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2화. 가디언즈 (10)
은열쇠로 마물원의 우리를 열어 골렘을 두고 해안선을 따라 첨벙첨벙 걸어 올라갔다. 젖은 옷은 해안가를 벗어나기도 전에 다 말랐다. 딱히 내가 뭘 어떻게 한 건 아니다. 다만 용성의 중심부로 갈수록 몸을 휘감는 강렬한 마력들이 더욱 거세졌고, 내 몸은 저항하며 스스로 힘을 발산시켰다. 동면 중임에도 이토록 강력한 마력을 내뿜는 드래곤 때문인지, 아니면 드래곤의 가디언들이 뿜어내는 힘인지는 모르겠으나 확실한 건 원장님은 숨 쉬는 것조차 텁텁하게 느껴지는 강대한 마나의 중심에 갇혀 있다는 것이다.
“시벌, 딱 봐도 저기네.”
그리고 굳이 찾지 않아도 그곳이 어딘지는 알 수 있었다. 해안가에서 올라오자마자 보였다. 아직 멀리 있지만, 육안으로도 확연히 보일 만큼 거대한 성이었다. 돌 따위로 세워진 성이 아니라 크리스탈 유리로 만들어진 듯했다. 성은 가끔 햇빛이 반사되며 태양처럼 엄청난 빛을 내뿜었는데, 빛은 주변 일대를 환하게 밝히다 못해 활활 태우기까지 했다. 난 저곳은 절대 몰래 숨어 들어갈 만한 곳이 아님을 깨달았다. 야옹이의 힘을 빌려 기척을 숨긴다 해도 허허벌판에 우두커니 세워진 크리스탈 성의 발광은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난 언뜻 환상적으로 느껴지는 크리스탈 성을 보며 문득 동화가 생각났다. 지금 내 꼴이 마치 ‘성에 갇힌 공주님’을 구하러 가는 왕자 같다. 적을 물리치고,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열의를 불태우는 정의로운 왕자님. 물론 현실은 공주는 사실 무시무시한 드래곤이고, 왕자는 정의감 따위가 아닌 공주의 환심을 사기 위해 발버둥 치는 머저리니 말도 안 되는 엉터리 동화지만.
난 괜히 이 이야기의 끝을 짐작하지 않으려고 했다. 동화처럼 아름답게 끝나진 않을 테고, 가슴 아픈 비극으로 끝맺거나 정말 생뚱맞게 공주님이 마왕을 물리치고 왕자님을 구할 수도 있을 테지만, 어쨌든 내가 하기에 달린 것이다. 젠장, 조금만 기다리쇼. 원장님.
*
용성엔 밤과 낮이 없어서 이곳에 온 뒤로 시간이 얼마만큼 흘렀는지 알 수 없었다.
갑자기 태양이 쨍쨍하다가 몇 발자국을 걸으니 밤이 찾아오고, 평평한 길을 걷다가도 발바닥 아프게 가시와 바위가 솟아난 협곡이 나오기도 했다. 드래곤의 기운으로 뒤죽박죽된 용성은 정해진 환경이란 게 없었다. 춥다가 덥고, 눈 내리다가 태풍 온다.
하지만 주변 환경이 일정하게 바뀌는 순간이 있었다. 난 이제 안다. 오히려 수시로 바뀌는 환경이 훨씬 낫다는 걸.
환경이 고정되는 현상, 그건 유독 강렬한 기운이 주변을 지배하기에 가능한 현상이다.
예로 들어 엘프 가디언의 힘으로 숲을 유지했고, 검은 대지는 수만 악마들의 흔적이었으며, 경우는 다르지만 수만 악마의 피로 인해 오크 가디언이 나타났었고, 바다의 안개는 인어 가디언에 의해 발생했었다.
“이번엔 또 뭐야.”
그러니 저 앞, 펼쳐진 썩어 가는 땅에는 용성의 환경을 고정하는 강력한 힘을 지닌 존재가 있다는 뜻이다.
우린 긴장하며 썩은 땅을 걸었다.
“불길한 곳…….”
코가 밝은 정혜연은 썩은 땅에 들어온 이후로 불안해했다. 나 또한 땅에 깃든 악취와 악의를 느꼈다. 얼마나 깊은 악의로 땅을 오염시켰으면 흙과 바위조차 썩어 버렸을까. 진흙처럼 불쾌한 썩은 땅의 감촉을 느끼며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분명 이곳에 있다. 빌어먹을 용의 가디언이.
후우.
오염된 땅을 걸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썩은 진흙으로 이루어진 야트막한 언덕을 넘었을 때, 바위에 걸터앉은 채로 우릴 바라보고 있는 자가 보였다. 난 한숨을 쉬며 언덕을 내려왔다. 그리고 시선은 그에게 고정하며, 천천히 걸어갔다. 가까워지고 있으나 그의 힘은 드러나지 않았다. 읽으려고 해도 읽을 수가 없었다. 정혜연을 돌아보니 녀석도 마찬가지인 듯싶었다. 힘의 크기를 짐작할 수 없다. 다만 겉모습으로 알 수 있는 건 놈은 뿔을 가진 악마라는 것이다. 검은 뿔의 악마였다. 그러나 전에 만났던 외뿔의 악마보다 뿔의 개수가 두 개 더 많았다. 불길한 상상이지만 맹수의 송곳니가 크기가 클수록 더 매섭듯이 만약 악마들의 힘이 뿔로 나뉜다면, 뿔이 많을수록 더 강한 힘을 지녔다면.
