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4화. 가디언즈 (12)
혜연은 이곳이 어딘지 알았다.
언젠가 그에게 들려줬던 이야기, 무지개 구름 위에 세워진 초콜릿 궁전.
불우했던 어린 시절 상상해 왔던 꿈동산의 경치였다.
그녀는 초콜릿 궁전에 초콜릿 소파에 앉아, 자신에게 초콜릿 우유를 건네는 자를 바라봤다. 이상한 자였다.
자신을 꿈동산에 데리고 온 자는 여자인지, 남자인지 헷갈릴뿐더러 인간인지도 애매했다. 드래곤의 피가 흐르는 혜연은 각 생물마다 풍기는 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그러나 저자에게선 인간의 냄새, 악마의 냄새, 정령의 냄새, 그리고 드래곤의 냄새가 났다.
“안 마실래?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괜찮아요. 그보다 저…….”
“멀린이라고 불러.”
그자는 잔에 든 초콜릿 우유를 마셨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분명 다 마셨음에도 잔을 내려놓았을 땐 달콤한 향기를 내는 초콜릿 우유가 가득 담겨 있었다. 혜연은 가만히 연거푸 우유를 마시는 멀린을 지켜봤다.
알 수 없는 자이나 왠지 그는 위험한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또한, 혜연은 그가 들려줄 이야기가 몹시 궁금했다.
연달아 석 잔의 우유를 비운 멀린은 만족한 표정을 지으며 잔을 바닥에 던졌다. 혜연은 곧 바닥에 엎질러질 유리조각과 우유를 걱정했지만, 막상 잔이 바닥에 부딪히자 깨지지 않고 스르르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혜연은 초콜릿 궁전의 바닥 또한 초콜릿임을 깨달았다.
“나는 그의 계획을 도와주고, 대가를 받기로 거래했어.”
드디어 시작된 멀린이 말에 혜연은 귀를 귀울였다.
멀린의 화법은 독특해서 질문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혜연이 궁금한 부분만 골라내어 설명했고, 한 단어조차 불필요한 건 없었다.
혜연은 멀린의 거래에 대해서 듣고 곧장 이해했다. 그의 임무는 ‘정다정’을 ‘빛의 세례자’라는 로드의 가디언과 단둘이 남게 하는 것이었고, 그에 대한 대가는 알려 주지 않았으나 보상을 ‘누가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선 가르쳐 줬다.
“네가 궁금한 것에 대한 대답, 첫 번째. 용성으로 돌아가진 못해. 네 안위 또한 거래 내용에 포함되거든.”
의문점이 두 개 생겼으나.
그마저도 혜연이 질문하기도 전에 멀린이 먼저 대답했다.
“두 번째, 맞아. 나와 거래한 자는 기록자, 나부다.”
“그럼 아빠는 살아 계신… 건가요?”
혜연은 말을 하던 도중에 입술을 깨물었다가, 겨우 말을 끝맺었다.
마치 아빠의 생존을 의심하는 듯한 질문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죽음을 직접 보았기에, 혜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살아 계셨다면 왜 그 사실을 지금까지 감췄을까?
“글쎄. 그건 모르지.”
멀린의 대답은 애매했다.
확실치 않은 말에 혜연은 표정을 구겼다.
좀 더 정확한 대답을 원했다.
“그는 로드의 시선을 피할 방법을 알았음에도 무모한 계획을 구상했어. 네 아빠는 이상한 존재야. 드래곤이 인연의 정을 이해하다니, 우습지.”
그러자 이번에도 굳이 질문하지 않아도 멀린이 먼저 말했다.
“기록자는 용의 주술사에게 ‘방법’을 가르쳐 줘도, 그녀가 자신의 모든 걸 포기할 비겁함이 없다는 걸 알았지. 결국은 로드에게 잡혀 기나긴 동면을 위한 빗장이 될 거라는 것도. 그래서 기록자는 드래곤치곤 아주 이례적인 선택을 했어.”
멀린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놀랍게도, 그녀의 가디언을 이용한 무모한 계획을 짰지. 내가 부탁받은 건 명료했어. 드래곤의 가디언들을 속여 그들의 곁에 지내면서 후에 용성을 찾아올 두 명의 멍청이들을 보살피는 것. 물론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긴 했지만 말이야, 하하.”
혜연은 그의 고운 목소리에 대조되어 웃음소리는 매우 호탕하다고 생각했다. 멀린은 즐겁게 웃었다. 농담처럼 들리진 않아서 뭐가 웃긴지 혜연을 알 수 없었다.
“결국엔 주술사를 구하는 건 가디언의 재량이지만, 직접 마주하고 보니 기록자가 드래곤답지 않은 어리석은 계획을 왜 실행했는지 알 것 같더구나. 퍼시발 경이라, 신수로 위장하여 나의 기사로 임명한 게 천복이었지. 하하하! 걱정하지 마. 그는 무사할 거야.”
