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3화. 가디언즈 (11)
히죽히죽 웃으며 날 쳐다보는 놈에게 난 가운뎃손가락을 추켜올렸다. 예사롭지 않은 놈이다.
어릴 적부터 인간군상들을 자주 봐 온 난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미친놈을 감별하는 것이다. 내 센서에 의하면 놈은 미친놈이 분명했다.
온몸에 새겨진 기하학적인 문신이 마법적인 힘을 이끌어 내기 위한 도구에 불과하다고 쳐도 내 도발에 가장 먼저 반응하여 나선 놈인 데다가 다른 가디언들은 그의 돌발 행동에 수긍하며 뒤로 물러나기까지 했다. 그의 힘을 인정하든가, 굳이 건드릴 필요 없어서겠지. 겉모습은 꼭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게 지금까지 상대했던 가디언들 중에서도 가장 약해 보였지만, 어떤 독을 품고 있을지 몰랐다.
과연 놈은 또 어떤 해괴하고 끔찍한 힘으로 날 괴롭힐까.
난 검은 짐승의 힘은 최대한 아껴 두려고 했다. 그러나 다른 힘들은 굳이 숨기진 않았다. 놈의 힘에 대비하여 난 전력으로 부딪힐 준비를 했다. 싸움을 질질 끌면 안 돼. 목적은 상기시켜. 난 가디언들과 생사결을 다투러 온 게 아니다.
언제든지 힘을 발산시킬 준비를 하며 놈의 기색을 살피던 그때, 놈은 마치 산책하듯 대수롭지 않게 내게 걸어오기 시작했다. 방심하진 않았다.
검으로 벨 수 있는 거리에 오면 거침없이 휘두르려고 했다. 하지만 그는 눈치챈 듯 아슬아슬한 허용 범위의 거리에서 멈추어섰다. 가까이서 보자 더 기묘하게 생긴 자다.
금발의 벽안을 지닌 놈은 콧방울이 좁고 눈이 크지만, 얼굴선이 굵지 않아서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았다. 중성적으로 생겼다는 것만으론 설명되지 않았다.
“안녕?”
심지어 날 향해 방긋 웃으며 인사하는 놈의 목소리 또한 굉장한 미성으로 여자의 목소리인지, 변성기가 오지 않는 남자아이의 목소리인지 헷갈렸다.
“안녕.”
내게 인사를 건네는 그를 향해 나 또한 싱긋 웃으며 화답했다. 동시에 샐러맨더의 힘을 극한으로 이끌어 올려, 허리춤에 맨 메타소드의 손잡이를 쥐었다.
검을 잡자마자 맹렬한 불이 피어오른다. 난 놈이 반응하기도 전에 검을 뻗어, 대염홍식의 검을 펼쳤다.
타오르는 붉은 송곳니의 검에서 산을 불태울 막강한 화염이 놈만을 화형에 처하기 위해 쇄도했다. 비겁한 수는 최선의 수다.
화르륵!
대염홍식이 일으킨 화염의 소용돌이는 주변 일대를 강렬하게 불태우다 금방 꺼졌으나 남긴 흔적은 거대했다. 대지에 그을린 자국만 보더라도 절대 약한 공격은 아니었다. 난 용의 가디언들과 싸워 봤다. 이 공격으론 죽이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화상 정도는 입힐 수 있었을 것이다.
“지랄이다, 지랄이야.”
하지만 그는 멀쩡했다.
입고 있는 짧은 바지와 우스꽝스럽게 생긴 반소매 옷 또한 타지 않았다.
난 대염홍식의 화염이 놈을 덮쳤을 때, 일순간 놈이 불꽃처럼 타오르고 있음을 느꼈다. 내 공격에 당한 게 아니었다.
마치 홍식의 화염처럼, 그는 몸을 같이 불태운 것이다. 불은 불을 태우지 못해. 그렇다면 다른 힘은 사용하면 되겠지. 놈이 불을 다루는 힘을 지녔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내게 깃든 힘들의 가짓수는 많았다.
놈은 마치 더 해 보라는 듯 내 공격에도 반격하지 않고 우두커니 선 채 웃기만 했다.
