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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251화 (251/258)

#251화 가디언즈 (9)

그는 이름을 대신하여 자기를 수식하는 호칭들을 말했다.

난 그 이유를 알았기에 나름의 정성을 다해 날 소개했다.

“난 원장님의 충실한 부하이자 월급쟁이. 또한, 오래전 기란성 혈맹의 군주였던 자다.”

놈은 내 말에 크게 껄껄 웃으며 소리쳤다.

“농인 걸 안다. 하지만 날 무시하는 게 아님도 안다. 재밌는 사내여, 적수를 만나 참으로 기쁘다. 파하하하!”

땅을 가르며 휘둘러지는 놈의 대검에, 나도 입꼬리를 올렸다.

* * *

정혜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검과 검이 부딪힐 때마다 살점이 떨어지고, 피가 솟구친다.

그럼에도 둘은 웃고 있다.

목숨이 언제 달아날지 모르는 두려운 싸움, 맹렬한 격돌에도 둘은 웃음을 잃지 않았다. 적의 검이 어깨를 잘라 뼈를 드러내도 웃고, 갑옷마저 잘라 허벅지를 도려내도 웃었다. 둘의 싸움은 서로 반드시 죽이겠단 일념으로 가득하여 저열한 짐승들의 싸움처럼 격렬하고 잔인했다. 그러나 정혜연은 시간이 지날수록 저 처절한 투쟁이 어딘가 숭고하다고 느껴졌다.

정혜연은 곧 깨닫는다.

그들의 싸움은 너무나 순수했다.

악의가 없다. 숨김이 없다. 거짓도 없다.

오로지 서로의 목을 베어 내기 위해 검을 휘두른다.

“저럴 필요 없는데. 대체 왜?”

정혜연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내뱉었다.

거대하고 무거운 검을 가볍게 휘두르는 오크.

하지만 그에 맞서는 자는 인간이며, 그는 굳이 저렇게 싸울 필요가 없었다.

순간 어리석다고 생각했다. 저리 처절하게 싸운다면, 이겨도 상처가 남는다.

콰직!

하지만 정혜연은 오크의 마지막 모습에서 그가 저리 처절하게 맞선 이유를 눈치챘다. 결국, 오크는 패배했다. 하지만 죽어 가는 그의 표정은 죽음을 앞둔 자라기엔 너무 쾌활하고 밝았다.

“내 심장과 피를 네 길에 보태 마.”

혜연은 비틀거리는 몸을 가까스로 유지하는 다정을 바라봤다. 그는 승자였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웠지만 ‘패자’에게 약한 모습은 보여 주지 않았다. 혜연은 결국 알아차렸다. 그의 이름만큼, 그는 다정한 남자였기에 어리석은 선택이라도 기꺼이 감수한 거야.

* * *

난 그의 심장에 꽃은 검을 잠시 내려놓고, 은열쇠를 꺼냈다.

마치 포를 뜬 듯 몸의 살점들이 잘려 나가는 것같이 아팠지만 놈의 마지막에 꼭 해 두고 싶은 게 있었다. 열쇠를 꽂은 문은 미처 오크 라덴으로 돌아가지 못해 마물원에서 관리하던 워라이언 우리의 문이었다. 문이 열리자 일곱 마리의 워라이언들이 으르렁거리며 문을 넘어왔다. 워라이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줄지어 오크 가디언의 주변을 둘러섰다. 그러곤 웅장한 갈기를 지닌 전쟁의 사자들이 동시에 울부짖었다. 영혼마저 흔들리는 깊은 울음소리였다.

“명예롭고… 안락한 죽음이다.”

난 다시 검을 쥐었다.

“고맙다.”

그리고 힘껏 뽑았고, 오크 가디언의 눈엔 생기가 사라졌다.

워라이언들은 한참 동안 위대한 전사를 위해 울부짖다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난 그들이 어디로 갔는지 알 것 같았다.

‘여덟 마리’의 워라이언들이.

난 오크 가디언의 검을 그의 곁에 두다가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넘어졌다. 젠장, 기력이 없어 어지럽다. 몸 상태는 말이 아니다. 난 오크 가디언을 내려다보다가, 결국 힘을 사용했다. 봉황의 기가 몸에 깃드니, 깊은 상처를 제외하곤 순식간에 치료되었다. 깊게 베인 상처도 얼마 지나지 않아 깔끔하게 낫겠지. 격전 중에 사용했다면 더 수월했을 테지만 뭐, 사나이가 자존심이 있지.

난 그를 묻어 주지 않았다.

오크가 아닌 내가 이런 생각을 하는 것도 우습지만.

