무 조용하여 불안할 정도였다. 용성엔 가디언들은 없었다. 침입자를 눈치를 챘다기엔 기분 나쁜 정적이다. 난 문득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위험을 받아들였는지에 대해 생각이 났다. 이젠 확실히 내 강력한 능력 중의 하나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 ‘직감’이 미리 경고를 해 줬다. 위험한 적들은 위험하다고 알려 준다. 그래서 직접 대면하지 않아도 끔찍한 적들에 대해 미리 대비할 수 있었다. 예상치 못한 위협과 적은 마물원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기에만 발생했었다. 심지어 그때에도 확실히 상대가 얼마만큼 위험한지 깨달았다.
하지만 용성에 온 이후로 내 감은 망가진 듯했다.
아니면 상대가 내가 읽을 수조차 없는 강한 적이라서 그럴지도 모른다.
난 이미 거미줄에 걸렸는지도 모르겠다.
거미가 이미 독니를 드러낸 채 다가오고 있는지도.
“조금 더 속도를 내자.”
“네.”
하지만 걸음을 멈춘다는 선택지는 없었다.
난 괜히 겁먹어 움츠러들기 전에 행동에 나섰다.
대범하지만 조심스럽게.
무너진 건물과 부러진 나무 뒤에 숨으며 그곳으로 향했다.
삐웅-!
분명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삐웅삐웅-!
놈들의 존재를 알아차렸을 땐, 이미 덫에 걸린 후였다.
그저 한 발자국. 평원에서 나와 황량한 대지에 발을 디뎠을 뿐인데.
순식간에 땅 아래, 곳곳에서 기괴한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난 땅에서 슬며시 모습을 드러내는 자그마한 놈들을 지켜봤다.
로봇, 아니 골렘이다.
농산물 따위를 담는 사각 상자에 붉게 빛나는 돌이 담긴 허접한 생김새.
그러나 드래곤들이 만든 골렘.
혜연도 골렘을 확인하곤 표정을 찡그렸다.
“경보 골렘.”
정혜연도 알았다.
경보 골렘. 위험하진 않지만, 침입자를 발견하면 세차게 굉음을 내며 주변에 알린다.
빌어먹을, 원장님이 사용하는 걸 본 적 있다. 기본적으로 놈들은 위험하게 설계되지 않는다. 오히려 길바닥에 돌멩이처럼 은밀하고 볼품없게 설계된다. 단 한 가지 목적, 경보만을 위해 만들어진 골렘이다. 그래서 나도, 정혜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직 들키진 않았어.”
발을 디뎌 경보 골렘이 작동했으나 야옹이의 힘 덕분에 놈들은 날 발견하지 못했다. 다행이다. 드래곤이 만든 골렘의 정교함을 생각해 본다면 야옹이의 힘은 정말 대단한 것이다.
“인다가티오.”
혜연은 뒤로 물러나 마법지팡이를 휘둘렀다. 무어라 말하는진 모르겠지만, 마법인 것 같았다. 혜연의 몸에서 마나가 방출되어 놀랐으나 다행히 경보 골렘은 인지하지 못했다.
“뭔 마법이야?”
“탐색 마법이에요. 주변에 심어진 경보 골렘을 확인해 봤어요.”
“표정 보니 알겠네. 많지?”
“네, 징그러울 만큼요.”
용의 마법을 할 줄 안다더니 혜연은 내 생각보다 훨씬 재주가 많았다.
경보 골렘을 확인하고 ‘시야 공유’ 마법으로 내게 보여 준다. 난 사방팔방, 대지와 바위, 하늘과 심지어 ‘공기’에도 심어진 경보 골렘을 보며 질색했다. 적어도 수만 기는 될까 싶었다. 누가 이랬는진 몰라도 대단한 편집증이다. 대체 용성에 누가 침입한다고(나 같은 병신을 제외하고) 빈틈없이 설치해 놨는지. 혹시 몰라 지평선 너머까지 둘러봤지만 경보 골렘으로 가득 찼었다. 빌어먹을 드래곤 스케일을 또다시 느꼈다.
이곳을 지나지 못하면 원장님이 갇힌 곳까지 갈 방법이 없다.
난 머릿속으로 몇 가지 방법을 고민했다.
골렘이 경보음을 내기 전에 모두 파괴하는 것, 동시에 수만 기를 파괴해야 함으로 실패할 가능성이 높고, 성공하더라도 가디언과 싸우기도 전에 지치고 말겠지. 결국 드래곤이 만든 특제 경보 골렘을 속여 은밀하게 지나가야 했는데, 정혜연이 문제다. 야옹이의 힘을 사용하는 난 가능하지만 정혜연은 무리겠지. 아니, 잠깐만.
“난 학습 능력이 없나 봐.”
별안간 나만 가능하면 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머쓱해하며 재빨리 행동에 옮겼다.
은열쇠를 열고, 혜연을 마물원 우리에 보낸 후에.
뒤에서 에옹에옹(날 비웃듯)거리는 야옹이를 안은 채 경보 골렘 덫을 지나갔다.