명백히 날 멸시하는 태도다. 건방진 놈, 이건 몰랐겠지.
난 불의 힘과 정반대 성질의 힘을 펼치기 시작했다.
“대홍연화(大紅蓮華)!”
불타오르던 붉은 송곳니의 검이 순식간에 시린 기운을 품은 백색의 장검이 되었다. 이 검은 극한의 냉기가 지배하는 니블헤임의 얼어붙는 힘과 대륙거북의 확장, 탑의 괴물이 지닌 전염의 힘까지 합해진 절기, 본래 문어 괴물처럼 상상을 뛰어넘은 거대한 적을 속에서부터 얼려 죽이기 위해 고안한 검으로 그처럼 작은 인간에게 사용하기엔 불필요한 검이었다.
힘의 낭비였기 때문이다. 대홍연화의 기운을 품은 백색의 검이 휘둘러지자 공기마저 얼어붙었다.
드래곤들의 기운으로 환경이 고정되었던 용성의 기후조차 변했다. 사방팔방 대홍연화의 꽃봉오리들이 피어났다.
일대가 얼어붙으며 생긴 현상이었다.
“아, 진짜.”
하지만 얼어붙은 대지의 중심에 선 놈, 대홍연화의 검에 직격으로 당한 놈은 지독한 한기에도 아무렇지 않아 했다. 놈의 힘은 불 따위가 아니었다.
난 뒤늦게 깨달았다. 놈이 내 힘과 같은 성질의 힘을 내뿜어 내 마력을 상쇄시킨다는 것을. 깨달았으니 망설일 것 없었다.
행동은 재빨랐다. 마력이 통하지 않으면 흉내 낼 수 없는 검을 찌르면 돼.
“파천격破天擊.”
백색의 검은 이제 내 키보다 큰 창이 되었다.
금강월부, 창과 도끼가 섞인 듯한 무기.
이 힘은 아즈모타카의 힘을 모두 이끌어 낼 수 있게 된 증거였다. 하늘을 부순다는 오만한 초식명을 붙였으나 부끄럽진 않았다.
능히, 그만한 힘을 지녔기 때문이다. 원시신의 힘이 내 손에서 펼쳐지니 창을 찌르자 황소의 울음소리가 용성에 울려 퍼졌다.
이 힘에 뒤에 멀찍이 선 가디언들조차 저마다 힘을 펼치며 대비를 한다.
합!
창을 힘껏 찌르자, 지금까지 여유롭게 서 있기만 놈조차 황급히 뒤로 물러났다.
하지만 이미 늦었다. 원시신의 포악한 힘이 놈을 잡아먹기 위해 달려든다.
매서운 창이 육중한 힘을 품어 놈을 으깨기 직전이었다.
‘마법?’
그 순간, 오리하르콘 브로치가 빛이 났다.
놈은 마법을 펼쳤다.
하지만 소용없다고 생각했다.
원시신 아즈모타카의 힘은 괴력난신, 온갖 해괴한 것들을 찢어발기는 힘이다. 덜 여문 힘으로 대방주의 주술조차 찢었던 힘이니 가디언의 마법이라고 해도 능히 없앨 거라고 생각했다.
“재밌는 녀석이야.”
하지만 상황은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다.
파천격의 창이 품었던 아즈모타카의 힘이 일순간 사라졌다.
창날의 끝은 정확히 놈의 목을 찌르기 바로 직전에 멈추었다.
난 힘을 잃고 평범한 철검이 되어가는 메타소드를 거두었다.
“봐주고 있는 거로군.”
놈의 힘을 아직 모르겠다.
하지만 내가 가진 그 힘이 아니면 어떤 공격도 통하지 않는다는 건 알겠다.
난 이를 으드득 깨물며 눈을 감았다.
떠올린다.
그것만으로.
그림자가 몰려온다.
잡아먹힌다.
그림자가 날 잡아먹는다.
그러므로.
내 안의 그것이 깨어났다.
눈을 뜨자, 세상이 낮아졌다.
으르렁거리며 아가리를 벌렸다.
