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5화 가디언즈 (13)
용성에 묻힌 드래곤들은 헤아릴 수 없는 아득한 시간 전에, 오만에 빠져 자멸한 드래곤들이다. 그들이 조율자의 책무를 잊어버리고 스스로 신이 되려고 하자 운명이 벌을 내렸고, 드래곤의 힘을 뺏겨 이지조차 잃어버린 괴물이 되었다.
그들의 존재는 드래곤들의 수치이자 굴욕이었고, 절대 거스를 수 없는 운명을 거역한 말로를 상징하는 반면교사였다.
드래곤의 권리와 그에 따른 힘을 잃었지만, 그들이 가진 비늘과 뼈는 여전히 강력하여 드래곤 로드의 무기가 되기엔 충분한 전력이었다.
드래곤 로드는 한때 자신의 동족이었던 자들을 짐승처럼 다루며 제어했다.
그들이 드래곤 로드의 무기로 전락했을 그쯤의 시대였다.
용들의 시간보다 더 아득히 오래된 지구의 역사 속에서 유독 강대한 힘을 가진 종이 탄생했다. 그들은 운명의 장난처럼, 마치 드래곤과 같이 강력한 육체를 타고났으며 생김새 또한 비슷했다.
그대로 두었다면 찬란한 문명을 이룩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일찍이 종말을 맞이했다.
저항할 수 없는, 법칙과도 같은 존재에 의하여 허무하게.
우주의 시간은 불규칙하다.
그래서 서로 흐르는 시간이 다르더라도 로드는 지구에 탄생한 자신들의 모조품과도 같은 종족을 발견했고, 참을 수 없이 격분했다. 로드는 그들의 생김새가 드래곤들의 수치와 비슷하다는 이유로, 그들을 세상에서 지우고자 했다.
그리하여 후에 공룡이라 불리게 될 지구의 종족은 어느 날 터전을 침범한 적, 자신들과 비슷하게 생긴 ‘이지가 없는 괴물들’에 의하여 종말은 맞이했다.
하지만 이 비극엔 숨겨진 이야기가 있다.
독단적인 로드에 반심을 품은 배반자의 용기로 공룡은 살아남았다.
살아남은 그들은 자신들의 새로운 둥지에서 오랫동안 멸종의 비애를 기억해 왔다.
그리고 오랜 시간이 지나도 그 기억의 불씨는 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타올랐다.
대에 대를 이어, 그들은 기다렸다.
단 하나 오로지 복수를.
*
파르바티가 자신보다 더 소중히 여긴 건 마물원의 유산이었다.
로드는 그럴 가치가 없었기에 공룡들의 전력을 모두 파악하지 않았다.
그가 죽인 공룡은 아주 일부분에 지나지 않았고,
많은 공룡이 이미 다른 둥지에 피신하여 해를 면할 수 있었다.
그리고 또다시 동족들이 학살당했다고 하더라도 복수의 불씨는 꺼지지 않았다.
용성에 잠든 변질한 드래곤들이 깨어나자, 그들의 꺼지지 않는 불씨 또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공룡들이 차원을 넘어 변질한 드래곤들의 기운을 알아차린 건 정다정이 가진 은 열쇠의 힘 때문이었다.
공간을 여는 열쇠를 통해 흘러들어온 원수의 기운에 공룡들은 폭주했다. 하지만 그들은 복수심을 해소하지 못했다. 이빨이 닿는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물원의 둥지에서 기다리던 케르베로스가 그들의 원한을 알아차렸다.
그는 곧 ‘깊이를 알 수 없는 막대한’ 자의 힘을 빌려 공룡의 둥지와 용성을 잇는 통로를 뜯어냈다.
이내 뼈의 용들이 공룡들의 둥지로 날아오자, 심지어 시간마저 초월한 원념들은 타올랐고 그들은 복수를 갈구하기 시작했다.
거대한 생물이 고개를 추켜든다. 섬뜩한 노란 눈알이 올려다본다. 포효하며 크고 날카로운 이빨들을 들이민다.
파르바티는 ‘그’와 접촉한 후 발생한 공룡들의 변화에 대하여 제한을 두지 않았다.
수천 년간 오로지 자신들을 멸종시킨 자에 대해 대항하기 위하여 불씨를 간직했던 공룡들은 ‘최초의 짐승’에 의해 진화했다.
룡들은 일찍이 재앙처럼 내려와 동족을 멸종시킨 괴물들에게 망설임 없이 덤볐고, 기뻐하며 크고 강력한 발톱과 뿔을 내세우며 돌진했다.
비록 그들의 힘은 로드의 무기에 비하여 미약하였으나, 동족이 죽더라도 시체를 밟고 올라가 뼈의 용들에게 이빨 자국을 남겼다.
처절한 싸움이었다.
공룡들의 시체가 쌓였다.
그러나 복수의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낮은 지능의 공룡들조차 가세하기 시작하자 뼈의 용들조차 천천히 무너져 갔다.
마침내 수많은 종을 멸종시켰던 뼈의 용들은 오랜 시간이 지나 그들이 해 왔듯이 이빨과 발톱에 의해 찢겨 토막 났고, 공룡들은 많은 희생을 대가로 비로소 복수를 성공하게 되었다.