놈은…….
간단한 산수로 계산해 보면 전에 싸웠던 악마보다 세 배는 더 강하다는 거잖아.
“나 또 뽀뽀하게 생겼다, 혜연아.”
녀석의 두툼한 입술도 이제 적응이 됐는지, 난 어느샌가 유니콘을 찾고 있었다.
*
지금까지 만났던 가디언들은 저마다 사정이 있었다.
힘을 탐닉하여 동족을 배신한 자, 어리석어 속아 넘어간 자, 드래곤이 소망을 이루게 해 주리라 생각했던 자. 각기 다른 이야기들을 가졌던 그들에게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드래곤의 가디언이 된 걸 후회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저 아래 바위에 앉아 우릴 기다리고 있던 악마는 가디언이 된 걸 더더욱 후회하고 있겠지.
그는 세 개의 검은 뿔을 가진 악마였다. 검은 갑주를 입고 등엔 박쥐의 날개가 접혀 있었으며, 적광의 눈빛은 소름 끼치도록 불길했다. 그의 팔과 다리는 맹수처럼 우악스러웠으나 허리춤엔 검 한 자루를 차고 있으니 검을 다루는 자인 것 같았다. 악마는 날 지그시 쳐다보기만 했다. 난 일단 유니콘을 부르지 않았다. 기이하게도 그는 지금까지 마주쳤던 가디언들 중에 가장 불길한 존재면서도 적의가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자극하기보다 우선 대화를 나누고자 했다.
“용성에서 벗어나게 해 주겠습니다.”
‘악마’라 불리는 놈들과는 대체로 피 터지게 싸우기만 했지만, 그들 중 일부는 지성을 지닌 종족이라는 걸 알았다. 실리를 추구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내가 그를 이곳에서 벗어나게 해 준다면 난 그와 싸울 이유가 없다. 그는 드래곤의 가디언이었지만 이젠 아니기 때문이다. 용성에 오기 전, 마담이 말해 줬었다. 가디언 중엔 유일하게 주인을 잃은 가디언이 있으니, 마계의 대장군이었던 자라고. 척 보니 놈인 것 같다. 일루미나티의 흑막, 원장님과 싸웠던 검은 용은 ‘가뭄을 내리는 자 브리트라’였는데, 어떤 사정으로 드래곤 로드에 의해 이무기로 격하 당한 후, 그의 가디언이었던 마계 대장군은 가디언의 맹약에 묶인 채 용성에서 오도 가도 못 하게 되었다고 했었지.
하지만 내겐 은열쇠가 있고, 그를 용성에서 벗어나게 해 줄 수 있다.
악마는 내 말에 대답하지 않고 조용히 일어나더니, 허리춤에 맨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난 한숨을 내쉬었다.
너무 안일한 선택지이긴 했어.
“싸울 거냐?”
악마가 대답했다.
“가디언들은 용의 둥지를 지킨다.”
그가 검을 뽑았다. 검날이 몹시 새파란 기이한 검이었다.
분명 어떠한 힘을 지닌 강력한 무기. 그러나 난 그가 검을 든 것과 들지 않은 것에 차이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상했다. 머리까진 대머리 아저씨라도 식칼을 들면 살인자처럼 비추어진다. 무기를 든다는 건 상대를 죽이고자 위협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는 살의는커녕 내게 무관심하게 느껴질 지경이었다.
“단지 그뿐.”
착각이었나,
그가 검을 휘두른다.
위에서 아래로, 단지 그었을 뿐이나 바위를 쪼갤 듯이 매섭다.
강하다.
하지만 부족해.
난 홍아를 들어 들어, 놈의 검을 가볍게 흘리고 곧바로 심장을 향해 찔러넣었다.
푹!
뼈를 부수고 심장을 꿰뚫는 감촉이 손아귀에 전해져 온다.
놈은 쓰러졌다.
“무슨 짓이지?”
이토록 허무하게 죽을 자가 아니다. 뭐지? 2페이지 돌입? 이제 뭐, 놈이 갑자기 폭주하더니 전에 만났던 악마처럼 해괴한 힘으로 날 죽이려 드려나? 하지만 죽어 가는 그에게 어떤 일말의 의도조차 비치지 않았다. 난 놈이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가루가 되어 사라지자 그제야 놈의 본의를 깨달았다.
“너 일부러 당했구나.”
이건 싸움에서 패한 게 아니라, 자결한 것이다.
놈은 날 자살 도구로 택했다. 쉬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당황한 난 놈에게 물었다.
왜 굳이 이런 최후를 택했지?
그가 대답했다.