아마 그는 땅에 묻히긴 싫어할 것이다.

그의 곁에 대검만을 놓아둔 채 난 등을 돌렸다.

* * *

바다를 건너는 방법은 많았지만, 힘을 아껴야 하는 지금 상황으론 이동 골렘이 제격이었다. 나와 혜연은 우리에 넣어둔 골렘을 꺼내 용성의 바다를 건넜다. 난 골렘에게 부딪혀 일어나는 물보라를 바라봤다. 역시, 용성의 바다는 평범한 바다가 아니었다. 바닷물이 짙다 못해 수은처럼 느껴졌다. 안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기운도 전혀 느껴지지 않아 바다 안에 뭐가 사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기분 나쁜 고요함을 제외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몇 시간 동안 찰랑거리는 물보라만 바라보며 바다를 건널 때였다.

변화는 급격하게 찾아왔다.

순식간에 주위를 감싸는 안개.

혜연이 마법을 펼쳤지만 소용이 없었다.

사방이 안개에 가려 볼 수가 없었다. 기이한 안개였다.

시벌, 올 게 왔구나.

라라라.

긴장을 늦추지 않고 다가올 위험에 대비할 때, 뜻밖에도 노랫소리가 들려왔다. 넘실거리는 바다처럼 풍부하고 소라 피리처럼 고운 미성의 목소리로, 우울하고 슬픈 멜로디의 노래를 부른다. 난 안개 사이에서 들려오는 노랫소리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노래를 듣자마자 난 누가 저리 구슬프게 부르는지 알아차렸다. 빌어먹을, 엘프에 오크에 이어서, 이젠 인어냐?

* * *

정혜연을 정신을 잃었다.

평범한 노래가 아니다.

인어의 노래엔 기억과 감정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감정은 반용의 힘을 지닌 혜연의 정신조차 버틸 수 없었다.

난 혜연의 눈가를 닦아 줬다.

녀석은 쓰러진 채로도 눈물을 흘렸다.

“그만.”

짙은 안개 속에서 들려오는 노래는 너무나 우울하여 나조차 절망스럽게 느껴졌다. 저자의 노래는 듣는 이의 가장 슬픈 기억을 자극했다. 난 어렴풋이 떠오르는 ‘그날’의 기억을 다시 머릿속에 가두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았다. 내겐 이런 힘은 통하지 않는다. 정신을 괴롭히고 의지를 속이는 힘. 난 문득 이 상황이 유럽의 신화와 같다고 느껴졌다. 아니, 확실하다. 뱃사람을 유혹하여 잡아먹는 세이렌의 노래. 직접 만난 세이렌들은 그런 존재는 아니었지만, 저 구슬피 우는 인어는 달랐다.

라라라.

“끄으으!”

쓰러진 채 슬피 울던 정혜연은 이내 발작하기 시작했다. 젠장, 이대로 두면 그녀의 여린 정신은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기감을 밝혀도 도무지 놈이 있는 곳을 알 수가 없었다. 여러모로 가장 성가신 적이었다. 일단 혜연을 돌려보내야 할 것 같아 은열쇠를 꺼냈다. 그러곤 ‘문’을 떠올렸는데, 인어의 노래를 듣고 있는 탓인지 마물원 내부에 마련된 그들의 ‘터전’이 생각나고 말았다. 문을 열자, 안에서 재잘거리는 ‘세이렌’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아…….

그 순간, 노랫소리가 바뀌었다.

구슬픈 노래는 분노의 비명이 되었고 비명은 내 귓구멍을 파고들어 뇌를 마구 헤집어놓기 시작했다. 머리가 찌르듯이 아파져 저항하고자 했으니 밀려드는 ‘기억’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많은 걸 보여 주기 시작했다.

“넌…….”

난 기억 속에서 그녀의 정체를 읽어 냈다.

옛날 옛적에.

어떤 나라의 왕자님은 물속의 인어공주와 사랑에 빠졌지만.

결국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인어공주는 사랑하는 왕자님의 손에 죽고 말았다.

“배신당한 인어.”

세이렌들이 전에 내게 보여 줬던 ‘첫 만남’의 인어가 그녀였다. 기억에서의 마지막은 죽음이 끝이었으나, 사실 인어공주는 죽음의 갈림길에서 살아남았다. 첫 만남 이후, 인간에 대해 알게 된 인어들은 수도 없이 사랑을 갈구해 왔지만, 수도 없이 배신을 당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인어공주는 자신에 의해 생겨 나간 저주의 고리를 원망하였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인어와 인간의 사랑이 시작되는 걸 막고 싶어 했다.

그때, 마녀가 공주에게 접근하니.