*
검은 짐승과 빛의 세례자의 대결로, 용성에는 찬란한 태양이 내리쬐는 낮과 별조차 뜨지 않는 어두운 밤이 되풀이되었다.
마치 용광로 안의 쇳물처럼 용의 마력에 의해 달궈져 변화하기 쉬운 용성의 환경이지만, 한 존재가 내뿜은 힘만으로 세계가 바뀌는 건 분명 초월자들의 영역이었다.
두 초월자들의 대결은 단순히 서로의 육체를 손상하는 데 그치지 않고 머무는 세계에 흔적을 남겼다.
빛이 가득해지자, 어둠이 사그라진다.
태양의 빛을 뿜는 자는 빛의 세례자다. 드래곤 로드 마루트루드라의 ‘빛’을 가장 간절히 받아들인 존재로서 드래곤과 최초로 접촉한 지구의 인간이었다.
그는 드래곤을 신으로 떠받들며, 지구에 그들의 광휘를 전파하였고, 수많은 신화와 종교를 낳았다.
그는 언제나 드래곤들의 충직한 종이자, 사도였다. 그는 의심하지 않았다. 신의 명령이라면 무엇이든 행했다.
인간을 저버린 그는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쳐 수천 년간 살아오며 조율자의 대변자로서 저항하는 자에게 ‘자비’란 이름의 무시무시한 철퇴를 내렸다.
빛의 세례자가 내뿜은 광휘는 생명이 가진 존재 자체를 지웠다. 그 빛은 신이 아니라면 견딜 수 없는 것이며, 한계를 초월한 자들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둠은 지워지지 않았다.
충만한 빛에 사그라지던 어둠은 어느샌가 몸집을 키워 빛을 삼켰다.
어둠을 흩뿌리는 존재는 검은 짐승이었다. 때론 늑대와 같았고, 때론 황소와 같았다. 짐승의 생김새는 그림자와 같아 변화무쌍했다.
짐승은 그림자를 지우는 빛을 발톱으로 찢어발기고, 아가리를 벌려 뜯어 삼켰다. 이름 없는 짐승은 빛나는 자의 광휘마저 제 그림자로 뒤덮었다. 그러나 빛을 모두 삼키진 못했다. 그러기엔 그에게는 이름이 없었다.
빛과 어둠, 낮과 밤의 팽팽한 줄다리기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힘의 균형은 무너졌다.
크리스탈 성이 빛을 반사하기 시작한 후였다.
용들의 힘이 결집된 크리스탈 성은 두 존재의 힘으로 무수히 변화하는 용성의 환경 중에서 유일하게 제 형태를 유지했다.
그러나 용들의 힘은 결국 빛나는 자에게 보탬이 되었었다.
빛의 세례자의 광휘를 버텨 내던 검은 짐승조차 크리스탈 성이 내뿜은 찬란한 빛줄기엔 무너져 내렸다.
그림자는, 어둠은 빛에 의해 서서히 지워졌다. 짐승은 결국 형태를 유지하지 못했다. 검은 짐승의 그림자는 사라졌고, 이름도 존재도 사라진 다정은 아무것도 없는 허무의 심연, 끝이 없는 나락으로 떨어졌다.
심연 속에서 다정은 아무것도 듣지도, 보지도 못했다.
생각조차 하지 못하여 그를 ‘생물’이라 규정지을 수가 없었다.
그는 죽은 것과 다름없다.
그는 패했다.
죽지도 살지도 못하는 저주, 영원토록 심연을 떠돌아다니는 형벌을 받게 되었다.
가라앉는다.
존재가 사라진 그는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
초점 없는 눈의 다정이 점점 나락으로 가라앉을 때였다.
까이!
분명 빛에 의해 존재가 지워져 공허만이 가득해야 할, ‘그의 내면’에서 기이한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심연과 나락은 망가진 내면의 현상이었다.
빛에 의해 존재가 지워지면 자신의 텅 빈 내면에 갇히게 된다. 그 어떤 강한 힘을 지닌 전사라도 텅 빈 내면에선 어떤 힘조차 이끌어내지 못한다.
그러나 허무의 공간에 기이한 생물체가 있었다. 그 생물체는 대단히 이질적이었다.
심연은 내면의 형상이기에 결코 다른 존재가 있어선 안 되었다. 그런 존재는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기묘하게도,
그의 공허한 내면에는 다른 것들이 존재했다.
그를 향해 기어오는 것, 하얀 생물.
다정에게 가까워질수록 점점 커지더니,
이내 그의 내면을 모두 뒤덮을 만큼 거대해졌다.
까이!
하얀 짐승은 존재를 잃은 다정에게 말했다.
[나는 너의 식욕이다.]
그러며 그의 입으로 기어 갔다.
[기억해라.]
또다시 말한다.
[나는 너의 식욕이다. 기억해라. 기억해라. 기억해라. 네가 누군지 기억해라.]
하얀 생물이 다정에게 깃들자,
존재가 없던 그에게 무언가가 생겨났다.
