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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257화 (257/258)

#257화 새로운 시작 (1)

무너진 크리스탈 궁전의 잔해 속에서 난 사람 한 명을 간신히 가둘 만한 크기의 새장을 발견했다. 그리고 새장 안에 있는 게 누구인지 확인한 순간 코끝이 시리더니 눈물까지 날 것 같았다.

“원장님이 어쩌다가…….”

새장 안에 갇힌.

고이 눈을 감은 채 일어나지 않는 원장님을 보자 복잡한 감정이 들었다. 원장님은 내게 상사이자 돈줄이었고, 구원자이자 히어로며, 존경하는 선생님이자 결코 쓰러지지 않아야 할 대단한 존재였다.

그런 경험은 없지만, 이게 말로만 듣던 ‘비틀거리는 아버지’를 바라보는 자식의 심정인가? 강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등이 초라해 보일 때가 있다던데, 그 미묘한 울적함을 어느 정도 이해할 것 같은 심정이야. 좁은 새장 안에 갇힌 원장님에게선 일말의 힘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드래곤의 기운은커녕 생명으로서 가지는 기운조차 희미했다.

“힘을 뺏기고 있어.”

새장은 오리하르콘으로 만들어졌다. 하지만 내 오리하르콘 브로치와는 다른 특이한 마력이 느껴졌다. 노인이 뿜던 빛과 같은 느낌이었다.

아마도 ‘드래곤 로드’의 마력일 것이다. 새장은 드래곤인 원장님의 마력을 흡수하며, 그녀의 정신을 속박했다.

난 글루토니의 검을 들었다가 다시 놓았다. 분명 노인의 백색 갑옷보다 더 강력한 힘이 깃든, 드래곤을 속박하기 위해 제작된 새장을 내가 부술 수 있을지 장담도 못 하는데, 만약 부수는 데 성공하더라도 여파에 휩쓸리면 힘을 잃은 원장님은 상당히 위험할 것이다.

“지독한 새끼들.”

만약 내가 원장님을 구하러 가지 않았다면, 그녀는 드래곤들이 동면에서 깨어날 수백 년의 시간 동안 홀로 새장에 갇혀 힘을 뺏겼겠지. 복잡한 감정은 처음 보는 약한 모습의 원장님에 대한 동정에서 분노로 옮겨 갔다. 난 입술을 깨물었다.

성질 같아선 잠든 드래곤 놈들을 찾아가 목구멍에 검을 쑤셔 박고 싶었지만, 지랄 맞게도, 그들은 드래곤이었다. 젠장, 아직도 내가 어찌하지 못하는 존재들이다.

“원장님.”

그러나 이번 일은 놈들도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난 놈들에게 먹일 충분한 빅 엿이라고 생각하며 화를 달랬다. 그리고 격렬한 싸움 중에서도 내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열쇠를 꺼냈다.

마물원의 마스터키, 마담은 공간의 힘이 결집한 이 열쇠라면 드래곤 로드의 마력으로 만들어진 새장의 문조차 열 수 있을 거라고 했었다. 새장을 살피던 난 열쇠 구멍이 없다는 걸 깨달았으나 열쇠와 새장이 가까워지자 갑자기 새장의 창살이 움직이더니 새롭게 열쇠 구멍이 만들어졌다.

기이하게도 구멍은 열쇠와 딱 맞아떨어졌다. 난 조용히, 침착하게 열쇠를 돌렸다.

불안감은 열쇠가 가볍게 돌려진 순간 기쁨으로 바뀌었다. 열쇠를 모두 돌리자 마스터키는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그러나 다행히 새장의 문은 열렸다.

난 조심스레 새장에서 원장님을 꺼냈다. 마물원에 입사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난 이토록 약한 모습의 원장님을 본 적이 없었다.

역시 화가 끓어올랐지만 정신을 퍼뜩 차렸다. 아직 안전하지 않아. 가디언들이 언제 돌아올지 모르니 빨리 벗어나야 해.