마녀가 말한다.

‘당신의 소원을 이루어 드릴 테니, 나의 부탁을 들어줘요.’

공주는 제안을 수락했고, 소원은 이루어지게 되었다.

‘인어들이 모두 죽음으로서.’

공주는 그 사실을 알았음에도 마녀에게 저항할 수 없었다.

그렇게 공주는 마녀의 종이 되었고.

마녀의 이름은.

‘가르치는 자’ 가나(Gana)였다.

* * *

현존하는 인어들은 세이렌에 의해 지켜졌던 소수의 인어였다.

난 모든 사실을 알았다. 인어의 비극엔 드래곤도 연관되어 있었다. 왜 원장님이 그들이 오만하다며 치를 떠는지 알았다. 공룡도 그렇고, 안 끼는 데가 없다. 난 노래를 통해 겹쳐진 기억으로 그녀에 대해 알았다. 구슬픈 노래를 부르는 인어는 배신으로 점철된 삶을 살아왔다. 그것도 수천 년 동안이나. 듣는 것만으로도 자결로 이끄는 강력한 원한이 담긴 노래, 그 노래에 담긴 원통함이 이해가 갔다. 하지만 이대로 가만둘 수는 없었다.

‘세이렌의 지저귐에 반응했지.’

난 우리를 열어, 녀석들을 불러 냈다.

기억의 마물들이 용성에 나타나자 노래가 뚝 멈춘다.

[바다님!]

[바다님, 고마워요.]

[바다님.]

세이렌들은 내가 무어라 말하지 않아도 모든 걸 알았다.

녀석들은 내게 고맙다고 말하며 날개를 퍼덕거리더니, 이내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난 잠자코 녀석들이 하는 행동을 지켜봤다.

라라라~

노래가 다시 들려왔다.

구슬픈 인어의 노래가 아닌.

신나고 즐거운 세이렌의 노래였다.

노래는 한참 동안 이어졌지만, 난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기절했던 정혜연도 정신을 차렸다. 혜연은 눈물을 닦으며 우울해하다가 이내 세이렌들의 노래에 표정을 밝혔다.

잠시 후, 안개가 걷혔다.

비로소 안개에 가려져 있던 풍경이 드러났다.

우린 이미 건너편에 도달한 후였다.

다만 해안가의 작은 돌섬에 누운 인어의 노래에 발이 묶였을 뿐이었다.

라라라~!

세이렌들에게 둘러싸여 즐겁게 노래를 부르는 인어는 방금까지 그토록 원한 서린 비통한 노래를 부른 여인이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나와 혜연은 가만히 그들을 지켜봤다. 노랫소리엔 어떤 마력도 담겨 있지 않았지만, 무척이나 아름답고, 즐겁고, 포근하다고 느껴졌다.

한참 동안 노래를 부르던 인어는 갑자기 날 보며 고개를 숙였다.

[고마워요.]

마지막으로 인어는 활짝 웃고, 물거품이 되어 바다에 흩어졌다.

정혜연이 말해줬다. 인어를 묶어 두고 있던 건 드래곤의 마법이었고, 자세히는 모르겠으나 마법을 유지하던 무언가가 사라졌기에 일찍이 수명을 다해 죽어야 했던 인어는 자연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난 내게 날아온 세이렌들에 의해 마법을 유지하던 무언가가 뭔지 알았다.

[바다님, 바다님. 그녀는 더는 슬프지 않아요.]

[고마워요. 바다님.]

세이렌들은 보여 줬다.

용의 가디언에게.

그동안 달라진 인어들의 모습을.

그녀가 바라던 건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어쩌면 사람과 인어가 진정 사랑을 이루는 건, 이룰 수 없는 바람이라고 생각했기에 그럴 마음조차 가지지 못했는지도 모르지. 이토록 쉬이 ‘원한’이 씻겨 나가 드래곤의 마법이 풀린 걸 보면 말이다.

[그녀가 줬어요. 바다님!]

세이렌 중 하나가 무언가를 부리로 물고 왔다.

새까만 진주가 박힌 반지였다.

내가 반지를 받아들자 링은 가루가 되고 흩어지고 진주만이 남았다.

아마 처음엔 새하얀 백색의 진주였을 것이다.

대체 얼마 동안, 원한으로 품었으면 이토록 검게 변할까.

조용히 진주를 바라보던 난 어깨를 으쓱하고 한입에 삼켰다.

부정적인 에너지로 가득했지만, 어쨌든 에너지는 에너지.

난 무리 없이 힘을 받아들였고, 오히려 용성에 처음 건너왔을 때보다 더 충만한 마나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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