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8화 가디언즈 (6)
[허미, 이게 다 뭐당가?]
“왜 갑자기 사투리를 쓰고 그래. 오랜만이야. 잘 잤냐?”
[어따, 오래 자부렸서야.]
난 명색이 자자한 용의 가디언을 앞에 두고도 능청스럽게 무시하며 깨어난 단비와 대화를 나눴다. 어찌 된 모양인지 위수와 엘프가 하나가 된 놈의 힘이 주변을 어지럽힐수록, 오랜 잠이 들었던 단비가 서서히 눈을 뜨더니 지금처럼 내 몸에서 나오기까지 했다.
[워메, 아직 더 자야하는디, 으쩔 수가 없는 겨. ‘내 아이’가 저리 고통받으니 우짜스까.]
잠에서 깬 단비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엘프를 쳐다봤다.
최초의 세계수인 단비라면 저자를 알지 않을까?
“저놈, 아는 놈이냐?”
[쪼까 알지예.]
“사투리 좀 그만하고…….”
[점마, 나쁜 년이라예. 내 아이를 잡아묵은 도둑년이라예.]
단비가 말했다.
엘프의 몸에 세계수의 씨앗이 느껴진단다. 아마 어떤 강제적인 힘으로 세계수를 삼키고, 스스로 가짜 세계수가 된 것 같다고 했다. 설명을 들으니 대충 알 것 같았다. 놈은 나와 비슷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난 단비의 ‘둥지’였고, 놈은 강제로 잡아먹은 것이다.
“놈, 인간이 다루기엔 과분한 힘이다. 저… 걸 넘겨라. 저것만 있다면. 난, 난!”
단비가 나온 이후 굉장한 걸 본 듯한 표정을 한 채 멍하니 서 있던 놈이 갑자기 발작하듯 소리치며 덤벼들기 시작했다. 놈은 단검을 내게 겨누었다. 또 용암이나 쏟아지겠지 싶었는데, 이상한 흡입력이 발생하더니 마치 자석처럼 내 몸을 서서히 끌어당기기 시작했다.
“여왕이 바라니, 세계수는 맹약에 따라 내게 오라.”
집중해 보니 내가 아니라 단비를 끌어당기고 있음을 깨달았다. 당황하여 단비를 붙잡으려고 했으나, 황금 원숭이 위수, 세계수 단비는 대범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사래를 쳤다.
[나 혼자 하마.]
사투리에서 어느새 근엄한 말투가 돼 버린 단비는 놈에게 끌려가는 와중에도 엄격, 진지한 표정으로 근엄함을 잃지 않았다. 마침내 단비가 놈의 손에 잡힐 듯 가까워졌을 때였다.
희열에 찬 표정으로 단비를 향해 손을 뻗던 가디언은 갑작스레 휘둘러진 단비의 손바닥에 뺨을 세차게 맞았다. 위수는 보통 저런 물리력을 가질 수 없지만, 놈도 위수라서 그런지 정말 찰지게 타격이 들어갔다.
[더러운 것이 어딜. 네 안에 있는 씨앗, 내놔 도둑년아!]
그뿐만이 아니다.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리며 욕하던 단비가 갑자기 놈에게 달려들었다. 단비는 금발 엘프의 몸에 들어가 버렸는데, 이내 놈의 눈깔이 뒤집어지더니 심한 구토를 하기 시작했다. 난 마치 피콜로 대왕이 알을 낳는 듯한 괴상망측한 꼴에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오, 무슨 짓을 하는 거냐. 단비야.
난 용기를 내 놈을 쳐다봤다.
놈의 입속에서 반쯤 나온 건 나무줄기였다.
생각보다 더 역겨운 장면에 나까지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오오, 나온다 나와…….”
근데 계속 보다 보니 어딘가 시원한 느낌이 들었다.
난 마치 반쯤 걸린 굵은 똥처럼 놈의 입속에서 천천히 나오고, 들어가길 반복하는 나무줄기를 보며 얼른 배설해 버리라고 응원까지 하고 싶었다. 힘을 줘, 힘을. 묵은 똥을 모두 쏟아 내는 거야.
크흡!
