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6화 가디언즈 (14)
노인의 표정이 가관이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나도 충분히 그만큼 당황스럽다.
우선 무엇이 변했는지 알아봐야겠다.
난 일단 메타소드를 휘둘렀다.
가장 익숙한 힘, 샐러맨더의 기운을 이끌어 내 가볍게 홍식을 펼쳤다. 그저 실험 삼아 휘둘렀으나 홍식은 기존의 대염홍식보다 더 강한 화력을 뿜었다. 마물의 마력 또한 이 상태로 펼치니 힘의 규격이 달라진 것이다.
생각해 보면 대단한 변화였다. 검은 짐승의 힘이 내 몸을 잠식하고 있을 땐, 메타소드와 다른 마물의 마력을 사용하지 못했다. 단지 물어뜯고 찢어발기고만 했을 뿐이었는데.
“어리석은고.”
강한 불꽃의 소용돌이도 놈이 뿜는 빛에 닿자 순식간에 소멸하였다.
하지만 기대도 안 했기에 그러려니 했다.
“그럼 이제.”
가장 궁금한 게 있었다.
그렇다면 이건 대체 뭘까?
글루토니의 기운이 느껴지는 백색의 검.
난 혹시 몰라 그와 거리가 꽤 떨어져 있음에도 그냥 한번 휘둘렀다.
본래 검이란 적과 붙어서 검날로 베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달랐다.
먼 거리에서 휘둘렀는데도 불구하고 아무리 지랄해도 상처조차 입힐 수 없던 노인의 다리가 가볍게 뜯겨 나갔다.
상처 자국이 아주 기묘했는데, 검을 휘둘렀는데도 상처는 마치 짐승이 물어뜯은 듯 이빨 자국과 같았다. 역시 맞았어. 이 검, 글루토니가 맞았네.
* * *
몸은 빛이며, 뼈는 성흔이니.
광휘의 빛으로 보호받는 자신의 뼈가 너무나 가벼이 부러졌을 때 빛의 세례자는 곧장 상황을 깨닫고 감추었던 힘을 꺼내었다.
빛나는 자의 충복은 자신의 성덕(性德)으로 세상을 구제하고자 하였고, 하찮은 존재였던 노인은 굳건한 의지로 결국 마루트루드라의 신물을 하사받았다.
노인이 드래곤 로드에게 받은 강력한 유물은 오리하르콘으로 이루어진 갑옷이었다. 그의 몸이 강렬한 빛을 머금은 순백색의 금속으로 뒤덮인다.
마침내 그는 떠받드는 존재를 대신하여 형벌을 내리는 백색 갑옷의 기사가 되었다.
그가 백색의 갑옷을 입었을 땐 세계를 구제할 때뿐이었다.
노인은 드래곤 왕의 의지를 대변하여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악한 존재들을 처단했다.
그중엔 강력한 악마와 초월자도 있었지만, 용의 갑옷을 입은 자신을 이긴 존재는 없었다.
자신은 선이자 빛이며, 그에 맞서는 자는 어둠이자 악이다.
노인은 생각했다.
저자도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마주쳤던 그 어떤 어둠보다 더 짙은 불길함을 내뿜는 자이나, 결국엔 광휘에 아스러질 거라고 생각했다.
“순백의 갑옷이라, 오리하르콘이야? 이야, 멋있네. 그거 나 주라.”
그자가 다시 검을 휘두른다.
다리를 부러트렸던 기묘한 공격.
공간을 넘어, 아니 공간을 뜯어먹는 불길한 힘이 몸을 강타했다. 그러나 용의 갑옷을 부수진 못했다. 그의 공격은 이제 통하지 않았다. 부러진 다리는 이미 고친 후였다.
노인은 하늘을 올려다보다 고개를 숙였다.
태양의 강렬한 빛이 날 향해 내리쬐고 있어.
이번에도 악을 구제할 기회를 주셨으니, 그대의 충실한 종은 기꺼이 불길한 존재를 처단하리오.
제 존재만큼 불길한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는 온갖 사악한 힘을 내뿜어 공격했지만, 노인은 담담히 받아 냈다.
몸을 불태우는 지옥의 업화와 얼어붙는 저승의 냉기와 혈관을 헤집는 더러운 질병과 살점을 뜯어 피를 마시는 야만적인 어금니에도 노인은 상처를 입지 않았다.
백색의 갑옷이 지닌 빛은 그 어떤 힘도 통용되지 않는 절대적인 은총이었기 때문이다.
오리하르콘은 소유자의 마력에 반응하여 마법을 차단한다. 그러나 소유자의 마력이 부족하거나, 마법의 힘이 지나치게 강하면 이를 견디지 못한다. 그때의 오리하르콘 돌과 다를 바 없어진다.