“정신 차려 봐요, 원장님.”

내 품에 안긴 원장님의 무게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었다. 그러나 내가 봉황의 기를 품자, 상서로운 신수의 기는 허약해진 원장님에게도 깃들기 시작했다. 난 보다 기를 잘 받아들이기 위해 원장님을 꽉 안았다.

드래곤의 심장을 채우기엔 턱없는 마나지만 정신을 차릴 기력은 채워준 듯했다. 난 서서히 눈을 뜨는 원장님을 바라봤다.

이내 자주색 꽃잎처럼 색 짙은 붉은 눈동자와 마주했을 때, 난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마담에겐 드래곤에게 은혜를 입히니, 보답을 바라서 그랬느니 변명을 했지만 역시 이유는 하나였다.

구해주고 싶었다. 그 감정 하나만이 중요했다.

난 내게 주어진 선택지에서 고민했다.

이성과 본능, 평소에도 자주 둘은 충돌하곤 했지만 이처럼 순수한 개인적인 욕망으로 피 튀기는 싸움을 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난 두 가지 행동에 대하여 고민했다.

만약 내가 이 상황에서 얼굴을 내려다보다 가까이 붉은 눈동자와 마주한다면, 원장님과 내 관계는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다. 반면 욕망을 참고 사무적으로 행동하여 기계적인 태도로 당장 용성에서 벗어나야 한다며 은열쇠를 사용하면, 너무 시시한 결말이었다.

물론 보답이야 두둑하게 받겠지만, 감흥이 없다. 지금까지 죽을 똥을 싸며 공주님을 구한 이유가 없는 것이다.

동화의 행복한 결말은 언제나 그렇듯, 입맞춤으로 끝나야 정석이거늘.

“쯧쯧.”

결국 난 절충안으로 무기력한 원장님의 뺨에 뽀뽀하는 걸로 만족하기로 했다. 난 고개를 내려 하얀 뺨에 뽀뽀했다.

간단했다. 아침에 만나면 뽀뽀뽀, 헤어질 때 또 만나요 뽀뽀뽀. 딱 그 정도 수준의 가벼운 스킨십으로, 외국에선 흔한 인사로 취급받을 표현이었다. 하지만 난 원장님의 뺨에 입술이 닿았을 때 벼락이라도 맞은 듯 미칠 듯한 막대한 전기가 몸을 감전시켰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콧구멍이 벌렁거렸다. 머리가 지끈거리고 쓰러질 듯 어지러웠는데, 이불이 있다면 당장 기어들어가고 싶은 창피함도 느껴졌다.

이런 감정은 처음이기에 무척 당황스러운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원장님의 싸늘한 표정 또한 확인하고야 말았다. 그와 동시에 이해할 수 없는 기분의 뒤로 격렬한 공포가 찾아왔다.

하고 나서야 깨달은 거지만 난 이 절충안마저 미친 짓이라는 걸 뒤늦게 알아차렸다. 애초에 드래곤과 입맞춤이란 선택지가 워낙 고난도라서 금방 깨닫지 못한 것이다.

3만 원짜리 물건을 살 때, 2만 원 할인받는 건 크게 느껴지지만, 100만 원짜리 물건을 살 때, 2만 원 할인을 받는 건 대수롭지 않게 느껴지는, 그런 오묘한 기분 차이랄까. 젠장, 별 잡생각이 다 드네.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안은 비겁한 도피였다.

난 모르는 척했다.

기운을 차린 원장님을 내려놓고, 은열쇠를 꺼냈다.

원장님은 열쇠로 마물원의 우리를 여는 모습을 빤히 바라봤지만 난 애써 무시하며 동작을 빨리한다고 해도 공간의 문이 빨리 열리는 것도 아닌데 괜히 바쁜 척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더더욱 방금 했던 짓에 대한 부작용이 일어났다.