그 후 또다시 공허해야 할 내면의 우주에 다른 존재가 나타났다.
그건 그림자였다.
어둠이 다가와 말하니.
[나는 너의 그림자다.]
[기억해라. 기억해라. 기억해라.]
[네가 누군지 기억해라.]
무언가로 채워진 다정에게 그림자가 생겨났다.
다정에게 깃든 그것들은 계속하여 속삭였다.
[네가 누군지 기억해라.]
[네가 누군지 기억해라.]
[네가 누군지, 네가 누군지, 네가 누군지.]
[기억해라, 기억해라, 기억해라.]
내면의 우주에 시간은 없다.
시간에 구애받지 않아,
그로부터 얼마나 오랜 시간이 흘렀는지 알지 못했다.
단지 몇 분.
혹은 몇 년.
몇백 년이 흘렀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확실한 건.
존재를 잃었던 그는, 영영 깨어나지 말았어야 한 그는.
눈을 떴다.
“내가 누군지.”
검은 하늘, 하얀 대지.
용들의 기운으로 가득 차 강력한 힘에도 영향을 받지 않았던 크리스탈 성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
멍청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내게 일어난 뜬금없는, 그리고 아주 거대한 변화에 머리를 긁적이며 어리바리하게 굴었다.
이게 뭐야? 내 모습 왜 이래?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건 빛에 삼켜졌다는 것. 그 때문에 내 모든 걸 잃어버리는 끔찍한 공허함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마치 오랜 시간 푹 자고 일어난 것같이 개운하기만 했다.
그러나 대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진 몰라도, 정신을 차린 후 내 꼴은 많이 달라져 있었다.
일단 검은 짐승이 아니었다. 지금 내 상태는 확실히 그림자를 받아들인 게 맞았다. 그러나 평소와 달리 흉악한 이빨과 발톱을 지닌 짐승이 아니라, 그냥 나 자신에 불과했다. 물론 변화는 있다.
“검은 갑옷?”
난 한 번도 입어 본 적 없는 갑옷을 입고 있었다. 비슷한 건 많이 봤다.
원탁의 기사들이 자주 이런 거추장스러운 갑옷을 입고 돌아다녔지.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 갑옷이긴 한데 느낌이… 마치 천 옷을 입은 듯, 아니 그것보다 마치 내 ‘살과 뼈’처럼 느껴졌다. 몸의 일부 같은 느낌이다.
시벌, 대체 뭐가 뭔진 몰라도 솔직히 선호하는 복장은 아니다. 흑기사야, 뭐야? 신명 나게 유치하잖아.
몸을 뒤덮는 육중한 검은 갑옷, 하지만 변화는 그게 다가 아니었다. 난 정신을 차렸을 때부터 왼손에 들고 있던 하얀 백색의 검을 들어 봤다.
별 장식이 없는 하얀 검이었다. 하지만 너무나 하얘서, 표백이라도 한 것 같았다. 조금 더 감성적인 비유를 해 보자면 하얀 눈, 직설적으로 표현하면 라미네이트를 금방 마친 이빨.
당황스러운 건 이 검은 메타소드가 변화한 게 아니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난 오른손에 메타소드를 고스란히 쥐고 있었으니까.
그럼 이건 대체 뭐로 만들어진 검이야?
짐작은 간다. 어이가 없어서 받아들이지 못했을 뿐.
희미하게 느껴지는 기운,
이해할 수는 없으나 이 백색의 검에서 글루토니, 녀석의 힘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갑옷의 생김새가 시꺼먼 게 야옹이 같기도 하고.
잠깐 그렇게 생각하면 난 야옹이를 뒤집어쓰고, 글루토니를 방망이처럼 휘두르는 거잖아?
“희한한고.”
혼자 잡생각에 빠져있을 때, 놈이 나타났다.
놈은 놀란 표정을 한 채 날 바라봤다.
노인이라서 공경하려고 했으나 놈은 개새끼다.
얼마나 당했는지 치가 떨려.
빛이 내뿜어질 때마다 난 끔찍한 공포를 느껴야 했다.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으나 오히려 죽을 만큼 아픈 것이 나았다. 존재가 사라지는 공포는 어마어마했다. 그러나 지금, 같은 상대를 마주했는데도 이상하게 별다른 무서움은 들지 않았다.
“불길한 존재는 정화하리.”
놈이 빛을 내뿜는다.
난 순식간에 환한 빛으로 충만해지는 세계를 둘러봤다.
과연 침착하게 보니 이런 풍경이었구나.
내 존재를 지우는 빛이 날 덮치지만, 난 전과 달리 담담하게 서 있기만 했다.
“시벌 놈의 눈뽕!”
이것도 직감일까?
잘 모르겠다.
그저 난 처음부터 검은 갑옷이 빛을 막아 줄 것을 알고 있었다.
난 욕을 내뱉으며 담담히 서서 빛을 마주했다.
예상대로 빛은 모두 갑옷에 가로막혔다.
검은 갑옷은 블랙홀처럼 빛을 빨아들였다.
나는 그 모습에 어깨를 으쓱했다.
유치한 생김새지만 이래 보니 괜찮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