하지만 갑자기 정신을 차린 놈이 벼락 같은 고함을 내지르며 줄기를 다시 제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똥을 싸다 말고 다시 들어가는 건 보기에도 대단히 불쾌하고 찜찜했다.
“뭐 해, 빨리 싸!”
“다… 닥쳐라! 크흡, 난 일찍이 엘프하임의 영웅이자 여왕, 네… 네까짓게 내 지배력을 앗아 가려 드느냐?”
나무줄기를 삼킨 채 우악스러운 표정으로 몸을 떨던 놈은 딱 봐도 몸 상태가 좋아 보이진 않았다. 그래, 아무리 생각해도 똥 마려운 사람 같았다.
쿠와아악!
예상대로 놈은 결국 참지 못하고 나무줄기를 다시 뱉었으나, 이번엔 꽤 간단히 다시 삼켰다.
“지배력을……!”
그건 ‘방심’이었다.
한 번 참아 냈다고 방심하면 더한 복통이 몰려오는 것과 같은 이치다.
방심하던 놈은 순식간에 쾌변, 아니 나무줄기를 모두 다 뱉어 냈다.
그와 동시에 놈의 몸에서 튀어나온 단비는 개운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엄지손가락을 추켜올렸다. 변비약 같은 새끼.
“그걸 왜 처먹느냐.”
단비가 자랑스러웠으나, 이내 땅에 떨어진 나무줄기를 단비가 주워 먹자 난 표정을 찡그리며 고개를 돌려야 했다. 물론 역겹거나 더러운 장면은 아니지만, 비유와 생각을 그렇게 해 버린 모양이라 기분상 대단히 불쾌했다.
“시원하냐?”
몸에 있던 거대한 나무줄기를 뱉어 버린 놈은 허망한 표정으로 단비를 바라봤다.
놈은 무엇인가 아는 게 있는지 단비를 보며 아주 작은 목소리로 ‘최초의 나무’라고 했다.
아마 단비는 놈의 몸에 있던 세계수를 뽑아냈겠지.
놈이 세계수를 잡아먹을 만큼 강하다고 해도 원조는 역시 못 이겨.
“어떻게 한다.”
승부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놈은 약해졌다.
위수도 뭣도 아닌 엘프다.
드루이드의 힘도 사용하지 못하는 평범한 엘프이기에 난 대충 몇 개월 동안 움직이지 못하도록 중상만 입히려고 생각했다. 어쨌든, 놈 덕분에 단비가 더욱 자라난 것 같으니까.
“…필요 없다.”
그러나 놈은 전의를 잃지 않았다.
난 희미하게 느껴지던 ‘위기감’이 놈이 힘을 잃고 나서 오히려 더욱 따갑고 거세지는 걸 느꼈다. 바늘로 피부를 콕콕 찌르는 듯한 위압감을 내는 놈.
“시벌, 그럼 그렇지.”
용의 가디언이다.
나처럼 숨기고 있는 수는 있었겠지.
난 엘프의 등 뒤에 나뭇가지와 풀로 이루어진 날개가 돋아나는 걸 바라보며 인생사 쉽게 되는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
베나 퀸은 이제 엘프도, 위수도 아니었다. 등에 돋아나는 신록의 날개는 그가 가디언으로서 자신의 영혼을 주인에게 헌신한다는 증거이자, 드래곤이 베나 퀸에게 내린 저주이며 속박이고, 축복이자 힘이었다. 베나 퀸은 본래의 성질을 잃어버렸다. 엘프들의 위대한 영웅이었던 베나 퀸의 모습은 마치 작은 용과 같아졌다.
[생명은 성장하며.]
용의 힘에 억눌려 이지를 잃은 베나 퀸은 엘프의 언어를 잃고 짐승의 말을 하였다.
그러나 다정은 그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오히려 그가 입으로 말을 내뱉을 때마다 더욱 많은 정보를 얻었다. 다정은 그녀가 ‘베나 퀸’이라는 존재이며 엘프들의 영웅으로서 어떤 삶을 살았는지 깨달았고, 또한 어떻게 변해 갔는지도 알아차렸다.
일시적인 교감이다. 정원사가 가진 기이한 힘이 베나 퀸을 짐승으로 만드는 탓에 다정은 본의 아니게 베나 퀸을 알게 되었다.