정혜연은 다정을 걱정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다정은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대단한 존재였다. 걱정은 되나, 믿음이 더 컸다. 혜연은 그보다 다른 대답이 더 간절했다.
“아직 대답을 안 해 주셨어요. 아빠는 살아 계신 건가요? 그렇다면 어디에…….”
멀린은 웃음을 뚝 멈추고,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드래곤이 왕의 시선을 피하는 방법은 간단해. 자신이 드래곤임을 포기하면 돼. 하지만 처음부터 주어졌던 많은 권리를 포기하는 건 빌어먹게 힘든 일이지. 아마 ‘모습이 형상화될 때까진’ 꽤 오래 걸릴 거야. 그는 지금 이곳의 초콜릿 기둥보다 더 약해졌거든.”
멀린은 혜연에게 다가오며 흐르는 초콜릿 바닥에서 다시 잔을 꺼냈다.
그러곤 초콜릿 우유가 가득 담긴 잔을 건네며, 혜연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그는 간단히 포기하더군. 자신의 모든 걸 잃어 가면서도 죽고 싶지 않아 했어. 그래, 왜일까?”
혜연은 잔을 받아 들었다.
“그래, 잘 아는구나.”
그러곤 초콜릿 우유를 남김없이 마셨다.
혜연은 달콤하고, 차갑고, 부드러워서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라고 생각했다.
또한, 기묘하지만 그리운 냄새가 났다.
혜연은 그제야 이곳이 어디인지 진실로 깨달았다.
*
대규모로 펼친 공간 이동 마법은 폭풍처럼 가디언들을 휩쓸었다. 무너지는 공간에 드래곤의 가디언이라는 존재조차 저항할 수 없이 빨려 들어갔다.
멀린은 정혜연을 데리고 사라졌지만 난 그가 적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이 망할 구출 작전을 끝내고 나서 알아볼 테지만 멀린은 기묘한 자이지 나쁜 놈은 아니라는 ‘감’이 들었다.
무엇보다 하마터면 수십 명의 가디언과 상대할 뻔했던 상황이, 그 덕분에 간결하고 쉬워졌으니 지금 당장은 그에게 절을 해도 모자랄 판이다. 예상하진 못한 행운이지만 방심하진 않았다.
난 서둘러 원장님이 갇힌 크리스탈 성을 향해 달렸다. 내가 할 일은 하나였다.
이제 열쇠로 원장님을 풀어 주기만 하면 돼.
풍종도보의 경공으로 바람처럼 달리며 가디언들이 사라졌던 곳을 지나갈 때였다.
난 서서히 걸음을 늦추었고, 이내 우두커니 멈추어 서서 천천히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봤다. 당황스러웠다. 언뜻 시야에 스치고 지나간 장면, 착각이 아니다. 용성에 온 이후로 극도로 예민해진 내 오감은 헛것 따위를 보기엔 너무 고성능이었다.
난 그를 보았다.
그는 내가 달려온 경로와 가까운 곳에 앉아 있었다.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그를 눈치챈 건 이미 그를 지나치고 난 뒤였다. 경공을 아무리 빠르게 펼쳐도 앞의 시야를 확인할 수 없을 만큼 빠르진 않다. 그 뜻은 난 가만히 앉아 있는 그를 눈치채지 못하고 지나쳤다는 게 된다. 젠장, 그는 내 기감을 완벽히 속였다. 어떻게?
그는 땅에 앉아 눈을 감고 있었으나, 난 검의 손잡이를 쥐며 싸울 준비를 했다.
겉모습은 추레한 노인이었다. 실뭉치처럼 뒤엉킨 더러운 머리카락을 한 아리아인 노인은 인도의 수행자처럼 윗옷을 입지 않고 낡은 회색 바지만을 입었다. 그러나 볼품없는 행색이라도 풍기는 기운은 무시 못 했다. 간신히 파악할 수 있을 만큼 희미했지만, 그가 가진 기운은 맑고 청아했다.
난 그를 파악할 수 없었다.
다른 드래곤의 가디언들도 그랬으나, 그는 특히 알 수 없었다.
난 미지에 대한 공포야말로 가장 경계해야 할 두려움이라는 걸 알았다.
그는 멀린의 공간이동 마법에도 휩쓸리지 않은 유일한 가디언이자 가장 알 수 없는 가디언이었고, 원장님을 구출하기만 하면 되는 상황에서 마주친 적이었다. 아마도 그는 용성에서 마주친 적 중에 가장 까다로운 적일 것이다.
“당신은 누굴 섬깁니까?”
말을 건넸으나 그는 눈을 감고 앉은 자세 그대로 요지부동이었다. 정말 기이한 노인이었다.
난 그를 쳐다보면서도, 그의 존재를 놓치곤 했다. 마치 드넓은 황야, 그 자체를 보는 것 같았다.