막막하기만 했던 원장님 탈출 계획을 이렇듯 성공할 만큼 강해졌는데도 결국 나란 인간은 다를 바가 없었다. 흑역사는 언제나 내 손으로 만들어 가니, 이번 일은 육유두와 더불어 가끔 생각날 때마다 이불을 뻥뻥 찰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왜 날 구하러 왔나요?”

공간의 문이 열리기 기다리던 세상 가장 어색하던 순간.

원장님이 말을 했다. 그녀의 목소리는 평소처럼 또랑또랑하지 않고 탁했고, 발음 또한 뭉개졌다. 난 용기를 내 원장님과 마주했다. 조금 전의 창피함은 일단 접어두고, 질문에 대답해야겠지.

“부탁하셨잖아요.”

이번엔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고 했다.

속내를 숨기고, 그럴듯한 변명거리를 찾았다.

텅 빈 원장실의 책상 위엔 마스터키와 ‘몬스터를 길들이는 방법’이란 제목의 책이 있었다. 책의 내용은 날 관찰한 원장님의 일기였다.

내가 마물원에서 겪은 수많은 경험들과 원장님이 쓴 일기 속, 감추었던 그녀의 마음이 교차하며 난 원장님에 대하여 많이 알아 갔다. 드래곤 로드에 의해 속박되기 전, 원장님은 내게 자신의 일기를 숨기지 않고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물론 그런 의도가 아닐 수도 있지만, 난 그녀의 일기를 내게 보여 준 이유로 그렇게 생각했다. 날 기억해요. 적어도 난 그렇게 느꼈다.

“난 다정 씨에게 이런 부탁을 한 적이 없어요. 대체… 왜, 운명의 여신조차 비웃을, 무모한 짓을…….”

일기에서도 쓰여 있듯이 원장님은 날 예측불허한 미친놈으로 보고 있었지만, 설마 용성에까지 쫓아올 줄 몰랐는지, 진심으로 혼란스러워하고 있었다. 현명한 드래곤은 이해 못 할 사건이다.

마담도 그렇게 생각했다. 솔직히, 나도 날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 미친 ‘공주님 구출 작전’엔 숭고함은 없더라도, 진솔함은 존재했다.

그저, 구하고 싶었어.

“책 읽어 봤어요.”

난 마침내 완전히 생겨난 마물원 우리의 문을 열고.

“다음 내용이 궁금해요.”

서 있기조차 버거워하는 원장님의 손을 잡고 이끌었다.

“그러니 돌아가요. 아직 완결 내기엔 시시하잖아요.”

문을 건너자.

하늘에 떠 있는 천공섬과 섬에서 흐르는 폭포, 갈대숲, 그리고 마츄들이 보였다.

드래곤의 기운들로 들끓어 숨쉬기조차 힘들었던 용성과 달리 마츄들의 숲은 서늘함이 기분을 좋게 했다. 은열쇠를 열 때 마츄들의 우리가 생각난 건 당연했다. 마물원에 와 처음 들어간 우리가 이곳이었고, 원장님이 가장 좋아하는 곳도 이곳이었다.

* * *

달력을 봤다.

딱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다.

용성의 세계와 지구의 시간은 달랐기 때문이다.

한 몇 달은 고생한 것 같은데 아직 주말도 지나지 않았다니, 허무한 기분이 든다.

원장님은 내가 보아도 느껴질 만큼 아직 힘을 회복하지 못했으나, 우린 느긋했다.

마츄 우리에서 다과를 먹고 음료를 마시며 난 원장님에게 용성에서 있었던 일들을 들려줬다. 원장님의 표정이 저리 풍부했던가? 시시각각 변하는 표정이 재밌다고 생각했다. 특히 글루토니에 대해 말했을 때 원장님은 손에 든 커피잔을 놓칠 만큼 놀라워했다.

느긋한 시간을 방해한 건 케르베로스였다.

속박에 풀려난 녀석은 마물원 우리를 자유자재로 이동했다. 전처럼 작은 개가 되어 버린 케르베로스는 뼈의 용들을, 복수에 찬 날개 없는 자들이 찢어발겼다고 얘기해 줬다.