‘짐승이 되었다.’
정다정은 베나 퀸이 날개 달린 짐승이 되었음을 알았다. 다시 돌아올 방법 따윈 없어 보였다. 베나 퀸은 침입자를 죽이기 위하여 자신을 포기했다. 세계수를 뺏긴 굴욕과 비애 때문일까, 다정은 날개 달린 짐승을 보며 마른 입술을 깨물었다.
[또한, 저물어 간다.]
짐승의 말이 끝나자 숲이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모습은 매우 기이했다. 먼지가 되어 사라지는 게 아니었다. 소멸하는 게 아닌, 마치 시간이 거꾸로 흐르는 듯 느껴졌다. 거목은 작은 줄기가 되어 이내 흙으로 돌아가 씨앗이 되었다.
꽃잎은 시들지 않았지만, 점점 작아져 꽃봉오리가 되고, 싱그러운 풀잎들 또한 사라졌으나 낙엽이 되는 게 아닌, 작아져서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더는 돋아나지 않게 되었다. 숲의 변화를 목격하던 다정은 이윽고 날개 달린 짐승의 기묘한 힘이 자신에게 닿았음을 깨달았다.
몸이 작아진다. 굵은 손은 여리게, 단단한 정강이뼈는 무르게, 피부는 어린아이처럼 약해졌고, 머리털은 가늘어진다.
“벤저민 버튼이냐, 시벌.”
농담을 했지만, 사태가 심각함을 모르진 않았다. 다정은 점점 어려지는 자신의 몸을 지켜봤다. 전에 이와 비슷한 힘에 당한 적이 있었다. 검은 뿔의 악마, 놈이 가진 퇴화의 힘. 그땐 몸을 노화시켰으나 저 짐승의 힘은 아예 ‘처음’으로 되돌리고 있다.
“아껴두려고 했건만.”
수백 년간 곧게 뻗어 있던 거목 마저 순식간에 씨앗으로 되돌린 힘이었으나 다정에게는 더디게 나타났다. 그가 천계에서 먹은 반도의 덕이다. 겉모습은 인간이나, 다정의 수명은 천 년이 넘었다. 그러나 곧 수명은 사라지고 다정의 존재는 시작 선에 닿을 것이다.
하지만 다정은 어려지는 와중에도 별다른 저항은 하지 않았다.
그때와 비슷했다. 다정은 그릇이 점점 작아질수록, 그림자가 짙어짐을 느꼈다. 눈이 보이지 않고, 귀가 들리지 않고, 손발이 움직여지지 않는 갓난아이가 되었음에도 그것의 힘은 상관없이 깃들었다.
다정은 얼마나 많은 적을 상대해야 할지 모르기에 정신을 잃을 위험을 최대한 늦추고 싶었다. 그러나 별수 없이 타의에 의해 그 힘을 받아들여야 했다. 작아진 다정, 그 때문에 깨어난 검은 짐승의 그림자는 어린 다정을 휘감았고, ‘본체의 모습’에 상관없이 검은 짐승은 크고 매서웠다. 날개 달린 짐승은 포효하며 저항하지만, 덤벼드는 검은 짐승의 이빨에 속수무책이었다. 날개를 뜯고, 살점을 도려내고, 핏물로 입을 적시며 검은 짐승은 날개 달린 짐승을 마구 헤집어 놓았다.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임팔라처럼 저항할 수 없었다. 검은 짐승의 잔인한 포식이 멈춘 건 날개 달린 짐승이 용의 힘을 더는 유지하지 못했을 때였다. 힘이 거둬지자 다정은 다시 원래의 젊은 남자로 돌아왔다.
퉷!
다정은 몸을 흠뻑 적신 핏물을 털고 입에 고인 살점을 뱉어 냈다.
이번에도 기억은 또렷했다. 이빨에 씹히는 살점의 감촉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카악 퉤! 젠장, 이에 끼였나 봐.”
오히려 기억하지 못했을 때가 더 낫다고 생각한 다정이었다. 포악한 검은 짐승의 이빨은 살인마처럼 잔인하고 무자비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무서운 건 검은 짐승이 된 자기 자신은 그 잔혹함에 희열을 느끼며 즐기고 있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후.”