한 시간이나 걸어야 했지만, 어쨌든 들키지 않고 무사히 지나갔다.
너무나 쉽게.
경보 골렘이 없는, 거대한 녹림이 시작되는 숲의 입구에서 열쇠로 문을 열어 정혜연을 불렀다. 첫 번째 난관이라 부르기에도 민망할 상황이다. 정혜연은 뒤를 돌아보더니 작동하지 않은 경보 골렘들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전 우리에 있을 테니 필요할 때마다 부르시는 게 어때요?”
“포켓몬이냐? 하지만 뭐…….”
난 그게 좋을 것 같아 정혜연을 다시 우리로 보냈다.
*
“숲과 바다를 건너 죽음의 냄새가 나는 곳으로.”
난 거대한 나무와 풀들이 우거진 녹색 수해로 걸어갔다. 거목이 자라 있는 수림은 초록 잎으로 빈틈없이 빽빽하여 걸을 때마다 우지끈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이상하게 햇빛은 화창하게 들어와 숲은 어둡지 않았다. 용성의 숲은 가지와 덩굴이 서로 뒤엉켜 마치 하나로 이어진 듯하여 살아 움직이는 하나의 개체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나 따뜻한 햇볕, 내 발자국과 그 때문에 들려오는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를 제외하면 너무나 고요했다. 숲에 들어온 이후 알 수 없는 괴리감에 불쾌했는데, 난 뒤늦게 깨달았다. 이 숲엔 생명이 없다. 개구리 우는 소리도, 늑대의 울음도, 개미의 사각거리는 소리마저도.
“징그러운 곳이야.”
들풀의 잎이 지구의 나무보다 큰 곳이다.
그러나 언뜻 보면 인적이 닿지 않는 고대의 수해 같아도 자세히 보면 아니다.
기이하게도 아름답게 핀 꽃들은 모두 색깔별로 정렬되어 있어 어느 곳엔 빨간 꽃만, 다른 곳엔 노란 꽃만 피어 있었다. 또한 이처럼 거대하고 많은 나무 중에서도 볼썽사납게 튀어나온 잔가지가 단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고의적으로 다듬은 것 같았다. 분명 ‘대자연’임에도, 마치 누군가가 꾸민 정원 같은 것이다.
난 괴리감과 불쾌함으로 몸이 진득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당장 이 생명이 없는 숲을 벗어나고 싶었다. 풍종도보를 펼쳐 빠르게 수해의 깊숙한 곳으로 달려갔다.
삐리리-
그러나 숲을 벗어나기 전에 난 우두커니 멈춰 섰다.
들려오는 피리 소리에 위를 올려다봤다.
일반적인 상황이 아님에도 난 자연스레 행동했다.
희미하게 피리 소리가 들리는 곳을 가만히 바라보자 점점 소리의 색은 짙어졌고, 이내 대단히 신비하고 우울한 소리가 되었다. 싱그러운 초록 잎과 햇빛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굵은 가지의 위에 그녀가 있었다. 바람처럼 느껴지는 자였다. 형태는 있으나 희미했다. 금발의 인간, 아니 자세히 보니 엘프다.
이곳은 적진이며, 날 기다리고 있던 저자는 적이다.
“풀잎이 내게 이야기한다.”
피리를 멈추고.
엘프가 말했다.
난 엘프의 목소리가 피리 소리와 다를 바 없다고 느껴졌다.
“너로구나.”
엘프가 말했다.
“멍청한 용을 섬기는 자여.”
방금 전까지 바람처럼 희미하고 햇살처럼 밝았던 엘프의 기운이 순식간에 사나워졌고, 난 그제야 그를 적으로 받아들이며, 적의와 긴장감이 피어올랐다.
“위대하신 분들을 대신하여 처벌을.”
엘프의 손에 들린 피리가 짧은 단검으로 변한 순간, 난 왜 이 숲에 ‘생명’이 느껴지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거목이 자라난 수해는 사실 숲이 아니었다. 생명이 살 수 없는 곳이며, 오로지 하나의 명령만을 따르는 심복이었던 것이다. 엘프가 단검을 휘두르자 나무들은 뾰족한 석암이 되었고, 꽃과 풀은 불꽃이, 바위와 흙은 용암이 되어 흘러넘쳤다. 방금까지 초록빛으로 가득했던 수해가 활활 불타는 용암지대가 된 것이다. 난 이 기상천외한 천재지변을 안다. 물론 비교할 수 없이 저 엘프의 힘이 훨씬 강력했지만, 이 힘은 분명 엘프들의 ‘드루이드’였다. 환경과 지리마저 바꾸는 엘프의 힘.
“넌 뭐지?”
난 담담히 내게 쇄도하는 용암을 받아 냈다.
샐러맨더에겐 그저 따뜻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 모습에, 금발의 엘프는 황동색 눈동자로 날 뚫어지게 바라본다.
“내가 묻고 싶은 말인데.”
드루이드를 다루는 엘프지만 그녀에게서 위수는 느껴지지 않았다.