생물이 가진 기운이라기보다 자연과 훨씬 가까웠다. 위수와 비슷했으나 심지어 더욱더 본질적이었다.
난 집중해야 간신히 그의 존재를 파악할 수 있었다.
불쾌한 대치가 이어졌다. 그는 앉은 채 눈을 감고만 있었고, 서서히 미지에 대한 공포가 짜증으로 바뀔 때쯤 난 듣고야 말았다.
드르렁.
지금까지 날 꼼짝 못 하게 했던 노인이 사실 자고 있었음을 깨달았을 때 난 망설임 없이 검을 휘둘렀다. 파천격의 맹렬한 검기가 땅을 뒤집으며 노인에게 쇄도했다. 그러자 노인도 잠에서 깨어, 천천히 눈을 뜨니 난 두 개의 태양이 땅에서 뜨는 줄 알았다.
노인이 눈을 뜨자 그의 두 눈에서 강렬한 안광이 뿜어져 나왔고, 파천격의 사나운 기는 빛에 삼켜져 순식간에 사라졌다. 그뿐만 아니라 그가 쳐다보는 모든 곳이 빛으로 환해졌는데, 그가 날 쳐다보자 난 빛으로 뒤덮였고, 곧이어 끔찍한 경험을 해야 했다.
고통이 없다.
그 어떤 감각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내 몸은 서서히 사라졌다.
빛에 의해 지워지는 그림자처럼.
냐앙.
난 어디선가 들려오는 야옹이 소리에, 내가 무얼 해야 할지 깨달았다.
그림자가 사라지기 전에 모든 어둠을 내 안으로 받아들였다.
그러자 검은 짐승의 송곳니가 돋아났고, 난 빛을 게걸스럽게 먹어치웠다.
“넌 누구인고?”
노인이 내뿜은 안광의 빛을 먹어치우다 보니 이내 빛은 사라졌고, 세상은 다시 그림자가 지기 시작했다. 노인의 눈에선 더는 빛이 뿜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기지개를 켜니, 그제야 난 그의 힘을 절실하게 느끼게 되었다. 숨겨 둔 힘이 궐기하니 그의 힘에 반응하여 용성이 개변되기 시작했다.
“고놈 참 불길한 자로고.”
용성의 환경은 가디언에 의해 바뀐다.
숲이 되고, 바다가 되고, 죽은 땅이 된다.
그러나 노인의 창대한 힘은 환경을 넘어, 용성 전체를 빛으로 물들였다.
세상이.
그를 따르기 시작한 것이다.
“빛이 내게 허락한 바, 일어나서 싸우오.”
무엇이라도 먹어치울 수 있을 것만 같은 송곳니와 어떤 것도 찢어발길 수 있을 것 같은 발톱을 지닌 검은 짐승이 된 이후 처음으로, 난 본능에 따라 뒷걸음질을 쳤다. 노인의 빛이 깃든 용성의 곳곳에서부터 그들이 몸을 일으켰다. 그건 용이었으나 죽은 용이었다.
난 하늘을 뒤덮은 죽은 용들을 보며 절망의 비명을 삼켰다. 비록 뼈밖에 남지 않았다곤 하나 수십 마리의 죽은 용들의 위압감은 날 금방이라도 박살 낼 것같이 강대했다.
[내게 힘을 빌려다오.]
그때, 목소리가 들려왔다.
난 퍼뜩 정신을 차리고, 그가 내 힘을 가져가길 허락했다.
그러자 족쇄를 푼 케르베로스가 공간에 제약받지 않고, 용성에 나타났다.
[놈들은 내가 데리고 가겠다.]
케르베로스의 말에 난 말하려고 했으나, 짐승의 입으론 인간의 언어가 내뱉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내가 그의 마음이 들리듯, 그도 내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어디로?]
[복수를 원하는 자들이 있다.]
그는 내 힘을 빨아들이며 점점 모습을 키우더니 이내 처음 마주쳤을 때처럼 거대한 삼두견이 되었다. 날아드는 수십 마리의 죽은 용을 향해 적안을 내비치며 으르렁거리자, 순식간에 하늘이 조각났다.
그 또한 공간을 다룰 수 있었다. 그러나 원장님보다 대단히 사나운 힘이었다. 마치 이빨 자국처럼 뭉개진 공간으로 죽은 용들은 빨려 들어갔다.
케르베로스 또한 스스로 찢긴 공간에 뛰어들자 이제 용성에 남은 건 나와 눈을 뜬 노인밖에 없었다. 그림자를 받아들여 검은 짐승이 되면 참을 수 없는 유혹에 시달리게 된다. 기억을 유지하게 된 이후로 난 항상 이 꺼림칙한 욕망을 참으려고 했다. 그러지 않으면, 내가 내가 아니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놈은.
그딴 걸 신경 쓸 수 없는 상대다.
크르르-
주변이 검게 물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