하지만 광물의 시초자인 마루트루드라의 빛이 깃든 오리하르콘은 달랐다. 빛을 품은 오리하르콘은 마법뿐만 아니라, 모든 마력을 차단한다. 강한 힘을 지닌 드래곤들이 로드에겐 거역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였다.
다정은 오크 라덴에서 이미 상대한 적이 있었다. 로드의 가디언, 카를이 오리하르콘 갑옷을 입었었다.
그에게 샐러맨더의 화염이 통하지 않았던 것도 카를의 오리하르콘 갑옷이 마루트루드라가 하사한 특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노인의 몸을 감싼 갑옷은 오크 라덴의 가디언의 것과는 격이 달랐다.
오크 라덴에서 상대한 자의 갑옷에 깃든 빛이 촛불이라면, 노인의 갑옷에 깃든 빛은 산불과도 같았다.
드래곤 로드가 존재하는 한, 그의 빛을 두른 노인은 신의 보호를 받는 것과 다름없었다.
“젠장, 아무래도 벗기진 못할 것 같은데.”
다정은 눈이 멀 만큼 강렬한 빛을 뿜는 노인을 보며 무척 난감했다.
더는 그의 빛이 자신에게 해가 되진 않았지만, 반대로 그를 죽일 수도 없는 것이다.
저 기이한 빛을 가진 갑옷을 부수진 않는 이상 적을 죽일 방법이 없다는 걸 받아들여야 했다.
다정은 아쉬웠다. 저 갑옷만 있으면 멀린처럼 기묘한 마법을 쓰는 상대라도 쉽게 이길 텐데.
다정은 빛의 세례자와 초월적인 싸움을 하는 와중에도 그런 시시한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어차피 이번 싸움은 이미 끝난 것과 다름이 없었기 때문이다.
빛의 세례자는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 있는 이유가 다정의 욕심 때문이란 걸 알지 못했다.
그는 자신의 의지와 하사받은 용의 갑옷 덕에 다정이 자신을 해치지 못한다고 착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실상은 단지 갑옷을 회수하려는 마음에, 다정이 잠자코 지켜보는 것에 불과했다.
다정은 천천히 글루토니의 검을 들어 올렸다.
검을 드는 행위.
그것에 지나지 않았지만, 그 모습을 보던 노인은 문득 의심을 품고 말았다.
저 불길한 자는 정말 자신을 죽일 수 없는 건가?
빛을 섬기는 자신이 죽는다고 생각하는 건 곧 빛을 의심하는 것과 다름없기에 황급히 의심을 지웠지만, 노인은 알지 못했다. 자신의 맹목적인 믿음이 죽음을 초래할 거라는 걸.
분명 백색 갑옷을 입은 노인은 초월자조차 감히 죽이지 못한다.
드래곤 로드가 가장 신뢰하는 가디언인 그는 드래곤 로드의 가호를 받고 있었다.
이는 신의 영역이다.
그리고 신이란 세계와 동등한 존재력을 가진 자다.
신의 반열에 오른 자가 아니고서야 그 어떤 힘도 빛 앞에 지워지고 말 것이다.
노인도 그 사실을 알았다.
신이 아닌 이상, 빛을 없애지 못할 거라는 걸.
“태양은 하나로다, 하나로다, 하나로다.”
그러나 노인은 자신에게 검을 들어 올린 채 성큼성큼 다가오는 남자에게서 일전에 느낀 아득한 기분을 또다시 느꼈다.
그날은 빛을 처음 마주했을 때였다. 어느 날, 신들에게 기도를 드리던 자신의 앞에 틀림없이 신이라고 생각한 존재가 나타나 수호자로 간택했을 때, 그는 지금의 아득함을 느꼈다.
도저히 닿을 수 없는 존재를 마주할 때 느꼈던 초라함이 자신을 엄습해 오자, 노인은 섬기는 자를 떠올리며 두려움을 떨쳐 냈다.
“빛은 범(梵)이고 아(我)는 곧 나이니, 범아일여(梵我一如)라. 내가 곧 빛이니라!”
노인을 감싸던 빛 무리가 뭉치더니 반달 모양의 거대한 검이 되었다.
이를 범아일여의 검이라 불렀다.
그 검은 드래곤 로드의 지배를 반대하던 여러 세계의 강자들을 무너트린 검이자, 선이라 믿으며 수많은 악행을 저지른 노인의 의지가 형상화된 검이다.
신에 이르지 못하는 존재들은 닿는 것만으로도 존재가 지워지는 검이 휘둘러지자 용성의 차원은 환한 빛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그러나 범아일여의 검은 작디작은 다정의 백검에 닿자, 빛이 일그러지며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근본이 아스러진다. 그렇담 아(我)는 내가 아니었다는 건가? 안 돼, 안 돼. 이럴 순 없다.”
그 모습을 허망하게 지켜보던 노인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범아일여의 검이 사라지자 노인의 믿음으로 굳건한 의지마저 꺾였다.