아직 웃고 있는 빌어먹을 놈을 잡아먹기 위해.
“어?”
하지만 어느 순간 난 다시 작아져 있었다.
인간.
난 검은 짐승이 아니었다.
그림자가 물러간다.
기이한 감각, 모든 순간이 마치 되감기는 듯한, 일생에서 겪어 보지 못한 느낌.
난 떨리는 손을 꽉 쥐며 진정했다.
다시 한번, 짐승의 그림자를 불렀다.
그러나 또다시 검은 짐승이 되어 가는 과정과 그 과정이 역순으로 되풀이되었다.
결국 받아들여야 했다.
“너, 드래곤의 가디언이 아니구나.”
믿을 수 없지만 이런 힘을 지녔다면 드래곤의 가디언 따위가 될 수 없어.
“시간을… 되돌리는 게, 가능한… 가능한 거냐?”
그는 히죽 웃으며 대답했다.
“눈치챘니?”
인정했다.
이 개새끼, 개사기 같은 새끼.
반칙이다.
어떻게 저러지?
놈은 내 ‘육체의 시간’을 되돌렸다.
그 기묘한 감각, 단지 힘이 없어지고 사라지는 게 아닌 아예 처음과 같은 상태로 돌렸다. 검은 짐승이 되어 확장된 감이 아니었다면 결코 눈치챌 수 없었을 것이다.
그저 특별한 힘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믿기지 않는 힘을 부정한다고 해도 놈의 힘이 없어지는 건 아니다. 받아들여야 했다.
놈은 시간의 힘을 다뤄. 내 ‘시간’을.
“놀랍니? 괜찮아. 너도 충분히 놀라운 존재니까.”
그가 말한다. 자신이 존재의 시간을 되돌리면, 그자의 기억 또한 잃으니 모순적인 감각에 지배당할 뿐 절대 ‘시간이 되돌려지는’ 기억은 남지 않는다고 했다. 눈치챈 자는 나밖에 없다고 했다. 하지만 난 칭찬으로 들리지 않았다.
다른 힘엔 반응하지 않다가 ‘검은 짐승’의 힘을 사용하려고 하니 시간을 되돌렸다.
그 의미는 명백했다. 놈은 검은 짐승의 힘을 두려워한다.
난 포기하지 않고 그림자를 받아들였다. 그러나 또다시 모순된 감각으로 점철된, 기이한 감각이 몸을 휘감아 날 원래의 인간으로 되돌려놓았다.
다시 한번.
그러나 또 되돌려놓는다.
반복되는 현상.
놈의 힘엔 제한이 없다는 말인가?
“그만해. 넌 아직 그 힘을 사용해선 안 돼.”
“지랄 마.”
난 검은 짐승의 힘을 간절히 원했다.
그러자 내 그림자로부터 대답이 들려왔다.
의외의.
하지만 예상한.
냐앙.
야옹이였다.
검은 고양이는 내 그림자에서 나와 성큼성큼 놈에게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도도한 발걸음으로 걸어간 야옹이는 아무렇지 않게 놈의 발치 앞에 섰다.
난 녀석이 드래곤보다 더 이해할 수 없는 힘을 지닌 존재라는 걸 알기에, 잠자코 그들을 지켜보기만 했다.
밤하늘 같은 눈으로 야옹이는 놈을 빤히 바라봤다.
그러자 놈도 웃음기를 거두고 심각한 표정으로 야옹이의 눈을 마주했다.
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야옹이가 나선 이유도 모르겠고, 야옹이의 존재를 별달리 신경 쓰지 않았던 다른 적들과 달리 유독 관심을 두는 그의 의도도 궁금했다.
냐앙~
마침내 둘은 접촉했다.
놈의 손이 뻗어졌다.
그리고 야옹이의 턱 밑을 살살 긁는다.
야옹이는 눈을 지그시 감은 채 그의 손길을 느끼더니,
이내 만족한 듯 길게 울곤 다시 내게로 돌아왔다.
“뭐지?”