“날 얽매던 증오스러운 자는, 내가 죽이기도 전에 죽었다.”
붉은 안광이 점점 희미해진다.
“그러나 내 어리석은 선택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이젠 충분하겠지.”
난 놈을 붙잡으려고 했으나, 손에 닿자마자 고운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야, 이 시벌놈아.”
“…….”
그는 마지막 한마디를 끝으로 가루가 되어 사라졌다.
남은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입고 있던 검은 갑옷과 청색의 검조차 마찬가지로 없어졌다. 난 상당히 불쾌한 기분에 짜증을 낼지, 참아야 할지 고민했다. 차라리 피 터지게 싸웠던 엘프 놈이 낫다. 놈은 날 이용했다. 난 그가 죽지 않음을 본능에 따라 깨달았다. 굳이 가루가 되어 사라지기 전, 내게 ‘한마디’를 말하지 않아도!
“또 보자고? 시벌, 만나면 뒤진다.”
*
드디어 빌어먹을 이야기의 종막에 다다랐다.
난 눈을 찌푸리며 크리스탈 성의 거대한 유리문을 지키고 있는 놈들을 쳐다봤다.
우두커니 선 채 날 기다리고 있다.
젠장.
아마 마담은 아주 오래된 정보를 내게 줬던 것 같다.
용은 동면에 든 자신들을 지키기 위해 가디언들을 이용하는 게 아니라고 하며, 그저 멋모르고 침입한 벌레들을 퇴치하기 위한 수단으로 적은 수의 가디언만 용성에서 대기한다고 했다. 가디언들은 기껏해야 열 명이 넘지 않는다고도 했었다.
하지만 날 기다리고 있던 가디언들은 열 명이 넘었다.
지금까지 상대했던 가디언들의 수를 제외하고도 훨씬 많은 숫자다.
20… 30?
기척을 숨긴 자들까지 합하면 얼추 서른 명쯤 된다.
“허어으음.”
이쯤 되면 짜증이 난다. 절망적이며 두려워해야 마땅한 상황이지만 줄지어 기다리고 있는 가디언들을 보자 먼저 든 생각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가디언즈들이다. 당연히 이런 건 원하지 않았다. 이런 상황이 벌어진다면 난 언제나 다수 쪽에 붙어 있고 싶었다. 집단 폭행의 피해자가 되고 싶진 않았다.
“커허음, 칵칵.”
난 목을 풀며 그들에게로 걸어갔다. 가래가 잔뜩 낀 것같이 목이 아프다. 젠장, 어느 정도 가까워졌을 때 왼쪽에서부터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천천히 놈들을 바라봤다. 어디 보자, 저놈은 인간이고, 옆에 있는 놈은 난쟁이고, 오우거도 있고, 어… 저 새낀 뭐야? 액체 괴물처럼 생긴 놈도 가디언인가?
“아아!”
난 고함을 질렀다.
원장님의 가디언이 되고 나서 항상 들어 왔던 말들이 있었다.
가디언의 격을 지켜라.
물론 난 그딴 건 그다지 지킨 적이 없지만, 놈들도 가디언이라면.
“이 새끼들아! 치사하게 다 덤비지 말고 일대일로 붙자. 다이다이, 맞짱, 도와주기 없음, 일기토로!”
우스운 꼴이다.
정상적인 집단이라면 침입자를 위해 굳이 귀찮고 성가신 방법을 택하진 않는다.
우르르 몰려와 패 버리는 게 당연지사다.
하지만 놈들은 드래곤의 가디언들이었다.
우주에서 가장 엿 같은 존재들인 드래곤이 직접 선별한 미치광이들이라는 것이다.
내 외침을 묵묵히 듣던 가디언들은 별달리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난 곧이어 내 말도 안 되는 도발이 통했음을 눈치챘다.
그들 중, 단 한 명만이 앞으로 나섰다.
그러자 다른 가디언들은 뒤로 물러갔다.
명백한 의도다.
경기장을 만든 것이다.
“가디언들은 왜 죄다 하나같이 그 모양이냐?”
난 저 남자, 아니 여자인가? 아무튼, 성별을 알 수 없는 인간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온몸에 기하학적인 문신을 한 그는 날 보며 묘한 웃음을 지은 채 걸어왔는데, 난 이 판국에 저런 요사스러운 웃음을 짓는 것도 이해가 되지 않았다. 날 때려죽일 생각에 아주 재밌어 죽겠지?
내 계획은 간단했다.
일격필살.
놈을 한 방에 죽인다.
그 뒤로 난전이 벌어지면 ‘녀석들’의 힘을 이용해 혼란을 유도하고, 그 틈을 타 ‘마스터키’로 원장님을 풀어준다. 아무리 힘이 약해지고 있다지만 성의 꼭대기에서 느껴지는 원장님의 기운은 섣불리 꺼질 만큼 유약한 게 아니었다. 애초에 다수 대 일이고, 정명 정대한 싸움을 하러 온 게 아니다. 목적은 원장님 구출, 그 뒤에 벌어질 상황은 원장님에게 맡기는 건 절대 비겁한 게 아니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