“범(梵)은 절대 사라지지 않는다, 마귀 놈!”
하지만 절망하던 노인은 결국 상황을 부정하며 또다시 빛을 모아 범아일여의 검을 만들었다.
이젠 스스로 방어하지 않고 모든 빛을 모으니 그의 갑옷은 힘을 잃었으나, 반달의 검은 더더욱 강력한 힘을 품게 되었다.
몇천 년 동안 드래곤 로드의 가디언이자 대리인으로 살아온 노인은 처음으로 전력을 다하여 필사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이마저도 사라진다면 곧 자신의 죽음과 같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워메.”
거대한 반달의 검에 맞서 남자가 휘두른 건 역시 왼손에 든 백색의 검 한 자루뿐이었다.
세상을 가르는 자신의 검에 비해 나뭇가지만큼 작은 검이다.
그러나 노인은 결국 그 모습에 스스로.
빛을.
주인을.
신을 의심하고 말았다.
노인은 보았다.
“짐승, 짐승! 짐승이로다!”
그가 휘두르는 검의 뒤, 검은 갑옷을 입은 남자의 뒤에 있는, 우주를 삼킬 듯이 거대한 짐승의 아가리를.
아드득!
짐승의 아가리는 반달의 검을 씹어 삼킨 것으론 부족한 듯 노인에게 시커먼 입을 들이밀었다.
노인은 자신을 향해 내리꽂는 거대한 이빨들을 보며, 울음이 터졌다.
마지막에 이르러서야 자신이 섬긴 주인이 진정한 신이 아님을 깨달았다.
결국, 그는 절망하며 살려 달라 소리쳤지만 포악한 짐승의 거대한 아가리는 멈추지 않았다.
짐승의 이는 용성에 만연한 빛들을 모두 집어삼켰다.
빛은 결국 작은 점이 되어 사라졌고, 노인 또한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이건 뭐라고 해야 할지. 음… 거참.”
잠잠해진 용성.
홀로 서 있던 다정은 주변을 둘러보며 난감을 표했다. 물어뜯겨 헤집어진 세계와 무너진 크리스탈 성.
저 믿기지 않는 광경을 자신이 행했다는 사실에 아직 얼떨떨했다.
다정은 왼손의 검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릇에 담긴 모든 힘을 풀었다.
그러자 검은 갑옷은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고, 백색의 검은 서서히 어떤 생물로 변해 갔다.
까이!
“세계를 씹어 삼키는 마물, 너… 참.”
하얀 털 뭉치의 귀여운 생김새, 전혀 위험할 것 같지 않은 마물의 이름은 글루토니.
그러나 수많은 세계를 삼킨 마물.
가장 강한 가디언조차 먹어 버린 마수.
다정은 이해할 수 없으나 글루토니의 힘을 받아들였을 때, 마치 야옹이의 힘과 뒤섞이는 기분을 받았다.
다른 마물들의 힘을 빌릴 때와 달리 마치 한 몸인 듯 익숙했다.
그러나 글루토니의 힘이 만들어 낸 광경을 보며 다정은 야옹이의 힘과 마찬가지로 글루토니의 힘은 최대한 펼치지 않겠노라고 다짐했다.
자신의 힘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어후, 무서운 놈.”
글루토니를 조심스레 안아 들자 품에 안긴 채 애교를 부린다.
다정은 애매한 기분에 휩쓸린 채 글루토니의 털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아마 이 녀석이야말로 우주에서 가장 귀엽고.
가장 위험한 마물이 아닐까 하고.
* * *
그러나 다정은 알지 못했다.
공간마저 삼키는 힘은 글루토니의 힘이 맞으나, 드래곤 로드의 빛을 소멸시킨 건 글루토니의 힘이 아니었다.
다정은 신이 아니다.
그가 가진 존재력은 신에 다다르지 못했기에, 본래라면 드래곤 로드의 힘을 소멸시킬 순 없다.
그러나 그는 로드의 힘에도 존재력이 지워지지 않고, 글루토니의 힘을 이용하여 소멸시키기까지 했다.
기록자가 정의하길, 힘의 높낮이에 상관없이 신은 오로지 신만이 죽일 수 있다.
그러나 무수한 시간이 흐르며 절대적인 개념인 존재력을 무시하고 신을 죽일 수 있는 존재들이 발견되었고, 기록자는 그들을 세 가지로 분류했다.
솔로몬과 같이 운명을 이탈한 자.
가롯과 같이 신을 죽일 운명을 지닌 자.
그리고.
태초 이전의 존재.
신이 아닌 그가 신의 힘을 없앨 수 있었던 건 그의 근본이 태초 이전과 닿아 있었기 때문이다.
간섭받지 않던 우주, 신조차 없던 시대, 짐승들의 시대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