야옹이는 앞발로 내 정강이를 툭툭 치더니 어느샌가 사라지고 말았다. 놈이 시간을 되돌린다는 사실만큼이나 믿기지 않고 놀라운 상황을 난 쉽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얼빠진 표정으로 놈을 쳐다보기만 했다. 왠지 소중한 걸 뺏긴 기분이 들었다.
나 외엔, 심지어 원장님에게도 애교는 피우지 않던 녀석이. 왜 처음 보는 빌어먹을 놈에게? 그것도 날 죽이려던 적인데? 아니, 엄밀히 말하면 날 죽이려고 하진 않았지. 내가 일방적으로 공격하면 놈은 가뿐하게 받아내기만 했으니까.
충격에 멍하니 서 있던 내게 놈이 말을 걸었다.
“워후, 무서웠어.”
너스레를 떨며 말을 이어 간다.
“그래, 어때?”
난 이어진 그의 말에 세 번째 충격을 받고 말았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의외의 인물들이 놈의 입에서 언급되는 것이다.
“네 힘, 과연 그렇군. 란슬롯이 질투할 만해.”
“무슨…….”
“나의 기사들을 잘 지내니?”
그가 말했다.
원탁의 기사들의 안부를 물으며 자신의 이름을 소개하니.
그의 이름은 ‘멀린’이라는 자였다.
*
“네 가능성을 확인해 봤어. 무례했다면 사과하지.”
멀린이 내게 고개를 숙였다.
내 예상대로 그는 드래곤의 가디언이 아니었다.
어떻게 드래곤들을 속였는진 몰라도, 그는 다른 가디언들과 달리 맹약에 속박된 존재가 아니라 나처럼 자유로운 존재였다. 멀린, 원탁의 기사들과 관련된 존재. 언젠가 갤러해드가 말해 준 적이 있었다. 기사들은 ‘멀린’에 의해 선택받은 자들이라고. 날 ‘퍼시발’로 임명한 멀린이 저놈이었다니.
“네 무대는 내가 만들어 줄 테니.”
멀린은 내게 사과한 후에 등을 돌려 용의 가디언들을 노려봤다.
“시간조차 갉아먹는 기묘한 짐승, 그 힘이라면 빛의 세례자조차 삼킬 수 있을지도 모르지. 내가 하지 못했던 위업, 너에게 맡긴다. 퍼시벌 경.”
그 순간, 멀린의 몸에서 강대한 마력이 폭주하듯 터져 나왔다. 난 그가 만들어 내는 마법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가디언들이 서 있던 대지 전체가 일렁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순식간에 가디언들은 일렁이는 대지에 집어삼켜졌다.
원장님 덕에 수도 없이 겪어 본 난 저 마법이 어떤 마법인지 보자마자 깨달았다. 공간 마법이다.
드래곤도 아닌 존재가, 저처럼 대규모의 공간 마법을 펼쳤다. 가디언들이 하나둘씩 공간 마법에 삼켜져 사라질 때, 멀린은 뒤돌아 날 보며 웃었다.
지금까지 징그럽기만 했던 그의 미소가 처음으로 멋져 보이는 순간이었다.
“가디언들을 전 차원에 뿔뿔이 흩어지게 했다. 하지만 빛의 세례자는 영향을 받지 않아. 그는 너의 위업이 될 거야. 아니면, 네가 그의 위업이 될지도 모르지. 어찌 되었든, 약속은 지켰다.”
그 또한 공간 마법을 펼쳐 사라지기 시작했다.
“어어?”
당황하는 정혜연의 목소리,
난 혜연도 공간 마법에 휩쓸렸다는 걸 알아차리고 멀린에게 외쳤다.
하지만 멀린은 싱긋 웃으며 한 마디만을 남겨 둔 채 정혜연과 사라지고 말았다.
“그녀는 내가 데리고 가지.”
*
멀린은 교사스러운 마법사이자, 마녀이다.
그는 한 가지 목적만을 위한다.
그는 온갖 세계에서 자신의 분신을 두고, 그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드래곤조차 속이며, 그는 대의를 위해서라면 드래곤의 무모한 부탁마저 기꺼이 승낙한다.
만물의 지식이 담긴 강의 수호자, 용들의 기록자라면 성배의 위치를 알 것이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