난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하나의 가정이 떠올랐다. 처음 엘프를 보았을 때 어떠한 살기도 기척도 감정도 느껴지지 않았으며, 저자가 가진 기운은 바람과 자연처럼 자연스러웠을 뿐이었지. 마치, ‘위수’처럼.
“어떻게 엘프가… 위수가 된 거지?”
저자, 금발의 엘프는 엘프이며, 또한 위수였다.
엘프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넘실거리는 용암을 모두 닿기만 하여도 불조차 얼어붙는 강렬한 냉기의 빙하로 바꾸었다. 난 아이스독의 힘을 빌려, 부딪혀 오는 빙하를 막아냈다. 저자의 힘은 천재지변과 가깝지만,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만난 것 같다. 내겐 모두 익숙하기만 할 테니까.
*
엘프들은 그녀를 베나 퀸이라 불렀다.
‘정원사’ 구루Guru의 가디언이자 엘프들의 여왕은 엘프하임을 구한 영웅이었으나 아득한 빛에 타락하여 세계수를 삼켜 스스로 위수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왕의 육체는 어떤 환경에도 동화되어 상처 입지 않으며, 들고 다니는 단검은 세계수가 형태화된 무기로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천재지변을 일으키며 행성의 기후마저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강대한 힘을 얻었지만 베나 퀸은 정작 목적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세계수를 배신하고 용의 권위를 택한 그녀는 영원히 정원사의 가위가 되어 이용될 운명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오랜 세월이 지난 어느 날, 제 주인이 동면에 들어 가디언의 책무를 수행하던 베나 퀸은 풀잎이 재잘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베나 퀸은 누구보다 빨리 침입자의 존재를 눈치챘으나 다른 이들에겐 알리지 않았다. 드래곤의 가디언이 가지는 지위의 책임감과 오만함 때문이었다. 정원사의 힘에 가장 강렬히 영향을 받는 숲에서 베나 퀸은 기다렸다. 고향에서 즐겨 부르던 동요를 피리로 연주하며 침입자가 다가오기를.
‘저자는 제 ‘주인’을 위해 스스로 사지에 들어왔다.’
마침내 그자가 나타났으나 베나 퀸은 우선 숲에 침범한 인간을 조용히 관찰했다.
과연 강한 자였다.
그래서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만약 자신에게 자유가 주어진다면?
베나 퀸은 절대 그처럼 어리석은 선택은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위대하신 분들을 대신하여 처벌을.”
모습을 드러낸 베나 퀸은, 지금까지 수도 없이 그래 왔듯 무심하게 침입자를 처벌하고자 했다. 스스로 세계수가 되니, 그녀는 의지만으로 환경을 조정할 수 있었다. 숲을 살점을 가진 자는 모두 맹렬히 불태우고 마는 용암지대로 바꾸어 그를 공격했다. 숨 쉬는 공기마저 자신을 해하려 드니 아무리 용의 가디언이라지만 기껏해야 몇 년의 시간만을 ‘견뎠을’ 저자는 결코 버틸 수 없을 거라고 여겼다.
“넌 뭐지?”
하지만 침입자는 아무렇지 않았다.
어떤 힘으로 막아 낸 것도 아니며, 버틴 것도 아니다.
마치 원래부터 용암에서 사는 존재인 듯 대수롭지 않게 고열의 공기를 마시며 용암 속에서 헤엄쳤다. 오랫동안 살아온 베나 퀸이라도 저자의 정체를 알 수 없어 표정을 구겼다.
“어떻게 엘프가… 위수가 된 거지?”
그러다 저 알 수 없는 존재가 엘프들만이 아는 지식을 이야기한다. 그러자 베나 퀸은 저자의 입에서 나오는 고향의 단어들에 이유 없이 화가 났다. 또한, 이미 고향을 등진지 수백 년은 지났음에도 화가 난 자신에게 더더욱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죽어라, 불경한 자야.”
극열의 환경이 아무렇지 않다면 정반대의 환경에 노출하면 될 터.
베나 퀸은 솟구치는 용암을 모두 극한의 냉기를 뿜는 빙하로 바꾸어 그에게 천벌을 내렸다. 하지만 그마저도 너무 쉽게 버텨 내자 베나 퀸은 그제야 서서히 그 안에 있는 무언가의 존재를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있을 수 없다. 넌… 넌 마치 나와…….”
믿을 수 없는 상황에 혼란스러워하던 베나 퀸이 침입자에게 무수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극열과 극한, 가득한 햇빛과 어두운 세계, 독이 꿈틀거리는 오염된 지대와 과포화된 산소와 살갗을 벗겨 내는 삭풍의 세계마저 그에겐 통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그의 몸에서 더더욱 그것의 힘은 강렬해지기만 할 뿐이었다.
베나 퀸은 절규하듯 소리쳤다.
“넌 대체 무엇이더냐!”
있을 수 없었다.
있어선 안 되었다.
설마.
감히.
저자 또한 세계수를 삼킨 배덕자란 말인가?
베나 퀸의 혼란을 비웃듯, 결국 침입자의 몸에서 무언가가 나타났다.
처음 보는 형태이나 베나 퀸은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제 안에 있는 세계수가 애타게 부르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계수. 또 하나의 세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