그 이야기에 원장님은 크게 호기심을 보였고, 자세한 이야기를 부탁했다. 난 풀려난 케르베로스 때문에 원장님이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했지만, 이상하게도 둘은 사이가 아주 좋아 보였다.

케르베로스는 원장님을 잘 따랐다. 마치 개처럼 말이다.

드래곤이라서 그런 게 아니라, 그냥 기묘한 관계처럼 보였다.

케르베로스의 이야기는 나한테도 놀라운 것이었다. 내게 두려움을 선사했던 뼈만 남은 용들이 ‘공룡’들에게 죽었음을 알자, 예전에 쥐라기 공원에서 작당 모의를 하던 브라키오사우루스들이 생각났다.

드래곤 로드에 의해 멸종당할 뻔했던 공룡들. 그래, 결국 복수를 이뤘구나. 원장님은 케르베로스를 다시 속박하지 않았다. 원장님은 그럴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케르베로스가 풀려난 것 또한 운명의 흐름이라나. 그러나 정작 그 운명이 뭐냐고 물어본 내 질문엔 그녀 자신도 모른다고 했다.

마츄 우리에서 나가려고 할 때.

내 그림자에 일렁거리더니 야옹이가 튀어나왔다.

녀석은 평소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분명 무언가가 달라졌다.

야옹이가 그림자에서 빠져나와 우리 문을 나갈 때였다.

내 그림자에서, 또 다른 마물이 튀어나왔다.

검은 고양이와 대조되는 순백색 털을 지닌 글루토니였다.

난 ‘마츄’들을 보며 강렬한 배고픔을 느끼는 글루토니의 식욕을 느끼고 황급히 녀석을 모래 언덕으로 보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가 없다. 녀석의 힘은, 으음. 솔직히 나도 너무 무서운걸.

관리실의 문을 열자 멀린이 데려갔던 혜연이 돌아와 있었다.

“뭐야. 왜 그래?”

당황스러웠다. 혜연의 모습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믿을 수가 없다. 난 갑자기 변한 혜연의 모습을 놀리거나, 비웃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너무 짧은 시간에 바뀌어서 당황한 나머지, 사춘기 소녀에게 묻기엔 너무 실례되는 질문을 하고 말았다.

“멀린이 고무고무열매라도 먹이디? 기어4를 쓰기 전 루피마냥…….”

“조용히 해요.”

과연, 오타쿠용의 딸이라 그런지 고전만화 농담도 잘 알아듣는다.

혜연은 몸이 세 배는 불어나 있었다. 어떤 마법적인 현상이 아니라, 보기엔 그저 많이 먹어서 살찐 것 같았다.

이 짧은 시간에 도대체 녀석에게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걸까, 멀린은 대체 어떤 끔찍한 짓을 자행했지? 하지만 내 걱정과 달리 정혜연은 담담했다. 오히려 너무 밝고 기뻐하는 표정으로 말할 순 없지만 모든 게 잘 풀렸다고 말했다.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난 고개를 끄덕이며 녀석의 입가에 묻은 초콜릿이나 닦으라고 말해 줬다.

정혜연은 그 사실만을 알려 주러 왔다며 다시 어딘가로 떠났는데,

공간이 일렁거리는 걸 보니 공간 마법을 사용한 것 같으나 어딘가 느낌이 달랐다.

마물원.

관리실.

원장님과 둘만 남은 풍경.

익숙한 이 장면을 되찾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이제 어떻게 하죠?”

하지만 문제는 남아 있다.

결국, 마무리는 내가 아니라 원장님이 지어야겠지.

난 원장님에게 이 문제의 답이 있느냐고 물었다.

눈을 감고 곰곰이 생각하던 원장님은 이제 또랑또랑한 목소리와 또렷해진 눈빛을 빛내며 얘기했다.

“우리에겐 많은 시간이 주어졌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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