다정은 한숨을 내쉬며 죽어 가는 베라 퀸을 내려다봤다.
목에 새겨진 깊은 이빨 자국에서 피가 울컥울컥 쏟아지고 있다. 죽음을 앞둔 베라 퀸은 신수도, 용의 짐승도, 가디언조차 아니었다. 그저 붉은 피를 흘리는 엘프에 불과했다.
‘망할 교감.’
그가 이지를 버리고 짐승이 되었을 때부터 다정은 그와 희미하게 연결이 되어 그의 삶을 잠시나마 엿보았다. 그래서 조금 전에 만나 서로 목숨을 노리던 적인 베라 퀸이 마치 친숙한 친구처럼 느껴졌다. 그가 엘프들의 영웅이 되고, 배신하고, 용의 가디언이 된 모든 순간의 기억들이 파편처럼 뇌리에 박혀 잊혀지지 않았다. 다정은 그의 마지막 정도는 지켜봐 주리라 생각했다.
“그대, 질문이. 질문이… 하나… 있… 다.”
죽음, 그 앞에 선 엘프는 발악하며 삶의 끈을 붙잡았다.
단지 단 하나의 질문 때문이었다. 베라 퀸은 핏물로 가득한 목구멍 때문에 헐떡이며 간신히 쥐어짜 내듯 말을 내뱉었다.
“드래곤… 따위를 구하는 이유가… 궁금하다. 대답은… 아… 하하…….”
자신을 죽인 자에게 질문을 던지던 베라 퀸은 문득 실소가 나왔으나, 기운이 빠져 웃지도 못하였다. 지금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죽이려고 했던 상대에게, 죽임을 당한 주제에 넉살 좋게 질문이나 하는 꼴이란. 베라 퀸은 결국 미련을 버리고 죽음을 기다렸다. 순식간에 그녀의 황동색 눈동자엔 회색빛이 차올랐다.
“뭐가 궁금해.”
하지만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움찔거리며 베라 퀸은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를 쳐다봤다.
베라 퀸이 말했다.
“그대는… 가디언의, 저주에서 벗어날 기회임에도. 어리석은 선택을… 왜……?”
남자는 정말 대수롭지 않게, 호탕하게 느껴질 만큼 간단하게 대답했다.
“그야 뭐, 좋아하니까?”
단지 그 이유 하나 때문에 저 남자는 드래곤들이 잠든 용성에 침입하여 세계의 패자였던 가디언을 상대로 죽음을 불사하며 상상할 수 없는 고난의 길을 걷고자 했단 말인가?
“미친… 놈.”
전력을 다해 욕설을 내뱉었으나, 베라 퀸은 문득 옛날 일이 떠올랐다.
무너지는 엘프하임을 바라보던 한 소년, 소년은 왜 수많은 고난을 감내하며 영웅의 길을 걸었지?
“좋아하니까… 라고.”
뛰어노는 위수, 웃는 아이, 날 바라보는 남자.
지키고자 했었던, 좋아하는 것.
아득히 높은 왕좌, 휘몰아치는 힘, 퍼덕이는 날개.
그 덧없는 걸 차지하고자 버렸던 것들.
내게 행복이란 진정 무엇이었지?
“킥… 킥킥킥!”
베나 퀸은 웃었다.
그러자 그녀가 누워 있는 핏물 가득한 자리에서 작은 꽃들이 피어나기 시작했다.
“그것참 숭고한 이유로구나. 그때의 난 전혀 이해하지 못했을 이유야. 그리고… 그들도… 결코… 킥킥.”
웃음이 멎고, 황동색의 눈은 감겼다.
정다정은 죽은 베라 퀸을 땅에 묻어 주고 가던 길을 서둘렀다.
휘이이!
그러다 어디선가 따듯한 바람이 부는 걸 느꼈고, 뒤를 돌아본 다정은 베라 퀸을 묻은 무덤에 앉아 있는 작고 노란 토끼를 발견했다. 잠시 묵묵하게 우두커니 서서 토끼를 바라보던 다정은 은열쇠를 열어, 위수들이 뛰어노는 둥지로 토끼를 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